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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신년새해/축복으로 가는 길, 형통으로 가는 길! (시 1:1-6)
신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설'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올 신년새해에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여호와이레' 준비된 축복을 소망하면서 우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할/
올해는 갑오년, 청마(靑馬)의 해라고 합니다. 말은 신의(信義)의 상징입니다. 옛 사람들은 신의를 맹세할 때는 백마를 잡아 피를 제단에 올리고 그 피를 마시거나 입에 바르며 신의를 지킬 것을 다짐했다고 합니다.
말은 지혜로운 동물입니다. 말의 기본적으로 뜻하는 의미는 '건강, 부, 성공'이라고 합니다. 특히 청마는 서양에서는 행운의 아이콘이라고 합니다. 무려 60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행운의 아이콘이라고 하니, 올해는 왠지 이 나라 온 국민이 하는 일마다 대박이 빵빵 터질 것 같은 그런 설렘이옵니다. /할/ 오늘은 신년 1월의 첫 주일로, 하나님 앞에 신년예배로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야누스라는 신이 있습니다. 이 야누스 신은 '시작의 신'이라고 합니다. 1월을 영어로 'January'라고 하는데 'January'는 야누스 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 야누스 신은 얼굴이 앞뒤로 두 개랍니다. 뒤의 얼굴은 과거를 보고, 앞의 얼굴은 미래를 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한해를 돌아보고 잘못 살고, 잘못 믿은 것에 대한 바른 회개가 있어야 하고,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미래를 열어 가는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①시편은 어떤 책인가?
시편은 '찬양, 감사, 간구, 기쁨, 신뢰의 노래, 헌신의 찬가, 예배 시'로 기록된 150편의 시편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귀한 책으로 사랑 받는 책입니다.
칼빈은 시편을 '우리 영혼의 해부학'이라고 했고, 루터는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 구약 성경을 인용한 성구가 283번 나오는데, 그 중 116번을 시편에서 인용이 되었습니다.
㉠시편 안에는 '5대 중심 사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⑴하나님만을 믿어라! ⑵하나님만 높이고 찬양하라! ⑶하나님의 백성(자녀)된 것을 기뻐하라! ⑷예배다운 예배를 들이라! ⑸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라! /할/
㉡시편의 1편은 전 시편의 서론과 결론과 같습니다.
먼저 1편은 믿음의 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을 공감하고 진정으로 '아멘'하고 받아들일 때에 시편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공감할 수 없다면 시편 묵상은 헛된 일이 될 것입니다.
이 시에 공감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했고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할/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신부가 신랑이 준 예물을 소중히 간직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간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소중하게 간직하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묵상한다는 말은 '중얼거리다, 낮은 소리로 읊조리다'라는 뜻으로,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말씀을 그 마음에 두고 계속 생각하며 지켜가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멘!/
②본문은 '축복으로 가는 길, 형통으로 가는 길'을 알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복을 좋아합니다. 중국사람들도 복을 엄청 좋아합니다. 중국사람들은 천장에도, 벽에도 복(福)자를 거꾸로 붙여 놨습니다. '왜 복이 거꾸로 매달려 있느냐?'고 물으면 '하늘에서 복이 잘 내려오라고 유턴하지 말고 그냥 곧바로 내려오도록 붙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사람들은 기본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복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할/
여러분, 복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복이라는 개념은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좋은 것, 옳은 것, 최상의 것, 기쁜 것, 아름다운 것, 유쾌하고 풍성한 것' 등의 뜻이 있고, 이 모든 말을 다 포함하는 말로 '행복한 것' 이것이 바로 복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오복을 말합니다. '오래 살고, 부자로 살고, 귀하게 살고, 아들 많이 낳고 살다가 고생하지 않고 제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도 복은 복입니다. 오래 사는 것은 누구나 다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몸보신을 합니까?
또 부자로 살고 명예를 얻고 직위도 얻고 권세를 얻고 귀하게 사는 것을 다 원합니다. 이왕이면 딸 많은 것보다는 아들 많은 것을 사람들은 선호합니다. 그래서 지금 남녀비율이 깨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들이 탐내는 세상 적인 복이 꼭 복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욕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부하게 사는 것도 어떤 이에게는 그 재물이 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아들 많은 것도 반듯이 복일 수는 없습니다. 모두 효자 일 때 복이지 깡패 같은 아들을 둔 것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같은 복을 외형적인 복 상대적인 복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 인들은 이 보다 더 진지한 면에서 그리고 보다 더 근본적인 면에서 복을 생각하고 소망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멘!/
㉠그러면 보다 근본적인 복은 무엇입니까? 본분에서 말하고 있는 복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와 그 다음에 '아쉬레'의 복입니다. '바라크'의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직접 받는 복'을 '바라크'라고 하고, 그 다음 '내가 받은 복이 차고 넘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런 복을 '아쉬레'라고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는 복을 받은 사람들인데 그 복이 어떤 복인가? 한마디로 '바라크'의 복, 즉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아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아쉬레'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믿/
▶시 1편에서 시작되는 '아쉬레'는 구약에서 45번 나타나는데 세 가지 경우에 썼습니다.
