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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한국시낭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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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철 게시판 스크랩 전주류씨 무실종택이야기
함산김윤숭 추천 0 조회 146 19.01.25 20: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전주유씨 무실종택(全州柳氏 務實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470-43
건 축 주 :  유성(柳城, 1533~1560)
건축시기 :  16세기
중건시기 :  1990년대(사랑채)
이건시기 :  1988년
소 유 자 :  (관리자 : 유종석)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7호, 1984년 5월 21일 지정, 3동

건축 이야기
사랑채의 대청마루에는 ‘월회당’, ‘기도유업(기봉 유복기와 도헌 유우잠이 남긴 기업)’ 등의 현판이 붙어 있었고, 사랑채의 서쪽, 안채로 들어가는 현관문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안채의 한쪽에는 ‘안분지족(분수를 지키고 만족한 것을 알아라)’이라는 글씨가 써 붙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건축 구성
종택은 대문이 잠겨 있었으나 뒤쪽의 쪽문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었다.

뜰은 넓었다. 집은 대문 옆에 붙은 행랑채, 안채, 바깥채가 하나로 붙어있는 본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집은 ‘기봉구로’, 즉‘기봉(유복기)의 옛 집’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는데, 민속자료 47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정면 7칸, 측면 6칸 민도리 홑처마 팔작목조 와가 …… 전면에 7칸의 행랑채 …… 원채는 口자형 …….”라고 안내판의 명문에 있다.

“사랑채는 불이 나서 새로 지었어요.”라고 종가에서 만난 노인이 말한다. 새로 지은 지 10년이 조금 넘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사랑채에서는 4백 년 된 옛집의 훈기를 느끼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안채는 그대로라고 한다. 안채까지는 불길이 닿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안채에도 세월의 느낌이 묻어나지 않는 반듯한 목재가 여기저기 끼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중수를 하다보면 새 목재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현판
기도유업(岐陶遺業)
월회당(月會堂)
거안사위(居安思危)
안분지족(安分知足)

 

문중이야기

- 가문의 중흥기
8대 유성이 무실에 기지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개시된 무실유씨의 역사는 유정휘의 등장으로 새로운 시기를 맞게 된다. 그로부터 문과 출신 10명, 무과 3명, 생원 진사 33명, 추천을 통해 벼슬길로 나아간 사람 5명, 증직을 받은 사람 20명, 음사로 벼슬길에 나간 사람 37명, 불천위로 모셔지는 사람 5명 등을 자랑하는 전주유씨 수곡파의 역사, 무실유씨의 역사가 중흥기에 진입하여 들어가기에 이른 것이다.
- 수곡에 정착하다
“전주유씨가 임동 수곡에 정착하기는 유성(1533~1560) 때부터라고 한다. 유성의 아버지 유윤선은 1500년(연산 6)생으로 원래 대대로 한성 묵사동에 세거하였는데, 영주 거주 반남박씨 사직 승장의 사위가 되어 다시 천전과 가까운 수곡에 이거하였던 것이다.”

타계한 서주석의 기록이다. 서주석의 이 기록은 약간 모호하지만, 어쨌든 유윤선에서 유성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 무실의 전주유씨가 놓여 진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기는 한다.

유윤선은 자가 선지이며, 인의 벼슬을 하였다. 『대동보』에는 그의 배위로 양천허씨와 나주박씨가 나란히 등재되어 있다.

“당시 영천군수를 역임하는 백씨(윤덕)를 따라 영천으로 낙향하여 사직 박승장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인 오천에 우거하였다.”

