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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7일 주일_요한복음 10장 19-33절(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르느니라)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
오늘 유대인과 예수님의 논쟁 중 유대인의 말에서 가장 귀담아 들어야 하는 말은 마지막 말입니다. 유대인종교권력자들이 구사하는 논리 중에서 그 말자체로 볼 때 우리가 경청해야 하는 본문은 이것입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이것은 유대교가 이 세상 모든 열등한 종교들과 자신의 종교들을 구분할 때 썼던 잣대가 됩니다. 가장 놀라운 증거는 보통 이교도는 신들과 인간의 경계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놓습니다. 로마는 30만의 신이 있습니다. 일본은 800만의 신이 있습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보면 일본신수양회에 참석하는 숫자가 800만 정도 되죠? 800만 마리라고 해야 할지 800만 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너무 많기 때문에요. 로마는 왜 30만이라면 로마의 모든 국가적 위신과 영광을 창출했던 사람들은 전부 다 신격화시켰기 때문에 결국은 로마에서 가장 명예로운 사람들의 총연합이 신입니다. 신처럼 되는 것, 이것은 로마나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개념입니다. 몰몬교도 그런 게 있죠? 이런 사람이 신이 된다는 개념은 고대 사람에게 익숙했고 그리스 사람에게 익숙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동방교회 정통을 이어받았던 아타나시우스라는 유명한 교부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아타나시우스가 그런 말을 했죠. 아타나시우스 오리겐 이런 교부들이 결국 우리 인간이 신처럼 된다, 인간이 신처럼 되는 것은 필연적인 하나님의 작정된 하나님의 창조 행위다, 이 사상에서도 그리스 사람들이 갖는 독특한 사고의 유연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절대로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교가 그리스와 로마종교로부터 윤리적 탁월성, 신관의 우수성을 말할 때 하나님과 사람은 도저히 하나 될 수 없는 엄청난 거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안에는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개념을 존재론적인 변화, 하나님처럼 먹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의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말을 쓰지 않았지만 구약에서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말이 분명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인격적 의지적 인지적 일치감을 완벽하게 구사할 때,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완전히 순복하고 하나님 뜻을 100% 대행하고 납득할 때, 하나님을 완벽하게 대리하는 인간을 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신을 엘로힘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엘로힘, 사람이 하나님처럼 된다고 할 때 엘로힘, 아담과 하와에게 뱀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엘로힘처럼 되리라 할 때, 그리스 로마적인 먹지 않아도 되고 무소불능의 권력을 휘두르고 유비쿼터스적으로 존재하는, 여기 있다가 저기 존재하는 신이 된다는 개념으로 한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You shall be as like~, 그렇게 썼을 때는 그리스 로마적으로 다분히 이교도적인 개념입니다. 시편 82편에 ‘너희는 신들이며’ 하나님 말씀을 맡은 자가 신이라고 할 때는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적으로 순복으로 하나님과 영적으로 인지적으로 지적으로 고도의 일치를 누릴 때 하나님처럼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남철을 가지고 작은 쇠붙이를 오랫동안 붙여 놓으면 쇠붙이가 한 동안 지남철과 떨어져도 여전히 자성이 남아 있는 원리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은 이단종교 때문입니다. 영생교라든지, 이만희 신천지, 안상홍, 이런 이단들의 특징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고 심지어 얼마 전 죽었던 문선명도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유대인이 우리에게 준 귀한 교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라고 할 때 시편 82편의 맥락,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이때 신이라는 말은 하나님 말씀을 맡아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신이라고 했기 때문에 존재론적 신처럼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완전한 일치를 누리는 일종의 영생적 교제에 들어온 그 피조물도 신이 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아들, 또는 신이라고 해도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시편 82편 6절의 맥락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는 겁니다. 