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난마돌이 남해안을 끼고 일본쪽으로 진행중이다. 바람이 불고 검은 구름이 잔뜩 몰려있다. 열 번째 이번 여행이 은근히 걱정스러운데. 아니나 다를까. 대관령에 가까워지면서 쏟아지는 비로 주변이 희뿌연 장막에 둘러싸인 듯 컴컴하다. 숙소에 도착해서 편하게 쉬는 일만 남았다고 스스로 위안해보는데, 대관령을 넘고 이십여 분 달렸을까. 거짓말처럼 구름이 사라지고 비가 그쳤다. 햇살이 눈 부신 인사를 건넨다.
6월에 병원에 입원을 하고 치료를 받은 덕택으로 나는 기대 이상으로 아니 기적처럼 건강해졌다. 의사 선생님들은 누누이 말씀하셨다. 이것으로 다 나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아직도 부풀어있는 위험한 혈관들이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그 말씀처럼 조심조심 살아가는 중이기는 한데, 어떠한 방법으로도 끊이지 않던 기침과 가래가 사라졌다. 더불어 피로감이 줄어들었다. 몸무게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산을 오르는 일이 예전보다 덜 힘들다. 생시인가 꿈이런가. 감사합니다. 낮 동안에는 물론이고 자다가 깨어난 한밤중에도 이 말을 반복하고는 한다. 이번 여행이 내게는 남다를 수밖에. 아무 때나 나오는 기침이나 가래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마음을 졸이고는 했다. 그런 시간들이 무려 십여 년이 지나갔다. 아아 편안하고 기쁜 이번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나는 무조건 행복하였다.
딸아이 결혼이 가까워지고 있다. 반면에 떠나보내야 하는 섭섭함이 야금야금 가슴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번 딸아이와 함께였던 설악산 여행으로는 그 섭섭함을 밀어내는 일이 미진하다 싶어 다시 한번 여행을 계획했다. 이번은 삼척 쪽이다.
천곡 황금박쥐 동굴에 갔다. 석회암 동굴. 안전모 착용 필수. 기온이 낮으니 가디건 준비 . 운동화 착용. 조도가 매우 낮으므로 앞을 잘 보고 다닐 것. 총길이 1,400m의 석회암 수평 동굴로, 4~5억 년 전에 생성된 천연동굴이다. 밤에만 활동하는 황금 박쥐도 10마리 살고 있단다. 황금박쥐는 복을 의미한단다. 깊은 동굴 속에 서식한다는데 혹 만난다면 진정한 복을 받는 것이란다. 석순 석주 종유석의 신비스러운 모양새와 빛깔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까. 지하에 흐르던 물이 만들어 놓은 물결무늬도 있다. 개의 화석도 있다. 5cm 떨어진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려면 2~300년의 세월이 필요하단다. 기기묘묘한 석순과 종유석들이 이미 만나고 있기도 하지만 만남을 향해 쉬지 않고 똑똑똑 석회암 물방울을 떨구고 있다. 평균 온도가 14도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단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동굴 속에서 딸아이는 엄마는 다닐만하냐고 재차 걱정스레 물어온다. 천천히 걷고 조심하라고 내 뒤쪽을 바짝 따라다니며 안달복달이다. 괜찮다 괜찮아. 이 정도야 뭐. 식은죽 먹기지. 그래? 정말?
월요일. 하필이면 쉬는 음식점이 많다. 골목골목을 뒤져 맛집 서너 집을 허탕친 뒤에 한우탕집을 만났다. 남편과 딸은 얼큰한 해장국을, 나는 슴슴한 설렁탕을 먹었다. 한우 맞을까 싶었는데 찐 찐 한우 국물맛이다.
숙소에 도착. 방에서 넓은 바다가 훤히 보인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고 사람들이 여유롭게 모래펄을 걸어 다닌다. 전망이 좋아 일만오천 원이 추가되었다는데, 추가될 만하다. 바다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가 되어가는 동안 나를 잊는다.