『기하수류』의 기록이다. 여기 보이는 영천은 영주를 뜻하는 것이고, 나주박씨와 반남박씨는 같은 성씨이다.
- 의성김씨의 정려각
무실 입향조 유성의 아내 의성김씨의 정려각은 새로 만들어진 마을의 정중앙에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만큼 무실유씨의 역사 속에서 김씨부인이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는 크고 넓은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정려각 앞의 안내판에는, 정려각이 경북 민속자료 제48호라는 점과, 1635년(인조 13)에 조정에서 김씨부인의 언행을 높이 평가해서 정려를 내려 비각을 세우게 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나지막한 비석의 앞면에는 ‘절부 고 유학 유성 처 문소김씨지각’, ‘절개를 지킨 부인, 죽은 유성의 처 문소김씨의 비각’이라는 뜻의 한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그 사적이 자잘한 한자로 각인되어 있었다. ‘문소김씨’는 바로 ‘의성김씨’이니, 의성의 옛 이름이 ‘문소’였다고 한다.
- 물 속에 잠기다
무실마을 주변의 산천은 무실마을 안에서 보다는 기양서당에서 살펴보는 것이 한결 그럴듯하다. 기양서당은 마을 동쪽 산언덕에 한층 높이 올라앉아 있어서 임하호의 물밭을 그대로 시야 가득히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는 너른 물밭이 다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기양서당은 기봉 유복기가 처음 세워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광해군 7년, 1615년의 일이다.
“해평으로 다 갔어.”
무실 마을에서 만난 유낙희(81세)가 말하였다.

“여기 무실 뿐만 아니라 한들에서도, 박실에서도 다 해평으로 옮겨갔어요. 원래 해평에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 거기도 백사장을 밀어붙여서 만든 이주단지예요. 수몰되니까 나라에서 이주지를 거기다 잡아 준 것이지. 거기 이주하는 사람들은 터를 주고, 또 집집마다 12마지기씩을 주었어요. 우리 무실마을에서도 한 80집이 옮겨갔지요. 전에는 여기 120세대가 살었지요. 지금은 한 20여 세대쯤 되어요. 딴 집도 있고 …….”

물이 들어온 것은 무실, 한들, 박실 등을 중심으로 하여 수백 년 이어 내려왔던 전주유씨 집성촌의 역사를 해체시켜 내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4백년의 연륜을 갖는 역사를 하루아침에 수장시켜 버리고, 전주유씨들은 뿔뿔이 흩어져 갔다. 해평으로 많이 옮겨갔고, 새로 산 위에 들어선 무실 마을에는 조금 옮겨 앉고, 간혹은 혼자서 떨어져 나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여 무실의 전주유씨들은 다시 맨몸으로 서서 새로운 터전을 가꾸어 나가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미 임하댐의 깊은 물속에 수장되어 버린 다음이었다.

“그 전만 하더라도 고색창연한 기와집과 초가들로 온갖 정취를 맛볼 수 있는 집성촌이었으나 근대화의 회오리에 밀려 ‘임하댐’이란 대역사에 희생의 제물로 바쳐진 채 찬란했던 ‘수류문물’(수곡유씨의 유적들)들은 ‘백장심당’(백 장 되는 깊은 물) 깊은 물속에 깡그리 수장되고 말았다. 고향 잃은 설움, 그 누가 알아줄까? 두고 온 이북 고향 통일 되면 갈 수 있고, 나그네 떠난 고향 찾아가면 그뿐인데, 우리 같은 수몰민은 고향이 용궁되어 꿈에서나 그려볼까? 기약도 하소연도 통한만 남을 뿐이다. 망향의 설움 달래고자 옛 집을 찾아가니, 넘실대는 파도 속에 추억조차 아련한데, 저 멀리 수평선엔 보일 듯 말 듯 물새가 나른다.”

유희걸 씨가 전주유씨 수곡파의 역사를 쉽게 옮겨놓은 『기하수류』라는 책에서 적고 있는 일절이다.

관련인물
- 유복기(柳復起, 1555∼1617), 유복립(柳復立, 1558∼1593)
유복기(柳復起)는 자가 성서이고, 호가 기봉이다. 그는 외숙인 학봉 김성일로부터 배웠으며, 임진왜란 때는 김해와 함께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정유년에는 곽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을 지켰다.”고 『대동보』에 기록되어 있다.