시편 82편 6절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성경은 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신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받아서 순종하고 대리하고 실천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굉장히 중요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키에르케고르 식으로 너무 훤히 벌려놓고, 우리는 벌레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우주의 먼지입니다, 이건 수도사적 영성이고 좋은 표현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건 어떤 극단에 있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는 먼지이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좋은 영성적 표현으로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건 창조의 한 부분만 강조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또 하나의 신으로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에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지 않고 벌레라고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너무 쉽게 벌레라는 말을 쓰는데 사실 벌레가 아니라 신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 받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벌레입니다. 그렇지만 벌레라는 말은 자주 나오지 않기 때문에 자주 쓰지는 마시고요. 먼지다, 벌레다, 이런 것은 극단적인 실존주의적 표현이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신으로써 이 땅을 정복하고 관리하고 동산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숭고한 책임주체다, 우주적 신적 책임감으로 무장된 존재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마땅합니다. 그렇게 80,90% 생각하고, 10,20%는 실연당했을 때라든지 돈을 잃었을 때 직장을 잃었을 때 나는 벌레입니다, 이렇게 해야 합니다. 대부분 80,90% 내내 벌레라고 생각하고 자기가 고귀한 하나님 형상이라는 걸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건 배율의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처럼 부릅뜬 눈으로 이 세상을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사르트르가 말한 앙가주망의 철학입니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형이상학적 신은 있지 않다, 구름 저편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신은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신이 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했던 앙가주망입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무신론은 실천적 윤리론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니체도 그렇게 말했고, 서구의 정신 말짱한 철학자들의 말은 이런 겁니다. 신이 없다는 최종 판단이라기보다는 신이 더 이상 역사 속에서 출애굽기 전쟁 방식으로 또는 구름 타고 와서 태양을 멈춰주는 여호수아 10장 방식으로 더 이상 활동하지 않고, 그런 의미의 신, 형이상학적 영역에서 바로 순식간에 물질영역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구해주는 신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신이 돼야 한다, 신이 없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1941-45년 사이에 본회퍼가 말했던 신 없는 종교, 신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성년이 된 인간, 이런 말입니다. 무신론을 표방할 때 사르트르 같은 무신론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한 무신론은 이런 뜻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떡 먹듯이 먹는, 하나님을 알긴 하지만 하나님을 묵살하는 윤리적 파탄자, 도덕적 파탄자, 이런 사람이 무신론자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중립적으로 신이 안 계시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서 우리가 신처럼 살아야 한다, 이렇게 말한 사르트르의 방식은 오히려 예수님과 같은 거예요. <그리스도냐 프로메테우스냐> 이 책을 썼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얀 밀리치 로호만, 이 사람이 썼던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라는 책을 보면 예수가 형이상학적인 병든 정신에게만 호소력 있는, 영력을 몇 개씩 뛰어 넘어 도와주려고 오는, 정신의 유아기 단계에 있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시지 않고, 자기 운명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알고 누구에게도 노예적으로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려고 하는 야곱 같은 실천적인 사람을 위해서 왔다, 예수는 무신론자를 위해서 왔다, 예수는 진정 자기 운명에 책임을 지고 분투하고 개척하면서 형이상학적 이상한 신들에 대한 의존을 핑계대면서 노예처럼 살지 않고 혁명도 일으키고 나쁜 정치도 고쳐가고 생태계를 책임져가면서 사는 사람을 위해서 예수가 왔다, 이게 바로 <무신론자를 위한 예수>입니다. 