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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반역을 읽고
오르테가 이 가세트
저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1883년 출생했다. 부친은 저명한 소설가이자 언론인. 모친은 일간지 설립자의 딸. 19세에 마드리드대 철학부를 졸업하고 21세에 <천년의 공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라이프치히,뉘른베르크,무니헨,베를린,마르부르크등을 돌아다니며 수학했고 27세에 마드리드대 철학부 정교수가 되었다.
그는 스페인 문화의 자유화와 근대화를 기치로 내건 1914세대를 이끌었다. 이후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일어날 때 까지 25년간 문필활동을 벌였다. 그는 1931년 제 2공화국을 지원하고 제헌의회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나 정치에 대한 염증으로 그 길을 단념했다. 내전 후 포르투갈,프랑스,아르헨티나등으로 망명길을 떠난 후 45년 귀국했다.48년 인문학연구소를 개설하고 55년 7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대중의 반역>은 29년 한 잡지에 기고한 글을 30년(47세)에 단행본으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가제트는 프로이드와 니체,앙리 베르그송,미겧 데 우나무노,베네디토 크로체,폴 발레리,장 폴 사르트르,알베르 카뮈,토마스 만,하이데거,버르런트 러셀등 세계적인 서구 문명 해석자들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사회는 언제나 소수와 대중이라는 두 요소로 구성된 역동적 통일체’(19쪽)이라고 주장한다.인간은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자신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면서 스스로 어려움과 부담을 누적시키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아무런 부담도 지우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산다는 것이 매순간 물결을 따라 표류하는 부표 같은 것이어서,그들은 완전해지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21쪽)
저자는 19세기 프리즘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20세기 초의 유럽 사회를 분석한다. 그의 진단은 이렇다. 오늘날의 다수가-즉,대중이-‘우수하거나 개성이 있거나,자질이 있거나,선택되는’(25쪽) 소수를 억누르고 정치,사회,문화 영역에서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주체는 개별 영웅들이나 대중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를 거쳐 살아가는 당시대의 소수와 대중이 엮어내는 역동적인 조합이라고 본다. 따라서 선택된 소수와 대중이 각각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제 위치에서 제 역할을 담당하는 길, 곧 참된 도덕을 회복하는 길이 문제 해결의 진정한 길임을 외치고 있다.’(서문 11쪽)
저자는 오늘날의 대중이 혜택을 누리는 편의 시설들이 마치 자연 환경 처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 처럼 생각되지만 그 시설들을 만들기 위해 수 백년에 걸친 소수의 분투가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그 문명은 긴장을 늦추지 말고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한데 대중은 그러한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대중의 득세는 사회의 몰락으로 귀결될 것이다. 오늘날 유럽 사회에 팽배해 있는 불안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고한다.
자 언듯 듣기에 도발적인 가세트의 주장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그 속을 들여다 보자.
I. 대중의 반역
1장 대중의 출현
오늘날(저자가 살고 있는 20세기 초) 주요한 사회세력으로 대중이 출현했다. 지난 세기까지는 없었던 현상이다. 대중이란 ‘특정한 기준에 따라 자신에 대해 선악의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동일시하면서 불편함보다는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를 의미’한다.(20쪽) 그들은 ‘자신에게 아무런 부담도 지우지 않는 사람들이다. 산다는 것이 매순간 물결을 따라 표류하는 부표 같은 것이어서,그들은 완전해지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다.(21쪽) 대중은 ’모든 차이,즉 우수하거나,개성이 있거나,자질이 있거나,선택되는 모든 것을 억누른다. 모든 사람과 같지 않은 사람이나 모든 사람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따돌림을 당할 위험이 있다.(25쪽)
2장 역사 수준의 상승
대중의 출현은 2세기에 걸친 ‘진보적인 대중교육과 사회의 경제적 번영’(35쪽) 때문이다. 18세기에는 인간존재 자체가 주권을 갖는다는 의식은 소수만 갖고 있었다. 당시 대중은 개별화되어 있었고 객체이자 대상물이었을 뿐이다. 19세기는 이러한 의식이 광범위하게 퍼졌지만 권리를 피부로 깨닫지 못 했다. 20세기에 들어 평균인의 심리에 자리 잡았다.평균인은 각 시대의 역사가 움직이는 지평을 의미한다.(33쪽) 이러한 주권의식은 이전에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유희와 여가를 다수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교육과 경제적 토대가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3장 시대의 높이
