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삶 느린 생각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1 - 21 回 |
정치에 도덕이 빠지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니다 |
21. 행동의 현실과 전략
지난달 뉴욕타임스(8월 19일자)에는 코넬 웨스트와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웨스트는 하버드대와 프린스턴대의 교수를 거쳐 지금은 유니온신학교의 철학 및 기독교실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그간 정치 문제에 관한 여러 글과 책을 발표하였고, 진보적 정치 운동에 직접 참여해온 지식인이다. 지난 8월 10일에는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 있었던,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데모에 참가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자유와 평등이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이고, 이제는 정치 체제가 어떤 것인가에 관계없이, 인간됨의 기본 조건이라고 할 때, 인종주의적 편견으로 궁지에 몰린 흑인의 처지에 동정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에 동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미국 흑인들의 인권 운동 그것보다 웨스트의 논의에 들어 있는 핵심적인 어떤 부분이 우리에게도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논의는 보편적 인간 상황에 두루 관계된다. 그리고 그는 관심을 흑인 문제 또는 다른 하나의 문제에 한정하는 것은 문제를 어떤 한정 구역, 문제의 빈민가에 몰아넣는 일이 된다고 말한다).
인터뷰의 배경이 된 것은 최근에 계속하여 일어난 흑인들에 대한 폭력행위 사건들이다.
지난해 7월 뉴욕에서 담배를 팔고 있던 흑인이 경찰의 단속에 걸렸다가 경찰의 목 조르기로 목숨을 잃은 것이나 미주리 주 퍼거슨에서 18세의 소년이 가게에서 담배를 훔쳤다고 하여 체포되는 과정에서 경찰의 총격을 받아 사망한 것은 그러한 사건의 몇 가지 예이다. 최근의 보다 큰 사건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튼의 한 흑인 교회에서 있었던 총기난사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백인우월주의자 청년 하나가 총격을 가하여 교회의 목사를 비롯하여 9명의 목숨 빼앗았다. 웨스트가 참여한 세인트루이스의 데모는 경찰폭력과 이러한 폭력적 백인우월주의에 항의하는 것이었다.
돈 · 성공 등 이미지 지향하는 공작 증후군
이러한 폭력 사건 이외에 인터뷰의 배경이 된 것은 『검은 예언의 불꽃』과 『급진 진보주의자로서의 킹』이라는 제목의, 지난해와 올해 출간된 웨스트의 저서였다.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차별과 억압을 견디어야 했던 흑인들 사이에서 그 부당함을 밝히고 저항을 주장한 예언자들이 등장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중에도 60~70년대는 흑인인권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그때 지도적인 이념을 제공한 예언자였던 마틴 루서 킹 목사나 이슬람교로 개종해 흑인의 분리 독립을 주장했던 맬컴 X는 당대에 널리 알려졌던 사람들이다. 『검은 예언의 불꽃』의 주장의 하나는 그러한 예언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동안 흑인 그리고 소수민족의 해방운동이 잠잠했었는데 흑인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행위 사건들은 그것을 다시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의 예언자에는 웨스트도 포함될 것이다. 차별과 억압 이외에 주택 문제 등 흑인이 부딪치는 구체적인 사회 문제들을 지적하기도 하고 노예제도의 희생물이었던 흑인에 대한 전체적인 보상의 당위성을 주장하기도 하는, ‘애틀랜틱’ 지 기고가 타네히시 코츠와 같은 사람도 예언자일 것이다. 웨스트의 명단에는 그 밖에 흑인의 삶의 현실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힙합 음악가 켄드릭 라마, 오래전에 작고하였지만, 그 영향이 증대해가고 있는 색소폰 연주자 겸 작곡가 존 콜트레인도 올라가 있다.
60~70년대 이후 민권운동이 잠잠해진 것은, 다른 이유도 있지만, 흑인들의 일부가 중산계급이 되면서 스스로 자기들도 모르게 백인우월주의를 내면화한 때문이기도 하고, 또 대체로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때문이라고 웨스트는 말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삶과 행동의 기준으로서 돈과 성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중요해진 것이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내놓을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다. 웨스트는 이러한 이미지 편향을 집약하여 ‘공작(孔雀) 증후군’ 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세계에서 상실된 것은 정직성, 자기충실성, 인간의 예의 등의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에 따라 사는 것은 돈과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을 각오하는 것이다.
‘예언의 불꽃’ 은 정치 행동주의
인간행동의 윤리적이고 자족적인 기준이 상실된 것은, 웨스트의 판단으로는 ‘예언자적 불꽃’ 이 꺼져버린 것과 관계가 있다. 이 불꽃은 일단 정의를 위한 정치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동인이 된다. 동시에 웨스트는 그것을 조금 더 광범위한 정신의 힘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 그리고 “그로 하여 분노를 느끼고, 자유를 위하여 살고 죽을 각오에 이르게 하는” 정신의 힘이다. 또 달리는 그것은 “영혼 속에 타고 있는 불꽃” 이다. 그는 정의의 분노가 증오로 끝나서는 아니 된다고도 하고, 정신의 힘은 “사랑의 윤리” 에 기초하여야 한다고도 한다(여기의 사랑은 최대한으로 확대되어 동물에 대한 사랑도 포함한다. 그는 사람과 함께 사는 개와 고양이가 그 나름대로 독자적인 감성을 가진 생명체라는 것을 말하면서, 닭까지도 그러한 생명체라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고 한다).
예언의 불꽃은 정치 행동주의의 심리적 동력이면서, 그것을 초월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양심을 말한다. 웨스트는 정치행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덕적 확신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 에서 나온 행동을 마키아벨리즘의 표현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결과를 계산하지 않는 정치행동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가 정치행동이 정의의 실현 그리고 좋은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목적이 분명하고 결과를 겨냥하는 정치행동도 양심을 떠날 수 없고, 어떤 경우에는, 양심의 행동은 목적과 결과에 관계없이 행해져야 한다.
『급진 진보주의자로서의 킹』은 킹 목사의 글들을 일정한 관점에서 편집한 것인데 인터뷰에서 이 책을 두고 웨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정치 행동의 복합적 의미이다. 킹 목사가 당초에 흑인 시민권운동을 시작하였을 때 그의 소신은, “도덕의 우주가 이루는 궁륭(穹隆)은 긴 호(弧)를 그리지만, 결국 그 선은 정의로 기울게 되어 있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기우는 쪽이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 점에 대한 신념을 완전히 버리지는 아니하였다. 이에 대하여 웨스트는 좋은 도덕의 행동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믿음을 버렸다고 말한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든 아니든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정직, 인간의 도리, 자기 충실―이런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것 자체로 충분히 보상된다고 그는 말한다.
윤리적 가치가 없으면 성공해도 ‘잠깐의 일’
이것은 대화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실존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현실의 변화에 대한 희망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희망을 가지는 것, 희망을 떠맡고 그것을 밀고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한 힘의 일부가 되는 일이다. 사실상 도덕과 윤리적 소신에 따라 행동한 킹 목사도 그러한 사람이었고, 그가 역사의 정의로운 발전에 기여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웨스트의 킹 목사 선집은, 제목이 말하듯이, 그가 단순한 선의의 인간이 아니라, 투쟁의 인간이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위대함은 인간 영혼의 불꽃에서 나오는 위대함이었다.
