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있어 외롭지 않은 해파랑길
해파랑길 부산과 울산, 경주 구간은 풍광도 빼어나고 다양한 볼거리도 많아 오르며 내리는 해안길을 걷는 내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푸른 파도와 시원한 바닷바람이 내 안의 묵은 때를 모두 씻어주는가 하면, 싱싱한 빛깔의 하늘과 해밝은 태양은 온몸 곳곳에 에너지를 넣어주었다. 그런데 왠일인지 포항길은 좀 달랐다. 다른 구간에 비해 유난히 좁은 차도로, 넓은 산업단지 해안도로로, 험하고 경사진 산비탈길로 안내를 하고 있었다. 해랑 파도랑 벗하며 걷는 길이 해파랑길인데, 포항 구간은 도보여행객을 위한 정비나 배려가 적어 안타까웠다. 그러나 힘든 고통의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생각하는 힘은 깊어지고, 절절하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은 넓어진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낳는다’ 는 로마서의 말씀이 언제나 나의 가슴 속에는 깃발로 꽂혀 있다. 포항에 사는 대학원 동창 부부가 한걸음에 달려와 저녁식사 대접에 숙소 모텔비를 내주고, 발가락 테이프를 사러 들른 약국의 여약사가 시원한 박카스를 건네주며 파이팅을 외쳐주는 등 소나기 사랑도 쏟아졌다. 샘물, 촛불, 등대로 온종일 웃음 달고 다녔다.
경주구간의 끝인 양포항의 여관에서 전날 저녁부터 전기장판에 펴놓은 옷들과 화장지 한뭉치를 다 구겨넣고 엎어놓았던 등산화까지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셋쨋날 아침 조금 늦게 일어난 탓으로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전문 낚시꾼들이 주루룩 늘어 세워놓은 낚싯대 풍경은 근사했다. 유유자작 걸어 금곡교를 지나자 가슴을 설레게 하는 풍경이 나타난다. 우뚝 솟은 바위 틈새로 그림처럼 붙어 자라는 소나무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자세히 가서 보니 ‘일출암’ 이라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육당 최남선 선생께서 ‘조선십경’ 중의 하나로 금강추색, 경포월화, 제주망해 등과 함께 이곳 장기천이 흐르는 곳의 일출암을 ‘장기일출’ 이라 명명하고 자주 들러 벗하셨다 한다.
기도하면서 손목에 걸어놓았던 팔찌 묵주가 보이질 않는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장기천 일대를 찾는 내게 중년의 세 여자가 다가와 묻는다. 팔찌묵주를 찾는 중이라고 하자, 그녀들은 일시에 돌아다니며 함께 찾는다. 물속에 빠진 것 같아 포기하려 하자, 한 여자가 주차장으로 가더니 자신의 묵주를 가져다 여행 잘 하라며 주었다. 개교기념일이라 여행 나온 울산 태화강 중학교 교사인 그녀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묵주를 준 미카엘라는 유독 더 예뻤다. 그녀들이 내놓은 사과와 배를 먹으며 학교 얘기, 해파랑길 얘기를 함께 나누고 헤어졌다. 인연이 좋았는지, 대진리 마을, 모포해변을 지나 장길리 복합 낚시공원 구남 낚시 매점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을 때, 다시 또 그녀들을 만났다. 바다 깊은 곳까지 철근다리를 놓아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으로 연결하는 보릿돌교를 넷이서 함께 걸어가며 사진도 찍고 짧은 해후를 했다. 하정해변을 지나 모텔, 호텔들의 야경이 현란한 구룡포에 도착했다. 숙소를 찾다가 하얀 십자가의 구룡포 성당을 발견하니 성모님을 뵌 듯 안심이 되었다. 호미곶 온천랜드 8천원짜리 찜질방에서 고단한 몸을 말끔히 씻었다.
많이 걸어 피곤했고, 소금방, 황토방, 보석탕 등에서 땀도 쭈욱 빼어 노골노골하기에 잘 잘수 있을 줄 알았다. 아이고, 일분도 못잔 머리 아픔이여! 대형선풍기 윙윙 소리, 이쪽 저쪽에서 코 골지, 잠꼬대하지 팔팔 뛰겠다. 수면방에서 나와 탈의장 바닥에서 자볼 요량으로 내려오니, 아뿔싸, 눈 따가운 락스 냄새에 목욕탕 타일 바닥 물 끼얹으며 물청소하는 소리 요란타. 어디에도 내가 잘 곳은 없다. 8천원짜리 숙소, 싼게 비지떡인가? 안마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뜬눈으로 새벽 4시를 맞았다. 무조건 짐 싸들고 나왔다. 호미곶 일출은 꼭 보고 싶었다. 한 차량이 시동을 걸고 있다. 상냥하게 부탁하니 구룡포 시내까지 태워주었다. 구룡포에서 택시로 만오천원에 호미곶에 도착했다.