⑴사람들이 번영을 누리거나 자식을 많이 두었을 때 '아쉬레' 하고 축하했습니다(8번).
⑵하나님을 잘 믿음으로 물질적 축복을 받았을 때, 하나님 믿는 사람에게 내리는 건강함과 범사가 잘 될 때 '아쉬레' 하고 축하했습니다(31번). 그리고 ⑶자식이나 물질의 소유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바르게 살아갈 때 '아쉬레' 하면서 축하했습니다(6번).
가난하게 살아도, 건강을 누리지 못해도, 자식을 두지 못했어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을 볼 때 '아쉬레'의 복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할/
이 말은 사람이 아무리 오래 살고 부자로 살고 귀하게 살아도 하나님을 모르고 살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참 복은 '하나님이 범사에 함께 해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형통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란 말입니다. 창39: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또 왕하18:7절에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아멘!/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최고의 권좌인 왕좌에 앉았지만 어느 날 하나님이 그에게서 떠나 버리시니까 그 순간부터 그는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그 마음이 병들고 정신이 병들어 마침내 폐인이 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할/
㉡어떤 사람이 복을 받습니까?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 축복의 길로, 형통의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 1-2절의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신30:19-20절을 보세요!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복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복을 받는 길과 저주의 길이 너희 앞에 있는데 스스로 선택을 잘 하라는 것입니다. 축복은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임의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택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금의 나의 모든 것은 내 스스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조국과 부모를 제외한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회를 맞게 됩니다. 학교를 선택해야 하고, 친구를 선택해야 하고, 직업을 선택해야 하고, 배우자를 선택해야 하고, 종교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러한 선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선택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 때부터 인간은 사탄의 꼬임에 빠져 선택의 실수를 계속했습니다. 마귀의 전략은 언제나 인간으로 하여금 선택의 오류를 범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공의 길임을 알고 선택했는데 그만 그것이 실패의 길이었습니다. 행복의 길임을 알고 선택했는데 그 길은 불행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택하여 하나님 편에 속한 사람은 결코 실패의 길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이 치열하던 때에 전쟁의 상황이 북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대되고 있었습니다. 참모들이 모여 작전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지혜를 짜고 있었습니다. 이때 어떤 참모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 북군에게 서도록 기도합시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령관인 링컨이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에 서도록 기도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각오를 새롭게 하도록 기도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그 후 전쟁은 링컨이 지휘하는 북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할/
하나님 편에 서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에 하나님께서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실패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불행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서는 사람이 축복의 길로, 형통의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믿/
③축복으로, 형통으로 가는 길은 무엇인가?(1)
옛말에 '남이 장에 가니까 지게 지고 따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두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죄인의 길이요, 하나는 의인의 길입니다. 죄인의 길은 죄인들이 가는 길이요, 의인의 길은 의인들이 가는 길입니다.
죄인 따라 가다가 지옥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못 말립니다. 태풍경보가 내려 졌는데도 무인도의 갯바위에서 낚시질 하다가 실종되는 사람들, 홍수 경보가 났는데도 계곡에서 야영하다가 실종되는 사람들, 폭설 경보가 났는데도 자동차를 몰고 눈 구경 나갔다가 조난 당한 사람들, 정부에서 위수령을 내렸는데도 데모 구경나갔다가 끌려 들어가 반병신 되어 나온 사람들은 다들 자기를 지키는데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연탄공장에 가면 연탄가루 뒤집어쓰기 마련이며, 밀가루 공장가면 밀가루 묻혀 오기 마련입니다. 봉제공장에 가면 실오라기 묻어오기 마련이며, 타작마당가면 덤터기 덮어쓰기 마련입니다. 막노동판에 가면 욕 얻어먹기 마련이며, 장기 훈수 뜨다가 귀 뺨 얻어맞기 일쑤입니다.
