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1일 목요일 <집단 상사병, 신정론의 딜레마>
[김용호] [오전 3:58] 굿모닝입니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화이팅~!!
[예레미야] [오전 8:49] 오늘도 화이팅입니다~
[정진호] [오전 11:54] 근로자의 날이라 노는 데가 많네요. 오늘도 저는 계속 돌아다녀야 해요.
[김용호] [오후 12:00] 아~ 멋진 성과 거두시길~~
[정진호] [오후 12:03] 신광은 목사님이 왜 이렇게 오래 뜸을 들일까요.
[김용호] [오후 12:07]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중인 듯한데 우리 수다를 아직 안 열어보았거나 보고서 혼란에 빠졌거나 둘 중 하나일 듯~ 막연히 이렇게 저렇게 상상만 하고 있는 어떤 것의 실체를 우리가 보여주고 있는 거지요. 상사병~ 이 한마디가 신 목사님에게는 천둥과 같이 들려야 하는데요. 상사병 집단~ 옳고 그름이 무의미해지는 거지요. 사랑만 남아 있는~~
이 일이 부모자식 간에도 안 되는 이유는 부모는 자식을 향한 상사병이 있지만 자식이 도무지 상사병이 안 걸리기 때문이고 부모도 제 정신을 차리는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집단 상사병은 이 세상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비의 극치지요^~
[정진호] [오후 12:18] 자식이 고생하는 부모에 대한 애절한 감정은 어떻게 보는 게 합당할까요? 자기를 위해 주는 사람이 잘 되어야 그게 자기 행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일까요?
[김용호] [오후 12:18] 자기 입장에서 고마운 마음~ 자기 밑 빠진 독을 채워주려 애쓰는 것에 대한 감사~ 결국 거래지요.^^ 부모에 대한 원망도 있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입장에서의 거래라는 증거입니다.
[정진호] [오후 12:20] 고생 안 하고 돈 척척 내주는 부모한테는 자식들이 그런 애절한 감정이 전혀 없지요. 거래가 맞네요. 나한테 잘해주니까 나도 잘해주고 싶은데 그게 안 될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거니까요.
[김용호] [오후 12:20] 그렇습니다. 잘 해주면 감사, 잘 안 해주면 원망~^^ 따라서 효심은 상사병이 아니지요.
[정진호] [오후 12:22] 나한테 아무조건 없이 돈을 빌려준 착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힘들게 사는걸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과 다르지 않겠네요.
[김용호] [오후 12:23] 맞습니다. 부모에게든 누구에게든 동일한 반응이 나가지요.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나가는 동일한 반응이라고 봅니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도 동일한 반응이 나가지요.
오직 예외가 자식 사랑인데 그건 생물의 본능이라고 봅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도 엄밀히 말하면 상사병이 아니라 동물적인 번식 본능이지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유지시키시기 위해 모든 생명체에게 심어주신 본능으로 봅니다.
[정진호] [오후 12:26] 그런 인간에게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시니 인간의 사랑과는 다른 사랑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네요. 인간의 사랑은 거래, 하나님의 사랑은 안 거래.
[김용호] [오후 12:26]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깊은 은밀한 곳에 칼을 던지신 거지요. 그곳에 할례의 칼날을 던지시는 겁니다.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롬2장29절
[정진호] [오후 12:28] 예수님이 사람들을 악하다고 말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한다고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데 역시 또 선악관의 충돌이네요.
[김용호] [오후 12:29] 그렇습니다. 서구 기독교가 하나님이 주신 형벌과 관련한 차원에서 계시를 해석하지만 성경은 선악관의 문제를 따지시지요. 죽음과 고통과 악에 대한 관심에서 선악관의 충돌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야 하는 거지요. 그러나 서구 기독교는 자기들이 악한 것이 문제인데 자기들이 선악을 논하고 있으니 타락하면서 획득한 선악관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도리가 없는 거지요.
[정진호] [오후 12:33] 창세기의 타락 사건으로 인간의 선악관과 하나님의 선악관이 충돌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되면 그 다음은 쉽게 풀리게 되는 건데요.