어떤 무신론이 나쁜 무신론입니까? 얀 밀리치 로흐만은 물론 기독교 신학자니까 무신론자 아닙니다. 얀 밀리치 로흐만, 로마드카, 체코슬로바키아 신학자들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기독교 신학을 굳게 세웠던 사람입니다. 얀 밀리치 로흐만, 로마드카, 사르트르, 칼 야스퍼스, 이 모든 학자들은 신이 옛날 방식으로 우리를 도와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계몽적 지성들이 깨어서 이 역사를 부릅뜬 눈으로 감시하면서 독재도 막아내야 한다, 이런 사람 사이에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방식으로 계실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목사님들은 이걸 모르시기 때문에 무신론자는 전부 다 나쁜 사람이고 하나님을 고백만 하면 착하다, 그렇게 속은 사람이 1935년 미국 침례교단이 베를린 올림픽을 잘 개최할 수 있을지 총통이 된 히틀러를 만나고 오라고 대표단을 보냈습니다. 미국 침례교 대표단이 히틀러를 만나고 온 소감을 발표했습니다. 히틀러, 인상착의 매우 건실함, 자기 절제가 매우 잘 됨, 술 담배 안 함, 채식을 중심으로 식단을 짰음, 아주 좋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렇게 평가를 했습니다. 임철우가 쓴 <붉은 방>에 나오는 이근안 닮은 고문수사관 채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요예배 꼬박꼬박 나가고 십일조 꼬박꼬박 내고 가끔 2차 나가는 것만 빼면, 하나님 제가 이 악의 무리를 뿌리 뽑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제가 고문할 때 인정에 약해지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어떤 것이 참 하나님입니까? 임철우의 <붉은 방> 채단식 같은 사람, 이근안 무허가 신학교를 나와서 목사가 됐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 악의 무리를 뿌리 뽑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고문하는 제 오른손을 붙들어주시기를, 이런 식의 기도를 한단 말이에요. 하나님이 어떤 존재냐? 우리가 벌레 같이 살면서 아주 낮은 자존감으로 짓밟혀도 매우 익숙한 경험으로 살기를 원했는지, 아니면 노예처럼 사는 것보다 자유인으로 자결하는 걸 원하는지 봐야 합니다. AD 70년 마지막 11월 쯤 됩니다. 로마 제10군단이 유대전쟁 마지막 저항자들을 공략하러 맛사다라는 요새로 이동합니다. 맛사다에는 약 천명의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거기에 엘르하살이라는 사람이 우리가 로마인에게 노예로 끌려가는 것보다 왜 자살해야 하는지 길게 연설합니다. 내가 자유인으로 죽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려야만 우리 후손들이 노예적 굴종의 삶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로마에게 노예로 끌려가서 로마사람들의 친절로 자유인이 되고 해방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사람들은 유대인들을 많이 잡아다가 해방노예로 풀어줬습니다. 그래서 로마유적지에 보면 로마시민 이름들 중에서 이스라엘 이름을 가진 해방노예들이 많이 발견됐습니다. 물론 로마가 나쁘진 않았습니다. 좋은 장군도 많았는데 엘르하살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지금 자유인으로 죽어야만 로마가 우리 정신의 자유를 공략할 수 없다, 우리 몸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자유를 향한 열정은 로마가 정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 다 죽습니다. 세 사람이 살아남았습니다. 너무 죽기가 두려웠던 세 사람이 살아남고 다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마지막 부분에 나옵니다. 거기에 맛사다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도 볼 수 있습니다. 맛사다 요새는 자유를 상징합니다. 인간은 신이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면 사는 것 자체를 하찮게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고귀한 신성, 신적위엄을 누려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 마음 때문에 불행한 걸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살이라는 것이 가능한 겁니다. 인간은 벌레가 아닙니다. 먼저 벌레라고 하기 전에 고도의 자기존엄을 얻고 사는 신적존재입니다. 하나님에게 책임지는, 국가에게 소속되기 전에 하나님과 1대1 대화가 되고 하나님과 직접 거래합니다. 중간의 어떤 관리자도 필요 없는,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박정희 등 독재자에게 귀속된 동원될 만한 국가의 부속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국가 위에서 모든 개인을 국가를 초월해서 언약관계를 맺어주시는 분입니다. 