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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한 사람 안에
2021. 3. 26. 이현래 목사
한 사람에 대해서 지난번에도 한 번 말씀을 드렸는데 이게 참 신기하다. 아주 단순한 문제지만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만 지었다는데 그러면 그때는 아담과 하와 가인 밖에 없었을 게 아닌가? 그런데 가인 하는 말이 이제 내가 나가면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그냥 안 둘 것이라고 하는 데 무슨 사람들이 또 있는가?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지은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숫자적으로 꼭 한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고 사람은 하나라는 말이다. 어디 가서 만나도 사람은 도로 사람이다. 옛날부터 그런 질문들이 많이 있었다. 한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면 대답하기가 대단히 곤란한 그런 말이다.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된다. 논리적으로 아주 간단하다. 이것이 처음에 들으면 이상한 말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당연한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볼 때는 사람이 많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한 사람 뿐이기 때문이다. 소를 보면 소가 많고 미국 소도 있고 한국 소도 있지만 우리가 볼 때는 다 소로 본다. 다 소니까 다 한 소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앞에서 아담 한 사람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 전가설이니 여러 가지 말이 있는데 그런 문제가 아니다. 사람 문제이기 때문에 아담이 이러저러 했다는 것은 인간이 그렇다는 말이다. 아담이 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가? 그렇지 않고 똑 같이 있다는 말이다. 개가 짖는다면 모든 개가 짖는다. 병신이 아니면 안 짖는 개는 없다.
아담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든지 아담이 하는 말은 다 우리들의 말이다. 똑 같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물었을 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했다. 그러면 아담만 그랬는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 아담이라는 사람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우리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북한에 묘한 게 있다. 주체사상이다. 주체사상은 김일성이 수령이라는 말이 아니고 수령은 오직 하나라는 뜻이다. 그래서 김일성이 죽으면 김정일이 수령이고, 김정일이 죽으면 김정은이 수령이다. 왜냐하면 수령이라는 개념이 국민의 총화라는 뜻이다. 전 국민의 대표자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수령은 영원하다는 뜻이다. 주체사상을 기독교 삼위일체라는 사상을 들어서 표절했다는 말이 있다. 강양욱이 김일성의 외삼촌이다. 그 사람이 목사다. 김일성의 외가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래서 주체사상을 만들 때, 그 사람이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삼위일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예수 한 사람이 의인이 됨으로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된다. 이 한사람이면 되니까 아주 간단하고 쉽다. 70억 인구의 문제가 아니고 한 사람의 문제다. 하나님이 볼 때는 한 사람의 문제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해결되면 다 해결된다. 그래서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만든 것 같으면 그렇지 않다. 나에게서 어떤 버릇이 없어져도 다른 사람에게는 없어지지 않을 수 있다.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같을 수가 없다. 한 사람이 고쳐졌다고 해서 다 고쳐지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이 고쳐진 것이 어떤 사람이 고쳐졌는가? 그것이 문제다. 백성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가? 아니면 우리가 알고 있는 개별적인 인간인가? 그 문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별적인 인간은 한 사람이 선하다고 다른 사람이 모두 선해질 수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든 사람은 한 사람이니까, 그것이 사람이니까, 또 그것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다 다르다. 문화가 다르고 종교가 다르면 다 달라진다. 심지어 같은 한국 사람도 교파가 달라지면 다 달라진다. 그것은 하나님이 볼 때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그것만 사람이다. 우리가 고침을 받아야 할 것도 하나님이 만든 사람, 그 사람이 고침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든 사람이 어디서 잘못 되었는지 모르면 고칠 방법이 없다. 원죄가 애매모호하면 답은 전혀 없다. 그런데 원죄 사상을 보니까 불순종 한 것, 교만한 것, 그리고 야망 욕망을 가진 것, 그 3가지를 어스틴도 그렇고 그 뒤의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한다. 그러면 해결이 안 된다. 한 사람이 불순종 했다고 해서 다 불순종 하는가? 한 사람이 교만하다고 해서 다 교만한가? 세상에 겸손한 사람도 많다. 겸손한 사람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원죄 사상 자체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니 답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병이 확실해야 그 병이 치료될 수 있는가 없는가를 알게 되지 병 자체를 모르는 데 어떻게 치료가 되겠는가? 옛날에 문둥병은 치료되지 않는다고 천질이라고 했다. 왜 그랬는가? 그 원인을 몰랐기 때문이다. 균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고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균이 있어서 그런 줄 알게 된 후에 간단하게 해결 되었다. 약 하나 먹으면 다 낫도록 그렇게 되었다. 결핵보다 훨씬 쉬운 병이다. 결핵은 최소한 1년은 약을 먹어야 된다. 그런데 문둥병은 발견이 되면 금방 낫는다. 100% 완치된다. 원인을 아니까 간단하다.
인간의 문제도 원인을 알면 간단하다. 그런데 원인을 모르고 2000년 동안 고친다고 했다. 사람이 무엇이 고쳐졌는가? 기독교 이전의 인간과 기독교 이후의 인간이 뭐가 달라졌는가?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 개별적인 행동이 달라진 것은 많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어 버리면 그만이다. 그 사람이 성자가 되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성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확실하지 않으면 답은 있을 수가 없다.
