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엘레지
-김사이
햇볕이 타는 한낮
가리봉오거리
슬리퍼에 맨발로
술 취해서 돌아다니는 후줄근한 남자
시장 복판에서 한바탕 몸씨름과 입씨름을 하다가
여자에게 허리춤 잡혀 끌려가고
無事한
그래, 이곳도 서울
아직 뱉어내지 못한 징그러운 삶이 있는
경고
-김사이
내 집 부엌 싱크대 문짝 두 개는
항상 입 벌리고 있다 아니 비틀어져 있다
지난여름 천장 구석에서 가운데로
작은 그림자 하나 그 영역을 넓혀가더니 뚝뚝
떨어지는 빗물 세숫대야에 고인 물에선
썩은 냄새가 가득하고
역겨운 냄새는 내 몸에 배었다
집 안을 휘젓는 똥 냄새도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맨 처음처럼 아무것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오래될수록 제 그늘이 넓어지는 집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지는 집
날 선 보일러 경고음은
다시 오늘, 가늘고 길게 삐- 삐- 운다
어릴 적 매정하게 뿌리친 어머니가
돌아와 내 앞에 목 놓아 울던 울음처럼
아찔해지는 서른이다
머물기 위해 떠나다
-김사이
하필이면 가리봉이었을까
세상의 흑백이 치열하게 공존했던
공단지대 구로동 가리봉오거리
끊임없이 날기만을 기다린다
땅 끝에서 떠나온 곳
서울에 올라와서도 몇 달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지하 쪽방 하나 얻어 가방을 풀고
한낮에도 깜깜한, 틈을 비집고 들어온 가느다란 빛에
아득하게 해바라기하다
불덩이 하나 밑바닥에서부터 끓어올라
보따리 구석에 밀어놓은 그대로
꼴딱 새운 가리봉에서의 첫날 밤
돈 벌러 서울 가면 구로동으로 온다는
밑바닥 인생이 거쳐가는 이곳
다섯 갈래 길을 따라 어디로든 가는,
누가 어디에 사냐고 물어볼 때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람들
내 고향보다 더 허름한 빈민촌 같아
자꾸 자꾸 눈에 밟히고 불편하면서도
무슨 짓을 해도 티가 나지 않을 것같이 거리낌 없었던
떠나고자 몸부림쳐도 구로동이었다
내 시가 시작된 곳
젊음의 덫이기도 했던
이 거리 구석구석 몸에 새겨졌다
떠나야겠다
시가 너무 오래 머룰러 있었다
그녀를 만나다
- 김사이
그곳에 가면
초경의 열병 온몸으로 앓으며
처음 했던 자위행위 같은 내 사랑이
남아 있다
나 이미 멀리 떠나왔으되
아직도 거기, 그녀
날것으로 사랑하고 있다
가끔은 그곳에 간다
몸뚱이에 기름기가 쫘악 빠져나갔을 때
찬 것이나 뜨거운 것은 다 토해내는 배 속처럼,
몇 번 뒤틀리다가 잠잠해지지만
뒤이어 찾아오는 허기에 숨이 가쁘다
나는 본다
잊혀지거나 버린다고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생생하게 퍼덕거리고 있는 그녀
나를 가르고 간다
비릿하다
봄이 불러 돌아보니
-김사이
바람난 봄이
가랭이를 벌리고 달려든다
나날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해거름 놀에 부딪치는 강물이
몽우리 맺힌 처녀 가슴
애를 태우듯 부서져갈수록
삶의 밑동이 미세하게 출렁거린다
은근하게 내뻗는 바람자락은
온몸에 스미어, 꽃이다
해마다 이맘때쯤
생의 비밀 하나씩 벗겨오는 그대 때문에
내 꽃은 닳고 닳아
신경 마디마디가 뚝 뚝 끊어진다, 꽃 핀다
햇살이 머리에서 나른한 블루스를 추고
진달래꽃 숭어리 숭어리 불덩이로 가슴에 박히면
내 구석구석에서
사정없는 고통이 흘러내려
그대 가랭이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지금
삼십 년이 하냥 무너져 내린다
반성하다 그만둔 날 / 김사이 -실천문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