그게 바로 신적존재, 하나님께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사는 존재, 하나님께 책임져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하나님 뜻과 함께 관리해가는 존재를 신이라고 합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했을 때 그리스적 개념의 하나가 아닙니다. 나와 하나님 아버지는 의지적 일치적 완전한 연합과 동역 속에 있다, 순종 모드에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영생하고, 이런 예수님께 예속돼야만 국가에 예속되지 않고 기업체에 예속되지 않고 자기 생계를 위탁한 직장에 노예처럼 굴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모욕과 노예적 존엄파괴를 못 견디는 이유를 창조신학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고귀한 형상이기 때문에 내가 모욕을 받는 순간 하나님이 동시에 연동돼 모욕을 받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150만 명이 죽을 때 하나님도 똑같이 150만 분의 모욕을 받은 거라 봅니다. 유신독재 때도 숱한 모욕을 당한 것처럼, 우리 하나님이 모욕당하도록 연동돼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존엄은 연동돼 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자기 존엄을 파괴할 때 하나님의 존엄의 일부도 파괴되는 것이고 그런 언약관계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그런 뜻으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모든 영생을 누리는 기독교인들도 이 유사한 말로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 예수님 사이에 경결한 영적결속과 영생적 교제를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라고 말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귀신 들린 자, 또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자라는 말을 서너 번 들었고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서너 번 들었는데 이건 유대종교당국자들이 대중과 예수님 사이를 순식간에 끊어놓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이건 태생 소경된 사람이 퍼트린 말입니다. 일종의 음성적 통신을 보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헷갈리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을 귀신이라고 부르고 싶은 욕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 원수를 우리는 귀신이라고 부르고 싶고 MB나 근혜할머니 같은 경우, 우리민족끼리 사이트에 접속 한 번 하면 조갑제 같은 사람은 뭐라고 생각합니까? 종북주의자, 좌파, 이렇게 하면 손쉽게 논리가 정돈됩니다. 좌파 종북주의가 되는 순간 그가 한 모든 얘기는 들을 필요 없는 상태가 되는 거죠. 얼마나 단순한 논리의 폭력이며, 얼마나 말이 갖는 무서운 단순성의 폭력입니까? 이 말의 힘 안에 인간들은 빨려 가기 때문에 양들은 타인의 음성을 구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의무가 있고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할 숭고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10장 2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이때 괄호하고 이렇게 써야 합니다. 타인의 음성을 듣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음, 자신을 죽음과 파멸로 이끌어가는 거짓 선지자, 삯꾼 목자, 강도, 이리떼들의 달콤한 유혹에 협조하지 않을 의무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히틀러 치하에 살았던 독일 사람들은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40만 명이 모였던 나치 당원의 위세 당당한 출범을 보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걸 보고 두려워한 사람은 본회퍼였고, 그걸 보고 독일의 구세주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것은 독일기독교연맹입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히틀러를 지지했는가, 안 믿겨지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멸공주의자, 반공주의자,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독재를 옹호하고 사수하고 멸공과 반북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신천지, 성락교회 김기동, 이단이 왜 무섭냐? 이단의 특징은 종교성이 약하기 때문에 극우세력과 빨리 한 편이 됩니다. 신천지 영생교, 모든 악한 극우세력의 집회에는 종교 세력의 대중동원이 너무 많았습니다. 장준하 선생님께서는 박정희가 매우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상계>를 통해서 유신독재는 옳지 않고 박정희 독재는 옳지 않다는 것을 계속 말했습니다. 문제는 그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했던 대중과 양떼들도 역사의 파국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독일도 마찬가지입니다. 2차 세계대전 후에 독일이 히틀러의 죄책에 다 책임져야 합니다. 히틀러를 제1당으로 만들어준 1932년 선거에 독일은 책임져야 합니다. 