유복기의 아우 유복립(柳復立)도 의병에 참여하였다. 유복립은 자가 군서이고, 호가 묵계이다. 그는 양자 가서 종조부 유윤덕의 손자가 되었는데, 김성일을 시종하다가 1593년에 진주성에서 전사하였다.

이렇게 두 형제가 다 의병에 투신한 것은 목숨을 바쳐서 의리를 구현하는 모친의 절개를 몸으로 익힌 결과이고, 외숙 김성일의 초모에 응한 탓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이다.

유복기 형제의 절의 지키기는 그들에게 한정된 것만은 아니다. 유복기는 영덕 정씨와의 사이에서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인 유우잠도 어려서 부친을 따라 의병 활동을 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도 창의를 하였다가 강화 소식을 듣고 물러나 앉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유치명(柳致明, 1777~1861)
유치명(柳致明)은 유봉시의 둘째 아들인 양파 유관현의 후손이다. 양파 유관현은 문과출신으로 벼슬이 형조참의에 이르며, 배위인 선산김씨와의 사이에서 유통원, 유도원, 유장원, 유공원, 유환원 등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인 유통원의 가계는 유성휴 - 유회문 - 유치명으로 이어진다. 유치명은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병조참판에까지 이른다. 그는 동암 유장원에게 수학하고, 유장원의 사후에는 손재 남한조에게서 배웠다. 그는 선산김씨와 평산신씨 등 두 명의 부인에게서 아들이 없어서 유도원의 후손인 유치검의 큰아들 유지호로 가계를 이었다.
- 유휘문(柳徽文, 1773~1832)
유휘문(柳徽文)은 유정원의 다섯째 아들인 유만휴의 둘째 아들이다. 유휘문은 동암 유장원에게서 배웠고, 손재 남한조와 입재 정종로에게서도 배웠는데, 천거로 참봉 직을 제수 받았다.
- 유정원(柳正源, 1703∼1761)
유정원(柳正源)은 호가 삼산인데, 11대 유숙의 넷째 아들 유익휘의 장자인 유상시의 손자이다. 그의 부친은 유석구인데, 이조참판을 증직으로 받았다. 유정원은 문과 출신하여 대사간에까지 이르며, 선성이씨와 무안박씨에게서 6남 3녀를 두었다.
- 유승현(柳升鉉, 1680∼1746)
유승현(柳升鉉)은 유숙의 장자인 유진휘의 둘째 아들 유봉시의 장남이다. 그는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참의에까지 이르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을 때에는 박실에 띠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인좌의 난으로 안동에서 일어난 의병의 대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배위는 광산김씨였는데, 아들이 없어서 동생인 양파 유관현의 둘째 아들 노애 유도원을 양자로 삼았다.
- 유직(柳稷, 1602∼1662)
유직(柳稷)은 도헌 유우잠의 둘째 아들로 자가 정견이다. 그는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를 문묘에 배향하고자 하는 논의가 일었을 때, 그것을 반대하는 영남 상소운동의 소두로 활동하였다.

 

무실마을이야기
- 아기산의 물줄기로 둘러싸인 마을
수곡은 우리말로 물골 혹은 무실·물실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지금도 이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전을 내앞으로 부르듯이 수곡보다는 무실로 부르고 있다.
수곡리는 원래 임하현의 지역이었다. 1895년 안동군 임동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대평, 원파, 늘치미, 독골, 박곡리 일부와 중평리 일부를 합하여 수곡리가 되었다.