웨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흑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혼을 잃어버리고 돈과 성공과 이미지, 즉 공작 증후군에 빠진 것이 하필 미국인에게 한정된 일이겠는가? 모든 것을 공리적 책략 속에서 계산하는 정신 습관에 철저하게 젖어 있는 것이 사회 · 정치 · 인간 일체에 대한 우리의 자세이다. 젊은이들이 스펙을 쌓고 취직 멘토링을 받고 대학의 교육이 그것에 따라 또 오로지 비슷한 외면적인 순위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것을 대표적으로 표현한다. 대학에 가는 것이나 학문하는 것을 공작의 장식을 갖추는 일로 생각하는 것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마키아벨리적 전략에 정치가 흡수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정치는 힘과 힘의 책략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 이러한 전략적 사고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정한 윤리적 도덕적 가치가 없을 때에 그것이 성공하는 것은 잠깐의 일일 뿐이다. 정직, 인간의 도리, 자기 충실이 불가능한 사회가 살만한 사회일까? 그리고 그것이 없는 현실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것일까? 윤리적 도덕적 가치는 현실을 포용하는 중요한 촉매이다. 깊은 도덕의식은 행동의 결과에 대한 깊은 고려를 포함한다. 윤리적 가치는 주어진 현실을 총체적으로-물론 인간의 삶, 생명의 의미와의 관련에서- 파악하는 수단이다.
- 중앙선데이 | 제444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5.09.13
|
소박한 삶의 뜻 알면 ‘검소한 경제학’ 도 충분히 가능 |
⑳ 알 수 없는 경제의 迷路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이론과 말을 보통 사람이 모두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를 위한 학문적 작업을 지나치게 간단하다고 여기는 발상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보통 사람의 삶에 직접적인 연관을 가진 일들은 보통 사람에게도 알 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다.
경제학 이론의 어떤 개념들은 보통사람에게도 알 수 있는 것이면서도, 아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가령, 성장이나 소비라는 말은 경제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기본이 되는 개념이다. 경제에 대한 발언에서는, 소비 위축은 우려의 대상이 되고 그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그 경우, 근검절약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전통적인 삶의 지침은 여기에 어떻게 맞아 들어가야 하는가? 근검절약의 경제학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두 개념 또는 요구의 모순은 일단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경제정책이나 이론에서 말하는 소비는 반드시 개인적 차원에서의 검소한 생활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여러 사람의 소비 활동의 총계를 검소한 생활의 요구까지를 참조한 수요의 총계를 가리킨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소비가 지배적인 가치가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검절약의 경제학. 존재할 수 있나
모든 이론에는 가치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고 막스 베버는 말한바 있다. 그리고 가치의 차이에서 사실 해석의 차이가 일어난다. 그러나 개인적 필요와 사회적 또는 집단적 필요가 상충할 때,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가치가 상충할 때, 우선하는 것은 후자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정치의 영역에서 증오와 폭력은 개인적으로는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면서 국제 관계에서는 오히려 권장되는 덕성이 되고, 이것이 행동의 규범으로서 전자에 우선한다. 경제에서도 이러한 모순관계가 있다. 거기에서도 집단적 인식론에 전제되어 있는 가치는 개인의 규범의 상충을 초월한다. 성장과 소비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이념이면서 다른 모든 개념을 부차적인 것이 되게 한다. 다만 그것은 정치에서와는 달리 다른 가치와 그에 따른 패러다임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는 최근에 국가 경제의 큰 문제에 부닥쳐 그것을 극복하는 데 큰 시련을 겪고 있다. 물론 그것은 엄청난 국가적 부채-수년 내로 그 부채 액수가 국내총생산(GDP)의 2배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하는 거대한 부채로 인한 것이다. 이 문제와 해결 방식에 대한 이론은 전제되어 있는 패러다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차이는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그리스가 빚을 진 것은 그리스를 비롯하여 유럽 여러 나라의 은행에 대한 것이었으나, 부채가 늘어남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유럽연합 (EU)의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여러 나라, 그 중에도 독일 · 프랑스 · 이탈리아 등에서 출자한 기금을 받은 때문이라고 한다.
빚을 지면 갚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채무자가 빚을 상환할 능력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채권자는 채무변제 기한을 연기해주거나 탕감해주는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2012년에 채권자들은 채무를 반으로 줄이는 데에 동의했다. 그리고 최근에 합의한 구제방안은 그 기한을 다시 한 번 연기하고 대부금을 추가로 배정하였다. 다른 곳에서 벌이는 경제 활동으로 차용금을 변제할 돈을 벌 수 있는 개인의 경우와는 달리 채무국가가 얻어내는 빚은, 국가 경제를 되살리는 데에 사용할 정도의, 채무액은 넘어가는 액수가 되어야 한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더 빌려주게 되는 돈에 대하여서 채권자는 그 조건들을 점점 더 까다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국가부채에서 가장 많은 부분은 EU국가들, 그 중에도 독일이 출자한 것이라고 한다. 갚아야 하는 것이라 하여도, 빚 갚으라는 독촉이 기쁘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그리스인들에게 채권자의 중심에 있는 독일에 대하여 반감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하여 반독일 시위가 벌어지고 과거의 침략자로서의 독일이 거론되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히틀러에 비교하는 여론이 일어난다. 우여곡절 끝에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받아들인 채권국들의 구제금융안(案)에는 사실 굴욕적인 조건들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여러 제도적 개혁에 대한 지시가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관계 EU 기관의 감독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도 있어서 그리스의 주권을 제한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독일의 전횡, 독일 제국주의에 대한 비난이 나오고, 2차대전 중 독일이 그리스에서 행한 범죄적인 일에 대한 변상을 요구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피압박 의식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느 정도까지 참으로 독일의 메르켈 총리나 그보다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였던 볼프강 쇼이블레 재무장관의 의도에 억압적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독일어에서, 그리스의 부채 위기라는 말은 슐덴크리제 (Schuldenkrise)인데, 거기에 들어 있는 말, ‘슐트(Schuld)’는 부채, 책임 또는 죄과를 의미하기도 한다. 독일어의 부채라는 말은 변제의 의무를 거의 도덕적 차원에서 생각하게 할 수 있다.
EU는 평화공동체라는 이상의 열매
심정적인 문제야 어떻든 구제책으로서의 구제금융이 그리스 경제를 되살릴 수 있을까? 구제금융은 경제를 활성화하기보다는 그리스를 보다 깊은 부채의 수렁에 빠지게 할 뿐이라는 의견들이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논평은 그러한 구제금융이 결코 그리스의 경제를 되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채권자가 내건 조건들은 주로 긴축을 강조하는 것들로서, 행정체제의 투명화 이외에, 세수 기반의 확대, 복지지출의 축소, 국유시설의 사유화 등의 제안을 포함하는데, 그의 의견으로는, 이러한 긴축 정책은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정책이 되지 못한다. 크루그먼은 대체로 말하여 케인즈주의자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의 미국 경제와 관련하여서도 세수와 지출의 균형과 국가부채의 축소를 위한 정책이 아니라, 과감한 재정, 통화정책을 통해서 경제를 촉진하고 실직문제를 포함한 여러 사회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그리스의 경우에도 이러한 적극적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요구되는데, 그리스의 경우, 근본문제는 경제 통합 또는 통화의 통합을 이루었으면서도,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EU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단독으로 그러한 정책을 시행할 수가 없다. 크루그먼의 결론은 그리스가 채무부도를 무릅쓰거나 EU 탈퇴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크루그먼의 제안이 옳은 것인가 아닌가? 7 월초 국민투표가 있기 전, 크루그먼 그리고 그와 의견을 같이하는 또 한 사람의 미국의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264명의 그리스 경제학자가 반대 성명을 낸 바 있었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또 지정학적으로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또는 EU 탈퇴가 옳지 않다는 의견을 발표한 것이나, 경제 위기의 문제를 떠나서 EU의 의의를 더 넓게 볼 때, 그것은, 1950년의 ‘슈만 선언’에서 시작한 유럽 통합운동의 정신을 망각하는 일로 보인다. EU는 경제적 통합만이 아니라 전쟁 없는 평화 공동체의 이상에서 나온 열매이다. 다만 현실정치의 혼란 속에서, 보다 높은 윤리적 의미를 가진 평화의 이상이 있었다는 사실은 쉽게 잊혀지는 것으로 보인다.