우리는 강단에서 뭘 하는가? 그 문제가 생긴다. 우리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 나도 한 교회에서 8년을 목회 했다. 나는 한다고 했고 말씀도 옳게 한다고 했는데 아무 것도 된 게 없었다. 뒤로 생각하니까 되고 안 되고는 제쳐두고 내 자신도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내가 그러니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너희는 모르는 것을 말한다는 말을 하신다. 율법이 다 똑 같고 역사가 다 같은데 뭘 가지고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너희는 모르는 것을 말한다고 하겠는가? 근본을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문둥병의 균 하나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 때문에 몇 천 년을 이어오는 동안에 문둥병은 천질이었다. 하늘이 준 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하늘이 준 병이 아니고 세균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알면 아주 간단한 문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사람이 한 사람이라야 그렇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개도 세퍼드도 있고 진돗개도 있고 다 있는데 그게 가능하겠는가?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된다. 아주 신기한 방법이다. 우리가 볼 때는 신기하고 이상한 방법이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당연하고도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문둥병은 DDS라는 약 하나면 미국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상관이 없다. 누구든지 먹으면 다 낫는다. 항암제가 나와서 많이 사용했는데 의학계에서 한계를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선택적인 항암제를 실험하고 있는 중인데 아직은 안 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검사해 보면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약도 다 달라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접종하기가 아주 어렵다. 우리 주변에서도 몇 사람이 했는데 다 실패했다. 아직은 성공이 불가능하다. 미국서도 안 되고 한국서도 안 되고 있다. 의사들은 될 수 있는 대로 해 보려고 한다. 지금 시험단계이기에 해 보려고 하는데 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원인이 딱 하나로 밝혀져야 그게 가능하지 이 사람이 다르고 저 사람이 다르다면 어떻게 그게 해결이 되겠는가?
원죄에 대해서 확실치 않으면 답이 확실치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니까 해 봤자 소용이 없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 강의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뭐가 다르겠는가? 명륜당에 가서 한문 공부해도 그보다 나을 수도 있다. 좋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사탄은 지식을 통해서 사람을 흩어 놓았다. 바벨로 갔다는 말은 다 흩어버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지식의 세계에 가면 다 다르다. 그래서 사람은 다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더군다나 해결이 안 된다. 원인도 모르고 답도 모른다. 결국에는 서로 말을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서로를 모른다는 말이다.
미국에 가면 영어가 안 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을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말이 통해야 안다. 말이 안 통하니까 아무 것도 모른다. 사람을 지으신 분에게는 언어가 다르든지 모양이 다르든지 상관이 없다. 사람을 지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문제는 하나뿐이다. 원래 지어 놓은 대로 있지 않고 이탈했다. 이탈한 그것을 죄라고 말하는데, 죄라는 개념이 많이 달라져 버렸다. 일반적인 죄도 있으니까 기독교인들이 죄, 죄라고 많이 하지만 무슨 죄를 회개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부흥회를 가 보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이 죄를 회개한다고 하는데 무슨 회개해야 할 죄가 많은지 모르겠다. 그리고 심하게 어떤 자리에 가니까 죄가 탄다고 한다. 그래서 죄 타는 냄새가 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내 옆에 앉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 기가 막히는 것을 다 보았다. 그렇지만 그때 나는 그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저렇게 될 수도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쫓아 다녔다. 하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냄새나느냐고 하는데 나는 안 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답답했다. 나는 왜 이렇게 아무 것도 안 되는가?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 모르고 있으니까 이런 우스운 일이 생기는 것이다. 한국 사람이 죄라고 느끼는 것과 미국 사람이 죄라고 느끼는 것이 다르다. 그러니 무슨 수로 그게 해결이 되겠는가?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이것을 해결하는 길을 찾자는 것인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사람들을 부르신 것은 이 길을 열기 위해서다. 한 번에 딱 되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안 되는 것 같다. 공사를 해야 길이 열리는가 보다.
지금 백신 문제가 나왔는데 어떤 의사는 하는 말이 백신 하나를 개발하는데 몇 십 년이 걸리는데 무슨 1년 만에 백신이 개발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백신 개발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백신 접종을 맞지 말라는 의사가 있다.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니까 맞아놓고 보는 것이다. 백신 하나를 개발하기 위해서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린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대인데, 왜 이 사람들을 불렀는가?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해서다. 새로운 길을 열려고 하니까 거기에 적합한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일에도 그 일에 적합한 사람들이 있다. 에서는 마음씨 좋고 호탕하고 남성적인 사람이었지만 야곱을 다루시는 것을 보면 야곱이 적격자인 것이다. 사람 속에 있는 어떤 문제를 끄집어내어서 해결하기 위해서는 야곱이 적격자다.
하나님은 위대한 연출자라고 할 수 있다. 영화배우를 선정해 놓은 것을 보면 참 잘 해 놓았다. 어떻게 그런 인물들을 선정해 놓았다. 그 사람이 그런 배역을 안 해도 그 다음에 보면 그 인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선택력이 있어야 영화감독을 할 수 있다. 엉뚱한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안 어울린다. 배역에 어울리지 않는다.