독일은 히틀러만 잘못한 것이 아니라 히틀러를 총통으로 뽑은 민중도 잘못했기 때문에 독일민중도 다 죄가 있는 겁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이지 유신, 예전의 죽어버린 이름만 있었던 천황을 다시 실제적인 천황으로 신격화했던 메이지유신의 핵심그룹들은 다 책임이 있습니다. 일본천황을 믿었던 천황숭배자들이 지금도 일본의 모든 권력기관에 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방식과 같은 하나님 아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쓸 때 항상 비특권화, 순종의 무한부담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본천황은 일본천제대신의 직계후손이기 때문에 아시아를 지배해도 된다는 지배권과 권력욕을 정당화하는 말을 썼습니다. 누구누구 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쓸 때, 모든 이교도들이 신의 아들이라는 말을 썼을 때 지배권 정복욕 탐욕을 정당화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한 번 쓸 때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함, 자기 비움, 타인의 유익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쳐내심, 이런 말로 쓰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쓰는 순간 권력담론으로 바뀌기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일단 시청에 많이 모이는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시청에 군중에 많이 모이며 거기에 선량한 담론이 나오지 않고 자기증대적인 자기확장적인 자기신격화적인 권력담론이 모입니다. 목사님은 한 명 있을 때가 제일 거룩하고, 목사들은 200명 모이면 영적수준이 예비군과 똑같습니다. 목사가 가장 사람이 나아보일 때 홀로 있을 때, 장례식 집전할 때가 제일 낫습니다. 목사가 오로지 한 곳, 장례식 집전할 때만 거룩해 보이고 무리지어 다니면 안 됩니다. 특히 전철에서 권사님과 다니면, 목사님 여기 앉으세요, 온갖 창피를 다 당합니다. 권사님 집사님과 다니면서 자리 양보 받을 때는 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저는 그래서 혼자 탑니다. 왜? 목사가 그렇게 모이면 안 됩니까? 장로 집사 또는 교회를 지배하려는 권력담론이 일상화돼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수줍은 듯이 부담을 가지면서 말씀했고 자기를 죽기까지 비우는 담론 권력해체적 담론, 권력포기적 담론으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말을 썼기 때문에 이교도 종교와 다릅니다. 훌륭한 목사님들은 권력자들과 일단 어울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접촉하는 목사님들은 권력자들과 상류사회에 가서 긴장감 없이 칵테일 잔을 부딪칠 수 없습니다. 반드시 긴장이 있게 됩니다. 불편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과 거룩한 제사장과 접촉하는 하나님 아들들 신들은 인간의 존엄이 파괴당할 때 분노하는 자이고, 인간의 존엄이 위협당할 때 일어서서 아모스처럼 사자처럼 부르짖는 자,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자입니다. 인류역사 인권의 역사를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의 역사로 보는 방법 외에는 달리 길이 업습니다. 만일 우리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선험적 토대가 없고 근거가 없다면 압제가 왜 나쁜 지를 입증할 방법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진화론으로 말한다면 압제, 약자를 죽이는 것은 적자생존론에서 다 옳습니다. 열성인자를 낳지 못하게, 못생긴 사람, 키 작은 사람, 지능이 낮은 사람을 도태시키는 것은 사회진화론에 맞습니다. 그래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보면 사자가 임팔라를 사냥하는 장면, 7분짜리 화면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세요, 이 놀라운 적자생존의 비밀을, 임팔라 중에서 가장 열성인자를 가진 자가 사자의 밥이 되는 겁니다, 사자는 임팔라를 도와주는 겁니다, 강한 종자만 살아남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게 히틀러의 우생학 실험입니다. 히틀러 또는 범히틀러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적응하지 못하고 밥값하지 못하는 경쟁과 각축 사회에서 힘써 생산성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도태시켜서 인간 존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이건희의 세계관이고 삼성과 현대의 세계관이고, 제너럴 모터스의 세계관, 모든 대기업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자생존론이 타인의 음성입니다. 우리 예수님의 음성은 상하고 병든 영혼들을 고쳐서 온 멧부리에 흩어졌던 양떼들을 싸매는 것, 사실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에서 장애인 한 명을 돌보기 위해서 돈을 쓰는 것은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짓입니다. 집안에 한 명 있는 사람을 위해서 국가가 돈 쓰는 것, 알코올 중독자는 히틀러 식으로 하면 불도저로 깔아 죽이는 게 낫습니다. 그런데 알코올 중독자 한 명을 살리기 위해서 독일에서는 140만 마르크를 씁니다. 