태양 전기가 보여준 그리스 회생의 빛
크루그먼 그리고 스티글리츠에 있어서 경제 활성화는 중요한 관심사이지만, 그것은 고용문제 그리고 경제적 평등의 문제에 이어져 있는 관심사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보다 큰 인간적 의미가 자리해 있다. 그들의 반(反)긴축 정책 옹호는 인간적 고려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 문제의 전체는 더욱 복잡한 것일 수 있다. 비교적 젊은 경제학자인 리처드 스미스의 저서 『녹색자본주의: 실패한 신(神)』이 올해 초에 출판되었다. 본 칼럼에서도 언급한 일이 있는 스미스는 일체의 성장 중심의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본다. 그것은 결국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종말을 가져 오게 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그의 공격 대상에는 밀튼 프리드먼과 같은 보수주의 경제학자로부터 크루그먼과 같은 진보주의 경제학자를 포함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자본주의를 적절하게 억제하고 수정함으로써, 경제적 번영과 환경 보존을 조화할 수 있다는, ‘비성장의 경제’, ‘녹색자본주의’와 같은 수정주의의 아이디어을 비판한다. 스미스의 생각으로는, 자본주의는 아무리 수정해도 경쟁 · 신상품개발 · 이윤추구의 추동력을 벗어날 수 없고 성장 지향을 벗어날 수 없다. 문제 해결은 이것을 조정하는 정치 기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공산권 몰락 이전이었더라면 스미스는 사회주의 체제와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내세우는 것은, '민주적으로 계획된 환경 사회주의 경제' 이다. 그것이 어떤 체제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이것이 오래 걸리고 실현하기 어려운 이상이라는 것은 스미스 자신도 인정한다.
그런데 새로운 기술 개발과 이상의 도움을 받는 녹색자본주의는 참으로 불가능한 것일까? 얼마 전 인터넷에는 그리스의 태양전기 운동에 대한, ‘그린피스’ 운동의 지도자 쿠미 나이두의 글이 실렸다. 그리스에 풍부한 것이 태양광인데, 2009년에서 2013년까지 있었던 태양전기 운동으로 그리스에서는 저소득층의 전기료가 현격하게 줄고, 수많은 새 직장이 만들어졌다. 그 수익은 최근에 있었던 연금 삭감액에 맞먹는다. 나이두의 글의 제목은 ‘그리스를 태양 전기화하는 것이 금융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이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반드시 비현실적인 꿈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는지 모른다.
의로움은 이웃간 바른 관계의 바탕
또 하나의 뉴스를 보태면, 지금 유럽이 부딪치고 있는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오는 난민 문제이다. 이 문제에 자극되어 반(反)난민 정당이 생기고, 국경에 담을 쌓는 정책까지가 시도된다. 독일의 경우, 2014년의 통계에 의하면, 난민 신청자 수는 20만을 넘고, 그 중 약 2만 명이 입국허가를 획득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총리 토르슈텐 알비히(사회민주당)의 발언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가 “난민 문제 해결에 예산이 아니라 인도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고 말한 것이 뉴스에 전해졌다. 독일에서 휴머니즘의 원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는 정신적 기초가 될 수 있다.
환경의 수용능력에 비하여 사람의 욕심이 과도하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한다면, 핵심적인 것은 이 욕심을 줄이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 합당한 것이 검소한 삶의 이상이다. 그 이상은 얼핏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마지못한 필요의 기율이 아니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말에,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어도 거기에 즐거움이 있고 의가 아닌 부귀는 나에게 뜬 구름과 같다 (飯蔬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其在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는 것이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소박한 삶에 수반되는 즐거움과 의로움이다. 검소한 삶은 삶의 즐거움의 근거이다. 또 중요한 것은 의로움-이웃 간의 바른 관계이다. 여기의 소박한 삶의 이상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인생지침을 말한 것이다. 이에 따른, 검소의 경제학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중앙선데이 | 제439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5.08.09
|
표절 · 메르스 사태는 일과 양심 사이에 딴 계산 끼어든 탓 |
⑲ 인간적 사회를 위해
당사자 본인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일이기에 재론하기 민망스러운 일이지만, 소설가 신경숙씨의 소위 표절 사건은 보다 복잡한 맥락 속에서 생각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표절이라고 하면, 그것은 정직성 그리고 양심의 문제에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작가의 정직성, 양심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여기에서 이것을 생각해보려는 것은 사회 속에 사는 사람의 양심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거기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대란과 같은 일도 이러한 문제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학문적 저작의 경우에 표절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표절은 학문이 추구하는 사실과 진리의 영역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업적이나 명예에 관계되는 일이다. 물론 사실이나 명제의 출전을 호도하는 것은 그것의 검증을 어렵게 하는 일이기도 하고 학문의 기본 정신을 어지럽게 하여 크든 작든 진리 추구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일이다. 학문에서 참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잘못 전하는 경우이다. 그것은 사실과 진리 추구의 공동 작업을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하는 일이기도 하고, 줄기 세포 연구에서의 증거 왜곡이 그럴 수 있듯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표절은 작품 전체에 보탬이 되는가가 문제
예술작품은 사실과 진리를 자료로 사용하지만 그러한 자료의 사실성이나 진리됨을 주장하지는 아니한다. 그렇다고 예술작품이 진리 시험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험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럴싸하다는 느낌, 그럴 수도 있다는 느낌이 일단의 예술적 진리라고 하겠는데, 그 느낌을 주지 못하는 예술작품이 좋은 작품이 될 수는 없다. 이 느낌을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의 구상력 또는 상상력이다. 그것은 작품을 일체적인 것으로 구성해내는 힘이다. 특히 서사적인 작품은 이 구상력으로써 세부적 묘사들을 하나로 종합한다. 물론 세부 사항이 그럴싸하지 않고서 전체가 그럴싸한 것이 될 수는 없다. 또 세부 사항은 전체 속에서만 그럴싸한 것이 된다.
이러한 세부와 전체의 관계는 학문 특히 과학 논의의 어떤 조건에 비교될 수 있다. 학문과 과학에서 사실 확인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지만 조금 더 추상적인 이론에 관계되는 연구에서는 사실들을 종합하는 이론의 틀 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연구는 이론과 사실의 상호 검증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의 경우에도 비슷한 상호검증이 세부와 전체 사이에 진행된다. 그리고 이 세부와 전체는 삶의 현실 그리고 그 진실 그리고 예술적 상상력의 세부와 전체를 반영한다.
표절의 경우 표절보다는 다른 작품에서 빌려온 부분을 말하는 것이지만 일단 작품의 전체에 보탬이 되는가 아니 되는가가 문제 될 수 있다. 빌려온 부분은 다른 작품의 상황을 연상하게 하여 작품의 의미를 강화하거나, 그 모방을 비판적으로 또는 풍자적으로 보게 하는 기능을 가질 수 있다. 물론 빌려 온 부분의 출처를 독자가 추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빌려온 부분을 포함하여 작품 또는 작품이 그리는 진실은 작가의 구상력에서 나와야 하고, 이 때 그것은 그려내는 진실과 완전히 일치하여 움직인다. 이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작가의 양심이다. 여기에서 일치는 다른 이해관계의 개입을 일절 허용하지 않는다. 조금 긴 우회가 되지만, 작가의 양심이 어떠한 것인가를 예를 들어 살펴보기로 한다.
예속되는 것 거부하는 ‘예술가의 길’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20 세기 서양문학에서 가장 이름난 성장소설의 하나이다. 이 소설은 제목에 나와 있듯이, 예술가의 길을 가게 되는 한 젊은이가 갖는 고민과 방황과 결심의 경과를 그려내는 것이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어떻게 독자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의 진로를 선택하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을 위한 결심에서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그 마음의 핵심에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통찰이 들어 있다. 그것은 삶의 진로만이 아니라 사람의 바른 마음가짐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성장소설의 공식대로 이 소설은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가 경험하게 되는 여러 가지 성장과정을 담고 있다. 어린 시절,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알게 되는 감각과 관능, 그 중에도 성의 유혹, 그 반대의 정신세계의 강력한 인력(引力), 고독과 가족과 교우 등의 문제를 삽화적인 이야기나 일기, 독백 등을 통해 그려 나간다.