5시가 지나자 바다 속 손가락 형상 저편에서 붉은 여명이 시작되더니,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로 발그레 고운 해님이 보인다. 조금씩 자리를 이동해가며 손가락 가락 사이로 동그란 해를 넣어가며 연타로 무수히 셔터를 눌러댔다. 이토록 설렘이 가득한 일출 촬영은 난생 처음이다. 해맞이공원을 둘러본 후 대보저수지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도 모를 내는 시골 마을 사람들의 얼굴엔 땀이 흘렀다. 장독대가 정겨운 동호사 사찰의 미소가 환한 부처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강물처럼 길게 이어진 대보산 저수지를 지나니, 바로 꼬불거리는 산으로 마구 올라간다. 조금 내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치고 올라간다. 임도길이 무려 8km로 표시돼 있다. 벤치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는다. 나에게 주문을 건다. 그래도 차도가 아닌 게, 포장도로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덩치가 큰 대보산을 넘어 내려오니 흥환리 보건소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도구해변으로 가는 길, 구 형산강교를 건너 포스코 공장 단지를 지나는 길은 완전히 땡볕 도로이다. 영일만 산업단지 포장도로를 걸으며, 바닷길을 걷는다고 체면을 걸었다. 나에게 로사리오 묵주가 없었다면 어떻게 견뎌내었을까? 물집 터진 발가락들에서 뜨끈끄끈 열이 나고, 머리 위의 태양열, 등 뒤 쌀가마니 같은 배낭의 열기, 한낮의 땅바닥 지열로 쓰러질 것 같았다. 이때 오아시스처럼 만난 눈부신 영일만 친구여! 이 살 것 같은 반가움이여! 바닷물에 발을 담그니 온몸에 차오르는 시원함이여, 새로운 충만함이여!
또 한 편의 ‘영일만은 내 친구’ 영화를 찍었다. 스마트폰의 셀프 동영상으로 신나게 ‘바닷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어릴 적 내 친구~~~’ 영일만 친구 노래를 부르고 버튼을 눌렀을 때였다. 큰 파도가 치더니 위쪽에 벗어놓은 등산화가 바닷물에 동동 떠내려가고 있는 게 아닌가? 모래사장에 배낭이랑 풀러놓고 밀려오는 파도를 덮치며 자꾸만 도망가는 등산화를 건지려 필사적으로 바다에 뛰어 들었다. 신발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한번 두 번, 세 번째 밀려오는 큰 파도 타고 드디어 건져냈다. 허리를 지나 가슴까지 바닷물 들었다. 모래벌판에 누워 앞뒤로 뒤집어가며 몸을 말렸다. 한시간 이상을 푹 쉬고 찰랑찰랑 바닷길로 칠포해변에 도착했다. 쌍둥언니가 3년 전에 묵었었다는 ‘돌담민박’ 집이 있었다. 친절한 주인장의 안내로 저녁경치도 둘러보고, 해안가 노천카페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도 한껏 불렀다.
어촌 길은 오도리, 이가리, 청진리로 계속 이어졌다. 용두교를 지나 월포 해변까지 비슷비슷한 풍광의 바닷길을 걸어 이번 주간의 목적지 화진해변에서 끝을 맺었다. 경주 10코스에서부터 포항 18코스까지 6일 동안 9코스 154km의 해파랑길 3~4구간을 잘 마무리했다. 부산 울산 구간 157km, 경주 포항 구간 154km, 도합 300km 이상을 걸었다. 고성까지 770km이니, 이제 한 달에 한 번 한주간씩 세 번 석달만 걸으면, 해파랑길 완주의 꿈이 이루어진다.
긴 도보여행은 순례길이며 행복한 길이다. 무서우면, 외로우면, 아프면, 눈물나면, 가족과 보고픈 사람 생각이 나면, 절경 풍경에 취하면, 성당만 보이면, 내 모든 체력과 정신력에 바닥이 나면, 실로 모든 것에 기도와 감사가 길 위에 넘쳐난다. 힘들 때마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크고 작은 도움을 받게 하면서 이겨내게 하셨구나! 손목골절 부상 때 병문안, 문자 등의 마음으로, 식사대접으로, 밑반찬으로 나를 품어주었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혼자 가는 길이지만, 결코 혼자라고 해서 외롭지 않은 행복한 길을 지금 내가 걷고 있구나!
*전문 낚시꾼들이 있는 양포항의 아침
*여관에서 전기장판에 말린 옷가지들,
휴지 구겨넣어 말린 등산화,
반으로 자른 달콤한 키위
*해파랑길 속속들이 메모된 수첩
*육당 최남선의 '조선십경' 중의 하나인
'장기일출' 일출암
*울산 태화강 중학교 여교사들과 만나 함께 어울리고
*빨간 지붕이 있는 바닷가 마을
*줄맞춰 모를 낸 들녘
*장길리 복합 낚시 공원, 구남 낚시터
*바다 저편에 있는 섬까지 연결한 보릿돌교
*보릿돌교에서 바라본 파도치는 동해 바위
*구룡포성당의 성모님이여!
*호미곶 해맞이공원에서
*손가락 가락 사이로 들어온 호미곶 해님
*대보 저수지 가는 길의 동호사
*포스코 역사박물관에서
*'철강은 국력'포스코 역사박물관 방명록에 서명하고
*포항 송도해수욕장 자유의 여신상
왼쪽은 전날 저녁, 오른쪽은 다음날 아침
*포항 영일대 야경
*영일대의 아침
*영일대에 촬영팀이 등장하고
*쓸쓸한 칠포 해수욕장의 저녁
*돌담민박집, 노천 카페 라이브
*칠포의 아침
*칠포의 일출
*오도리 마을 풍경
*미역 말리는 어촌 풍경
*월포 해수욕장
*스킨 스쿠버 체험하는 여학생들
*화진 해수욕장의 오후
*서울 상경길 차창 밖으로 지는 해님
첫댓글 영일만 바다에서 트래킹화
건진 일은 두고두고
얘기할만한 실감나는 일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