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修羅) - 백석 민근홍 언어마을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시구연구]
♣ 수라(修羅) : 불교에서 싸우기를 좋아하는 신(神), 아수라(阿修羅). 가족 공동체를 방해하는 현실 상황을 우회적으로 표현함 ♣ 방바닥 : 가족 공동체가 해체된 현실 ♣ 어니젠가 : 어느 샌가 ♣ 싹기도 : 식기도 ♣ 가제 : 금방 ♣ 문밖 : 가족 공동체가 실현되는 공간
[핵심정리]
*주제 : 거미의 처지를 보고 떠올린 가족에 대한 그리움 *표현 : ① 구조의 반복과 변용을 통해 정서를 심화시킴 ② 대상을 의인화하여 표현
* 백석(白石, 1912.7.1∼1995)
평안북도 정주(定州)에서 출생. 본명은 기행(夔行). 오산(五山)중학과 일본 도쿄[東京] 아오야마[靑山]학원을 졸업. 1936년 시집 《사슴》을 간행하여 문단에 데뷔하였다. 방언을 즐겨 쓰면서도 모더니즘을 발전적으로 수용한 시들을 발표하였다.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착하며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8·15광복 후에는 고향에 머물렀다. 1963년을 전후하여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자에 의해 사망연도가 1995년임이 밝혀졌다.
[참고]
-백석의 작품 세계
백석의 시에 나타나 있는 가장 중요한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시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데 있다. 그의 시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과 사물들 또는 풍속과 자연의 명칭이 나오지만 이들은 결코 따로 독립되어 있는 개별적 존재가 아닌, 합일을 기다리며 모여 있거나 이미 합일된 경지에 있는 관계를 이룬다. 그런데 이 사물이나 풍속은 주로 농촌 공동체에 한정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이 시인이 인제 강점기에서 문학이 할 일을, 농촌 공동체 곧 민족적 원형을 시적으로 탐구하여 모국어로 보존하고 재생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백석은 무너진 시대 안에서의 주체적 정서와 자아를 모국어로써 견고히 유지하려 했던 시인이었고, 이러한 그의 정신은 당대의 젊은 시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 백석론- 백석 시의 민족문학사적 의의
인간의 말이라고 하는 것이 요즘처럼 그 품격을 잃어버린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말이 스스로의 품격을 잃어버리게 된 모습을 우리는 말의 타락이라고 한다. 말이란 원래 인간의 것이니 말의 타락은 곧 그 시대 그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생활. 인간정신의 타락과 다름 아니다. 이러한 말의 타락현상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장 첫 번째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식언일 것이다. 앞서 행한 자신의 말이나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다르게 말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이것은 실천보다 목적이 더 급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모든 분야에서 책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식언은 뭇사람의 도덕성을 마비시키는 현상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감언이설도 말의 타락현상 중의 하나이다. 남의 비위에 맞도록 꾸민 달콤한 말과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꾀는 말이니 식언의 앞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요, 식언 이후에도 무더기로 확산되는 현상이다. 이처럼 말의 타락현상의 하위개념들로 이어지는 것은 실속 없이 오버액션으로 떠들어대는 훤사, 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며 교묘히 둘러대는 교언, 껍질의 아름다움에만 집착하는 미사여구, 그 성질 자체가 천하고 더러운 비어, 난폭하게 내뱉어버리는 폭언, 따위라 할 수 있다. 러스킨이 말한 바, <가면을 쓴 외교관> <교활한 외교관> <표독한 독살자> 따위는 모두 이 말의 타락현상을 풍자하는 말일 것이다.
인간의 말이 요즘과 거의 버금갈 정도로 극심한 타락현상을 보였던 것은 나라의 주권을 강도 일본에게 빼앗겨 유린당하던 일제 말기가 아니었던가 한다. 전통가치를 포함한 기존의 모든 민족적 가치가 일제의 계획적 조직적 파괴로 깡그리 무너져가던 어둡고 암울한 시대에서 우리는 시인 백석(1912-?)의 민족언어를 위한 고결한 노력을 다시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당시 식민통치자들의 주된 목표는 제국주의적 규격화, 규범화, 구별화의 강압적 개편으로 한반도에서 진작부터 살아온 토착민들을 일본국민으로 동화시켜버리거나, 아예 점령지 밖으로 추방해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상당수의 기회주의적 지식인들은 일제의 정책을 고분고분 접수하여 그들만의 살길을 찾으려 했다. 그 극단적인 모습들이 일제말의 친일문인들로 표상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인 백석은 민족의 주체적 자아를 문학 쪽에서 보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활동영역을 농촌공동체의 생활과 그 정서에서 찾으려 했다. 그 무렵 도시공간에서는 이미 말의 타락현상이 극심하게 일어나 인간의식의 붕괴 및 파탄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민중들이 믿어왔던 지식인들은 참으로 그 모습이 말이 아니게 달라져서 소일본인화되어 버리고, 그들이 내뱉는 말이라곤 학병지원을 독려하는 강연, 전시체제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선무성 시국강연 따위로 분주하던 시절이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었고, 신뢰할 수 있는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농촌만큼은 제국주의자들의 극악한 농촌파괴정책에도 불구하고 혈연과 거주지로 함께 엮어지는 생활공동체의 끈끈한 유대를 여전히 갖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 백 석의 본명은 백 기행.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이다. 역시 동향인 관서 출신의 시인 김 소월과는 당시의 유명했던 사학 오산고보의 선후배 사이로 백석은 선배시인 소월을 매우 흠모하고 존경했지만, 서로 만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소월의 시에도 민요가락에 실어서 표현되는 관서지방 특유의 정서가 있지만, 백석은 소월보다 어쩌면 훨씬 더 짙게 마천령 서쪽지역인 평안도 쪽의 정서를 특이한 문체로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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