주인공은 이러한 모든 것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독자적인 의식을 가진 개인으로 성장해 간다. 그런 가운데에도 그에게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는 큰 테두리는 가족과 종교 그리고 사회와 민족의 현실이다. 아일랜드의 젊은이로서 피할 수 없는 것은 영국의 식민지로서의 사회·정치 현실이다. 소설에서 이것이 본격적인 주제가 되지는 않지만 그것은 수시로 화제가 되고 토론의 주제가 된다. 그리고 아일랜드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에 와서도, 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에도 종교가 가장 강한 영향을 끼치는 나라이다. 가톨릭 신앙은 모든 사람의 삶과 의식에 깊이 삼투해 있다. 주인공 디덜러스는 한때 신부가 될 것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신부의 금욕적 삶과 감각적 관능적 삶의 유혹 사이에 고민하다가 결국 신부가 될 생각을 포기한다. 말할 것도 없이 가족은 주인공에게 감정적 지주이고 위안의 근거이다. 그러나 주인공에게 그것은 벗어나야 하는 관습의 굴레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이러한 크고 작은 속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물론 이것은 속박일 뿐만 아니라 삶을 지탱하는 근본적 테두리이기도 하나-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결심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는 어떠한 이데올로기, 사회적 요청 또는 가족에게도 예속되고 봉사하는 것을 거부하겠다고 한다. 그것이 예술가의 길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양심을 영혼에 녹여 재생산
그리고 디덜러스는 예술가로서 그가 하여야 할 일을 “나의 영혼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민족의 양심을 다져내는 일”이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선언은 모순되고 오만한 선언으로 들린다. 집단적 삶의 테두리의 압력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이 되고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이 주인공의 깨달음이었는데 민족의 양심을 다져내겠다는 것은 그 굴레 안으로 다시 되돌아가겠다는 것인가? 그 양심을 “창조되지 않은 민족의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19세기 말 이후만 해도 이 소설에서도 언급되는 유명한 찰스 파넬을 비롯하여 많은 자치 그리고 독립을 위한 운동가들이 있었고, 주고받는 대화에서도 정치 화제는 격정을 일으키는데, 어떻게 하여 새로운 양심을 창조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디덜러스의 선언은 그러한 양심을 주어진 대로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 녹여 재생산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은 거의 새로운 양심을 다져 내는 일이 된다. (우리 전통에서 온고지신(溫故知新) 또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수련되지 않은 자기를 내세우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현실 인식에 바치는 일에서 시작된다. 양심의 창조를 말하는 것은 “경험에 100만 번 쯤 부딪치겠다고” 말한 다음이다. 그리고 예술가의 자유를 위한 그의 결단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여러 경험과 깨달음이 선행, 수반한다. 공중을 나는 수리의 이미지를 통하여 하늘의 바람 속으로 자신이 풀려나는 것을 느끼고 마음속에 삶의 충동의 외침을 듣는 것도 그러한 경험의 하나이다. 또는 주인공은 해변의 소녀의 모습에서 삶의 현실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깨닫기도 한다. 소설에 묘사된 이러한 광경들은 그의 예술가의 자유를 위한 결단이 단순히 이념적 결단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결단은 그에게 하나의 계시(啓示)처럼 그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가리키는 조이스의 유명한 용어가 에피파니, 현현(顯現)이다. 그것은 직관적 진실 파악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디덜러스에게 그리고 조이스에게는 지적인 체험도 그러한 정신적 깨달음의 체험이 된다. 어떤 사물의 사물됨을 분명하게 인지하는 것도 그러한 체험이다. 사물의 사물됨을 알게 된다는 것은 그것을 전체성·균형·밝음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감정 체험, 지적 인식 모두가 이러한 현현의 체험으로 계시된다. 예술가의 양심이란 이러한 사물 인식이 직접적인 깨달음 또는 느낌으로 일어나게 하는 매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 다음에 디덜러스는 아일랜드를 떠날 생각을 한다.
이러한 마음의 과정에서 주목할 일의 하나는 양심의 직접성이다. 거기에는 여러 현실 인식, 자아 인식이 녹아 하나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결심에서 일체적인 원리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작품 또는 사물 자체의 진실과 양심 사이에는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지 못한다. 시장의 이익, 독자 확보, 여론, 이데올로기, 편의 등 외적인 계산이 개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다.
수익성·관료화에 오염된 의료제도
보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행동에도 그러한 양심이 작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하건대, 그 양심은 사물과 진실의 인식, 맡은 바 일과 행동을 하나가 되게 하면서, 다른 이해관계에 대한 궁리가 들어설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직접성의 원리이다. 그러면서, 작품에서와는 달리, 상상력이 크게 관여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 세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원리는 보다 직접적으로 작용한다.
최근 메르스 사태가 벌어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인데, 무엇보다도 과학적 이해가 부족하고, 신속한 협조를 위한 체제가 준비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할 수 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은 양심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일 수 있다. 또는 사회에 그것이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근착의 미국의 한 잡지(New York Review of Books, June 4-24)에는 미국 의료제도를 논한 책에 대한 서평이 실렸었다. 서평은, 원저도 그렇겠지만, 주로 인턴 레지던트 교육의 후퇴에 중점을 두고 미국의 의료제도를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비판의 핵심은 제도가 비인간화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병원 제도의 수익 지향 그리고 제도의 대규모화와 관료화가 비인간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과도한 수의 환자를 받고, 건강보험의 보상을 겨냥하여 입퇴원의 속도를 필요 이상으로 빠르게 하고, 의료기기를 사용한 과도한 진료를 실시하는 등의 일이 그에 따르는 폐단이다. 인턴 레지던트 교육의 부실화도, 병원의 이권화, 거대화, 관료화에 주요 원인이 있다. 그리하여 수련의들과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것으로 변화되었다. 동시에 환자를 돌보는 일이 인간적인 관계가 아니게 된 것도 또 하나의 부대 현상이다. 앞에 말한 과도한 의료기기 의존 진료는 수익집착에 못지 않게 조직의 비인간화의 결과다. 사람이 할 일을 기계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의료 사업은, ‘의료산업’이 되었다.
스스로의 일에 충실할 수 있는 사회돼야
이 평문을 쓴 사람은 오랫동안 의료에 종사했던 의사이다. 그는 의료제도의 비인간화가 의사로서의 그의 양심에 저촉된다고 느낀다. 그의 비판은 다분히 그의 개인적 경험에도 관련된다. 가령, 노동시간을 단축해야 한다는 요구에 따라, 수련의의 노동 시간이 일주 100시간에서 80 시간 또는 그 이하로 줄어들게 되었지만, 이것으로 하여 환자를 돌보는 일이 순번에 따라 교대 근무하는 사무가 되었다. 그리하여 환자 한 사람을 계속 돌보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서평자는, 자신의 경험으로는, 단축 된 시간의 기계화된 노동보다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간적인 관심을 가지고 돌보는 장시간의 노동이 오히려 직업적 만족감을 주었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로는,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의 의사직에는 도덕적 차원이 존재했다. 의사는 단순한 직업이라기보다는 박애(博愛)적 사명을 가진 직업이며 의료 종사자는 환자의 복지, 공적 봉사에 주력하면서 그것을 직업의 참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교육도 전문지식과 함께 그 정신을 전수하는 일이었다. 병원의 크기를 적절하게 제한하고, 환자 수도 한정하고, 의료비를 최소화하고, 자선 의료를 베풀고 빈곤한 사람에게는 무료치료를 실시하는 것이 의료활동의 관례였다. 그러나 상업주의의 침투는 이러한 정신을 유지하기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의료 전문인의 본래적 사명감을 환기하려고 노력하는 의료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평 대상이 된 책의 저자인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 의대교수나 뉴멕시코 산타페의 한 병원의 폐질환 전문의인 서평자와 같은 사람이 그러한 의료인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메르스와 관련하여 우리 의료계의 많은 사람들도 놀라운 헌신과 희생을 보여주었다. 처음의 잘못된 대책이 비인간화된 의료 체제 그리고 금전과 권력의 체제에 관련된다면, 의료인이 보여준 희생적 봉사는 일에 임하여 자기의 직업적 양심에 충실하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해야 할 일과 양심 사이에 다른 계산이 끼어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은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적 사회란 스스로의 일에 그대로 충실할 수 있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사회이다.