수곡리는 전주유씨(全州柳氏)의 동성마을이다. 조선 명종(明宗) 때 유성(柳城)이 이곳에 입향하였으며, 마을 뒷산인 아기산(峨岐山)에서 물줄기가 마을을 둘러싼 형상으로 흐르고 있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 수곡리는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새로운 단지를 만들어 마을을 새로이 형성하였다. 그리고 수몰민 일부는 구미의 해평면 일선리에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어 이주하였다. 수몰되기 전 수곡리에는 한들, 원두들, 늘침, 독골, 밤나무골 등의 마을이 있었으나 거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일부분만 남아 있다.

광산(匡山)·가구(佳丘)·개두들은 수곡리가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자 주민들이 아기산 기슭에 새로운 단지를 만들어 이주한 곳이다. 원래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 명칭은 예전부터 사용하던 것인데 아기산 기슭의 아름다운 언덕이라는 뜻에서 가구라고 하였으나 그 음이 변하여 개두들이라고 한다.
마을에는 전주유씨 종택과 기양서당, 수애당, 무실정려각 등 고가옥이 함께 이건되어 동성마을의 면모를 간직하고 있다.

황산골은 개두들 뒤편 골짜기이다. 신라시대의 고찰인 봉황사(황산사라고도 함)가 있어서 붙인 명칭이다.

독골·도곡·구수동은 옹기굴을 차렸던 마을이라 전한다. 그러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대부분 수몰되고 뒷산의 일부분만 남아 있어 이곳에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종택과 만우정(晩愚亭)을 이건하였다.

종택이 있는 곳을 구수목·구수동이라고 하는데, 여기의 땅을 파면 군데군데 구멍이 있는 공간이 있어서 붙인 명칭이라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다른 민가는 없고 종택 1가구만 있다. 구수동으로 들어오는 입구의 공터에 청류쉼터가 있는데, 이 아래에 구미 해평으로 옮긴 동암정(東岩亭)이 있었다고 한다.

 

 

월회당 류원현선생

성명 : 류원현(柳元鉉) , 1674년 ~ 1755년
본관 : 전주(全州)
: 태언(台彦)
: 월회당(月會堂)
출생지 : 안동(安東) 수곡(水谷)
출신지 : 안동(安東)
분묘지 : 봉화(奉化) 임당산(林塘山)
입사경로 : 1711년(숙종 37) 생원시(生員試) 합격
증직및기타 : 수직(壽職)으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월회당'호의 유래
류원현은 1674년(현종 15)에 태어나서 1755년(영조 31)에 82세로 숨을 거두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태언(台彦)이고, 호는 월회당(月會堂)이다.

조부(祖父)는 진사를 지낸 류진휘(柳振輝)이고 부(父)는 류종시(柳宗時)이며, 4형제 중 장남이다. 기질이 준엄하였으며, 문망이 있었다. 행실이 돈독하고 매 달 한 번씩 종족들을 불러 모아 친목을 다지기도 하였다. ‘월회당’이라는 호를 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다.
장수하여 나라의 혜택을 받음
1711년(숙종 37)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3대가 연이어 진사를 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하면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개인의 심신 수양에만 열중하였다. 82세까지 오래 살았기 때문에 수직(壽職)으로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올랐다. 의성김씨를 부인으로 맞아 3남을 두었다. 장남은 류광택(柳光宅), 차남은 류사원(柳師源), 막내는 류기원(柳起源)이다.

가     족

: 류진휘(柳振輝)
생부 : 류종시(柳宗時)
형제 : 류창현(柳昌鉉), 류하현(柳夏鉉), 류정현(柳鼎鉉)
죽음에 임해서도 친족화목을 도모하다
류원현의 유문(遺文)은 불행하게도 시 10여 수와 제문 몇 편 밖에 남아 있지 않아 그의 일면을 고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가 친족들의 화목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가는 임종에 이르러 지은 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오늘 아침 죽음에 임해 한마디 부치니 / 垂死今朝寄一言
여러분들은 나를 위해 들어 주소서 / 諸君爲我聽施焉
본래 같은 조상을 근본으로 하여 수천 가지로 나뉘었지만 / 本根同處千支別
모든 사람들을 부를 때는 일각을 다투어 먼저 왔지요. / 衆幟麾時一角先
돈친목족(敦親睦族)하는 유풍을 쇠퇴하게 하지 말고 / 敦睦遺風須勿替
청렴검소(淸廉儉素)하는 구업을 서로 전하기를 좋아하소 / 淸寒舊業好相傳
평생 동안 법 삼아도 효험이 없어 / 平生未效居宗法
허망하게 죽으니 부끄러워 눈물이 쏟아지는구려 / 虛負堂名愧淚漣