아담이 스스로 만들어 바벨로 가는 멸망의 길 대신에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는 새 길이 있어야 한다. 길이 있어야 간다. 성경으로 말하면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그 길을 이루기 위한 준비다. 부르심! 아브라함은 부르심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이삭이다. 이삭을 주신 목적은 야곱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도 순서적으로 건설하였다. 아무나 그것을 할 수가 없다. 하나님 나라도 가는 길을 아주 오래 전부터 예비를 했다. 그 길은 동산을 나온 후로 예비한 길이다. 동산 안에 있었으면 그런 길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산을 나오니까 도로공사가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도로공사를 제대로 받아야 하고, 이 공사를 해 놓은 길로 가야 한다. 그 길로 안 가면 아무리 차가 좋아도 안 된다.
전에 한 번 말씀을 드렸다. 내가 C.C.C.에 가니까 폭스바겐 봉고차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주 골치 아파했다 그때 당시에 우리나라의 도로 포장률이 엉망이었다. 비포장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이 차를 끌고 나가면 고장이다. 길에서 고장 나 버린다. 왜 그런가 했더니 도로가 엉망이어서다. 독일에서 사용하던 차를 비포장도로에 세워 놓으니까 맨날 고장이다. 차가 좋아도 길이 없으면 갈 곳이 없다.
아담이 만들어놓은 바벨로 가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거기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데 절대로 불가능하다. 길이 다른데 어떻게 되겠는가? 길로 가도 시원찮은데 길이 아닌 곳으로 가서 되겠는가? 나는 그 길을 모르고 갔던 것 같다. 길을 모르니까 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다. 좋은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길은 몰랐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길이 필요하다. 새로운 길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 길을 발견해서 이 길로 사람들을 인도해야 제대로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 길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하늘에서 그냥 뚝 떨어진 게 아니다. 물론 동산에서부터 있었겠지만 그 길이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예수까지 온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서울에서 시작해서 부산까지 왔다. 부산에 덜 왔으면 아직 도로가 완성된 게 아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것은 종착역으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는 창조 이전에 있었다는 말이 그 말이다. 창조 전에 있었다는 말은 사람을 지어시기 전에 있었다. 왜냐하면 사람을 지을 때 우리는 모르지만 지으신 이에게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표가 그리스도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통해서 자기를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미 그림이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다. 선재성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냥 하늘에 있었다고 하면 막막하다. 하늘 어디에 있었겠는가? 하나님 마음속에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고 했다. 태초에 하나님과 같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같이 있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가 아는 시대에 태어났는데 그렇게 말한다. 신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때 하나님 안에 있었으니까 우리에게 왔다.
사람을 지었다. 전에 있었다. 그리스도가 사람이니까 사람을 지은 게 아니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한복을 만드는 본이 있었는데, 부인들이 한복을 지으려면 그것을 꺼내서 거기에 맞추어서 재단을 한다. 그것을 본지라고 한다. 요즘은 대량생산을 하니까 옷 만드는 공장에 가 보니까 본을 종이가 아니라 함석으로 만들어 놓았다. 원단을 쌓아 놓았는데 몇 벌인지 모른다. 수백 벌은 되어 보였다. 그렇게 쌓아 놓고 그 위에 본을 놓고 기계로 싹 돌려서 자른다. 한꺼번에 그렇게 재단을 했다. 손으로 해서 당해내겠는가? 한꺼번에 기계로 잘라버린다. 단추를 다는 사람은 계속 단추만 단다. 구멍을 뚫는 사람은 계속 구멍만 뚫는다. 그래서 쫙 돌아가서 나온다. 삼성물산에 납품하는 공장에 가 봤는데 그렇게 했다. 그래서 혼자는 저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잘 해도 못하겠다는 생각했다. 그렇게 기성복이 나오는 바람에 수동식 양복점이 다 죽어 버렸다. 처음에는 엉성했는데 갈수록 좋아졌다.
이 길은 만들수록 좋아졌다. 도로공사를 하면서 점점 좋아졌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말 사건도 나오고, 기생 라합 사건도 나오고, 이방 여자 룻의 사건도 나오고 별의 별 사건도 다 나왔다. 그런 길을 뚫을 때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는가? 강을 건너야 되고, 다리를 놓아야 되고, 또 산을 뚫어야 되고, 그런 아주 특별한 공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특별한 공사는 보통 사람이 아니고 아주 특별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런 것을 족보에 넣어놓을 수 있는가? 적어도 그리스도의 족보인데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넣어놓을 필요가 있는가? 그런데 그게 없으면 안 된다. 꼭 그게 필요하다. 길을 닦는데 강이 나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럴 때는 다른 기술자가 와야 한다. 강에 다리를 놓아서 건너가는 다른 기술자가 와야지 도로를 닦는 것 가지고는 안 된다. 다른 은혜가 와야 하고 다른 기술자가 와야 한다. 터널을 뚫으려면 또 다르다. 또 다른 회사가 와야 한다.
하나님도 그리스도가 오는 길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과 과정이 필요했다. 거기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말이고 라합이고 룻이고 심지어는 우리아의 아내도 있고 그렇게 왔다. 우리가 이것을 잘 생각해 보면 우리 안에서도 이런 일을 이루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역사만 아니고 우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길을 닦는다. 내 속에도 길을 닦아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는구나. 이런 길에서는 운동화를 신어야 되고, 저런 길에서는 구두를 신어야 되고, 이런 것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것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으니까 헷갈려서 운동화로 시작한 사람은 계속해서 운동화만 주장하게 되는 것 같다.