대중의 출현은 20세기가 이전 세기보다 평균 생활수준이 향상되었고 그 만큼 역사수준이 상승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고 지금 이 시대가 완성체인가? 각 시대는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며 만들어 가는 과정체이다. 삶이 예측불가능성과 우연성인 것처럼 시대도 그렇다. 그래야만 시대나 삶이 진정성과 충만함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삶과 시대의 몰락 가능성을 그 내부에서 찾아내야 한다. 과거의 영광스런 문명이 대중의 탄생을 이뤘다면 그 진보의 연장선상에서 대중이 자행하는 몰락의 징후도 봐야한다. 삶의 근본적 활력은 귀족적인 풍모를 가진 소수에 의해 이뤄진다. 대중은 그들에게 복종할 때 만이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작금의 대중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귀족은 불로도식하는 세습귀족이나 상류특권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시대정신을 갖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자들이다. 저자는 우리가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이렇게 표현한다.‘다른 시대보다는 우월하지만 자기 자신보다는 열등하며, 매우견고하면서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불안해하고, 자신의 힘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하는 시대’(51쪽)
4장 삶의 확장
오늘날 삶은 ‘양적이거나 잠재적인 측면에서 전진과 확장’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이전 시대에 다수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들에게 세계는 그 안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제는 가능성으로서 지구가 세계가 되었다. 시대의 생명력은 무한대로 넓어졌다. 그러나 보다 많은 지식과 자산,기술을 가졌음에도 사람들은 목표를 잡지 못 하고 표류하고 있다. 무슨 이상을 실현해야할지 모르고 단지 이념과 관습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있다. 마르크스 사회주의뿐 아니라 진보적 자유주의도 세상은 앞으로 전진할 것이라는 확신만 세운 채 뒷짐만 지고 있다. ‘자신의 실존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취하고 그에 대해 충분한 책임을 지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끊임없이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불확실성을 느낄 것이다.’(63쪽) 백척간두 진일보의 심정으로 시대와 세상을 바라볼 때 만이 삶의 충만성을 이루어 질 것이다. 우리 시대는 ‘과거로부터 아무런 방향 제시도 취할 수 없으며,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65쪽)
5장 통계자료
‘상황과 선택이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두 요소다’(66쪽) 상황은 가능성이고 선택은 삶을 자유롭게 하기도 하고 구속하기도 한다. 자유와 구속의 향방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인간 유형이 무엇이냐에 따라 예측할 수 있다. 우리 시대는 대중이 지배하고 대중이 선택한다. ‘대중은 삶의 계획이 없이 표류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그의 가능성과 권력이 아무리 막대하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건설하지 못 한다.’(68쪽) 정부는 대중의 요구에 휘둘리고 장기적인 플랜을 세우지 못 한다. 이 것을 민주주의와 보통선거시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지 말자. 선거는 대중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대중은 소수파의 결정에 찬동하는 것일 뿐이다. 소수파가 제시한 집단적 삶의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날 횡포를 부리는 대중의 출현은 자유민주주의와 과학기술 발달에 의한 인구증가(69쪽) 때문이다. 문제는 이들에게 ‘현대적인 삶의 기술만을 가르쳤을 분 계몽시키지는 못 했다는 것.그들에게 생존수단들을 제공했지만 위대한 역사적 사명감을 심어주지 못했다는 것’(70쪽)이다.
6장 대중의 해부
시림들이 식료품 부족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빵을 요구하면서 빵집을 때려 부순다. 자신을 길러준 문명에 용의주도하게 맞서는 행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83쪽) 이러한 대중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19세기의 자유민주주의,과학적 실험,산업주의의 시도와 완성은 이전 세기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신분적 제약,경제적 압박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렇게 탄생된 대중이 시대의 징표가 되는 평균인이 되면서 20세기를 특징지우게 되었다.