기독교가 아니면 알코올 중독자, 정박아, 정신지체자, 장애인들, 공부 좀 못해서 9등급 받아서 직장 못 갖는 사람들, 좋은 부모 못 만나 중랑구에 태어나서 좋은 대학 못 가는 아이들, 이걸 다 돌보는 게 타인의 음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서 마땅히 구가해야 할 삶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너무 적습니다. 9급 공무원 적고 언론인 중에 적고 목사 중에 적습니다.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줄만한 정책을 결정하고 우리 사회 얼굴, 우리 사회 이토스, 깊음을 새롭게 만들만큼 예수님의 음성을 따르는 절대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기독교적 영향력의 침투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은 푸른 초장으로 따라간다는 뜻이고 쉴 만한 물가로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사람은 두 가지 해결됩니다. 푸른 초장에 가서 인간의 존엄을 충분히 공급받으면서 자기가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을 보장받고 있다고 믿으며, 쉴만한 물가에 가서 안식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노동의 성과를 즐기면서 자기 존엄을 향유하면서 쉴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안식과 노동의 리드미컬한 반복을 통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서 마침내 고위평탄면, 골짜기를 지나서 대관령이 나타나듯이 죽음의 협곡을 지나서 마침내 천국이라는 진수성찬과 같은 플랜프 지역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행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푸른 초장도 없고, 양들이 푸른 초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필립 켈러가 쓴 <양과 목자>에 나옵니다. 동아프리카에 태어나서 양을 직접 길렀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양들이 푸른 풀밭을 보면 얼마나 기분 좋은지, 그동안 이웃 양들과 머리를 박고 싸웠던 양떼들이 거대한 푸른 초장에 가면 성자처럼 바뀌는 겁니다. 양들이 또 언제 성격이 좋아지느냐? 쉴 만한 물가로 목자가 데려갔을 때, 그런데 목자가 있을 때만 그 양은 쉽니다. 목자가 가운데 있을 때 우리 말로 디비져 잡니다. 양이 그렇게 자는 이유는 목자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목자가 있어야 우리가 절대안정과 절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인생의 복이거든요. 절대안정과 절대 존엄의 향유, 이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국가가 줄 수 없고 가정이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 수 있습니다. 이걸 아무도 빼앗을 사람이 없게 만드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행복입니다. 여러분 직장은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47세에 다 은퇴해야 합니다. 은퇴하고 나서 25-30년을 post retirement, 은퇴 이후를 살아야 합니다. 그 중에서 목사가 제일 좋습니다. 목사는 일단 70세까지 일단 할 수 있습니다. 좋긴 하지만 부르심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제가 볼 때 직업적 안정성은 목회자가 최고입니다. 교황이 물론 조금 더 낫긴 하지만요. 돈 많은 절대 난공불패의 대기업 회장, 100세까지 은퇴가 안 됩니다. 죽을 때 끝납니다. 47-56세 안에 다 직장을 떠나는 사람들이 국가나 가정이나 회사가 영생을 준다고 믿을 수 없어요. 지금은 그런 것을 다 초월하여 절대적 우주적 안정감을 가진 하나님 앞에 신앙을 갖지 않으면 사는 것이 너무 고달픈 거예요. 기독교 신앙은 어제 필요하냐? 국가나 가정과 기업 일터가 아무것도 나에게 해줄 수 없는 절대 무의 공간에서 진짜 신앙이 필요한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크게 보입니다. 20대 들은 잘 안보일지 모릅니다. 20대가 요즘은 삶이 팍팍한데도 불구하고 타인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 입장이 많습니다만, 저와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타인의 음성을 배척할 수 있는 영적 변별력을 가져야겠고 주님을 따르면서 푸른 초장을 경험해야겠고 절대 안식을 경험해야겠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서 고위평탄면 같은, 진수성찬 같은 어떤 맹수도 쫓아올 수 없는 높다란, 목자가 그 가운데 계셔서 나를 절대 평안한 자세로 드러누워 자게 만들 수 있는, 더 이상 경쟁도 없고 더 이상 각축도 없는 그런 세상에 우리를 안내할 때까지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줍니다. 주님을 따르면, 저 친구가 나보다 더 빨리 출세하네, 안 되겠다, 하면서 각축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양을 편안하게 누리듯이 하는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우리를 누리셔서 내 존엄을 내가 고취하며 내가 나에게 충분히 만족할 수 있도록 우리 하나님은 인도하십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만족하지 말고 내가 나 자신을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신묘막측함을 발견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요? 이것이 영생 아닐까요? 