길이 다르니까 다른 길로 갈 때는 다른 신발을 신어야 하는 것이다. 강을 건너갈 때는 배를 타야 한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배가 없고 사공이 없으면 못 간다. 어려서 자란 우리 동네 앞이 선창가다. 배가 정박하는 곳이다. 건너 편 섬으로 가기 위해서 배가 항상 대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배가 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배가 갈 때 건너간다.
이런 것들은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안에 있는 일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사람, 형상과 모양, 흙과 생기, 남과 여, 이것은 모두 다 계획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야만 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길이 안 된다. 형상과 모양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흙과 생기가 필요하다. 또 그것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고 남과 여가 있어야 된다. 그래야 생육하고 번성한다.
이것은 알고 보면 치밀한 계획이다. 아주 완벽한 연출이고 계획이다. 우리 인생 하나가 구원을 받는 데도 우리도 알고 보면 신기한 존재들이다. 나는 지금도 생각할 때 어떻게 그런 길로 왔을까하고 생각한다. 정말 신기한 길로 왔다. 나도 모르고 남도 모른다.
나를 알던 옛날 사람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한다. 아직도 살아 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고 한다. 이미 죽었을 사람인데 그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느냐고 한다. 내 또래 친구들이 한 20명이 있었는데 다 죽고 지금은 2명만 남았다. 내가 제일 먼저 죽을 사람인데 제일 오래 살고 있다. 그것을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몰랐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있었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그 사람, 형상과 모양이라는 그 사람, 흙과 생기라는 그 사람, 남과 여로 표현된 그 사람, 이 사람 안에서 우리가 지어졌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이게 다 있다. 사람, 형상과 모양, 흙과 생기, 남과 여, 이것이 우리 인생에 다 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 사람들이 오늘 우리를 위해서, 또 모세가 있고 아론이 있고 다윗이 있다. 이 사람들은 꼭 있어야 될 사람들이다. 길을 가다 보면 길을 만드는 방법이 여러 가지니까 여러 사람들이 있어야 된다. 모세가 나는 입술도 둔하고 어찌하다고 하니까 하나님이 화를 내면서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말을 잘하는 아론이 있지 않느냐고 해서 아론이 동반자가 된 것이다. 이 사람은 통치의 모양으로 세상에 왔던 것이다. 그 사람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흔적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다 한 구속하는 사람들이다. 전쟁을 하면 군인들은 전부 모양은 다르고 소속도 다르지만 어차피 한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가 보면 다 한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이 사람들의 실재다. 지금까지 왔던 사람들이 하나의 형상이라면 예수는 실재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장막이 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표현해 놓았다. 예수 안에 이 사람들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예수 한 사람 안에는 지금까지 왔던 모든 선현들이 그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을 지으실 때 앞에 다 있다. 빛도 있고 궁창도 있고 식물도 있고 동물도 있다. 이것들이 사람 속에 다 있다. 왜냐하면 그런 과정을 거쳐서 사람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을 따로 지은 게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그런 모든 것들을 다스릴 수 있는 기능이 있다. 우리 속에도 그런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짐승이라고 무시할 수 없다. 노루같이 생겼는데 새끼를 낳고 있는데 표범이 온다. 그래서 엉겁결에 낳아 두고 도망을 쳤다. 태반에 싸인 채로 말이다. 그런데 표범이 이것을 보고 잡아먹을 것 같은데 안 잡아먹는다. 표범이 핥아서 새끼를 주머니에서 빼어낸다. 이 새끼는 자기 엄마를 못 봤고 표범 밖에는 본 일이 없으니까 표범이 자기 엄마인 줄로 안다. 그래서 젖 달라고 배 밑으로 들어간다. 표범은 젖이 없으니까 못 줄게 아닌가? 그래서 피해 다니느라 아주 난처해한다. 그런데 계속 그렇게 하니까 멀리 갖다 두고 온다. 그러면 이 새끼가 또 어미라고 찾아온다. 처음 본 게 표범이었으니까 아무 두려움이 없다. 그 새끼를 안 잡아먹는다. 그것을 보는데 저것보다 못한 사람도 많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애기를 낳아 놓고 도망 가 버리는 사람이 많다. 젖이 안 나와서 그렇지 젖이 있으면 키울 것 같았다. 짐승도 저렇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부드러울 것이라 한 입에 먹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전혀 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핥아주어 참 신기했다. 어떻게 그런 것을 촬영했는지 모르겠다.
동산에 지어진 아담은 그 전에 지어진 만물의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누구인가? 아브라함부터 쭉 내려오던 그 사람들의 실재다. 그 안에 그게 다 들어 있다. 예수는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다. 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리스도라고 불렀지 사실은 아브라함도 그리스도고 다 그리스도다. 다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이고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브라함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보고, 이삭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본다.
성령으로 잉태해서 나왔다. 지금 생각한다면 너무 안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삭을 보면 ‘아! 이런 것을 말하는구나.’ 이렇게 짐작이 간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서 자식을 낳을 수가 없게 되었고, 사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아니다. 내년 이맘 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고 갔다. 그래서 낳은 아기가 이삭이다.
이 이삭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났다는 것을 예언이고 비유다. 이삭은 사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닌 것이다. 100살에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 아브라함은 낳는다고 하더라도 사라가 99세인데 어떻게 아기를 낳겠는가? 사라를 이해할 수 없는데 그리스도를 보면 이해가 되고,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는데 사라를 보면 이해가 된다는 말이다.