- 중앙선데이 | 제435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5.07.12
|
세월호 · 메르스는 우리 사회 연륜이 부족하다는 반증 |
⑱ 오늘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 메르스) 사태는 오늘의 삶에 대하여 여러 가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중 하나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하나로 묶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감염된 한 사람의 병이 100여 명으로 퍼지고, 환자 접촉이 있었던 4000여 명이 격리 상태에 들어갔다고 한다. 급격한 메르스 확산은 정부와 병원 그리고 의료 관리 체제가 잘못된 때문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이번 일과 관련하여 한국 경제가 적지 않게 후퇴하리라는 해외 언론의 보도도 있다.
좋은 정부 체제란 국민이 모두 악마라고 하더라도 그들로 하여금 법을 지키게 하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체제라는 정치적 견해(칸트)가 있다. 그것은 강압적인 통제 때문이 아니라 체제 자체의 힘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인데, 잘 짜인 체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책임 있게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악마들의 준법국가는 민주주의 체제를 논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질서 정연한 국가라고 해서 국가와 국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질서 안에서도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있어서 법의 시행 · 집행 · 준수를 매개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이 아닐 수 없다. 악마라는 말은 과장된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언급된 국가 질서와의 관련에서는, 모든 국가 성원이 책임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또는 국가나 사회의 질서는 그 안에 살아야 하는 개인의 도덕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개인들 하나하나에 의하여 지탱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사람은 약한 존재이니만큼 나쁜 체제 속에 그 책임이 오래 살아남을 수는 없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와 닮은 공황상태
알베르 카뮈의 유명한 소설 『페스트』는 작은 발병에서 시작하여 전 사회를 휩쓴 전염병 페스트로 인하여 공황상태에 빠진 알제리의 도시 오랑의 이야기이다. 소설 속의 일과 현실의 사태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메르스(MERS)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일도 비슷한 공황상태가 아닌가 한다. 여러 가지 깊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이 소설을 간단히 요약할 수는 없지만, 사태의 전개만을 보면 『페스트』에 묘사된 일들은 오늘의 메르스 사태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비슷한 것이 많다.
소설의 처음에 나오는 쥐들의 떼죽음이 전조(前兆)가 되기는 하지만, 역병이 시작되는 것은 그 사태를 회고하고 기록한 의사 류의 아파트 관리인 미셸이 고열로 고통받다가 죽게 되는 일부터다. 류는 그 원인이 페스트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으로 그것을 시장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시장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또 그 사실을 공표하는 것은 공연히 시민들을 불안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일을 묵살한다. 그러나 환자가 가속적으로 늘어나자, 전염병 환자 병동이 설치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공표문은 낙관적인 전망을 강조한다. 확산하는 페스트때문에 병상 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많은 환자들이 자택 격리 조치를 받고, 도시 전체가 출입이 금지된 역병의 옹성(甕城)이 된다. 그리하여 오랑에 왔던 사람들은, 돌아가야 할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도, 도시를 떠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 중 어떤 사람들은 비밀 루트를 통하여 도망갈 궁리를 하다가, 결국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참한 일들을 두고 떠나갈 수 없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의사로서의 자기 일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의사 류와 더불어 구조 활동에 나선다. 그러다가 페스트에 감염되어 죽기도 한다. 물론 상황이 위급한 것을 이용하여 그것을 과장된 설교의 자료로 삼고, 돈을 벌 기회로 삼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물론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구조 활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카뮈가 강조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영웅적인 인간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놓이게 된 상황에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한 인간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신들이 빠져들게 된 상황에서, 책임 있게 행동하는 인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들은 마치 순교자가 될 것처럼 스스로 떠맡은 일에 헌신한다.
심각성에 직면하고 싶지 않는 관료적 타성
카뮈가 그리고 있는 오랑의 페스트 사태가 우리의 메르스 상황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교가 부질없다고만 할 수는 없다. 처음에 사태의 심각성 인정을 보류하고자 하는 행정관리의 태도는 우리의 사태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취하는 태도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발병을 확인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고, 작게 시작하여 확대되는 일의 전개를 처음부터 예견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응 조치가 늦어지는 것은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준비 부족이란 담당자들에게 가지고 있었어야 할 역병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사태를 과장하여 시민들의 불안을 조장하지 않겠다는 것이 진심일 수 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지만 그러한 결정에는 심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사태의 심각성에 직면하고 싶지 않다는 관료적 타성이 작용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어느 쪽으로나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처음에 사태 확인과 발표를 꺼린 것은 대형 병원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것은, 수익이 모든 일의 판단과 행동 기준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환자들이 이 병원에서 저 병원으로 뺑뺑이 돌림을 당한 것도 이러한 손익 계산에 관계되는 일은 아니었을까? 뺑뺑이 돌림은 환자 자신의 계산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전염병 환자가 다른 병원에 갔었다는 것을 감추고 이곳저곳 또 여러 도시로, 고향으로 돌아다니고 하는 일은 사실의 의미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감염이야 내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그런 것인가?
우리의 병원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도 있다. 가령, 혼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 대형 병원의 병실 광경이다. 거기에서 2차, 3차 감염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피하다. 입원환자가 있으면 병문안 오는 사람들이 수시로 출입한다. 또 환자를 돌보고 뒤치다꺼리를 맡는 사람은 환자의 가족이다. 어떤 설명은 한국 사람의 두터운 가족 간의 정이 그 이유라고 한다. 그것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간호 비용을 절감하려는 의도가 끼어든 것은 아닐까? 병원에서 참으로 환자를 잘 돌보고 엄격하게 관리한다면 환자 치료에 폐가 될 정도로 가족들이 병실에 들락거릴 것인가?
나는 큰 병원에 근무하는 한 지인 의사에게 하루에 몇 사람의 환자를 보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가를 물은 일이 있다. 그의 대답은 7~8명 정도라는 것이었지만 실제 그가 대하는 환자는 그 10배였다. 지역의 소(小)병원과 대(大)병원의 관계를 규율 하는, 다른 나라들에서 보는 바와 같은 체제가 있다면, 폭주하는 병실 교통이 조금이나마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는 데에는 다시 손익 계산 문제와 군소 병원에 대한 신뢰 문제가 있을 것이다. 큰 것일수록 좋고, 높은 것일수록 좋고, 직함이 높을수록 좋은 것이 우리의 사회 문화이다. 그것은 사회 전반에 개인의 책임감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다는 사실과 관련되는 일일 것이다. 사회신뢰도가 극히 작은 곳이 우리 사회다.
최근 영국의 BBC 인터넷 채널에 나이지리아의 최대 도시 레이고스의 소방 시설에 관한 보도가 있었다. 이것은 사회의 필요와 체제 사이의 불균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다. 거기에 보도된 것에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황당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면 독재정권에 시달려온 나이지리아를 동정하게도 되고,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 형편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게도 된다. 이 보도에 의하면 레이고스에서는 유조차 화재가 빈번하다. 그로 인하여 주변의 주택들이 수십 채 씩 타고 무너지기도 한다. 소방대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인구가 2000만에 이르는 레이고스에 소방서는 13개뿐이다. 월급이 형편없이 적은 운전사는 정비가 되어 있지 않은 차를 함부로 몰다가 화재를 일으키는 수가 많다. 또 소방차는 어떤 때는 소화용 물도 싣지 않고 화재 현장으로 달려간다. 유조차에 화재가 나면 그것은 주변의 주민들에게 주변 상점을 약탈하는 기회가 된다. 어떤 때는 소방수가 화재 현장에 너무 늦게 왔다고 폭행의 대상이 되고 다른 때는 불을 너무 일찍 꺼서 상점 약탈의 기회를 놓치게 했다고 불만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것들이 사실이라면 공동체의 일과 그에 대한 책임, 정치와 행정의 체제 사이의 간격이 이보다 클 수가 없다.
