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고미숙의 유쾌한 임꺽정 읽기
근대 이전은 구술문화의 시대다.
모든 것이 구슬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시절, 이야기는 소통의 수단이자 오락이요 예술이다.
또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출구이기도 하다.
그에 반해 우리 새디는 서사가 사라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의 능력을 망각해버렸다.
자신의 일상, 자신의 인생, 자신의 배움이 모두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것이다.
동시에 청각도 읽어버렸다.
자신의 속내와 인생역전을 멋들어지게 이야기할 줄도 모르지만,
남의 사연을 허심탄회하게 들을 줄도 모른다.
해서 남의 이야기는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엿보고,
자기 이야기는 정신과 의사나 심리상담사를 찾아가서 한다.
(...)
공부가 곧 꼬뮌적 접속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야기를 하면 판이 벌어져야 하듯이,
공부를 하려면 반드시 판이 있어야 한다.
'스승과 도반(道伴, 함께 도를 닦는 벗), 도량(道場, 도를 얻으려고 수행하는 곳)이 있는 판.
판은 넓을수록 좋다.
그 판들의 네트워크가 바로 '앎의 꼬뮌'이다. 86쪽
공부란 무엇인가?
존재와 세계에 대한 비전 탐구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무엇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아주 낯선 세계 속으로 진입하는것,
이전과는 아주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고향으로부터 떠날 수 있어야 한다.
부모와 가족, 고향과 집이라는 장소에 머물러 있는 한 존재와 세계에 대한 탐구는 불가능하다.
물론 그것은 단지 '장소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중요한 건 발원이다.
지금의 나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
지금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변이하고자 하는 치열한 열정!
그것이 내 몸과 일상을 꽉 채우게 될 때,
그때 비로소 떠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떠날 수 있는 인연이 찾아온다.
어느 날 문득 느닷없이. 87쪽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스승을 부르는 것이지,
좋은 스승이 있어서 잘 배우게 되는 건 절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곳으로 유학을 가고 주변에 스승들이 널렸어도
자기가 찾아나서지 않으면 터럭 하나만큼도 배우지 못한다. 91쪽
근대교육에서 좋은 선생이란 친절하고 자상한 안내자를 뜻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계몽의 구조이기도 하다.제자는 어린애요, 길 잃은 양이다.
선생은 어른이고 목자다.미성숙에서 성숙의 단계로 끌어내는 것이 선생의 역할이다.
고전에서는 이와 다르다. 사제는 모두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도반이다. 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