성경은 과학적인 책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써 놓은 책도 아니다. 과학적인 검사를 맞을 책도 아니다. 여기서 비약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우리로서는 모르지만 비약이 가능하다. 맞니 안 맞니 산부인과적으로 계산할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산부인과가 들어가는 게 아니다. 그런데 해석이 되면 아주 은혜롭다. 우리 인생에도 그런 것이 있다. 우리 인생에도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이성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사람이 머리를 쓴다는 게 얼마나 옹졸한 것인지 모른다. 이성, 이성하지만 그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옹졸한지 모른다. 자유의지라는 것도 그것이 아니면 죽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자유의지가 아무리 커도 그것보다 큰 자유의지를 만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바둑판에서 나는 내 자유의지로 바둑을 둔다. 나는 절대로 남이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내 자유의지로 둔다. 그런데 나보다 고수를 만나면 나는 죽는지 사는지 모르고 두는 것이다. 나는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뒤로 보면 다 죽었다. 내 이성과 자유의지라는 것은 더 큰 것을 만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내 이성과 자유의지로 모든 것을 정확하게 판단한다고 잘못 오해하면 안 된다. 얼마든지 잘못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틸리히의 존재냐 비존재냐 문제를 보니까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원래 상대적인 것이다. 종교적인 비존재, 철학적인 비존재, 도덕적인 비존재,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한다. 그것들이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뚫고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까지가 비존재인지? 그것이 사람마다 다를 게 아니겠는가? 어디에 기준을 두고 이것은 비존재고 저것은 존재라고 하겠는가? 그렇게 하다보면 결국은 뭐가 되겠는가? 내 자유의지, 내 이성이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다 비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비존재 앞에서 소외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문제가 해결이 되겠는가? 좀 답답해도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지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안 된다. 답이 안 나온다.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신 사람들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요한1서에 되어 있다.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뭘 만진 것인가? 이 사람을 만진 것이다. 지금 아브라함 이후로 쭉 내려온 이 사람을 만났다는 말이다. 다말이 낳은 아들을 만났고, 라합이 낳은 아들을 만났다는 말이다. 우리는 마리아가 낳은 아들을 만난 것이다.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것이 얼마나 정확했으면 요한1서 5장에 보면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5:20)고 했다. 참 하나나이라는 말은 여호와는 거짓 하나님이라는 말이 아니고 실재적이라는 뜻이다. 실재적인 하나님,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볼 수 있는, 들을 수 있는 실재적인 하나님이라는 뜻인 것 같다. 그러니까 영생이다. 영생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 상태가 영생이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아담이 창조의 마지막이 되었듯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창조의 완성으로서 오신 첫 번째 사람이다.
신약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고, 이미 과정을 거쳐 와서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것이 신약이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가 된 이분으로 말미암아서 시작된 것이다.
구약에서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으로 시작되었다. 역사하신 것은 많이 경험했지만 보지는 못했다. 손으로 만져볼 수 없었다. 아! 여호와께서 했구나. 이렇게는 알지만 우리가 만질 수는 없었다. 광야 40년 동안은 기적의 연속이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니까 금방 바알을 섬겼다. 왜냐하면 그들이 본봐요 들은 봐요 주목하고 만진바 된 하나님이 없다. 혜택만 받았는데 가나안 땅에 가니까 자기들보다 훨씬 잘 사는 것이다. 거기는 농경문화이니까 그때 당시 상당한 문화가 있었다. 잘 산다. 그래서 광야에서 우리를 도와줬던 그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이 바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기독교인도 그런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병을 고쳐서 교회를 오게 되었다. 그러면 자기 하나님은 병을 고쳐준 하나님이다. 그런데 다음에 병이 나서 아무리 기도해도 안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디에 생불이 있는데 거기 가서 기도하면 된다고 해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가봤는데 거기서 병이 나았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 생불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우스운 일도 있다. 하나님을 그렇게 알아버리면 다음에 가면 그렇다. 어떤 사람들이 연구해 놓은 것을 보니까 중동 지방에 신들이 많은데 가장 근사한, 여호와와 가장 비슷한 신이 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바알이 가장 비슷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신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연구를 한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아담이 창조의 마지막이었듯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새 사람으로 첫 사람이다. 마지막 사람, 첫 사람 그렇게 말한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산 영, 산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라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유명한 말이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다는 것은 기능만 있지 생명이 없다는 말이다. 숨은 쉬고 있지만 이 생명 말고 그 사람을 완전히 사람 되게 할 수 있는 그 생명이 없다. 아직은 빈 그릇이나 마찬가지다. 빈껍데기, 빈 그릇이다.
자동차가 아무리 좋아도 운전사가 없으면 못 간다. 그와 마찬가지이다. 산 혼이라는 말은 기능은 다 있는데 운전사가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생명이 없는 것이다.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고 번역한다. 예수는 아담과 다른 것이다. 아담은 우리가 아무리 유전되어도 기능만 유전된다. 그런데 예수는 우리에게 유전된다면 생명주는 영이 내 안에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것이 마지막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와 연합이 없이는 그분과 같은 것을 누릴 수가 없다. 우리가 흉내 내거나 모방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다. 왜냐하면 자기를 대신하게 하려니까 모든 것을 다 맡겼다. 위임한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다. 기름 부음이다. 위임했다. 우리는 그 위임받은 그 사람과 연합해야 우리가 그 하나님을 누릴 수 있다. 이 누림을 은혜라고 한다. 은혜중의 은혜다. 우리가 옛날에 은혜가 시작될 때는 바깥에서 도움이 은혜였다. 그런데 이것이 궁극적으로 들어가면 바깥에 있는 도움만 가지고 안 되고,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 은혜다. 이것이 최종적인 은혜다.
