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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서대장
족할 줄 아는 아는 성도가 받는 복. 잠30:15-16
오늘 주신 말씀 잠30:15말씀을 중심으로 [족할 줄 아는 성도가 받는 복]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 안에서 평안하시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어 자녀 삼아 주시고, 자유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거처할 집과 먹고 살 양식과 좋은 교회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은 요즘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는 7조원에 달하는 저축은행 부조리를 보며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에 2천5백만 원의 월급을 받고 어떤 사람은 회사에 입사한다고 수억을 받기도 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들고 지치게 일해야 겨우 기 백만 원을 받아 드는 일반서민들에게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절대빈곤층이 점점 늘어나고 상대적 빈곤층으로 전락한 중산층이 점점 불평불만 세력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똑 같이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사회불안은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손해입니다. 모두가 잘 사는 나라, 더불어 함께 행복한 나라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욕심이 잉태한즉 죄악을 낳고 죄악이 장성한즉 사망에 이르니라는 말씀을 과욕으로 인한 패가망신을 하거나 욕심을 부리다가 실패한 사람들에게 쓰곤 합니다.
왜 서두에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시지요?
수천억을 가지고 있으면 자녀들이 언제 죽나하고 유산에만 눈독을 들이지 정작 부모님에게는 무관심하고 무정한 것이 세태입니다.
수조 원을 가지고 있다 해서 하루 세끼 밥 먹지 5끼 먹지 않고 한 개의 침대에서 자지 동시에 열 개의 침대를 쓸 수 없으며, 한 남자 한 여자와 결혼해서 사는 것이 행복이지 동시에 여러 여자 여러 남자를 관계하면 짐승이지 사람 취급받지 못합니다.
결국 돈이 많으면 그만큼 근심걱정이 많다는 것이고 할 일이 많다는 것이지 ,더 행복하거나 더 안전하거나 더 사랑받거나 더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다오 다오]는 개역성경에서 다고다고라 번역했던 말입니다. 영어로 give give입니다.
구약성경이니까 히브리어로 יָהַב (yahab) 인데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주다(창29:21,욥6:22), 두다 ,넣다(삼하11:15), 오라! 지금오라, 가라(창11:3, 출1:10)라고 사전에 뜻이 정의 되어 있습니다.
LH 이전을 진주로 확정하고 나니까 그쪽 관계자 한 사람이 연금관리공단을 전주로 이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정말 이 사람들은 거머리같이 탐욕이 과한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거머리 같은 사람이란 결국 정상적으로 월급을 받는 앞 빨판이 있고 뒤에서 뒷돈 검은 돈 빨아먹은 큰 빨판을 가지고 무지막지하게 탐학질하는 탐관오리들과 왜 이렇게 똑 같을까요?
국토균형발전을 위한 혁신도시지방 분산은 LH 세수가 254억인데 연금관리공단 6억짜리 주고도 그것 마저도 내 놓으라하는 사람들은 결국 모두 자기들이 독차지해야만 성이 차는 아귀 같은 탐욕스러움은 다고 다고 하는 거머리 같은 존재들이라 할 것입니다.
1930년대 조선에 기독교가 들어와 무서운 속도로 전파되며 독립운동과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것을 보고 일본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대항마를 키운 것이 불교진흥정책입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은 30만, 불교인은 10만에 불과했는데 기독교를 저지하기 위해 불교를 지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일본식불교 지원은 일본과 거리가 가까운 경상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대통령의 개발독재도 이 지역에 집중 투자하여 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해방 당시 경제와 인구가 비슷한 수준이었던 두 지방은 결국 경상도 지역에 비해 호남은 인구가 40% 경제규모는 30%대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경제적으로 예속하기 위해 각종 부조리한 방법들을 사용하고 직접 방한 하여 전수하였으며 그 결과 아직도 부패공화국의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의 불교진흥정책은 자연공원법, 불교테마공원, 템플스태이등을 통해 오늘까지 확대 재생산되어 계승 발전시키고 있으니 정말 성공한 정책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경상도지역의 복음화율이 20%가 넘어야 대한민국이 부패공화국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지역 복음화가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정치적으로 승자가 되었다고 독식하면서도 더 달라고 머리 빡빡 깍고 투쟁한다고 지자체장들이 투쟁을 선언합니다. 그 모습들이 영낙 없이 다고다고 하는 거머리 모습을 닮아도 너무나 닮은 것 같아 너무 안타깝습니다.
