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혁명-33
삶은 사소한 사건들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재작년인가 20년 가까이 된 화장실 세면대 배수관에 구멍이 뚫렸습니다. 막힌 배수관을 아내가 쇠꼬챙이로 쑤시다가 그리 된 겁니다. 배수관을 교체하기로 하고 분해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마땅한 공구가 집엔 없었습니다. 아들에게 8층에 가서 아저씨(5부두에서 기름배를 타고 있으므로 그 정도의 공구는 있을 것이라 추측함.)에게 공구를 좀 빌려 오라하니 아들이 안 가려고 합니다. 협박 반 사정 반으로 겨우 아들은 내려갔으나 그냥 돌아왔습니다. 문이 잠겨 있더랍니다. 아가리가 큰 스패너가 필요했는데 그게 없으니 할 수 없이 집에 있는 작은 것으로 풀어 보려고 끙끙댔습니다. 때는 여름이라 웃통을 벗고 팬티만 입은 채였습니다. 쪼그려 앉아 머리를 세면대 밑에 틀어박고(약간 어둡기도 하였음) 일을 하려니 땀도 흐르고 다리가 너무 아파왔습니다. 아내가 목욕탕용 플라스틱 앉은뱅이 의자를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목욕탕의 것처럼 작고 단단한 게 아니라 재질이 얇고 큰 게 좀 엉성해 보였습니다. 제 몸무게도 만만치 않은데 배수관의 연결부위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저는 계속해서 이리저리 용을 쓰게 되었습니다. 일단 스패너가 밸브를 꽉 잡아줘야 할 텐데 그게 안 되니 힘이 더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닫힌 공간에서 용을 쓰고 땀까지 흐르니 신경질도 약간 나면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벌려놓은 일이라 저는 계속해서 힘을 모아 본다는 자세로 연결부위와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제 손은 스패너를 놓쳐 버렸습니다. 순간 연결부위가 풀린 줄 알았습니다. 그리곤 주저앉으면서 뒤로 나자빠졌습니다. 엉덩이에 깔려 있던 플라스틱 의자가 박살이 나버린 겁니다. 그리곤 플라스틱이 깨어지면서 생긴 날카로운 단면이 제 등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몹시 아프고 쓰라렸습니다. 식구들이 모두 뛰어와서 쓰러져 있는 저를 약간 안됐다는 듯이 쳐다보았습니다. 땀과 상처 그리고 배수관 오물(뚫린 구멍으로 나온)로 약간 더러워진 바닥에 쓰러진 저는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의자는 ‘ 탑 마트 천 냥 코너’에서 이름에 걸맞게 1,000원주고 샀다고 하더군요.
배수관이 막힌 것(이건 매우 오래된 사건일 겁니다.) 알맞은 스패너가 없었던 것, ‘천 냥 코너’에서 부실한(?) 플라스틱 의자를 산 것, 그게 아니라 용도에 맞지 않게 사용하였던 것이라고 해야겠습니다. 8층 아저씨가 하필이면 부재중이었던 것, 저의 몸무게, 여름이라 벌거벗은 것, 너무 용을 쓴 것, 흐르는 땀과 조급함 그 모든 것이 뒤엉켜 만들어진 사건이죠.
다음 날 관리실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아저씨는 알맞은 공구로 짧은 시간에, 깔끔하게 일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부드러운 조작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배수관을 뜯어보니 막혔던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화장실 벽 쪽과 배수관이 연결되는 부분에서 시커먼 물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우린 처음에 그게 쥐인 줄 알았습니다. 소리를 지르며 약간 놀랐죠. 하지만 확인한 결과 머리카락 뭉치였습니다. 대번에 머리칼이 긴 여성들에게 눈총이 돌려졌습니다. 특히 우리 딸, 빠진 머리카락을 치우기 싫어서 일부러 세면대 구멍으로 밀어 넣거든요. 하지만 그 머리카락 뭉치 속에 짧은 머리카락도 있다는 항변이 있고 난 뒤 더 이상의 책임 추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제 등 뒤에 상처 사진은 짓궂은 딸이 찍었습니다. 하지만 교훈을 얻었습니다. 모든 작업엔 적합한 공구를 써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 말입니다. 그런데 아저씨가 갖고 온 스패너는 일반명사로서의 공구가 아니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것은 공구를 넘어 신체의 변용(變容)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우린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어설픈 변용으로 일을 처리하려다 낭패를 본 경우 말입니다. 관리실 그 아저씨가 아니었다면 배수관을 풀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부셔버렸을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사건을 지배하려는 멍청한 짓일 뿐이지요. 그리고 더 많이 몸과 영혼이 다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를 더 많이 의심하고 피곤해 하며, 화를 내거나 힘들어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훗날 더 큰 악령(惡靈)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신체의 변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해 주는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첫댓글 삶은 사소한 사건들의 연속이네요.희철님 생각의 뿔 133번에 이글이 있어요^^
천원짜리 의자에 너무 많은 무게를 실은것 아니예요ㅎㅎ
네,... 예전에 한 번 올렸던 것인데.. '몸의 혁명'이라는 주제로 다시 글을 올리다 보니.. 아,,, 며칠 전 '밀양 희망버스' 안에서 김진숙씨 만났는데.. 그냥 인사만 하고 님에 대한 이야기는 못 나누었네요..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다면... 꼭...
다녀오셨군요.몸만 비대해져서 밍그적대고 있는데...
늘 몸성하라고 응원만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