그렇습니다. 악하고 패역한 세대의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를 세상과 세속에서 지키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자기를 영적으로 지키는데 실패하면 세속에 물들고 맙니다. 세속에 물들면 신앙생활에 실패합니다. 신앙생활 실패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 받은 하나님의 축복까지 상실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축복의 사람, 형통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⑴악인의 꾀를 쫓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악인'이란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혹은 '소란을 피운다'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악을 계획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의인과는 달리 이 세상의 어두움의 일에 민첩하고 행동이 빠르고 간사하여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혼란을 가져오는 익숙한 사람을 말합니다.
여기서 악인이란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하나님에게서 떠난 일반적인 사람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악인들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데 죄인, 오만한 자, 거만한 자, 행악자, 강포한 자, 간사한 자, 살인자,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 불의한 자, 횡포한 자, 모해하는 자, 교만한 자, 대적자 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철저한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시14:1)고 떠들어대기도 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악인은 아주 꾀를 잘 부립니다. 하와가 왜 넘어졌습니까? 바로 이 꾀에 넘어진 것입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공감이 가게, 이해가 가게, 말이 그럴 듯 합니다. /할/
▶악인의 꾀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정에 끌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번번이 잘못인줄 알면서도 안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친하다고) 그만 이래서는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그냥 끌려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롯은 삼촌의 은혜도 망각하고, 하나님의 동산처럼 보이는 소돔과 고모라 땅을 그만 택하고 말았는데 그 결과는 참으로 비참했습니다.
감옥에 간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를 해보았더니, 자발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은 아주 적었고 대부분은 누군가와 함께 죄를 지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혼자서는 죄를 짓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죄에는 공범이 있게 마련입니다. 모두 악한 사람의 꾀를 좇다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⑵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이란 하나님께 반역한 자요, 불법한 자요,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방향과 목적이 없이 사는 사람, 행동과 생각으로 나쁜 짓을 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교만을 가장 큰 죄라고 했습니다. 불교에서는 탐욕을 가장 큰 죄라고 했고, 유교에서는 불효를 가장 큰 죄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살인을 가장 큰 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가장 큰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면 죄인의 길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롬14:23절에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할/
참 생명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 길은 좁은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요, 부활을 얻는 길이요, 영생의 길입니다. 그러나 죄인의 길이란 악인의 행로, 범죄자의 행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넓은 길이요, 멸망의 길입니다.
본문이 가르치는 복 받는 자의 자세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 즉 '죄를 이기는 것'이 축복의 길로, 형통의 길로 가는 통로입니다. /믿/아멘!/
사실 죄를 정복하지 않고는 세상에 축복도, 평화도 없습니다. 죄는 인간을 망하게 하고, 병들게 하고, 죄는 우리를 좌절케 합니다. 죄가 들어온 이 세상은 탄식의 소리로 메아리쳐 오고 있습니다. 미움과 질투, 살인과 전쟁, 이 모든 것은 죄로 말미암아 찾아온 불행한 선물들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죄와 깨끗이 결별하고 죄인의 길에서 돌이켜 생명의 길로 걷는 자입니다. /할/
⑶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합니다.
'오만한 자'란 '업신여기다'는 뜻에서 온 것으로서 계속적으로, 습관적으로 말씀을 이탈하므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오만한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강퍅한 자를 말합니다. 진리와 양심과 도덕을 다 포기하고 자기를 세우려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에도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호히 '아니다'라고 강하게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④축복의 길, 형통의 길로 가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2)
⑴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는 성도가 됩시다. 여기서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 읽기를, 듣기를, 실천하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자요, 늘 하루종일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또 여기 '율법을 즐거워한다'는 말은 '율법을 좋아한다, 관심을 갖는다, 소원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이 좋아지고 관심거리가 되고 그의 소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 있는 사람에게는 삶의 희열이 되고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시112:1절에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인생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 있습니다. 진정 복 있는 성도는 성경 안에서 즐거움을 맛보는 자입니다. /아멘!/
또한 여기 '오직'이라는 말은 '우선'이라는 말로, 우리 인생에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권의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움직이는 힘, 인생에서 나를 이끄는 모든 힘이 말씀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간의 우선권을 말씀을 즐거워하는 일에 두었습니다.
시간은 다 똑같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은 엄청나게 질적으로 압축된 시간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시간을 내놓으면 결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성경을 못 본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시간의 양을 질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내 인생을 다시 보고, 미래를 바라봅니다.
⑵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면 우리가 복을 받습니다.
