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0] 윤영태(尹泳泰) - 고생과 축복 4. 온갖 비난과 고난을 딛고
1 그러나 동계 40일 전도 기간에 송상열(宋尚烈) 씨와 송영순(宋英順) , 김춘화(金春花) 식구 등 3명을 전도 임지에 내어보내는 날부터 동네가 발칵 뒤집혀졌다. 양반 집안이라는 송(宋) 씨 가문에서 들고일어나 핍박하기 시작했다.
2 때마침 치안국에서는 통일교회 전도대원을 단속하라는 공문이 각 지서에까지 하달되어 교회 방안에 붙여 놓은 포스터까지 순경이 와서 찢어갔고 서후면으로 전도 나간 두 아가씨들은 지서에 인사하러 갔다가 포스터와 전도지를 빼앗기고 집으로 당장 돌아가라는 호통을 당하기도 하였다.
3 송상열(宋尚烈) 씨 남매는 그 후로도 개척 전도활동을 계속했지만 가정에서는 그 부친이 사업에 거듭 실패하는 등 정신적으로 많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이웃과 친척들은 “자녀들이 통일교회에 쫓아다니고 집에서 교회를 하고 있으니 정신이상자가 되었다”라고 더욱 핍박하기 시작했다.
4 그런 상황에 또 시집간 둘째 딸이 몸이 불편하여 친정에 왔는데 제정신이 아닌 그 아버지가 눈이 펑펑 내리는 밤중에 쫓아버리니 가다가 저수지에 빠져 자살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모든 일이 점점 복잡해져 가고 있었다.
5 그렇다고 후퇴하게 되면 식구들은 다 떨어지고 다시는 발을 붙일 수가 없을 것 같아 끝까지 버틸 수 밖에 없었다. 상열(尚烈) 씨 남매가 전도 임지에서 잠깐 다니러 온 것을 큰 댁에서 알고 할아버지와 사촌들이 몰래 잡으러 왔을 때 겨우 피신시켜 식구 집에 숨겨 두었다가 새벽에 안동지역(安東地域) 본부(本部)로 도망가게 한 적도 있다.
6 송영순(宋英順) 양은 어린 나이에 낡은 운동화를 끌고 40리 길을 혼자서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니 장하다는 생각도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인도자의 책임감을 더욱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7 1962년 1월 다시 교회를 시장 부근으로 옮겨 전도활동을 했으나 너무 핍박이 심하여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러한 때에 맨 처음 풍산(豊山)에서 전도된 김종원(金鐘元) 씨는 어머니의 지독한 반대로 교회는 나오지 못하고 집에 있다가 결핵이 재발되어서 타계하고 말았다.
8 아들이 타계하자 그 어머니가 나를 찾아와 “아들이 죽으면 칼을 갖고 올려고 했는데 아들이 죽으면서 윤 선생님께 꼭 알려 드리고 원리 책을 무덤 속에 넣어 달라”라고 유언을 해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는 말을 하고는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날 아무도 들어가지 않으려는 방에 그의 어머님과 같이 들어가 간절히 기도를 하고 영혼을 위로했다.
9 따뜻한 새봄이 되어 다시 매곡동(梅谷洞) 나씨 집으로 교회를 옮겼다. 전도된 10여 명의 청년들을 수련시켜 하계 40일 전도 기간에 동원시켰더니 또 한 번 온 동네가 발칵 뒤집어졌다.
10 협회의 지시에 따라 나도 풍천면(豊川面)으로 하계 전도를 나가 뒷수습을 할 수 없어서 도중에 후퇴한 청년도 있었고 기간을 마치고 귀가한 청년 식구들도 심한 반대에 부딪혀 대부분 좌절되고 말았다.
11 나는 풍천면(豊川面) 중리(中里)와 갈전리(葛田里)를 전반 후반기로 나누어 30일간씩 미숫가루를 먹으면서 활동했다. 후반기 갈전리(葛田里)에 들어가서는 회관 처마 밑에 짐을 풀어놓고 3일 금식을 하면서 새벽에는 제일 높은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낮에는 방을 구하면서 가정 방문을 하였다.
12 일주간 돌아다녀도 방을 구하지 못하였으며 3일 금식이 끝난 후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밀가루 풀을 끓여 먹기도 했다. 며칠 후 풍산(豊山) 식구들이 좁쌀을 몇 되 가지고 와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13 잠잘 곳이 없어서 동회관 처마 밑의 좁은 마룻바닥에서 가마니 한 장을 깔고 덮고 자다가 비가 오면 옷이 다 젖기도 하였다. 일주일 후, 느티나무 밑에 흑판을 걸어 놓고 원리 강의를 하면서 열심히 전도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나의 소문이 차차 퍼지자 면의원이 식사를 며칠간 제공해 주고 이장의 도음으로 방을 구할 수 있었다.
14 그날 저녁에는 이장댁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취지를 설명하고 문맹퇴치운동(文盲退治運動)과 함께 전도활동을 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곳에서 감리교회(監理教会)에 다니는 이찬주(李燦周) 씨 모자를 전도하고 청년 4명을 40일 협회 수련회에 참석시킬 수 있었다. 풍산(豊山), 풍천(豊川) 두 교회를 개척하고 구역장으로서 양쪽 교회를 인도하게 됐다.
15 그 무렵 군 입대 영장이 나왔다. 식구들은 인도자가 없이는 신앙을 지키기 어려울 것 같이 생각하였고 나도 역시 식구들과 떨어져서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막상 예비 신체검사를 받았을 때 불합격으로 판정받아 귀임하게 되었으나 한편 송별해 주시기 위해 대구에서 300여 리를 오토바이를 타고 오셨던 이요한(李耀翰) 지구장님께 미안스럽기도 하였다. 할 수만 있으면 3년 노정을 끝내고 입대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16 1963년 3월 10일 자로 다시 군입대(軍入隊) 영장(令状)을 받고 안동지역(安東地域) 수련회(修練会)에 10여 명 식구를 인도하여 참석하였다. 수련생을 돌보다가 어머니가 병석에 계심을 알고도 찾아뵙지 못했다.
17 입대하기 전날 들리려고 했는데 마침 3월 9일 선생님께서 영주(栄州) 지방으로 사냥을 오셨다는 소식이 왔다. 입대 전 꼭 뵙고 싶어서 저녁차를 타고 황인태(黄仁泰) 영주지역장(栄州地域長)님과 같이 영주에 도착하였으나 밤이라 찾아 뵐 수 없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음날 새벽 첫 버스로 논산훈련소(論山訓練所) 수용연대(収容連隊)에 들어가게 되었다. 왜 그렇게도 뵙고 싶은지 탈영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나의 3년 복무기간은 시작됐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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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尚烈
宋英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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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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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燦周
豊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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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仁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