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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방 글씨
조 승 만
가리방 긁던 추억, 가리방 글씨를 아시나요? 가리방이라 하면 이거 일본말 아니여? 뭔 소리 하는 거요? 하고 물을 것 같다. 80년대 초 중반까지만 해도 관공서나 학교에서는 가리방을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마도 사오십이 넘은 공무원들은 잘 알 것으로 추측이 되나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르리라고 생각 되어 진다.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타자기는 있었지만 컴퓨터는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행정기관에서는 직원들이 자기업무에 대하여 손수 가리방을 긁어 등사를 하여 문서를 만들어 공문을 전달하였고 학교에서는 시험 문제지나 학부모님들에게 서신을 보낼 때에 사용하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그 당시 가리방은 요즘처럼 문서를 작성하여 인쇄하는 컴퓨터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리방이란 B5나 A4 용지만한 크기에 가로 세로 촘촘하게 줄이 그어진 철판인데 그 위에 양초를 먹인 기름종이를 대고 글씨를 쓰면 글씨가 선명하게 나타난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면 사용을 다하고 난 못 쓰는 볼펜이나 또는 뾰쪽한 철필을 이용하여 글씨를 새기는 것이다. 글씨를 모두 새긴 후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질이 낮은 누런 마분지 종이나 갱지를 놓고 글씨가 새겨진 기름종이 위에 검정색의 잉크를 묻혀 동그란 롤러를 굴려서 한 장 씩 문서를 찍어내는 인쇄술인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여간 더딘 작업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사무실에서 일상의 필요한 문서는 인쇄소에 안가고 거의 가리방을 이용하여 문서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작업상 능률은 없었지만 그 당시 관공서 직원들은 모두가 가리방 긁는데 선수이었고 등사를 하는데도 이골이 났던 것이다. 종이가 질이 낮고 구멍이 숭숭 뚫려 글자가 누락되어 문맥이 이어지지도 안했던 경우도 있었는데 직원이 직접 등사를 하기도 했지만 청부라 불리는 직책의 직원이 있어서 숙직을 하면서 밤새 등사를 하였으며 이튿날은 수신 처에 전달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였다. 가리방을 긁는데 솜씨가 없어서 글씨를 그리 썩 잘 쓰지 못하는 직원들은 글씨를 잘 쓰려고 저녁에 퇴근을 한 후에는 펜글씨 학원에도 다니고 붓글씨 학원에도 다녀 봤지만 별로 나아지지는 안했다. 아마 글씨 잘 쓰는 재주는 부모님으로 부터 태어날 때 물려받는 것 같다. 아무리 연습해도 필체를 바꿀 수가 없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개가 글씨 쓴 것을 보면 이것은 누구 필체라고 바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 후로 얼마 있다가 시내에 타자 학원이 몇 군데 생겨났는데 글씨를 못 쓰는 직원들은 타자를 배워서 타자를 쳐 등사를 하면 글씨도 보기도 좋았으며 일의 능률이 올랐던 계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사무실별로 컴퓨터가 보급되고 복사기가 배치되는 등 급속도로 사무기기가 현대화되기 시작하였는데 타자기와 컴퓨터와 자판이 거의 비슷하여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읍면서기들은 낮에는 주로 현장을 찾아 마을로 다니면서 행정지도를 하고 밤에는 야근을 하면서 가리방을 긁어대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공무원들은 야근을 해도 초과근무수당이라는 것은 아예 없었다. 박봉에 국가의 봉사자라는 이름으로 아무 불평불만 없이 오로지 조국근대화라는 목표를 향하여 새마을 운동의 선봉에 서서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면서 공무원이니 만큼 그저 그러려니 하고 묵묵히 일만 하였던 것이다. 간혹 글씨를 연습해도 재주가 없어 못 쓰는 사람들은 글씨를 잘 쓰는 직원에게 소위 빽을 쓰면서까지 가리방 글씨를 써 달라고 애걸복걸 사정하기도 하였는데 글씨 쓰기에 재주가 있는 직원들은 글씨 좀 쓴다며 뻐기느라고 바쁘다고 둘러대며 이런 저런 일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부탁을 해도 잘 안 써주기도 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글씨 쓰는 재주가 없는 직원들은 맡은 일은 시간 내에 해야 하므로 글씨 잘 쓰는 직원을 타일러서 술 한 잔 거나하게 사주면 언제 버티었느냐는 듯 좀만 기다리라고 하며 밤을 새우더라도 술기운으로 얼른 써주기도 하였다. 그 당시 술 한 잔은 왕대포 막걸리에 김치 곁들인 돼지비계이면 최고의 술이었으며 안주거리이었다. 물론 홍성에는 예로부터 관공서가 많아서 ~옥자 붙은 고급스런 요정집도 있었지만 읍면서기들은 박봉에 그런 집은 거의 근처도 가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저녁 퇴근 무렵에 직원들끼리 정종이나 대포를 마시면 으레 노래를 불러댔는데 모두가 상 주변으로 둥그렇게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쇠 젓가락을 한손에 하나씩 집어 들고 꿍짝 꿍짝 장단을 맞추느라 주막집의 상이라는 상은 젓가락을 하도 두드려 상 갓이 팽겨서 남아나질 안했다. 또한 한사람이 노래를 부르면 함께 참석한 사람들도 모두 따라 부르며 목청껏 소리를 높였는데 그 시절 어려운 읍면서기의 애환을 술과 곡조로 달랬던 것 같다. 그러한 광경들이 그래도 노래방이 없던 그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은 웬일일까? 또한 퇴비증산, 논보리파종, 도로에 깔을 자갈 대금 징수, 지방세 체납액 징수 등 상급부서에서 현지 확인에 대비하기 위하여 차트글씨로 쓴 상황판을 수시로 만들어서 비치하기도 하였는데 차트글씨를 잘 쓰는 직원들은 인기가 좋아서 학벌에 상관없이 상급기관까지 뽑혀 다닐 정도였으며 초등학교만 나왔어도 글씨 하나 잘 쓰는 재주로 중앙부처까지 발탁되어 높은 직위까지 올라가는 경우가 허다하기도 하였다 세월이 흘러 요즘같이 모든 문자를 손가락 하나로 마우스를 움직이거나 아이패드의 화면을 치거나 키보드로 입력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 과학의 발달, 문명의 발달, 시대의 변화를 다시 한 번 실감하지만, 글씨를 빨리 쓴다 해도 요즘의 정확한 컴퓨터자판기의 입력속도를 따르지 못할 것이며, 명필이라 해도 명필 나름대로의 예술성은 있겠지만 컴퓨터의 복사기 글씨보다 다양하고 빠르고 깔끔하게 쓰지는 못하리라 생각되어 진다. 그래도 옛 시절 동료들과 논두렁 밭두렁을 거닐면서 꿋꿋이 견뎌온 꾸불꾸불한 세월, 퇴근 무렵 허연 달을 바라보고 저녁별을 맞이하며 젓가락 장단에 왕대포를 기울이던 주막집에서 젊은 애환을 노래하던 희미한 모습들, 어두운 밤 사무실 등불 아래에서 가리방을 긁어 대던 이십대 초반의 젊디젊었던 읍면서기 시절이 그립다. 그 시절 밤을 잊으면서 써내려간 가리방 문서가 어딘가에 남아 있겠지. 남아 있다면 구멍 숭숭 뚫린 가리방 글자의 추억도 남아 있을까? 가리방 글씨를 쓰고, 젓가락 장단 맞추며 목청껏 애달픔을 노래하던 나의 젊은 시절을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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