오늘날 평균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 ‘..기술적.사회적으로 완벽한 세계에 살면서도 그것이 자연의 산물이지 탁월한 개인들의 천재적인 노력의 산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더구나 이 모든 편의시설이 고도의 인간 능력에 기초한 것이며 사소한 결정으로 장엄한 건물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수도 있다는 사실을..’(80쪽) ‘그들은 복지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그 복지를 낳은 원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82쪽)
7장 고귀한 삶과 평범한 삶,혹은 노력과 게으름
평범하고 게을러진 대중의 출현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19세기 세계는..가공할만한 욕구와 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경제적.육체적,시민적,기술적인 모든 차원의 강력한 수단들을 불어 넣었다. 19세기는 새로운 인간 속에 이 모든 힘을 불어넣은 뒤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평균인은 본래의 습성을 따라 자기 세계 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그 결과 우리가 목격하는 대중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강력한 대중이긴 하지만 전통적인 대중과는 달리 자기 자신 속에 틀어벅혀 자족한 채 아무 일에도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92쪽)
전통적인 대중은 경제적 신분적으로 한계와 제약를 느끼며 살았다. 상층 권위에 의존하고 또한 느끼며 살았다. 상층 권위자들은 소수이며 진정한 귀족들이다. 불로소득,기생적인 삶을 살아온 이른바 세습귀족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귀족은 고귀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고귀함은 권리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지워지는 요구와 의무로 살아간다. 자기를 스스로 강제해서 ‘더욱 복잡하고 힘겨운 새 규범을 만들어 내는’(88쪽)사람이다.
오늘날의 대중은 용감하고 우수하고 비범한 삶을 살아가는 귀족적인 소수들을 무시하고 외면한다. 이런 상황이 30년만 지속되면 이 시대는 몰락하게 된다.
8장 대중은 왜 모든 일에 폭력적으로 개입하는가
오늘날의 대중은 매사에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 전 시대의 평균인도 생각은 있었지만 자신이 ‘이론을 주장할 자질이 없다는 선천적인 한계 의식’(99쪽)을 가지고 있었다.대중이 견해와 교양을 갖는 것은 거대한 진보가 아닌가? 아니다. 진정한 견해와 교양을 갖추기 위해서는 ‘진리가 요구하는 놀이 규칙-토론의 기준이 되는 일련의 규칙’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은 이를 무시한다. 그것은 차라리 야만적인 것이다. ‘마니교도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사해보지도 않고 독설을 퍼붓는 시골마을의 신부’와 같은 것이다. 생디칼리즘과 파시즘같은 정치운동이 그렇다.
폭력은 자신의 이성과 정의를 옹호하기 위해 사전에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한 다음 안될 때,마지막으로 행사할 때 정당하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들은 폭력을 제일의 이성으로 간주한다. 우리가 세운 문명은 적과의 공존정신이 유지될 때 의미가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그 정신의 제도적 실현인 것이다.그러나 대중은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자들과의 공존은 원하지 않는다.’(106쪽)
9장 원시성과 기술
과거를 지배해야 하는 것은 바로 미래이며, 미래가 우리에게 과거에 대한 태도를 정해준다.(110쪽) 그러나 현실의 열매에 안주하고 있는 평균인은 과거가 이룩한 문명과 기술을 혁신하고 발전시키려는 사명을 잃었다. 이들은 문명 세계에 출현한 원시인이다. 고대의 원시인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처럼, 현대의 이들은 지극히 인위적인 문명의 산물을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 단적인 징표가 과학기술을 배우려는 젊은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과학의 발전은 런던,베를린,빈,파리라는 사변형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문명은 우연이 아니라 인위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지금의 의사는 과학이나 문명의 운명에 최소한의 감사와 연대도 없이 아스피린 통을 처방하고 있다.
