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1-6
행동하는 신앙인 / 이용호 목사
우리에게 소개되는 오바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사람이면서도 아주 큰 감동을 주는 사람입니다.
오바댜의 신분은 이스라엘왕 아합시대의 궁내대신입니다. 우리나라의 문화관광부 장관 정도되는 직책도 되고 살림을 맡아서 하는 행자부장관 역할도 됩니다. 또 선지자는 아니면서 한 사람의 관리로서 사회인이고 평신도이기도 합니다.
오바댜가 살던 시대는 대단히 악한 시대입니다. 그가 모시고 있던 아합왕은 가장 악한 왕이요 폭군입니다. 아합은 많은 선지자를 해쳤으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극심한 우상숭배를 했던 왕입니다.
오바댜는 최악의 시대에 최악의 왕을 모시고 있는 궁내대신이지만 우리에게 빛나는 신앙인으로 다가옵니다. 바알숭배자 밑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오바댜는 그런 극단적인 환경 가운데서도 성경은 희생을 지불하는 대단한 의인으로 소개합니다. 시대적으로 환란과 기근이 있는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선지자들을 죽이는 시대에 오바댜가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경외하는 자란 주석가들이 '믿는 자' ' 여호와께 순종하는 자' '여호와만 두려워하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오바댜를 추월하자
오바댜가 한 일을 열왕기상 18장4절에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에 오바댜가 선지자 일백인을 가져 오십인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었더라"고 했습니다.
오바댜의 행위는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돌봐주었던 그 선지자들과 함께 몰살당할 위험한 일입니다. 목숨을 건 헌신입니다. 우리가 남을 도와준다는 것도 평상시 자유롭게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은 누구든지 하지만 오바댜가 살던 시대의 이와 같은 행위는 목숨을 건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바댜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만 놀라고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이라면 아들 독자를 하나님께 바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의 신앙행위에 대해서 감탄만 하고 스쳐지나기 쉽다는 것입니다. 욥은 우리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감탄만 하고 끝나는 것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자꾸만 실패하게 됩니다. 오바댜를 보면서도 오바댜의 목숨을 건 행위에 대해서 '그는 정말 놀라운 행위를 했다'고 감탄만 하고 지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볼 때 첫째는 이들의 신앙행위를 본받아야 합니다.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행위를 배우고 본받으라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이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을 보고 배우는 것만 하고 끝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다나엘을 보신 주님이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요 1:50)"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을 보고 큰 비전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요 14:10)고 오바댜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그 사람의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어야만 성경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오바댜에게 볼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로 되는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내가 해서 감당할 영역이 있고 내 힘으로 도저히 안되는 영역이 있는데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만 하고 내 힘으로 안되는 영역을 포기하면 안됩니다. 내 힘으로 안되는 것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것을 우리가 추구해야 됩니다.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12)"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이유는 내 힘으로 안되는 영역이 많기 때문에 그 분을 기대지 않고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 영역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으면 내 힘으로 못하는 그 영역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 힘으로 못하는 그 영역은 우리가 믿고 의지하면서 그 분께 구할 때 하나님이 그 영역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오바댜의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그의 일을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피곤하고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구하지 않는 것은 영적 교만이라고 정확하게 지적을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주의 일을 해보겠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에게 '당신은 지금 영적으로 교만해 있다'는 지적을 하면 속상해 합니다. 본인이 스스로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것을 육신적으로 해석할 게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신앙인
그리고 오바댜는 백명의 선지자를 먹이고 있습니다. 오바댜는 대부분 자기의 것으로 먹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오바댜는 신앙의 모델로 베푸는 사명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계 위험'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아무리 좋은 일도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배고플 때 밥을 먹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조금 지나면 배도 부르고 밥이 맛도 없는 한계가 옵니다. 그처럼 한계를 넘어서면 위험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한계위험의 표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돈을 적정하게 벌어야 하지만 한계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버는 것도 처음은 재미있지만 나중에는 재미가 없습니다. 재미없는 것을 재미있게 하려면 번 돈을 가지고 베풀 때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유가 있어야 교회를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으로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모든 면에서 한계위험의 신호를 무시하고 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신나지 않다면 신나는 길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오바댜는 출세한 대신으로 상당한 재물도 있는데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신앙의 깊은 의미를 맛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베푸는 자가 되겠습니까? 그것의 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지금 네 모습 그대로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물질이 더 있어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분량대로 베풉니다. 사랑의 치수가 높아갈 때 더 베풉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열정의 지수가 높아질 때 물질을 더 베푸는 것입니다. 충만한 믿음의 지수가 있어야 가치의 지수를 따라 베풀게 됩니다.
오바댜는 행동하는 신앙인입니다.
오바댜는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고 있는데 초첨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긴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교만해 보이는 것 같아도 결국은 겸손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초점이 여호와를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유명한 칼럼니스트가 '한국인의 인격 속에는 교만한 겸손이 대단히 많다'는 지적을 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유교적 겸손이라 합니다. 유교는 아무리 선비가 굶어도 굶었다고 표현을 안하는 것이 유교의 덕이고 겸손입니다.
그런데 이 정신이 신앙세계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인사부터 모순된 것이 많습니다. 밥상을 잘 차려놓고는 인사할 때는 '차린 것이 없지만 많이 잡수세요'라고 합니다. 우리의 관습이나 전통은 그렇게 말해야만 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악이 아니지만 우리의 행동이나 생활 속에도 연결되는 게 문제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문화적인 측면이 아니라 내 삶의 중심이 예수님께 바로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벧전 5:6)"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보실 때 내가 겸손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오바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내어놓고 뛰어든 사람입니다.
맺는 말
우리 가운데 오바댜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믿음으로 살고 간 사람들을 감상만 하고 존경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후대들에게 존경받는 그 자리로 돌진해야 합니다. 오바댜를 본받을 뿐만 아니라 추월하라고 한다고 성경은 채찍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보를 모든 사람 앞에 나타내라 그리고 더욱 주님을 섬기라고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가슴깊이 담는다면 우리는 행동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장애물이 있고 부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부담도 없고 고난도 없는 완벽한 환경이라고 장담하면 바로 갈 줄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도 부담을 안고 있기 때문에 기도라도 한마디 더 하는 것이지 부담 때문에 절망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장애물이 있고 하나님께 은혜받을 만한 여건이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 은혜입니다.
오바댜도 그 어려운 시대에 극악한 상전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충성되이 살았다는 것은 그 시대가 오바댜를 신앙의 승리자로 만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환경이 어려워도 오바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