질서 정연한 자유민주사회가 되는 길
물론 이러한 것들을 너무 간단히 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다른 일과 관련하여, 나는 공산권 붕괴 이후 동구권에서 지속되는 혼란에 대한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 에른스트 오토 쳄필 교수의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설명은 관대한 것이었다. 헝가리 · 체코 · 폴란드와 옛 유고 지역의 혼란상은 새로운 제도가 태어나기 위한 과도기 현상이라고 한다. 한 사회가 일정한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시행착오와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질서 정연한 자유민주사회가 등장하는 데에는 특히 그러한 조정 과정이 있어야 한다. 쳄필 교수는 이것은 아프리카나 중동의 혼란에도 해당되는 일이라고 한다. 자유와 질서의 체제를 연결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질서의 체제는 지켜야 할 것을 지키게 하는 체제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어떠한 것도 지키지 않는 것이 자유이다. 두 개가 하나가 되려면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에는 법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심성에 그것을 뒷받침하는 도덕의식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의 도덕은 자유의지의 자율에 일치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뜻으로 책임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질서가 있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 그것은 개인의 단호한 결단을 요구한다. ‘관행’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것을 보면 그러한 환경에서는, “이 일이 옳은 것인가” 물으면서 사안 하나하나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결단하여야 한다.
그러나 좋은 체제의 형성은 긴 시간을 요구한다. 구미의 이름난 대학들을 더러 돌아보고 나는 유명한 대학들이 대개는 최소한 200년 이상의 오래된 대학이라는 사실을 놀랍게 생각한 일이 있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경험한 일이지만 이번의 일에서도 우리들의 민주사회의 연륜 그리고 책임 있는 삶의 연륜이 아직은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메르스의 문제도 해결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속도와 적절성은 사회적 성숙의 속도와 일치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무책임한 일들이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책임한 사회일수록 책임을 아는 사람의 책임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 중앙선데이 | 제431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5.06.14
|
위안부 문제에 대한 분노는 미래 위한 제안에 모아져야 |
⑰ 감정의 정치, 현실의 정치
위안부 문제를 두고 한국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과 관련하여 미국에서 ‘한국 피로감’이 퍼진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리고 한국이 한 · 중· 일 관계 그리고 한 · 미 · 일 관계에서 소외되어 가고 있다는 논평이 들린다. 한 · 중 · 일의 평화적 연대가 중요한 것이라면, 그 연대를 위한 관계에서 소외된다는 것은 지금 시점에서 그렇게 큰일이 아닐지 몰라도 유감스러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소외에는 ‘한국 피로감’도 한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피로감은 현실 관련이 약하면서 되풀이되는 일에서 생기는 느낌이다.
아이들이 떼를 쓰며 칭얼댈 때 갖기 쉬운 것이 감정적 피로감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아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판단과 관계있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도 잘못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판단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돌보는 사람이 아이의 안녕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다는 증표일 수도 있다. 각도를 달리하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아이가 아이기 때문, 즉 아이가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가령 아이가 왕의 자식이라면 보모가 왕자의 칭얼댐을 모르는 채 할 수 있을까? 무엇인가에 불만을 계속 표하고 있는 것이 왕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한국 피로감’도 한국 외교 소외의 원인
위안부 문제가 사과를 요구할만한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과를 거부하거나 피해가는 경우 거기에 대한 대책이 있는 것일까? 강제할 힘이 없는데 사과의 당위성을 느끼게 할 방도가 있는 것일까? 사적인 관계라면 이 힘은 사과해야 할 사람이 마음 깊이에서 느끼는 회한(悔恨)의 힘일 것이다. 그것은 도덕적 자각에 관계된다. 이 자각은 잘못을 범한 자로 하여금 사과 요구가 나오기 전에 사과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자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사과는 힘의 관계에서 나오는 결과로, 참으로 의미 있는 사과라 할 수 없다.
물론 국가 간의 관계에서 도덕적 진정성의 동역학을 쉽게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거기에 도덕성의 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포괄적인 현실 이해의 밑에는 일정한 도덕의식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오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오늘과 미래의 현실 상황을 검토한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의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앞으로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이 진정한 것이라면 거기에는 도덕적 고려가 개입되지 않을 수 없다. 국내 정치에서도 그러하지만 국제 관계에서는 최소한, 그리고 어떻게 보면 최대한의 목표가 되어 마땅한 것은 평화이다. 평화스러운 삶의 조건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은 삶의 귀중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때 따라야 하는 규범이 도덕이다. 거꾸로 도덕적 규범은 그럴만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살아 작용하는 원리가 된다. 한 · 일 관계, 한 · 중 관계, 한 · 중 · 일 관계, 그리고 여러 국제 관계에서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는 어떻게 하여야 확보될 수 있을 것인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요소가 된다. 그러나 그것이 무게를 갖게 되는 것은 적어도 국제 관계에서는 현재와 미래의 현실에 대한 큰 물음의 일부가 될 때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한 · 중 · 일이 공동의 평화와 공동의 번영을 지향하여야 한다는 데에 합의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합의가 쉬운 것일 수는 없다. 현시점에서 한 · 중 · 일은 이해관계, 그리고 오늘의 현실과 미래의 비전을 달리 할 것이다. 다만 그러한 합의를 위한 제안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 틀 안에서 우리의 주장 또는 호소는 다른 나라들을 포함하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제안과 호소가 될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한 · 일 간 쟁점의 하나는 그것이 강제 동원이냐 인신매매냐, 동원이 정부 권력에 의한 것이냐 매춘업자들의 영업행위냐 하는 것이다. 범죄란 전통적으로 국가의 법 체제 안에서 정의되는 것이지만 2차 대전 후의 국가 관계에는 국가 주권을 넘어서 규정한 ‘전체 인간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한 서구 학자의 설명을 따르면 그것은 “법적으로 권한을 위임받은 국가 기구가 수없이 많은 다른 기구 · 단체 · 담당자 · 관리 · 사업가 · 시민의 보조를 받아 저지른 범죄” 일체를 말한다. 여기에 강간이나 성노예화, 강제 매춘 등도 포함된다. 이것은 다시 정부 권력을 돕는 모든 단체와 개인의 행위가 범죄로 정의될 수 있고 그 책임은 권력 주체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위안소가 일본군의 통제하에 있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것을 범죄 또는 범죄적인 것으로 간주하려면 책임의 문제를, 전체 인간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의 경우처럼 보다 넓게 파악하는 도덕적 비전이 있어야 한다. 전체 인간에 대한 범죄는 국제 관계에 등장한 지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개념이다. 이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국가 주권을 넘어 인간 모두를 하나의 법률 체제 안에 거두어들이는 개념이다. 이 개념에서 인간은 모두 하나의 공동체 속에 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광범위한 법과 도덕규범이 모든 사안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아니한다.
국가 권력의 강제가 있든 없든 전쟁 지역에서 위안부가 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사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인가? 전쟁과 강제의 문제를 떠나 한국과 일본에서 성에 대한 규범이 전통적으로 그 엄격성에 있어 차이가 있었다는 것도 두 나라 입장의 차이에 개입되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강제적 성격에 대하여서는 어느 쪽에서나 이제는 부정적 판단이 따를 것이다. 여성운동이 이러한 문제에 대한 여권 의식을 높였다고 할 수 있다. ‘전 인간에 대한 범죄’라는 것이 비교적 근래에 인정된 것이라고 하였지만 전쟁을 보는 눈도 시대와 더불어 달라져서 이제야 그것을 보다 넓고 높은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였다.