10장 원시성과 역사
문명의 배후를 열심히 배우고 많은 경험을 하는 것,곧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역사지식은 낡은 문명을 유지.계승하기 위한 최상의 기술이다. 그것이 새로운 상황의 삶의 갈등에 적극적인 해결책을 주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시대에 범한 순진한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125쪽)
과거란 본질적으로 유령과 같다. 아무리 내동이쳐도 어김없이 되돌아온다. 따라서 과거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과거에 유의하고 과거를 고려해 처신함으로 그것을 멀리 피하는 것이다. 요컨대 역사적 상황에 대한 예민한 의식을 갖고 ‘시대의 높이에서’살아가는 것이다.(130쪽)
그러나 지금 유행하는 정치운동인 뵬세비즘과 파시즘은 대중의 즉흥적인 행동에 기반하고 역사의식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127쪽) 혁명이나 진화는 시대착오적이지 않은 역사적인 것이다. 아니 것이어야 한다.(131쪽)
11장 ‘자만에 빠진 철부지’의 시대
오늘날, 그저 그런-예전에 지배의 대상이던-대중이 세계를 지배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반성과 성찰없이 직접행동을 통해 주장을 관철하는 그들은 상속자 행세만 하려는 상속인이며 진정한 귀족이 아닌 말로만 귀족이다. 그들은 문명의 응석받이이다. 진정한 귀족은 스스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운명이란 하고 싶어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해야만 한다는 것에 있다.(143쪽) 그러나 철부지들은 그 반대다. 기원전3세기 견유학파는 자신을 만들어 준 문명을 그저 파괴하는 일만 했다. 디오게네스는 흙 묻은 신발로 양탄자를 밟고 다녔을 뿐이다. 그들은 헬레니즘의 허무주의자였다. 오늘날 파시즘은 정치적 자유가 근본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 반대운동을 하고 있다. 이들은 운명을 거스르는 철부지들 뿐이다.
12장 ‘전문화’의 야만성
우리가 이야기 하는 대중은 하나의 사회계급이 아니다. 모든 계층에서 볼 수 있는 그래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고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압도하는 종류의 인간을 말한다.(148쪽) 그 중 권력을 잡고 시대정신을 불어 넣어주는 자는 누굴까? 부르주아지다. 그 중 상위집단인 기사,의사,금융업자,교사다. 이들을 순수하게 대표하는 직종은 과학자다. 이들이 대중의 원형이다. 실험과학은 16세기 말(갈릴레오)에 시작되어 17세기 말(뉴턴)에 제도화되고 18세기 중엽부터 발전한다.(150쪽) 그 발전의 양상이 분업화,전문화다. 그래서 지금의 전문가는 엄밀한 의미에서 시대를 이끌어 갈 교양인이 아니다. 단지 자기 분야만 알 뿐이다. 그러나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듯이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귀 기울이려 하지 않고 높은 권위에 굴복하려 들지 않는 대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154쪽) 오늘날 문명의 본질과 삶의 속성을 이해하는 교양인으로서의 전문가가 너무 적다.
13장 최대의 위험은 국가
유럽은 상층권위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층 권위를 스스로 차지한다면 우수한 자가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대중으로서 우수한 자의 상층 권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158쪽) 그러나 대중은 국가를 통하여 직접지배를 하려 한다. 소수의 창조적이고 역사적 자발성을 근절하려 한다.
프랑스 혁명이후 부르주아지가 공권력을 장악하면서 국가에 가치를 부여했다. 1848년 제 2세대 부르주아 정부가 시작된 이후 진정한 혁명은 사라졌다. 그만큼 국가권력이 사회권력을 제압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국가는 문명의 산물이지만 본질적으로 국가는 한낱 기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대중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면서 사회적 자발성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있다.
무솔리니는 모든 것이 국가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진정으로 그 국가는 자유민주주의가 만든 것이다. 그런데 그가 국가를 무절제하게 사용하고 있다. 지금의 시대에 국가는 문명의 최대 위험이다.