위의 시에서 류원현은 죽음을 앞두고 평소 친족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자신을 따라 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이러한 화목 및 청렴하고 검소하게 사는 유풍은 절대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하였고, 자신은 평생 이것을 위해 애썼지만 별로 이룬 것 없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어 부끄럽다는 겸손한 말을 남기어 가족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학    문

학파 : 기타 학파
후진 양성에 힘쓰다
류원현은 1711년(숙종 3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에는 출사를 단념하고 학문과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5대손인 수재(修齋) 류정호(柳廷鎬)가 쓴 묘지명(墓誌銘)에 “3대진사(三代進士)면 분(分)에 족하다.”하여 출세를 단념하고 기양(岐陽)에 강학(講學)을 열고 독서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고 되어 있다.

저    작

문집명
『월회당일시(月會堂逸詩)』
『월회당일시(月會堂逸詩)』
월회당 유문(遺文)에는 문장은 남아있지 않고 시만 남아 있다.

「입춘일기양회음(立春日岐陽會吟)」
기양서당에서 오늘 모인 것은 / 岐陽今日會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함이로세. / 送舊又迎新
백발이 되어 자리에 참석한 이는 / 白髮能參座
82세의 노인이로세. / 八旬二歲人

이 시는 입춘일에 기양서당의 모임에 참석하여 읊은 것이다. 기양서당에 모인 이유를 명확히 제시하였고, 결구에서 자신이 82세임을 밝혀 놓았다. 여기에서 류원현이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만세력을 보니 그해 입춘일은 설날을 7주 남겨 두고 있다. 전주유씨 대동보에는 9월 1일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죽음을 8개월 정도 앞두고 지은 시임을 알 수 있다.
김성일의 연보간행의 주도적 역활

밀암(密庵) 이재(李栽)가 쓴 학봉집 연보 발문을 보면 “연보가 이미 이루어진 뒤에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 이를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게 되었는데, 그 일을 주관한 사람은 상사(上舍) 류원현(柳元鉉)과 대아(大雅) 김명석(金命錫)이다.[譜旣成 自虎溪書院 將刊布以廣其傳 終始幹其役者 柳上舍元鉉 金大雅命錫也]”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학봉 김성일의 연보를 간행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도헌 류우잠선생

성명 : 류우잠(柳友潛) , 1575년 ~ 1635년
본관 : 전주(全州)
: 상지(尙之)
: 도헌(陶軒)
출생지 : 안동(安東) 수곡(水谷)
출신지 : 안동(安東)
분묘지 : 봉화(奉化) 임당산(林塘山)
진외종조부 학봉 김성일과의 각별한 인연
류우잠은 1575년(선조 8)에 임동면 수곡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상지(尙之), 호는 도헌(陶軒)이다. 조부(祖父)는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된 류성(柳城)으로 영주에서 안동 수곡으로 이거하였다.

그러나 25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니, 학봉 김성일의 누이이자 류우잠의 조비(祖妣)인 의성김씨는 머리를 자르고 보리죽으로 연명하다가 3년상을 치른 후 상을 마치는 날부터 곡기를 끊고 자진하여 나라에서 열녀로 정려(旌閭)하였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류성의 두 아들은 외가인 천전(川前)에서 양육되었는데, 특히 외삼촌인 김성일이 두 생질을 자기 자식처럼 여기며 돌보고 가르쳤다. 류성의 맏아들인 류복기(柳復起)가 바로 류우잠의 부친이다. 따라서 김성일은 류우잠에게 있어 진외종조부가 되는 셈이다.
나라의 위기에 분개하다
류우잠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기질을 지녔으며 천성이 강직하고 순결하며 돈독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9세의 나이로 부친을 따라 의병진에서 활약하였으며, 1594년에는 팔공산에서 적을 막았으며, 1597년에는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였다.

