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인’이라는 말은 최고의 완성된 유형을 지칭하는 말로서 ‘현대인’, ‘선인善人’, 기독교인과 다른 허무주의자와는 반대되는 말이다----도덕성의 말살자 짜라투스트라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게 되면 대단히 무궁무진한 말이 되는 것이 초인이다. ----그런데 초인이라는 말은 도처에서 극히 무지하게 짜라투스트라가 의도하는 가치와는 정반대되는 가치로 이해되고 있다. 말하자면 더 고등한 인간, 반 성인聖人, 반 ‘천재인’, ‘이상주의적 전형’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기독교는 인간의 역사를 기껏해야 6,000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인간의 역사는 수억 년도 더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들었지만, 아담과 이브의 후손인 유태민족이 타락했고, 그 결과, 요셉의 아내인 마리아의 뱃속을 빌려서 그의 아들인 예수를 탄생시켰다. 성부, 성자, 성령, 즉, 이 삼위일체처럼 하나님과 예수는 동일 인물이 되었고,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종교라고 할 수가 있다.
기독교는 인간의 역사가 수억 년이 되었다는 것과 지구가 수천억 개의 별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었던 원시시대의 여러 종교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자연과학은 무신론의 토대 위에 기초해있고, 따라서 자연과학이 모든 믿음을 대청소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인간의 자기 발견, 즉, 사유하는 인간은 공동체 사회와 종교 속에 구속되었던 인간의 해방이자 신의 사망선고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신은 다만, 언어와 환영 속의 도깨비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니체의 ‘초인’은 신이 사라진 시대의 미래의 인간형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초인은 보다 완전한 인간이며 고등한 인간이고, 선악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다. 하늘 나라의 천국을 믿지 않고, 뜬구름 속의 이상주의를 짓밟으며,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짜라투스트라가 그 초인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도덕성의 말살자는 자기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되는 천지창조주와도 같은 인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신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가 활짝 열렸던 것이고,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의 창작품인 인간을 믿지 못하고, 타인의 아내의 뱃속을 빌려 예수를 낳은 기독교적 이상과 그 가치관을 철두철미하게 짓밟아버렸던 것이다.
내 작품에 익숙하게 되면 다른 서적, 특히 모든 철학 서적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니체는 스위스 바젤대학교의 고전문헌학 교수였고, 그는 고전문헌학자로서 그리스 로마신화를 비롯하여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 문학, 기독교와 불교, 단테, 셰익스피어, 괴테, 톨스토이, 또스트예프스키, 빅톨 위고, 발자크, 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 헤겔,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이밖에도 정치학과 역사학과 심리학 등에 능통한 대사상가라고 할 수가 있다.
니체는 고전문헌학자이자 비판철학자였고, 시인이자 역사학자였다. 그는 종교학자이자 사회학자였고, 심리학자이자 윤리학자였다.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문체와 가장 감미롭고 부드러운 문체, 잠언과 경구, 그리고, 그 어느 시인의 시구보다도 더욱더 아름다운 그의 문장 속에 빨려들면, “다른 서적, 특히 모든 철학 서적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게 된다.
나는 필연적으로 내일의 인간, 모레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는 철학자가 항시 스스로를 오늘과 상반되는 존재로 생각해 왔고, 또 그렇게 생각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는 기분을 점점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의 적敵은 오늘의 이상이었다. 철학자라는 이름의 인간의 육성자, 이 비범한 존재들은 이제까지 스스로를 지혜의 친구라기보다는 위험스러운 물음표, 불쾌한 바보로 생각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대의 불쾌한 양심이 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자각해 왔다. 그러한 사명은 수행하기도 어렵고 달갑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회피할 수도 없는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위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시대의 미덕의 심장에다가 메스를 댐으로써 그들의 비밀한 과업이 무엇인가를 드러냈다. 즉 인간의 새로운 위대함을 인식하고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인적미답의 새 길을 탐구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때마다 그들은 당대의 가장 찬양받는 도덕들 속에 얼마나 많은 위선과 안일, 나태, 타락, 허위 등이 숨겨져 있는가를, 그리고 당대의 미덕이 얼마나 낡은 것인가를 폭로해 왔다. 그들은 항시 다음과 같이 말해 왔다. “우리들은 오늘날 그대들이 가장 불편스러워하는 곳으로, 그러한 길로 가야만 한다.”
----니체, {선악을 넘어서}에서
거인적 예술가 아이스퀼로스는 인간을 창조하고 올림프스 신들을 멸망시킬 수도 있다는 반항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것을 그의 지혜에 의하여 알아내게 된 바, 그 지혜의 대가로 그는 영원한 고통이라는 것을 받아야 했다. 영원한 고통을 받음으로써도 충분히 그 대가를 치뤄내지 못할, 위대한 예술가의 위대한 능력, 예술가라는 쓰디 쓴 자부심, 이것이 아이스퀼로스의 문학의 내용이자 영혼이다.
----니체, {비극의 탄생} 에서
신이 기뻐하는 성자는 이상적인 환관宦官이다......삶은 ‘신의 왕국’이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니체, {우상의 황혼}에서
너는 네 자신에 대해 재판관이 되고 너의 율법의 징벌자가 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의 율법의 재판관과 징벌자와 함께 혼자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렇게 하여 거친 공간 속에, 고독의 차디 찬 숨결 속에 한 별은 내던져지는 것이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하지만, 그러나 니체의 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좀 더 대범하고 간이 크고, 마치 낡디 낡은 허물을 벗지 못하면 파멸하는 뱀처럼, 수없이 되풀이 죽었다가 되살아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이 속한 시대의 미덕에다가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칼날을 들이댈 수가 없다면 니체의 철학을 공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또한 모든 가치를 부수는 자, 파괴자, 범죄자의 쾌락과 그 희열을 맛볼 수가 없다면 그 어느 누가 새로운 미래의 인간형인 짜라투스트라가 될 수가 있겠는가?
니체의 철학은 위험한 검이며, 그 칼끝에는 늘, 항상 치명적인 독이 묻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용감하게 자신의 두 다리로 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지고 만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투쟁의 아버지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고, 마르크스는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고,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이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나는 승리를 훔치지 않는다라고 말한 바가 있고, 나폴레옹 황제는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모든 잠언과 경구들에는 인간의 삶 전체를 꿰뚫어보는 진리가 들어있고, 이 진리들 속에는 사악한 생각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언제, 어느 때나 어렵고 힘든 길만을 걸어갔던 테세우스, 불의를 보면 참지를 못하고 저승사자의 목마저도 비틀어버린 헤라클레스, 요정 칼립소가 제안한 영생불사의 삶을 거절하고 인간의 삶을 선택했던 오딧세우스----. 모든 잠언과 경구들은 이 문화적 영웅들이 붉디 붉은 피로 쓴 진리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문화적 영웅들의 용기(생명의 숨소리)로 살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죽지만 영웅은 죽지 않는다.
모든 말들은 죽지만 진리는 죽지 않는다.
천하무적의 용기가 없다면 자기 자신의 두 다리로 설 수가 없고, 그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조차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낙천주의자로서의 나의 세 명제는 이렇다.
제일의 명제: 나는 신성모독을 범한다, 고로 존재한다.
제이의 명제: 세계는 나의 범죄의 표상이다, 고로 행복하다.
제삼의 명제: 나는 나의 사상에 기댄다, 고로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