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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안창 마을로 오기까지] “나는 이 안창 마을 안 올라 올라 했어요. 내가 너무 고생도 많이 하고...자전거 끌고 짬밥 갖다 나르고, 연탄 지게 넉 장 지고 다니고...이런 내 고통, 회한이 많기 때문에 안창 마을이라 하면 회의를 느꼈는데...” 그의 말에서 안창 마을이라는 곳에 대한 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을 시작한 곳이지만 아픔 또한 너무 많아 쉽게 마주할 수 없는 곳. 그 곳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복잡한 사연이 그의 목소리에서 모두 묻어난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큰 연못 앞 고인돌 위에 좌판을 벌여 동네 주민을 상대했던 어머니를 이어 받아 지금 이씨는 마을 어귀에 자그마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다. 번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싶어 현금 지급기와 복권 기계까지 구비해 놓기도 했지만 상주인구가 적은데다 유동 인구도 없어 이제는 대부분 정리했다. 요즘은 버스를 조금만 타고 나가도 대형 마트들이 워낙 많아 운영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뭐 구멍가게도 아이지. 우리 집이니까 뭐 닫을 수가 없고 우리 동네에 마 그래도 담배나 팔고 뭐 간단하게 술이나 인자 할라고 안즉까지 이렇게 있습니다.” 이씨가 말은 편안하게 하지만 속이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예전에 규모가 꽤 컸을 때 건물들 하며 확장해 나간 역사를 자세히 설명해 준다. 무허가 건물이나마 세를 늘려가며 하나 둘 장만해 가던 재미가 컸던지 이쪽저쪽 가리키는 그의 손짓에 아쉬움이 묻어난다. 그의 아들과 딸도 아버지가 공부를 했던 범일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씨는 자신의 어릴 적 삶이 한스러워 비록 넉넉하지 않지만 자식들에게는 피아노와 컴퓨터 등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나마 방과 후 교육 등이 있어 예전에 비해 다양한 교육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의 부모님이 자신에게 바랐듯이 이씨는 자신의 아이들이 아버지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길 기대한다. 자신이 어릴 적에는 재래식 화장실이 부끄러워 친구들 데려오는 것도 잘 하지 못했었다. 아이들에게만은 할 수 있는 만큼은 좋은 환경을 주고 싶어 많이 애를 쓴다. 자연히 그의 관심은 의무 교육, 무상 급식 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세상 모든 부모들은 자식 앞에서 똑같은 마음을 가지는 법이다. “우리 안창 마을에는 문을 안 잠급니다. 뭐 가갈기 있어야 문을 잠구제.” 대부분 오래 알아온 주민들이 함께 하며 이웃집의 사소한 일까지 알아가는 정이 남은 마을. 자식들이 이사를 가자고 해도 계속 이 마을에서 살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는 어머니들이 많다. 고생도 많이 했지만 이만큼 정이 가는 터전이 흔치 않을 것 같다. 이곳에서 뛰어놀며 자유롭게 커가는 아이들이 세상에서 소외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그의 말 속에서 오롯이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