1636년 인조의 강화도 피신 소식을 전해 듣고 후금의 만행에 대해 비분강개하였으며, 삼전도의 굴욕 이후 과거의 뜻을 포기하고 스스로 독서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또한 도연명(陶淵明)을 사모하여 호를 ‘도헌(陶軒)’이라 하면서 은일 자적한 생활을 보내다가 1635년(인조 13)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1세였다.

임종에 임해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각지 행동 거지를 삼가서 부조(父祖)들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가   족

: 류성(柳城)
생부 : 류복기(柳復起)
: 영덕정씨(盈德鄭氏) 정진(鄭溍)의 딸
진주에서 숙부의 장례를 치르다
18세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친 류복기(柳復起)가 안동열읍향병(安東列邑鄕兵)의 참모로 참전하자 부친을 따라 의병진에 가담하였다. 이때 숙부인 류복립(柳復立)은 경상우병사로 적의 호남 진출을 방어하던 외숙 학봉 김성일을 따라 진주로 내려가서 왜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김성일이 진중에서 숨을 거두고, 류복립도 1593년 왜적들이 대규모로 진주성을 공격한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군·관·민 6만여 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에 류우잠은 진주로 달려가서 촉석루(矗石樓)에서 초혼(招魂)하여 숙부 류복립의 제사를 지낸 다음 왜적의 무자비한 학살로 시신을 수습할 길이 없자 하는 수 없이 고양군(高陽郡)의 선영 아래에 의관장(衣冠葬)을 지내고 돌아왔다.
많은 인재를 배출한 가문
류우잠은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과 처남 매부 사이이다. 우계이씨(羽溪李氏)와의 사이에서 5남 1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둘째 아들 백졸암(百拙庵) 류직은 진사이고, 다섯째 아들 류격은 생원이었다. 특히 넷째 아들 류학은 류우잠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단지(斷指), 곧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부친에 먹여 목숨을 살린 극진한 효자였다.

부친인 류복기, 둘째 아들인 류직과 함께 3대에 걸쳐 뛰어난 문장과 후덕한 인품으로 사림의 중망을 받음으로써 무실의 전주류씨를 영남의 명문으로 자리 잡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학   문

스승 : 류복기(柳復起)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장흥효(張興孝), 이준(李埈), 김시온(金是榲)
인격 수양을 위해 학문을 하다
류우잠의 학문의 연원은 아버지 기봉으로부터 전수받았다. 성장한 후에는 학문을 좋아하여 날마다 책읽기를 하였으며, 창석(蒼石) 이준(李埈),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등과 교유하였다.

경전에 몰두하여 행실을 갈고 닦아 몸에는 나태한 모습이 조금도 없었다. 또한 부모에게는 효를 다하였고, 조상들에게도 정성을 기울였으며 다섯 아우들과는 우애가 독실하였다. 빈궁하거나 환난을 당하면 언제나 앞장서서 도와주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친척과 이웃에게까지 미쳤다.

