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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 교수가 영어시험 감독 |
미국유학의 시험제도와 서류준비 |
대한민국 정부가 부산에 피난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교부와 외무부 시험은 물론 미국 대사관 시험도 1953년도에는 부산에서 치러야 했다. 문교부의 역사시험은 대학 입학시험보다는 쉬운 편이다. 그러나 외무부의 영어시험은 박마리아 이화여대 교수(이기붕 국방장관, 자유당 시대의 부통령의 부인)가 시험관이었기 때문에 매우 까다로웠다. 키가 작은 편이었던 박마리아 선생은 의자에 올라서서 영문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문장을 뽑아서 읽어 주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썼다. 영어 히어링과 스펠링 테스트 등 우리 수험생들은 받아쓴 영어 문장을 한 시간 이내에 우리말로 번역을 해서 제출했다. 연락장교 시절 매일 하던 작업이어서 나는 큰 문제가 없었고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백선엽 중장이 육군 총참모장으로 있을 때 1951년12월 3일에 발부받은 신분증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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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미국 대사관의 면접시험이었다. 당시 한국은 각종 시험에 대리시험이 흥행하는 엉성한 사회구조였다. 때문에 미국 대사관에서는 미국 유학 지망자를 직접 만나서 영어실력을 구술시험으로 테스트했다. 테스트 내용은 미국 대학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영어실력이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미국대사관의 문정관은 미국유학 지망생을 한 사람씩 자기 사무실에서 면접하면서 영어 회화능력을 테스트했다. 책으로만 배운 영어, 대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배운 영어실력으로는 통과하기가 매우 힘든 영어구술 시험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레어드 선교사로부터 2년 동안 영어회화를 배웠고, 또 매주 일요일에는 영어 선생들과 함께 미국인 선교사 사택에서 영어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영어회화는 비교적 쉽게 통과했다. 그리고 6?25전쟁 3년 동안 미국 장군의 연설을 통역한 바도 있으며, 각종 미국장교들과 어울려 다니며 영어로 대화한 경험도 큰 도움이 됐다. 미국 대사관의 문정관 그레고리 헨더슨씨는 "미국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려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미국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유학생"이라고 평가하면서 나를 많이 격려해 주었다.
미군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이 동성훈장을 필자에게 달아주고 악수하는 모습. | ||
나는 미국유학 수속을 진행하기 위해 부산에서 며칠씩 묵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38도선 이북에 있는 화천북방에서 하루 걸려 부산에 내려오고, 또 하루 동안 유학수속을 진행하고 다음날 군단본부로 돌아가야 되는 매우 촉박한 일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당시에 미군 고문단에서 운행하는 미공군 항공기가 춘천에서 출발해 부산에 왕복하는 편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맞춰 하루에 수속절차를 끝내야했다. 한국의 법무부에서는 해외여권을 받기위한 신원확인 서류를 요구했다. 법무부의 담당 과장은 내 서류를 한번 훑어보더니 "오늘은 결재하기가 매우 힘드니까 내일 찾으러 오라"고 말했다. 나는 38선 넘어서 전방으로 오늘 밤에 돌아가 내일 아침조회 때 한국군 장교와 미군장교들에게 브리핑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통사정을 했다. 이런 직무 때문에 부산에서 하루를 묵을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간
훈장 수상후 찍은 기념사진. | ||
곡하게 말했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실망하고 나오는데 과장 옆에 앉아있던 직원 한사람이 따라 나오면서 나의 귀에 대고 한마디를 했다. "양담배 한 보루만 주시면 오늘 될 터인데 왜 그러시는 겁니까?"
나는 대학에 다니다가 육군 연락장교 후보생 훈련을 대구에서 받고 38도선 이북인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와이로(요사이 말하는 급행료)' 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유학 수속을 할 때, 정부기관에 출입할 때는 반드시 장교 복장을 하고 출입 했다. 그것은 신사복이 한 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대한민국 정부의 일원으로서 잘 봐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선에서 고생하는 군인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와이로(뇌물)를 바치라고 하다니' 하는 생각에 울분이 치솟았다. 그래도 뇌물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할 수 없이 법무부 계통에서 근무하는 외사촌형에게 전화를 해서 그의 도움으로 그날 겨우 수속을 마칠 수 있었다.
6·25전쟁 중에는 물론이고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의 전후복구사업이 시작됐을 때 한국 정부의 공무원들이 얼마나 부패해 있었는지, 한마디로 '부패공화국' 이라고 미국의 언론은 보도한바 있다. 해외유학 수속을 하는 과정에서 신원증명서를 받는 데도 뇌물을 바쳐야 했고, 여권 수속을 하는 데도 몇 번씩 뇌물을 주고, 심지어는 유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시험 날짜를 확인하는 데도 뇌물을 바치기도 했다. 어떤 유학생은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한 부패천국이다. 이런 나라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라며 부산항을 떠났다는 일화도 있다.
나는 1953년 9월 5일 법무부 정보국장으로부터 해외유학 수속 완료 증명서를 받았다. 그리고 외무부에 가서 여권을 받았는데 나의 여권은 1953년 8월 26일에 변영태 외무장관의 이름으로 발부됐다. 유효기간은 1956년 2월 26일까지로 기재돼 있었다. 3년 8개월의 여권기한이었던 셈이다. 4년간 공부를 하려면 기한 만료 6개월 전에 뉴욕의 한국총영사관에 가서 다시 여권 연장신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60년 전에 받은「대한민국 해외여행권」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아래 사진 참조). 1956년부터는 매년 연기신청을 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1957년 2월21일부터 1960년 2월 21일까지 매년 뉴욕총영사관의 남궁련 총영사가 서명했던 여권을 아직도 나는 보관하고 있다(사진 참조). 이런 복잡한 수속절차를 끝내고 미국 대사관 영사과에서 입국사증(Visa)을 받은 후 1953년 9월21일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정부로부터 발급받은 나의 유학 무렵 여권 사진. | ||
내가 1952년 육군 제2군단 정보처 (G-2)에 복무할 때 신임 참모장으로 부임해 온 김웅수 장군에 관한 이야기는 지난 14호에 소개한 바 있다. 김 참모장은 매우 우수한 장군으로 실력 있는 엘리트 장군(지장) 이라고 우리는 불렀다. 그는 우리들 연락장교를 가리켜 한국군 창건에 공헌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응분의 대우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대부분은 대학 졸업생 아니면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출신으로서 전쟁 중에 연락장교로 입대했기 때문에 문관취급만 당하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하여 김 장군은 나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동성훈장을 추천한 결과 육군본부와 미군 제8군사령부는 나에게 미국 동성훈장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벤플리트 미군 제8군사령관이 한국을 떠나기 전 1953년 3월 제2군단 본부를 방문하는 기회에 나에게 동성훈장을 수여했다(벤플리트 미8군 사령관이 나에게 동성훈장을 달아주는 사진을 나는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위 사진 참조). 미군에게서 받은 동성훈장은 나의 미국 유학 길을 열어준 하나의 큰 동력이었던 것이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