첫 사람 아담은 산 혼 밖에 안 되지만, 마지막 사람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된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이다. 생명주는 영으로서 새 인류의 조상이 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사람이 시작되었다. 새 사람이다. 지금까지는 다 준비이고 새 사람이 시작되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무엇을 해도 다 준비뿐이다. 결혼을 해야 실제가 되는 것이다. 20살에 결혼한 사람이나 30살에 결혼한 사람이나 매한가지이다. 하나는 20년 준비해서 간 것이고, 하나는 30년 준비해서 간 것인데 준비는 어차피 준비이다. 10년 더해도 준비이고 10년 덜 해도 준비이다. 더 오래 준비한다고 결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젊은이들을 만나면 할 수 있으면 빨리하라고 한다. 늦게 해봤자 할 일도 없고 준비할 것도 없고 빨리하라고 한다. 그래야 인구정책에 도움이라도 된다. 그리고 빨리해서 빨리 아이를 낳아야 아이들이 건강하다. 지금 우리나라가 심각한 것은 인구가 자꾸 준다. 다른 이유도 있지만 늦게 결혼하니까 아기를 많이 낳지 않는다. 일찍 해야 하나라도 더 낳고 건강한 아이도 낳는다. 그래서 빨리 하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와서 내년에 한다고 하면 내년까지 언제 기다리느냐고 빨리하라고 한다. 또 요즘 아이들은 연애를 오래 하면 사고 난다. 헤어진 놈이 많다. 연애 오래 해서 잘된 사람이 별로 없다. 연애는 짧게 아쉽게 하는 게 좋다. 또 해보고 싶도록 하는 게 좋지 질력이 나면 끝나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헤어지는 것을 쉽게 생각한다.
아담 안에서 지식으로부터 시작된 인류, 지식은 흩어짐이다. 사람을 흩어지게 한다. 지식이 다 갈라지면 다른 데로 완전히 딴 사람이 된다. 똑같은 사람인데 지식이 달라지면 완전히 대화가 안 되고 다른 길로 가버린다. 지식의 최종 목표는 흩어지게 하는 것이다. 연합이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학자들이 토론하는 것을 보면 글자 하나 가지고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
목사들, 교수들, 그 사람들은 틀어지면 다시 회복할 길이 전혀 없다. 너무 세세하게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된다. 좀 무식하면 막걸리 한잔 먹고 해결하는데 너무 맑은 상태에서는 고칠 방법이 없다. 세상사람 같으면 막걸리 한잔 먹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학자들끼리는 그것이 안 된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안 된다. 무섭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으로 하나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없이는, 구속이 없이는, 우리나라는 출발도 안 된다. 아예 구속으로부터 시작해야 되지 그것이 아니고 다른 것은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로마서 3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고 한다. 이 은혜로,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의 믿음이 중요한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이다. 그 안에서 그것이 은혜다. 그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 우리가 믿음이 좋아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은혜 때문에, 그 안에서 받은 것이다.
그것을 자랑했으면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그런데 그 다음 단계가 안 넘어 가진다. 그래서 지금 못 가고 있는 것이다. 왜? 거룩하게 되어야 되는데 안 되니까 그렇다. 그것도 은혜로 되면 되는데 그것이 되는 은혜는 아예 없다. 그런데 사실은 구속의 은혜 안에 다 들어있다. 거룩하게 됨도 들어 있고, 연합도 들어 있고 다 들어 있다.
그런데 이것도 지식으로 갈라버리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하면 끝나버린다. 그리고 다시 성결케 되려고 노력을 하는데 성결케 노력한다고 되는가? 안 된다. 그러니까 연합도 불가능해져버린다. 거룩해져야 되는데 이것이 거룩해지지 않는데 어쩌겠는가.
천주교에서는 수도사들이 어떻게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겠는가? 나도 해보니까 딱 그 자리에서 안 되었다. 자격이 안 되는데 되겠는가? 그때는 그것을 자격으로 생각했으니까 안 되는 것이다. 구속이 없이 자격을 만들려니까 되겠는가? 안 된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아주 많이는 해보지 않았지만 좀 해봤는데 절대로 안 된다. 구속 안에서가 아니고는 절대로 안 된다. 배 째기 내기해도 안 된다.
수도원에 가서 앉아 있으면 잠시는 되겠지만 밥 먹고 기도만 하고 있으면 그래도 되는 것 같겠지만 사람이 원래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밥 먹고 기도만 하고 있을 때는 되는 것 같았지만 눈떠버리면 그만이지 되겠는가?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나는 하루만 좀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오늘 하루만 내가 좀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것도 안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상하네, 내가 돈 달라는 것도 아니고 세상 것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하루만 좀 예수님을 모시고 살게 해달라고 하는데 그것도 안 해주시네, 참 야속했다. 지금 생각하니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될 일이 아니다. 될 일 같으면 하나님이 안 해주시겠는가.?안 될 일이니까 안 해주신 것이다.