『전쟁론』을 쓴 카를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말에 “전쟁은 수단을 달리하여 정치(또는 정책)를 계속 추구하는 것” 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전쟁은 무조건적인 폭력과 잔학행위가 아니며 따라서 정치 목적이 이루어지면 그것을 제한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클라우제비츠의 말에는 전쟁 자체에서는 그 무자비한 수단에 어떤 한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있다. 그가 말하는 바 전쟁이 정치의 일부라는 것은 정치가 내세우는 합리적 목적을 위해서는 전쟁도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전통적으로 서구에서는 전쟁을 당연한 정책 수단으로 간주하였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이러한 통상적인 이해를 넘어 전쟁 없는 세계를 생각해보려 한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마저도 유럽 여러 나라 사이의 전쟁을 전혀 이상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서, 또는 그 자체를 규탄하지 않으면서 전쟁이 없는 체제를 구상해보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제 서양에서 대체로 전쟁을 당연한 국가 관계의 일부로 보는 심리는 많이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전쟁 중의 범죄만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범죄행위로 보는 입장도 일반화 되어가고 그것에 맞추어 ‘전 인간에 대한 범죄’와 같은 개념도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현실 파악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
필자는 일본의 전통적 전쟁관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다만 일본에는 봉건 영주들이 전쟁을 마다하지 않던 전국시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평정 상태에 이른 다음에도 일본은 무사계급이 사회의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사회였다. 거기에서 전쟁은 자연스러운 인간사의 일부로 생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비하여 우리의 전통에는 전쟁을 정치 전략의 일부로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일본에서도 2차 대전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전면 전쟁, 그리고 원자폭탄의 막대한 피해를 경험하고 난 후 전쟁에 대한 생각이 예전과 같은 것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전쟁에 대하여 우리와는 생각을 달리했고 또 그로 인하여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쟁에 따른 비인간적인 사건들에 대하여도 느낌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전쟁을 이성적 정치 수단의 일부로 본 클라우제비츠까지도 전쟁 자체의 무자비성을 시인하였다는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물론 전쟁 수행 시의 전사들의 행동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무자비성이 전쟁의 내용이 된다면 그것은 전장(戰場)에만 한정되지 않기가 쉽다. 최근 영국 BBC 방송 홈페이지에 ‘베를린의 강간’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전쟁 중에 일어난 여러 사실들이 이야기되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베를린과 독일에 진주한 소련군이 저지른 강간이다. 그 희생자는 베를린에서만 10만, 독일 전역에서 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간 이러한 사실들은 여기저기의 여러 문서에서 드러 났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밝혀진 것은 전쟁이 끝나고 7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이다. 소련군 병사였던 블리디미르 겔판트의 일기는 여기에 대한 현장 기록의 하나인데 아들이 그것을 발견하여 올해 말에야 출판될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이 BBC 기자의 글은, 규모가 달랐던 것으로 보이지만 강간이 독일에 진주한 연합국 그리고 소련에 진출한 독일군에 의하여서도 자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통의 차이나 전쟁에 따른 참혹상같은 것들이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보다 큰 현실 관련 속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과 내일의 현실이고 이 현실 파악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향해야할 미래이다. 동아시아, 또는 더 넓은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공동의 평화와 번영의 미래이다. 전통의 차이나 오늘의 이해득실의 차이는 이 미래에 대한 비전 속에서만 지양될 수 있다. 위안부 문제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분노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제안 속에 수렴되어야 한다. 그 미래는 단순히 우리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그리고 세계 전체를 포함한다. 필요한 것은 관계국들이 이러한 비전을 공유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함께 노력하는 일이다. 이 테두리에서만 위안부 문제도 힘을 얻을 수 있다.
국내외 정치, 현실 정책에 더 가까워져야
이러한 당면 문제와 그 테두리의 문제는 국내 정치에도 해당된다. 분노와 적대 감정의 격발은 우리 정치의 동력이다. 그것은 누구나 즐기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래가면 그것은 우리를 질리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정치 피로감을 갖는다면 그것은 분노와 적대 감정의 격돌이 현실 문제의 현실적 해결에 연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과 미래의 현실은 정책에 의하여 간추려진다. 최근 공무원 연금, 국민 연금을 두고 벌이는 여야와 정부 간 갈등은 국민의 삶의 현재와 미래의 삶을 두고 일어나는 갈등이다. 그것의 잘잘못에 대한 여러 시비가 있지만 적어도 그것은 우리의 전체적인 삶에 관계되는 정책의 논의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어쨌든 이제는 정치가 조금 더 현실 정책에 가까이 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것은 내외 어느 정치에나 두루 해당된다.
- 중앙선데이 | 제427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5.05.17
|
무사공평한 공적 기율 없으면 선물은 뇌물로 변질 |
⑯ 물질시대의 사회의식
1976년 미국 독립 선언 200주년 기념에 맞추어 열린 국제 학술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다. 여러 발표가 있었지만, 인상적인 일 하나는 처음으로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학자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 뒤, 그들의 대화나 발표가 반드시 이데올로기에 구애되는 것은 아니라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그 때 유고슬라비아는 티토의 통치 하에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공산국가에서 발행된 잡지를 가지고 귀국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는 하였지만, 가지고 와서 귀국 후 읽어볼 수 있었다. 서구 논문들이 실린 문예학술지와 비슷하게 자유로운 논의를 펼치고 있었다.
친구가 밥사도 ‘노’ 하는 미국 공무원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조직위원회에 참여한 미국인 친구 덕택에 나는 미 국무부 간부직원과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다. 내가 잠깐 근무하였던 미국 대학에서 알게 된 이 미국사 교수와 국무부 직원과는 동창생이어서, 점심은 단순히 옛 우정을 다지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멀리서 온 나를 끼워 준 것이었다. 점심이 끝난 다음에 국무부 직원은 친구 교수가 내려는 점심값을 내지 못하게 하였다. 공짜 점심을 먹는 것도 점심을 사는 것도 공무원의 복무 규정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친구 간의 점심도 받아먹어서는 아니 되는 미국 정부의 엄격한 규율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공공질서가 부패에 잠식되어 있다는 인상은 주지 아니한다. 물론 근년에 와서 정당 그리고 선거 자금에 기부를 제한하는 규정이 완화되어 미국의 공공질서에 금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체로는 청렴도와 투명도에 있어서 문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이것은 상당정도 위에 말한 바와 같은 공적 규율의 엄격성과도 관계가 있다고 할 것이다. 또는 역으로 이러한 규율은 사회의 도덕적 엄격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위에 말한 점심이 있었던 한 참 후, 한 국제회의에서 구 유고슬라비아의 한 지역 -슬로베니아 아니면 세르비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에서 온 교수를 만난 일이 있다. 2000년대에 와서 놀라운 일은, 한국인의 발걸음이 얼마나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지만, 90년대 초반에 벌써 이 구 유고슬라비아 대학의 교수 지도하에 박사학위 과정의 한국학생이 있었다. 이 교수는 그 학생이 한국에 다녀온다든지 할 때, 선물을 가져다주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럽다는 말을 하였다. 그 학생의 선물은 스승의 은혜에 대하여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일 뿐 어떤 숨은 의도가 들어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나는 설명하였다. 그 설명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는 설명을 완전히 납득하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 유럽인에게 공적 관계에 있어서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는 사회 관습이 아니었다.
‘김영란법’과 관련해 여러 논의가 벌어지고 있다. 필요한 것은 더 엄격한 법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적용의 법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부정 청탁이나 금품 수수의 숨은 관행의 철저한 척결 없이, 우리 사회가 보다 좋은 사회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국에서 과속 산업화가 진행되던 19세기 말 소위 ‘도금시대 (The Gilded Age)’는 부패가 만연하였던 시대이다. 그러한 부패가 극복되지 않았더라면, 미국은 정상적인 국가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금품 수수란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으로부터 유래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선물의 교환 자체는, 그것이 선의에 기초한 것인 한, 미풍양속에 속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것을 바르게 이어나갈 수 있다면,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씨앗이 될 수도 있는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청탁과 금품 수수의 엄격한 규제가 절실한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선물과 관계하여 그것이 내포하고 있던 다른 가능성을 잠깐 생각해보는 것도 무익한 일은 아닐 것이다.