신29:9절에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또한 수1:7-8절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다윗이 유언을 들어보십시오! 왕상2:2-3절에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할/
⑶'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성도가 되십시오!
㈀여기서 '묵상'은 말 그대로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이는 묵상을 소가 되새김질을 하는 것에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소는 거친 짚과 풀을 먹습니다. 그러나 1차는 대강 먹고 2차는 되새김질을 통하여 거친 짚과 풀을 고운 가루와 같이 만들어 소화를 합니다. 그렇습니다. 묵상을 통하여 내 영혼의 양식으로 소화를 해야 합니다. /아멘!/
㈁또 '묵상한다'는 말은 '소리내어 읽는다, 읊조린다'는 뜻입니다.
묵상은 마치 비둘기에게 먹이를 던져주면 쪼아먹으면서 '구구구'라고 소리치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비둘기가 먹이를 먹으면서 '구구구'하는 것은 '이것은 내 것이니 다른 자가 차지하지 마세요. 나는 이 먹이를 즐기고 있어요.'라는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사자가 먹이를 움켜쥐고 그 앞에서 이것은 내 것이라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묵상하는 소리랍니다. 그것은 '내가 소유하며 즐기는 먹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얼굴이 밝아지고 괜히 흥얼거리는 즐거운 소리를 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아멘!/
⑷여러분, 이제 억지가 아닌 자원하는 마음으로 말씀묵상을 시작하십시오.
신앙생활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괴로운 것은 억지로 예수 믿고, 억지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때로 마지못해서 억지로 이끌려 나올 때가 있습니다. 친구가 나가자고 하니까 올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내 평생소원은 당신이 교회 나오는 거야'라고 말해서 시간을 끌고 끌다가 억지로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억지로 끌려 나오는 시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습니다. 계속해서 한달, 일년 동안 억지로 나온다면 그것은 너무나 괴로운 일입니다.
한번 나오기로 결단했으면 이제 말씀을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한번 내 속에서 자발적으로 예수 믿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진리의 즐거움'을 마음속에 확인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배드리는 것이 기쁘고 읽은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아멘!/
⑤축복 받은 사람, 형통한 사람은 '시냇가에 심긴 나무 같은 사람'입니다(3).
이 말씀은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 받아 누리는 축복을 냇가에 심긴 나무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가뭄을 모르고 잎이 무성하게 자라납니다.
식물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도 반드시 강을 끼고 발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도시에는 반드시 큰 강을 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는 한강이 있습니다. 충청지역 도시에는 금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영남지역 도시에는 낙동강이 있습니다. 호남지역 도시에는 영산강과 만경강, 섬진강이 있습니다.
이처럼 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아니 될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물로 생활용수, 농업용수, 공업용수로 활용하기에 점점 발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
또 냇가에 심겼다는 말은 뿌리를 냇가에 두었다는 말씀인데, 뿌리를 우리들의 현실에 비춰본다면 조상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조상이 일찍 하나님을 잘 섬긴 후손들은 지금도 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유럽이나 북미의 나라들이 이에 해당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뿌리를 두었기 때문입니다.
출20:6절을 보세요!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할/ 또 렘17:5-8절을 보세요!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이런 형통한 축복을 원하십니까? 다시 한 번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신10:12-13절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할/
⑴그렇습니다. 축복의 사람, 형통한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우리는 시냇가의 심은 나무라는 말이 큰 감동을 느껴지지 않지만 광야와 사막이 펼쳐져 있는 팔레스틴 지방에서의 시냇가의 심은 나무란 그야말로 행복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 완벽한 시적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시냇가는 문자 적으로 애굽이나 바벨론 등의 황무지에 수원지로부터 물을 공급하는 하천을 말합니다. 시냇가란 근원으로부터 신선함을 운반하는 통로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시냇가'란 곧 생명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뿌리를 내린 성도는 복된 자입니다.
여기 '심은 나무'는 '옮겨진 나무, 이식된 나무'를 말합니다.
이 나무는 본문에서 의인이요(5,6), 복 있는 자(1)입니다. 이식된 나무는 바로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얻은 성도들을 가리킵니다(엡1:7). /아멘!/
성도는 죄와 사망의 황무지에서 생명의 시냇가로 이식되어진 나무입니다. 이러한 성도에게는 결코 목마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생명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고 하였고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⑵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렘17:8절에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니라' 그리고 시92:12-15절에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여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할/
⑶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잎사귀'는 신앙 생활을 표시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외적인 생활, 자손의 번성, 사업의 형통 등을 뜻합니다.