[김용호] [오후 12:34] 그렇습니다. 그것을 불순종의 문제로 보니 성경의 주제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는 거지요. 빛과 어두움의 충돌이 선악관의 충돌이란 것만 인식하게 되면 말씀하신대로 줄줄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정진호] [오후 12:37] 내가 악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하지요. 이게 전적타락을 인정하는 건데 타락의 본질을 독자적인 선악관을 가진 걸로 보는 게 아니라 불순종한 걸로만 보는 거지요.
[김용호] [오후 12:39] 그렇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황당한 믿음을 서구 기독교도 사실 똑 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주장이 그것이지요. 그 이성이 새로운 이성으로 교체되어야 하는데 말이지요.
웨슬레의 감리교가 "거듭난 이성"이라는 교리를 내세웁니다. 따라서 형식논리는 우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속 내용은 옛사람의 훌륭한 이성이지요.^^ 이성 자체는 귀한 것이지만 문제는 그 이성이 작동하는 기준입니다. 자유의지가 바로 이성에 의해 움직이니까요
우리가 새로운 지정의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더 엄밀히 말하자면 지정의가 왜곡된 기준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문제지요. motive의 문제입니다. 자기가 옳다는 고집에 더해 자기가 생존해야 한다는 고집과 자기가 번영해야 한다는 고집이 지정의를 장악하고 있는 거지요.
아담이 에덴의 모든 생명체에 이름을 붙이지요. 왕성한 지정의의 작동인데 그 지정의가 타락 이후로 자기가 옳다는 고집에 장악되고, 추방 이후에는 자기의 생존과 번영 추구에까지 장악된 거지요. 따라서 옛사람, 즉 죄인은 두 가지 올무에 잡혀 있는 존재입니다.
1. 독자적 선악관
2. 하나님의 형벌
[정진호] [오후 12:50] 자유의지가 이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이 맞네요.
[김용호] [오후 12:50] 예^^ 지성 감성 의지에 의해 움직이지요. 그런데 각 개인 안에서 지성, 감성, 의지가 또 수시로 충돌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근원을 들여다보면 참 단순한 존재지요. 엄마 품만 찾는 아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는 소리만 다양할 뿐이지요. 그런데 만물의 척도라니~ 헐^^
[한금옥] [오후 4:02] 한마디로 벌레보다도 못한 저속한.. 자기가 고상한줄 알고 최면을 걸고 사는...
[김용호] [오후 5:08] 예. 자매님 맞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재창조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으로, 자녀로 삼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네요. ㅜ.ㅜ
[김용호] [오후 7:24] 뉴스앤조이와 당당뉴스 등 몇몇 기독 언론들을 살펴보았는데 세월호 사건을 두고 신정론의 딜레마만 반복할 뿐 하나님이 내리신 형벌에 대한 시각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군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데 세상에는 왜 악이 있는가~라는 유치원 아이들 같은 소리들만 심각한 어조로 반복하고 있네요.
신정론에서 나름 천재들인 신학자들이 이 딜레마에 대한 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모델에는 다음의 6가지가 있습니다.
1. 보복모델 - 심판자 하나님
2. 계획모델 - 선한 목적을 위하여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
3. 치료모델 - 성숙을 위해 고통을 주시되 마지막에는 치료하시는 하나님
4. 연민모델 - 고통당하는 사람을 연민만 하시는 하나님
5. 대속적 고통의 모델 - 고통에 친히 참여하시되 고통을 초월하여 해방케 하시는 하나님
6. 신비적 모델 - 고통의 신비 안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형벌로 인한 인간의 고통과 환난을 선택하신 자들을 부르시는 일에 사용하시기도 하고 회개에 사용하시기도 하고 연단에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형벌 자체를 취소하시지는 않지요. 성숙한 새로운 피조물도 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하고 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형벌 안에서 고통 받으며 살다가 그냥 죽고 끝나는 것이구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형벌을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쿨하게 사용합니다. 자신이 받는 형벌이든, 이웃이 받는 형벌이든 말이지요.
위의 6가지 모델들은 모두 이미 주어진 형벌, 즉 자연 법칙과 인과관계에 의한 고통을 인류에 대한 형벌 자체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행하시는 예외적인 사건들로 보고 있습니다. 대단한 자가당착이지요. 자기들을 보호하고 자기들을 세우는 일에 완전히 정신을 빼앗긴 자들의 모습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