한 시간 정도 쉰 다음 바닷가로 나갔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데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행객들은 너나없이 즐거운 표정이다. 우리도 나이를 잊은 채 겅중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웃음이 파도처럼 쏴아 밀려든다. 여전히 다리를 길게 나오게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딸아이는 우리의 다리를 기린처럼 만들어주었다. 딸아이가 없다면 남편과 나는 둘이서 어정거리며 그냥 심심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딸아이에게 감사한다. 딸아이를 위한 여행이라지만 아니다. 우리를 위한 여행이다.
바다를 마주하고 조금 놀다가 저녁을 먹으러 갈 계획이었다. 태풍의 영향으로 파도가 제법 힘차게 몰려왔다 몰려갔다. 엄마 아빠 바다 쪽으로 서 보세요. 바다 가까이 서서 멋진 사진을 기대하며 김치를 연발하면서 손가락을 브이로 만들어 치켜세우는데, 아뿔싸! 파도가 발목까지 쳐들어왔다. 눈 깜짝할 새다. 예상하지 못하였다. 저녁이어서 기온이 조금 낮아졌으므로 제법 물이 차가웠다. 운동화와 양말과 바지 아랫단이 젖었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딸아이가 더 난리다. 방에 들어가서 수건을 가져온다나 양말을 가져온다나 난리다. 아빠 양말을 벗겨서 짜주기도 한다. 이 정도야 뭐 괜찮다 괜찮아. 재미있는데 아무나 만들지 못할 추억 하나 만들었구먼.
경제가 하락세라더니 이자율이 급상승하는 바람에 융자금으로 집을 산 청년세대들이 난리라더니 물가가 너무 올라 살기 팍팍하다더니 라는 말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그 넓은 횟집에 오후 다섯 시인데 사람들로 꽉 차 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사람들이 계속 밀려든다. 그럴만하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이 정성스럽고 깔끔하고 맛이 있다. 이십여 가지 음식들을 천천히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배불리 먹었다. 이번에는 회를 먹었으니 다음에는 생선구이를 먹어보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밤이 되어서 기온이 꽤 내려가 있다. 바람까지 세다. 긴 팔을 입고도 추워하는 내게 남편은 자신의 바람막이를 기꺼이 내주었다. 반 팔 차림으로도 조금도 춥지 않다며 가슴을 딱 내밀고 걸어가는 씩씩한 남편, 얼마나 든든한가. 딸아이는 바람을 막아준다며 바닷가 쪽으로 서서 내 팔짱을 꼈다. 얼마나 다정한 풍경인가.
아침 햇살이 찬란하다. 촛대바위가 바라다보이는 바닷가에 들렀다. 바위들이 촛대처럼 삐죽삐죽 솟아있다. 갈매기들이 모래펄에 아침 회의라도 하는 양 모여있다. 태풍이 지나간 바다는 더없이 조용하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에 햇살이 비춰들어 은구슬을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린다. 바다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며 사진의 구도를 맞추느라 몰두 중인 날씬한 딸아이를 뒤에서 찍었다. 갈매기 서너 마리가 딸아이 머리 위에서 날고 있다. 바다와 숙녀라는 제목을 떠올렸다. 나는 숱도 없는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려 산발이지만 남편과 포즈를 취했다. 한쪽씩 팔과 다리를 들어 올린 역동적인 사진이다. 바라보는 지금도 웃음이 난다.
이사부공원. 중국의 천국의 계단만큼은 아니지만 그만큼 계단이 높아 보인다. 신라장군 이사부의 개척정신과 얼을 이어받은 가족형 테마공원으로 동해안의 아름다운 절경을 가장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물썰매장이 있어 어린이는 물론이고 가족, 친구, 연인들에게 동심을 안겨준다. 둘레길이 있어 바다를 가까이에서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또 실컷 바다를 보았다.
내가 건강하니 세상이 건강해 보인다. 내가 기쁘니 세상이 기쁘다. 내게 웃음이 넘쳐나니 딸아이도 남편도 웃음이 넘쳐난다. 이번 여행은 만사오케이! 건강하다는 것, 이보다 좋은 것은 없지 싶다. 아니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