가뭄이 와도 청청한 빛을 내는 잎사귀, 환난과 핍박과 그 어떤 어려움에 부딪혀도 신앙의 색깔이 변함 없는 성도, 이것은 복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주는 화려한 축복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성도가 '마르지 아니하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은혜가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기름먹인 가죽이 부드럽다.'는 말이 있습니다.
평상시에 '아니요' 하던 사람도 은혜 받으면 '아니요' 하는 사람 없습니다. 평상시에 '없어요' 하는 사람도 은혜 받으면 '있어요' 합니다. 평상시에 '미워요' 하던 사람도 은혜 받으면 '사랑해요' 합니다. 평상시에 '못 하겠어요' 하던 사람도 은혜 받으면 '하겠어요' 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은혜가 마르면 심령이 강퍅하게 됩니다. /믿/
㈁사랑이 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이 마르면 미워집니다. 여러분, 불행한 사람은 미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도 미움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였습니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 된 사람들은 미움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미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마르지 않도록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머리는 차고 가슴은 뜨거워하는 것처럼 성도는 성령으로 가슴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가슴으로 해야 합니다. 머리로 하는 신앙생활은 따지기를 좋아하고, 나타내기를 좋아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 충만을 받아 새해에는 신나게 일합시다. /할/
⑷형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여기 '그 행사'라는 뜻은 '그가 행하는 모든 일들'이라는 뜻입니다.
형통의 반대는 불통입니다. 즉 막혀서 할 수도, 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형통은 문이 열렸다는 말입니다. 일이 잘 된다는 말입니다.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오늘 신년예배를 드리는 참 행복한 성도들은 이 형통의 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통해야 할 것이 잘 통해지는 것을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잘 이루어지는 것이 영통이며, 사람과의 관계에서 잘 이루어지는 것이 인통이며, 대소사의 일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물통'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그래서 안 통하는 것을 일컬어 불통, 즉 잘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안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박근혜 대통령이 지적 받는 말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불통대통령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통한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마음이나 생각이 같을 때 서로 통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관계가 좋아집니다. 부부간에 통하지 않으니까 싸움이 벌어집니다. 서로간의 미움이 일어나는 것도 통하지 않아서입니다. 통하지 않으면 정말 답답합니다
㈂전기도 마이너스 풀라스가 통할 때에 큰 힘을 발휘합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 좋은 전기시설이 있다고 해도 전기가 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일단 통하기만 하면 아무리 큰 기게일지라도 움직이고, 환하게 됩니다. /할/ 이렇듯 통해서 잘되는 것, 무엇이든지 잘 나가는 것을 '형통'이라고 합니다. 부부간에 형통하고, 자녀간에 형통하고, 이웃 간에 형통하고, 성도간에 형통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진짜 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잘 통해야 합니다. 이 말을 신통(神通), 혹은 영통(靈通)이라고 합니다. 왜 영통 해야 하는가? 모든 것에는 근원이 있습니다. 수돗물도 저수지, 전기는 발전소가 있듯이, 만들어진 것도 근원이 있습니다. 이 근원과 연결될 때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원, 즉 생명의 뿌리입니다. /믿/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축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약1:17절에서는 '각양 좋은 것들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온다'고 했고, 그래서 시73:28절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통해 있는 사람은 몇 만 볼트의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소보다 더 큰 에너지원을 갖고 있는 것이 됩니다. /할/
㈄그렇다면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과 통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 잘 믿는 것이 하나님과 통하는 통로가 됩니다(요14:6). 통하기만 하면 죄 사함, 자녀, 영생, 하늘나라의 기업을 상속받습니다. /아멘!/ ▶성경 말씀은 하나님과 통하는 길입니다. 이 통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보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통하는 통로입니다. 기도하면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받습니다. 낙심했다가 기도하면 힘이 통로를 통하여 엄청난 것을 공급받지만, 즉 형통케 되지만 그러나 통하지 않으면 답답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신통하면, 인통(人通)합니다. 사람과 사람관계가 원만하고 좋아집니다. 행, 불행의 모든 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영통해서 충만해지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잘 되게 하나님이 역사 하십니다. 그것이 영통의 힘입니다. /할/
▶또 물통(物通)합니다. 물질과 물질이 들어 있는 환경을 정복, 다스립니다. 영통하면 형통합니다. 하나님과 통하면 사람과 통하고, 물질과, 환경을 통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권, 인권, 물권'의 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복이 어디서 옵니까? 성전 중심, 예배 중심을 통해서 옵니다.