마르셀 모스의 『선물론 (Essai sur le don)』은 인류학 · 사회학에서 고전적인 저서이다. (『증여론』이라는 제목의 우리말 번역이 있다.) 이것은 선물을 주고받는 일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이면서 현대 서구사회에 대한 비평을 담고 있다. 선물을 교환하는 것은 원시사회에서 상호 유대를 확보하는 사회 행위의 일부이다. 교환행위는 경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 인간적, 정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선물의 교환 관계에서 중요한 요소는 주는 것과 갚는 것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호혜적 균형은 단순히 정(情)과 선의로 하여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선물은 되돌림의 의무를 수반한다. 선물 교환의 의식으로서 대표적인 것은 북아메리카 인디안의 잔치, 특별한 기회와 명절-출생 · 결혼 · 죽음과 같은 기회에 베푸는 잔치이다. 이 경우에도 받았던 것은 기회를 잡아 다시 되돌려야 한다. 선물의 관습은, 모스가 예시하는 바로는, 옛 게르만족에도 있었던 것인데, 의무로서의 되돌림의 무거움은, ‘선물(Gift)’이라는 독일어 단어의 모순된 의미에서도 볼 수 있다. 영어에서 gift는 선물을 말한다. 독일어에서 Gift는 일차적으로는 ‘독(毒)’을 뜻하지만, ‘선물’이란 뜻도 가진다. 선물은 그것이 부과하는 보은 (報恩) 또는 반제(返濟)의 부담으로 하여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기이한 두 가지 뜻이 유래한다.
그런데 교환의 균형이 한 쪽으로 기울게 되는 일도 일어난다. 선물은 집안의 지체, 또는 위세(威勢)의 경쟁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받는 것보다 갚는 것이 커야 체면을 살릴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선물 교환은 선의와 우호의 행위보다 위세와 위신과 세력 과시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심한 경우, 잔치를 통한 잔치의 경쟁은 값비싼 물건들을 다투어 파괴하는 행사를 수반하는 일이 되기도 한다.
선물행위의 부정적 측면에 주의하지 않은 것은 아니면서도, 모스는 선물 교환 의례를 긍정적인 사회 행위의 모델로 받아들인다. 그는 이것이 사물과 인간 그리고 인간이 오래 전부터 지속해온 정상적인 사회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취한다. 이 전통적 그리고 자연스러운 인간관계에서 기본이 되는 것은 공동체의 일체성이다. 선물의 교환 관계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이러한 일체성을 다지는 일이다. 이 교환 관계에서 주고받는 선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교환은 사람들의 영혼의 유대를 상징한다. 물건도 그 나름으로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의 영혼을 나누어 간직하고 있다. 이것은 받은 선물을 가볍게 처분하지 못하는 심리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선물의 존재 방식은, 근대 공리주의 사회의 ‘냉정한 계산’에 기초한 상품의 존재 방식과는 판이한 것이다. 원시 공동체에서 선물 교환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총체적인 증여’-모든 것을 내어주는 관계이다.
독일어 Gift엔 독(毒)과 선물 두가지 의미
모스의 선물론은 원시 사회에 대한 관찰에서 나오는 것이면서도 그의 정치 노선에 의하여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장 죠레스의 중도 사회주의에 동조했다. 전체적으로 원시사회에서의 교환 관계는 삶 전체를 포괄하는 관계이다. 선물의 교환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이면서 집단 전체의 관계를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물교환만을 말하지 아니한다. 흔히 음악과 무용, 즐거운 놀이, 종교 행사 등이 거기에 포함된다. 그리하여, 모스는 원시 사회 그리고 전통사회에서의 예술 지원, 너그러운 접객 행위, 공사(公私)를 막론한 축제 지원 등 기쁨을 위한 출자를 언급한다. 이러한 것들은 근대의 ‘사회 규범의 경직성, 추상성, 비인간성’에 대비된다. 그러나 그 시대의 관점에서 모스가 강조하는 것은 선물 교환이 함축하고 있는 사회적 지원과 협동의 요소이다. 오늘의 사회의식에는 ‘자비심 · 사회봉사 · 유대감’ 등의 순수한 정서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원시사회의 선물 의례에 들어 있는 ‘자유와 의무, 관대함과 자기이익의 수호’와 같은 요소들이다. 여기의 ‘자기 이익’이라는 말은, 얼핏 보기에, 이기적인 모티프를 말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로운 증여와 반제의 의무의 균형을 상기시킨다. 사회 성원이 노동과 삶을 사회 공동체에 바쳤다면, 사회는 그에게 빚을 갚아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서 그의 이익이 빠질 수는 없다. 그 연속 상에서 사회 보장은 당연한 것이 된다. 이것은 전체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이다. 개인은 오늘의 사회 보장 제도 하에서도 자신의 삶의 이익을 위하여 노동하여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의 삶과, (노동쟁의 중의) 미불임금과 질병과 노년과 죽음’을 국가가 돌보야 한다는 것이다.
원시사회의 유풍은 오늘의 사회에도 잔존한다고 모스는 말한다. 프랑스의 시골에서 탄생 · 결혼 · 장례 등의 경조사에 촌민 전부가 참석하는 데에서도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 아이의 출생을 기념하는 잔치에 동네 사람들은 상징적으로 계란 하나씩을 가지고 간다. 일반적으로 잔치에 초대할 때, 그것이 예의 바른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도 예로부터의 유풍이다. 모스가 언급하는 옛 관습 또는 거기에서 나온 관습에는 ‘전문직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명예의식, 무사공평 원칙, 직업적 유대감’ 등도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은 공동체적 협동 의식이 현대화한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집단 규모 커지면 도둑정치체제로 변화
이러한 유풍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사회가 대체적으로는 인간적인 공감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스는 옛 선물의 인간적 협약을 상기하게 하려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또는 그 바탕으로 필요한 것은 모든 사회 활동에서 지켜야 하는 공적 기율(公的 紀律)이다. 어떤 인류학자는 소규모의 인간집단-마을이나 종족이나 부족국가 등의 규모를 넘어가면 모든 정치 체제는 결국 도둑정치체제 (kleptocracy)가 된다고 말한다. 여기의 도둑정치는 세금을 부과하는 체제까지를 포함한 것인데, 잠재적으로 정치가 이러한 체제가 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공적 기율(公的 紀律)이 없이는 모든 공적 기능 또는 인간관계는 사익의 거래 관계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선물은 뇌물이 되어버린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선물 교환의 관계는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규율을 넘어 호혜적 교환이 보다 인간적인 사회 이상을 나타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인간관계라고 해서 기율이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여러 가지 호의적인 집회-결혼식이나 장례식 또는 권력자의 출판 기념회를 보아도 순수한 인간적 감정이 얼마나 거짓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사에는 규범이 필요하다. 위에서 모스에서 인용한 무사공평 (無私公平)이라는 말은 프랑스어 ‘desinteressement(무이익성)’의 번역이다. 이것은 그 앞에서 ‘자기이익’이라고 번역한 ‘interest’를 벗어나는 태도를 말한다. 주목할 것은 자기 이익의 수호도 자기 이익을 넘어가는 무사공평한 사회의식을 배경으로 하여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규범의 경직화는 자연스러운 인간성 회복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공 영역의 규범이 확립된 다음의 과제이다.
- 중앙선데이 | 제419호 |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 2015.03.22
|
김우창(金禹昌,1937~) 고려대 명예교수 전남 함평 출생.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7년 첫 저서 『궁핍한 시대의 시인』(1973) 이후 『지상의 척도』 『심미적 이성의 탐구』 『자유와 인간적인 삶』(2007), 『기이한 생각의 바다에서』』(2012) 등을 펴냈다.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