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70〉달라이라마 미국 영접 모습에 마음 뿌듯
수도자와 국가 영수
교황 방한 천주교 위상 높아지게 해
종도들이 달라이라마 방한 발원해야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때, 교황 방문은 많은 사람들을 힐링되게 해주었고, 그 분의 존재감만으로도 감사하다. 대학에서 교양과목 수업 중 선사들의 무소유 정신이나 자비 사상을 언급할 때, 함께 예를 드는 신부님이 있는데, 이탈리아의 Francesco(1182~1226) 신부님이다. 현 교황이 이 분의 존함을 붙인 것으로 알고 있다.
13세기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카톨릭 교회 성인으로서 수도회를 창립하였고, 청빈주의로 수도 생활의 이상을 실현한 분이다. 불교 수업에 신부님을 예로 드는 데는 소납이 범종교적이고, 평화주의자라는 점을 학생들에게 보이는 일종의 과시욕구임을 고백한다.
교황 방문하는 날, 박근혜 대통령이 공항까지 나가 영접했고, 그 모습이 생방송으로 방영되었다. 소납은 그 장면을 보면서 그 옛날 중국 황제들과 오버랩되었다.
처음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이래 역경이나 불사 등 황제들의 비호가 있었다. 중국불교의 최대의 역경자는 현장이 아닌 구마라집(344~413)이다. 구마라집은 소대승 경전을 모두 한역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역경이래 중국 문화가 반영된 격의불교의 한계성이 극복되었기 때문이다. 구마라집은 귀자국 사람으로 초기불교 및 대승 경전까지 섭렵하여 인도 및 서역, 중국 일대에 명성이 자자했다.
이 무렵, 전진(前秦)왕 부견이 도안(道安)의 건의로 구마라집을 데려오기로 하였다. 왕은 여광에게 그 명을 내렸다. 여광이 귀자국을 정벌하고 구마라집을 데리고 돌아오는 중에 전진왕 부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여광은 감숙성 양주(凉州) 지역에 ‘후량국’을 세운 뒤(386), 라집을 15년 동안 모셨다. 실은 여광이 스님을 모신 것이 아니라 감금한 것이다. 여광으로서는 라집을 모시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라의 이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훗날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이 나라를 다시 세우고, 수여차례 라집을 보내줄 것을 종용했으나 보내지 않자, 결국 후량국을 멸망시키고 라집을 서안으로 모셨다. 이후부터 라집은 경전 역경을 하였다.
라집 뿐만 아니라 현장(602~664) 법사도 인도에서 돌아와 한역할 때 고종 황제의 국가적인 원조가 있었다. 그 대신 황제는 현장에게 서역에 관련된 자료를 원했는데, 이때 나온 책이 <대당서역기>이다. 뭇 역경자들이 국가적인 지원을 받았고, 그 대가로 국정을 도와주었다.
이렇게 전면에는 황제들이 불심이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승려를 기용함으로서 자신의 종교적인 이미지로 정권을 유지하고 민심을 모으는 하나의 방책이었다. 대표적인 모델이 측천무후이다. 용문 석굴 가운데 최고는 봉선사 석굴에 있는 비로자나불인데, 이 불상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하였다. 한편 무후는 스님들을 황궁으로 초청해 법문을 들었다. 여자가 황제였기 때문에 자신은 부처의 화신으로서 나라를 다스릴 수밖에 없음을 합리화시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번에 교황이 한국에 도착하는 날, 대통령과 정치 수뇌부들이 영접하는 모습을 보며 ‘티베트의 달라이라마였다면 어떠했을까’ 잠시 생각했다. 영접은 옛날 중국 황제들처럼 대통령과 정부의 이미지 쇄신을 위한 노력으로 비쳐졌다. 그런데, 다음 순간 소납의 모순점을 발견했다. 몇 년전 달라이라마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라마가 백악관에 초청되어 오바마와 대담을 나누고, 유럽 방문 때 대통령이나 총리들이 앞 다퉈 영접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인정받는 것에 마음이 뿌듯했었다. 그러니 얼마나 모순된 인간인가? 어쨌든 이번 교황 방문을 계기로 천주교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불교계도 종도들의 힘을 모아 한국 땅에 달라이라마를 모실 수 있도록 간절히 발원해보자.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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