이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이 은혜로! 이 사람이 한 새 사람이다. 한 새 사람! 이 은혜 안에서 모든 부정이 다 사라진다. 이 은혜는 구속이다. 이 구속 안에서 모든 부정이 다 사라진다. 부정을 내가 해결할 수 없다. 우리 인간에게 들어있는 부정을 내가 끄집어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노골적이지 않으면서 자꾸 옆에서 노골적이 되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 우습다. 정녕 자매가 내 옆에 앉아 있다가 하는 말이 좀 노골적으로 해라, 솔직해라, 솔직해라,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자꾸 솔직하라고 한다. 그런데 자기는 솔직하냐 하면 자기는 솔직하지 않다. 모르니까 답답한가보다. 솔직하라고 솔직하라고 한다.
이 은혜가 없으면 인간 속에 가지고 있는 부정이 없어지지 않는다. 벌써 이탈될 때 부정을 가지고 나왔는데 그것이 참는다고 없어지겠는가? 씻는다고 없어지겠는가? 세계를 바꿔야 다른 세계로 바꿔져야 가능하지 세계를 그냥 두고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아들의 복음이다. 로마서 처음이 하나님의 복음은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 아들이 복음이다. 아들, 아들이 복음이다.
아들이 복음이라고 하면 예수가 복음이다. 이렇게만 생각하기 쉬운데 아들은 사람이다. 사람이 복음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신약 안에서 하나의 큰 전쟁은 천사냐? 인간이냐? 이 전쟁이다. 구약도 마찬가지이지만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 전쟁이다.
옛날에는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신성이 있으니까 천사는 신성이 있다. 신기가 있으니까 하나님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과 비슷한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르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냐? 이것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이것이다. 그것은 천사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조롱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아니 너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네가 하나님 아들이냐? 이 말이다.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4:5,6)고 했다. 그것이 신이 아니고 되겠는가? 인간은 안 된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내놓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야? 이 말이다.
이것이 결국은 마지막 십자가에 가서 또 다시 나타났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봐라. 사람이니까 못 내려온다. 못 내려 올 줄 알고 하는 말이다. 당연히 못 내려올 줄 알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봐.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한다. 그것이 사탄의 말이다. 군중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것은 사탄의 말이니까 이것이 전쟁이다.
예수 안에 신기가 있다는 이 문제는 심각한 문제이다. 잘 생각해야 한다. 예수는 신기가 있고 우리는 없다면 구속이 불가능하다. 예수는 신인데 우리는 신이 아니면 어떻게 구속이 가능한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제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아들이다. 하나님을 대신한다. 하나님을 표현한다. 하나님과 연합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 안에 신기가 있어서 연합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는 그냥 사람이니까 신기가 전혀 없다. 아무것도 없다. 십자가에 못 박으면 그냥 할 수 없이 죽어야 한다. 아무리 죽기 싫어도 죽어야 한다. 어쩔 수 없는 그것이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완전한 표현이 된다는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를 찾고 있느냐? 그것을 찾고 있다.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대신 대리자가 되는 것을 찾고 있다.
창조는 이것을 목표로 지었다. 그렇지 않으면 천사들이 많은데 무엇 하려고 사람을 지었겠는가? 천사들이 얼마든지 하나님을 흉내 내고 다 할 수 있는데 뭐 하러 사람을 또 지어놓고 복잡하게 하겠는가?
천사들은 능력이 사람보다 월등하게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질이 다르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 만유를 포함하기 위해서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만유가 포함된다. 사람이 아니면 만유가 포함될 수가 없다. 능력이 있다고 포함하는 것이 아니니까 본질적으로 같아야 포함이 되지, 다르면 어떻게 포함이 되겠는가?
이 은혜 안에서 우리가 염려한 그 부정은 다 사라진다. 이것이 있는데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부정이 사람에게 있는데 어떻게 연합이 된다는 말인가? 그런데 구속 안에서 이것은 다 사라져 버리고 없다. 염려할 문제가 전혀 아닌데 그것을 염려하게 된다.
아들의 복음! 알고 보면 이것은 성육신의 복음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이것이 복음이다. 사람인데,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고 사람은 사람인데 하나님과 연합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신기한 일이고 진짜 비밀한 일이다.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연합이 되었다는 이것이 복음이다. 창조, 연합, 성육신, 은혜와 실재의 충만, 이것이 복음이다.
사람이, 부정이 가득 차 있는 사람이 성육신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최종적인 은혜이다. 병을 고친 것도 은혜는 은혜이지만 하나님이 작정하신 그 은혜가 아니다. 거기까지 아직 못 온 것이다. 그냥 그것은 맛보기이다. 예수님께서 포도주도 만들어 주고 병도 고쳐준 것은 맛보기이다.
옛날의 엿 장사 맛보기처럼 엿장수들이 다니면 아주 기술적으로 얇게 떼 낸다. 맛보기 준다고 그것 하나 먹고 나면 자기 집에 가서 쓸 만한 것을 다 가지고 와버린다. 찢어진 고무신짝만 가지고 오면 되는데 아이들이 그 생각을 하겠는가? 맛보기 보고 온전한 고무신짝도 가져와 버린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맛보기 좀 먹고 그냥 몽땅 팔아서 밭에 묻힌 보화를 사면 좋은데 맛보기만 먹고 달아나 버리는 것이 많다.