이 영생을 주님은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 영생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아무도 괄호하고, 히틀러 모택동 김일성 김정일 박근혜도 빼앗을 수 없다, 목사님도 빼앗을 수 없고 교황도 빼앗을 수 없다, 이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국가 소속, 제도권 교회 소속보다 더 강력한 근원적 소속감은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간절하고도 지속적이고도 친밀한 인격적 관계, 이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주님을 듣고 따르려면 오래 숙달된 말씀경청훈련이 있어야 하고, 기도훈련이 있어야 하고 순종훈련이 돼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직립 보행하는 직립보행자가 돼야 하는데, 숙달된 경지까지 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담임목사를 믿어버리려고 하고 영적 멘토를 믿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거짓 목자가 출연합니다. 이끄는 자와 따르는 자를 가만히 보면 내용과 상관 없이 이끄는 자는 확신과 에너지가 넘치는 자고, 이끄는 자를 따르는 자는 확신과 에너지가 모자란 자입니다. 어떤 세계든지 확신과 에너지가 비대칭적으로 높은 사람이 거기서 오야붕 노릇을 합니다. 그게 모자란 사람들은 어수룩하다가 어느 순간 따라갑니다. 사나움과 온순함을 이끌어 갑니다. 윌리엄 골딩이 쓴 <파리대왕>에 보면 사나운 청소년지도자가 온순한 자를 다 데려갑니다. 우리 모두는 선한 목자를 따라가지 못하고 누구를 따라갑니까? 확신 있는 자, 이 화장품을 바르면 이 기미 주근깨가 영원히 소멸됩니다, 우주 저 밖으로 갑니다, 확신을 자꾸 심어주면 홈쇼핑광고를 보고 50만원어치 화장품을 사버립니다. 이 옷을 입는 순간 우리 몸매는 어떻게 됩니다, 이런 강한 확신, 광고, 광고적 확신은 돈 쓰게 만듭니다. 따라 갑니다. 이번에 나에게 우리 정당에 투표하면 무슨 자리를 주겠습니다, 강한 능력 카드를 보여주는 것도 따라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으면 능력이 많은 사람, 확신이 많은 사람, 지나칠 정도로 자신감이 많은 사람이 우리 거짓 목자가 돼서 우리 인생을 파멸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고귀한 형상이 내 안에 역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침마다 말씀을 펼치셔서 읽어보십시오. 하나님 음성이 들려오는가 오지 않는가를 테스트해보셔야 합니다. 성경은 알파벳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6만 구절을 가지고 만들어 내십니다. 아침마다 들으시고 따르시고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오가면서 많이 자라서 마침내 주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그 여정에서 꼭 이기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타인의 음성을 거부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주님은 귀신 들린 자라는 비난을 받았고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 그 험한 시대를 살아갔습니다. 우리 주님을 변호할만한 어떤 후견인도 없었고 정치단체도 없었고 유명한 사람 중에서 주님을 변호할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습니다. 주님은 절대적 우주적 고독 속에서 형벌을 받으셨고 십자가의 짐을 지시고 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태양처럼 찬란한 자존심이 있었고 인간이 얼마나 고귀함이 있는가 극한의 고귀함을 보여주셨고, 하나님 말씀 때문에 양심을 팔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아름다운 예수님을 흠모하게 하시고 우리도 따르도록 용기를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에게는 삯꾼 목자와 확신의 전도사들이 많습니다. 때때로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음성을 들은 지 참 오래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들려주시고 우리를 다시 한 번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소서. 간절히 간절히 빕니다. 주님을 분별하게 하시고 그 음성을 듣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헌금 기도)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직장을 무사히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벌어들인 소득을 감사함으로 바쳤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이 귀한 헌물이 하나님 친백성, 우리 바깥에 있는 백성, 아직 하나님을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여전히 꽂혀 있는 그 백성을 살리는데 쓰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청년들 중에서 주님의 포도원으로 진입하기 위하여 문 두드리는 아들딸들 많습니다. 하나님 문 두드리는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소서. 가장의 자존심을 살려주시고 가정을 책임지려고 하는 아들딸들의 숭고한 책임감에 응답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 들어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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