II.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14장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지배는 침략과 다르다. 정상적인 권위 행사다. 그것은 여론에 기초해서 왕위,고관,의회,각료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176쪽) 국가는 주먹의 문제가 아니라 자리의 문제다. 국가란 결국 여론의 상태이자 균형의 상태이다. 어떤 인간,민족,동질적 집단이 주어진 시대를 지배했다는 말은 특정한 여론 체계-사상,편애,열망,목적-가 당시의 세계를 지배했다는 말과 같다.(178쪽) 활력있는 공동체는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소수가 지배한다. 다수는 지배자를 존중하고 그를 추종하며 그와 연대 책임을 지고 그의 깃발아래 열정적으로 동참하면 된다.(200쪽)
유럽은 대중이라는 평균인들이 국가를 매개로 지배되고 있다. 현재의 유럽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정치적으로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유럽에 활력을 불어 넣고 역사의 사명을 다할 것인가? 그 것은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것이다. 국가가 영원하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국가의 본질이 언어,혈통이 같고 지리적 통합성에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 특징은 국가가 성립되고 난 후 그 것을 유지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홍보되는 것 뿐이다. 국가도 역사적 산물이며 해체의 기로에 설 수 있는 건축물이다. 국가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존재한 공동체들의 한 아종이다. 공동체는 공통의 과거를 소유하기 이전에 공동체를 창조해야 했고,공동체를 창조하기 이전에 그것을 꿈꾸며 바라며 계획해야 한다.(241쪽) 그런 인식에 근거하여 유럽은 국가를 넘어 유럽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지금의 국가 단위에서 일어나는 나태와 방종,안이를 넘어설 수 있다. 삶은 창조적이어야 하고 정력적이어야 한다. 그러한 삶을 살아내려는 선각자에 의해 대중은 지배되어야 한다. ‘수준 높은 위생과 위대한 품성,그리고 존엄 의식을 불러 일으키는 끊임없는 자극체제’(199쪽)로서 유럽은 경계가 확장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럽은 대중과 국가들 사이에 끼여 몰락을 면치 못할 것이다.
15장 진정한 문제에 도달하다.
오늘날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이념-혁명주의든 반동주의든-과 집단의 문제는 ‘모든 의무는 무시하고 아무 문제의식도 없이 무제한의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260쪽)는 것이다. 도덕이란 언제나 본질적으로 어떤 것에 대한 복종의 감정이고 봉사와 의무에 대한 의식이다.(262쪽) 오늘날 보여주는 무도덕의 원인은 바로 현대의 모든 문화와 문명이 그런 믿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 속에서 자신의 기생 상태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건설하거나 축적한 것으로 살아가는 유럽의 한 부류를 지적하고자 했다.(263쪽)
가세트를 옹호하며.
그가 이야기하는 대중은 우리가 흔히 아는 국민,대중,백성,민초등등이 아니다. 대중은 저자 자신이 생각하는 부정적인 유형의 인간상을 뜻한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에 빠져 즉각 행동을 일삼는 부류를 대중이라 일컫는다. 그러한 대중은 노동자 집단에도 있고 자본가 집단에도 있으며, 정치인에게도 있고 우리 이웃들에게도 있다.
역으로 그가 우수한 자로서 소수라 하는 사람들도 이미 정해진 타고난 사람들이 아니다.역사와 문명의 발전을 이해하고 시대정신에 맞춰 스스로 지워진 의무를 다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들이 진정 귀족이다. 자신의 목을 치는 단두대를 의연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소수다. 세습귀족,불로소득 특권층은 대중이지 저자가 이야기하는 소수에 속하지 않는다. 소수는 노동자집단에도 자본가 집단에도 있다. 정치꾼들속에도 있고 우리 이웃에도 얼마든지 있다.
저자가 이야기 하는 대중과 소수는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해온 인물 유형들이다. 역사는 소수의 리더쉽과 대수의 지지와 참여로 발전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살았던 현재에서는 소수의 현명함이 무시되고 다수의 무식함이 지배하는 광기의 시대라고 본 것 같다.