창조! 창조는 뭐하려 했는가? 연합하려고 했다. 연합하며 어떻게 되는가? 성육신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와 실재다. 아주 간단하다. 복음의 노선이 다 있다. 구속, 은혜, 의롭다 함, 다 됐다. 구속 안에서 의롭다 함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면 이 믿음도 장담할 수 없다. 오늘은 믿었지만 내일은 못 믿을 수도 있다. 또 불안정하다.
그런데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우리를 의롭다 했으니까 나한테 실력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에게 은혜가 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나는 이렇지만 나는 늘 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분의 은혜가 있다. 구속 자체가 은혜다. 내가 사람의 길로 회복된다는 그 자체가 은혜다. 그리로 회복이 되어야 그 다음에 뭐가 있는 것이지 그것이 회복이 안 되고 바깥에서 아무리 해보았자 안 된다. 국적을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안 된다.
물속에서 아무리 수영을 잘하고 별 짓을 다 해도 물속에서 안 나오고 계속 있으면 저절로 죽는다. 불어 터져서 죽는다. 물이 몸에서 안 빠져나가면 죽어버린다. 물에 빠져서 제일 어려운 것이 잠이 오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수영을 잘해도 잠을 못 견뎌서 잠이 와서 죽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체온이 떨어진다. 체온이 떨어지면 잠이 오게 되어 있다.
옛날 목포 앞바다에 배가 침몰했는데 어떻게 해서 두 사람이 살았다. 둘이 궤짝 같은 것을 잡고 살아났다. 그런데 남자는 붙잡고 있다가 도저히 잠이 와서 못 견디는 것이다. 여자가 잠을 자면 죽는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되고 잠이 와서 물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그때 여자 한 사람이 살았다. 여자가 생명력이 남자에 비해 강하다. 살아서 재미있는 얘기가 있었다. 사람은 육지에 살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하고 힘쓰고 별 짓을 다 해도 죽는다. 그 여자도 오래 있었으면 죽는다. 그 한계를 못 넘으면 죽는다.
우리는 제한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그래서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제한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이 인간을 하나님이 쓰시기 원하기 때문에, 이 사람을 쓰기를 원하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람을 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생각할 때 이것은 안 되겠다 생각하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이 필요하다. 이것을 알면 내가 별것이 아니고 형편없는 인간이라도 자부심이 생긴다.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하는구나. 내가 없으면 안 되는구나. 그러면 든든한 재산이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만 알면 밭에 묻힌 보화를 얻은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이다.
한 사람 안에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이 한 사람이라는 이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은 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아닌 사람들은 거기서 내려오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그것은 예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다. 예수가 못 내려오는데 어떤 사람이 내려왔다면 예수와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못 내려오는데 예수님은 내려왔다면 관계가 없다. 그분과 우리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관계가 없으니까 어떻게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본질적은 관계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안 해주고 싶겠는가? 해주고 싶어도 안 된다.
그 생명 안으로 돌아가는 구속이 나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것은 아들이 없어도 될 수도 있다. 구약시대에 다 살았다. 그런데 구속만은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구속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유일하게 꼭 그분이 아니면 안 되는 이유는 구속 때문이다. 예수는 왜 필요한가? 구속 때문이다. 내가 해보니 그렇다. 예수 없어도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다 도와주시는데 예수 없다고 안 될 것이 없다.
나는 예수를 모를 때 이미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고 쓴 물을 달게 해주어도 구속은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 안으로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아들이 필요하다.
나는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3:16) 하는 말을 거기서 알았다. 옛날에는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을 도저히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뭘 사랑했는지 모르겠다. 혜택을 받은 것은 알지만 그것만 가지고 저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고 한다. 더군다나 그를 그 피로 제물로 주었다느니, 그 피가 아니면 속죄 받을 수 없다고 하는데 너무 나와 안 맞고 너무 멀고 내 얘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딱히 예수님 은혜나 예수님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이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죽을 자리에서 살기도 하고, 하나님 때문에 내가 궁지에 몰렸을 때에 길을 얻기도 하고, 다 하나님 때문에 그랬다. 그 하나님을 모르기는 모르지만 그렇게 도와주시었다.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못하겠다.
그런데 왜 예수가 꼭 있어야 되는가? 그것이 해결이 안 되었다. 구속을 알고 나면 예수 없으면 하나님도 안 된다.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선물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만일 나는 예수로 말미암은 구속이 없었다면 나는 하나님께 혜택은 많이 받지만 영생을 얻지는 못한다. 영생은 없다.
한 사람 안에서! 이것을 단단히 못을 박자. 그래야 6장에 들어가면 확실한 말씀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장사지내고 죽고 침례 받는다고 하는데 옛날에는 ‘함께’라는 말이 참 어려웠다. 하나님과 내가 어떻게 ‘함께’인가? 더군다나 예수님과 내가 어떻게 ‘함께’인가? 친구도 아니고 손잡고 갈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 함께, 함께, 함께 가자는 말은 하지만 요망사항이지 내가 직접 안 된다.
함께! 같은 모양으로 6장에 가면 “같은 모양으로(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롬6:5), 같은 모양으로! 주님이 진짜로 우리에게 함께 해주시기를 기도하겠다.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