시118:24-26절에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그리고 시122:6-7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아멘!/
⑥악인을 보세요!(4-5)
⑴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4).
여기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라는 말은, 악인의 삶과 그 결국은 1-3절까지 말한 의인의 복된 삶과 그들의 축복에 결코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을 강하게 대조시키는 그런 말씀입니다.
악인은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겨는 그 안에 생명이 없습니다. 뿌리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열매도 없습니다. 껍질이요, 쭉정이입니다. 그러므로 바람과 함께 이리 저리 날아다닙니다. 결국 불에 태움을 받게 됩니다.
마3:12절에 의인을 알곡에 비유하고 악인을 쭉정이에다 비유하면서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 그것은, ㈀무가치한 인생, 쓸모 없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맛을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마5:13). ㈁불안정한 삶을 의미합니다. 바람이 부는 데로 이리 저리 날릴 뿐 안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이 알곡과 쭉정이를 나눌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바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쭉정이의 특징은 바로 바람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할/ 그리고 ㈂타작(심판) 마당에 버림을 당하여 태움을 받을 인생을 의미합니다.
다시 한번 마3:12절의 말씀을 보세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할/
⑵심판을 견디지 못합니다(5).
여기 '심판'은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공의로우신 판결을 의미합니다. 여기 '견디지 못한다'는 말은 심판 앞에 서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 심판의 자리에 자신의 죄악이 너무 커 그 결과가 너무 무서워 일어서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거나 거절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항거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시5:5절에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할/
⑶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5).
여기 '회중'은 거룩한 장소 곧 하나님의 언약궤가 모셔져 있는 성소나 성전을 가리킵니다. 즉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지시하는 것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의인의 회중'이란 하나님의 심판, 또는 판단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들의 총회를 말하는데, 신구약 시대를 망라한 하나님의 공회를 뜻하고 있으며, 신령한 의미로서 교회를 의미하고, 장차 우리에게 다가오는 미래적 천국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통하여 택한 백성을 구별시켜 의인의 회중으로 모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악인들은 시대 시대마다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 가인이 의인 아벨과 함께 하지 못하였습니다(창4:1-16). 구약시대의 광야 교회에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무리들이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하도록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민16:1-35).
신약시대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의 회중에 들지 못하였습니다(행1:16-19). 의인의 회중에 들려고 성령을 속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행5:1-11). /할/
⑷악인의 결론은 '다 망하는 길'입니다. 6절하반절에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할/
⑦가장 축복의 길, 형통의 길은 의인으로 인정받는 길입니다(6)
⑴여기서 '대저'라는 말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왜 의인이 복을 받습니까? 여호와께서 그 길을 축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께서 그 길을 인정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제멋대로 가다가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니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다 다니엘은 모함을 받아서 사자굴 속에 던짐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시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사나운 사자들의 입을 봉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도 살아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다니엘을 모함하다가 그들이 대신 사자 굴에 던짐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몸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사나운 사자들이 뛰어올라서 그들을 움켜쥐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뼈까지도 부수뜨렸습니다. 의인의 길은 하나님이 축복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
⑵여기 '인정'은 말씀은 '결재하시고 허락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가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오! 그 소원이 옳구나'하시며 인정하신 다음에 허락의 도장을 찍으시고 '하늘 창고를 열고 내어주마'하시며 주신다는 것입니다. /할/
사람이 누구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 분야의 실권자에게 인정받으면 그 사람의 생애가 바뀝니다. 우리나라에서 월드컵 축구경기가 열렸을 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인 선수들이 그 당시 히딩크 감독에게 인정을 받아 국가 대표 선수로 발탁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일약 세계적인 선수로 도약을 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도 이러한데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면 이 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요셉이라는 사람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형들이 시기하여 애굽의 노예로 팔았습니다. 요셉은 노예로 충성한 결과 주인의 인정을 받아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 후 요셉은 여주인에 의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곳에서도 간수의 인정을 받아 옥중의 제반 사무를 보며 다른 죄수들을 관리했습니다. 옥중의 자유인이었습니다. 이처럼 겹겹이 몰아닥치는 억울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편에 서는 신앙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요셉은 훗날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할/
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열 자녀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가진 재산도 다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내가 배신을 했습니다. 친구도 배신을 했습니다. 이웃이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편에 서있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욥은 옛 명성을 다시 회복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42:10절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아 축복의 길, 형통의 길로 가는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4년 1월 5일 신년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