남과 교류할 때는 항상 예로써 하고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구분함에 있어서는 매우 엄격하였다. 또한 자제들을 가르침에는 의리로 지도하였으며 비록 작은 것이라도 도리에 맞지 않으면 받지 않았다.
세인들의 존경을 받다
특히 류우잠은 시를 잘 지어 당시의 부류들이 미칠 바가 못 되었다고 한다. 일찍이 유림들이 5현을 문묘에 종향하기를 청하는 소(疏)를 가지고 대궐에 갔는데, 당시 한림(翰林)에 엄성(嚴惺)이란 사람이 류우잠을 보고는 늦게 만난 것을 탄식하며, “그대와 나의 마음을 알려면 눈 내린 남산에서 푸른 솔을 보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이 지은 제문에는 “오류(五柳)의 청풍(淸風)이요, 북창(北窓)의 황희(皇羲)이며, 향중에선 영수(領袖)요, 중인(衆人)에게는 사표(師表)로다.”는 말이 있다. 처남인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은 “이 사람이 죽었다니 다시는 이런 사람이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경옥(景玉) 이보(李簠)도 “어려서부터 향중(鄕中)의 부로(父老)들에게 들으니 산림의 재상은 오직 류도헌(柳陶軒) 그 사람뿐이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서도 그의 학문과 인품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영남 유림의 종장(宗匠)이 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같은 대학자를 길러 내기도 하였다.

저   작

개인저작
「상대인서(上大人書)」
「조령도중(鳥嶺道中)」
「체상입부시진폐조목(體相入府時陳弊條目)」
문집명
『도헌일고(陶軒逸稿)』
「상대인서(上大人書)」
「상대인서(上大人書)」는 1608년 7월 오현종사소(五賢從祀疏)를 올리기 위해 한양에 가 있을 때 부친인 류복기에게 올린 편지이다. 그는 이 편지를 통해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의 처벌 문제를 둘러싼 논란의 경과와 방향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특히 대사헌(大司憲) 정인홍(鄭仁弘)의 태도를 모든 사람이 주목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당시 요동총병(遼東總兵)인 이성량(李成梁)이 우리나라를 명나라의 군현(郡縣)으로 편입시키려다가 실패했음을 알리는 밀계(密啓)가 있었다는 소식도 전하고 있다.
「체상입부시진폐조목(體相入府時陳弊條目)」
「체상입부시진폐조목(體相入府時陳弊條目)」은 도체찰사가 안동부를 방문할 때 건의할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당시 안동부의 현안문제를 6개 조목으로 나누어 진술하고 있다. 첫째 항목은 100여년 만에 다시 양전(量田)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가 시행되지 않고 있어 조세가 균평(均平)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셋째 항목은 환상(還上)의 결손이 수천 석이나 되어 만약 이를 백성들에게 분배하여 징수한다면 그 피해가 엄청날 것이므로 결손된 수량을 검사하여 원수(元數)를 경감해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양전과 환상에 대한 두 항목을 뺀 나머지 네 항목은 모두 군정(軍政)에 관련된 것으로 삼정(三政)의 문란이 군정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먼저 안동부의 병액(兵額)은 원래 11초(哨)였는데 나중에 4초가 더하여 15초가 된 것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한 호는 100여 명의 병졸로 구성되어 당시 안동부에는 1500여 명 정도의 병졸로 구성된 속오군(束伍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병란으로 인구가 감소하여 늘어난 4초를 채울 길이 없으니 이를 감해 달라고 건의하는 내용이다.

그 외에도 보장(保障)을 설치하고도 부역은 더 심해진 현실, 그리고 사망한 군졸이나 도망한 군졸의 번가(番價)를 인족(隣族)으로부터 징수하는 문제, 원래 15세로 되어 있는 군역(軍役)을 5·6세나 3·4세 아이에게까지 부담케 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의 현실 등을 군정과 연관하여 폐단을 시정해 달라고 건의하는 내용이다.

조령도중(鳥嶺道中)
처남인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에게 준 이별의 시

모든 골짜기에는 바람 소리 급해지고 / 萬壑風聲急
낭떠러지에는 낙엽들이 많아졌구나 / 千崖落葉稠
어찌하여 그대는 멀리 떠나가는가 / 如何君遠去
슬프게 이별하니 더욱 슬픈 가을이로세 / 傷別又傷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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