그에게 대중선동정치는 문명을 파괴하는 행위로만 보였다. 파시즘이 그렇다. 그에게 비합법 폭력조직 운동은 옛날의 잘못을 되풀이 하는 몰역사적인 행위로 보였다.뵬세비즘이 그렇다. 과학기술과 산업화,대중교육의 확대가 자유로운 대중의 출현을 가능케 했지만 세계에 대한 소명의식을 심어주지 못 했다. 소위 전문가라는 계층도 너무 분업화되어 교양의 전모를 갖추지 못 했다. 그리고 아는 체하며 우쭐 대는 것은 일잔 대중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책의 내용은 그렇게 절절히 대중의 교양없음을 폭로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을 교훈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 삶이 성찰하고 분투하며 연대하고 소통하는 것이어야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현명한 소수를 구분해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하는 소수와 대중은 내 안에도 있다. 어느누가 완벽하다고 하겠는가? 다만 과정이 있을 뿐이다. 물론 과정체로서 모든 행위와 결과를 미화해서는 안되지만. 또한 상황과 선택에 따라 선과 악이 나올 수 있고,또한 어느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선이 악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한 개인의 사회적 실천이 무엇이냐에 국한해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삶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활력-배르그송이 이야기하는 vitality-을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저자의 소수를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가세트에게 배우기
그의 국가론은 명쾌하다. 역사 발전의 한 단계에서 각각의 공동체들의 요구에 의해 지금의 국가가 만들어진거지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국가의 본질은 언어와 혈통,지리적 공통성에 있지 않다는 것. 이 또한 민족 개념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이러한 그의 국가론은 지금의 국가주의가 문명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진단으로 이어졌고, 그 대안으로 유럽통합을 주장하는데 이른다.
그의 사유를 한반도 정세에 인용한다면 어떨가? 민족당위와 이념강세에서 벗어나 한반도 통일과 동북아 평화로 가는 길을 만드는 논리로 써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역사에서 반도국가의 두가지 특질인 자주성과 사대성이 이렇게 완벽하게 나뉘어진 시대가 있었을까? 자주권력과 사대권력이 북과 남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각 자의 영토에서 그 권력에 아부하는 대중으로 살지 말고 자주와 사대를 엮어 내는 소수의 사명에 복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세트를 비판하며
아무리 그래도 대중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모두는 시대의 산물이다. 대중의 그러한 물결이 없었다면 역사의 진보는 이루어졌을까? 또한 그가 이야기하는 소수는 너무 청교도적이다. 금욕적이다. 좋은 의미에서 그렇지만 그과 극은 통한다고 그 역작용도 심할 수 있다. 내부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 벌일 수 있는 폐해는 그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할 수 있다는 것. 그 것보다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 주고 동조성으로 같이 변화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지도자가 더 좋지 않을까 싶다. 하긴, 가세트가 살았던 시대는 성장의 동력과 대상이 아직은 남았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내부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 시대에 맞았겠다. 지금은 그런 시대는 아니라고 보는데...
<살아가면서 꼭 읽어야 할 서양고전>이라는 독후감에서 '대중의 반역'에 대한 평을 읽고 쓴 느낌 글- 이렇게 독해를 하고 있었네요.ㅎㅎ
총 15편의 글 중에 가장 가슴에 박힌 것은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이다. 이순신이 위대한 것은 그와 죽음을 같이 했던 수 많은 병사와 백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대중을 집중 조명하지 않았다. 영웅을 위대하게 만드는 소품으로 취급받았을 뿐이다. 20세기 들어 대중은 자유로운 시민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적 지배를 받고 있다. 왜 그럴까? <대중의 반역>은 바로 우리가 사는 산업사회,정보화사회의 대중의 모습을 분석하고 있단다. 근데 내용을 보니 우리가 사는 우리의 모습을 민낯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군중의 무리에 스며 들어 평균을 살아 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우리들. 낯이 화끈거린다. 쪽팔린다. 그러나 희망은 있는 것인가? 개인의 삶은 순간 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그러나 포기를 하고 남의 눈치를 보고 정답보다 남의 많이 쓴 답을 베껴 적어낸다. 그리고 평균점수를 보고 내 점수에 안심하고 위로받거나 불편해 한다. 우리는 절대 평가보다 상대 평가가 더 프렌들리하다. 전자는 헛풍선이 되고 후자는 긴장감을 준다. 내가 이 책을 읽고 그래도 희망을 얻기를 소망한다. 인생은 순간 순간 선택의 삶이고 거기에 우리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받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의 반역은 자멸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우리의 역사는 소수의 손에 맡기고 그들의 운명에 우리의 운명을 내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