특정지역을 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첨단 과학단지는 원래가 충청도 몫입니다. 과학벨트 예산이 대구가 광주의 두 배가 되는데도 적다고 볼멘 소리하는 저들이 너무나 다고 다고 하는 거머리 같아 보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 주신 은혜에 만족하며 균형감각을 가지고 정의를 실현하며 바르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스스로 족할 줄 아는 분수를 아는 성도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첫째로 현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라 (잠30:15-16)
족한 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을 거머리에 비유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제 모내기철이 되었는데 모내기 하면 떠오르는 것이 거머리입니다.
고래실논에 들어가 모내기를 하거나 논정리일을 하다보면 언제 붙었는지 거머리가 종아리에 붙어 피를 빨아먹고 있습니다.
조금만 늦으면 풍선처럼 터질듯 빨아먹은 거머리를 보고 깜짝 놀라 떼어 버리기 십상이죠.
거머리는 머리와 꼬리에 두 개의 빨판이 있어 살짝 붙어 피부를 녹여 통증없이 입을 틀어박고는 배가 터질 정도로 빨아 먹습니다.
300여종이 있는데 몸 앞 끝에 입을 지니고 있는 작은 흡반(吸盤)이 있고, 몸 뒤끝에는 큰 흡반이 있으며 몸은 34체절로 되어 있습니다.
몸길이는 20㎝에 이르기도 한다. 주로 민물과 육상에 살지만 문질목(Rhynchobdellida)에 속하는 것들은 바다에도 삽니다.
포식성이거나 유기물 부스러기를 먹거나 기생성이며 두통, 정신병등 피를 빼야할 때 의료용으로도 쓰이기도 합니다.
거머리가 몸 앞과 뒤 끝에 흡반을 가지고 피를 빨아먹는 것이 마치 흡혈귀를 연상케 하여 탐욕을 상징하는 생물이 된 것입니다.
두 딸은 당시 [알루카]라는 악마가 두 딸을 이용해 많은 생명을 쉬지 않고 잡아먹었다는 전설에서 나온 말입니다.
거머리가 두 빨판으로 온 몸이 부풀어 올라 풍선처럼 되면서도 계속해서 피를 빨아대는 모습이 만족하지 않는 인간의 탐욕, 잔혹스런 탐욕을 표현하고 있으며, 거머리 앞뒤 두 빨판을 알루카의 두 딸로 부르기도 한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속성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탐욕입니다.
본 구절은 회화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의 죄성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의인화하여 거머리와 두 딸로 표현하여 그들의 계속적인 외침이 [다오 다오]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다오 다오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외침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인간의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기에 계속 더 결핍을 느끼게 됩니다.
탐욕을 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자족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끝없는 탐욕을 보여주는 예로써 네 가지를 말합니다.
이 네 가지가 족한 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음부는 창세 이후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죽어도 이제 만원이니 그만 죽어라 하지 않고 만족함이 없이 계속해서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태는 그 당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이기에 아이 잉태하기를 바라며 갈급함이 뼈에 사무 쳤기에 90된 사라도 죽은 것 같은 몸에서 아이를 잉태하고 기뻐 춤춘 것입니다.
물로 채울 수 없는 땅이라는 것은 중동지역의 메마른 땅에 이슬이나 우기에 내리는 비로 감질만 날뿐 지역일대가 홍수에 잠기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죠. 사막과 메마른 땅이 비가 내리자마자 흔적도 없이 빨아드리는 모습을 말합니다.
[족하다 아니하는 불]은 불은 태울 것이 있으면 있을수록 좋지요. 다다익선이라고 많으면 많을수록 잘 타는 것이 불입니다. 있는 대로 제한 없이 아낌없이 태우는 것이 끝을 모르는 인간의 탐욕 같다고 말합니다. 태울 것이 있는 한 불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파괴하고 소멸하기 전에 멈추지 않듯이 인간의 탐욕이 끝도 없고 멈출줄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속성이 파괴적입니다.
딤전6: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말씀처럼 인간의 탐욕에 대한 유일한 해결 방법은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자족한다는 것은 결국 만족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생활필수품의 종류나 능력 성능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산이나, 자신의 몫의 넉넉함을 보이는 마음의 구조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며 느긋해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느 글에서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는데 어떤 때일까요?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사사로운 마음이 없는 사람, 속되지 않고 진실한 사람은 하늘처럼 맑아 보이는 사람일 것입니다.
억만금을 가진 사람도 부럽지 않은 보화를 가진 사람, 탁한 세상을 맑게 정화시키는 샘물같은 사람은 자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온통 사람들이 탐욕에 빠져 어떻게든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더 많이 소유하려고 눈이 빨개져 있을 때, 세상탐욕을 살짝 비웃어주며 자연을 벗 삼아 인생을 노래하고 사랑의 기쁨으로 행복한 사람은 하늘처럼 맑아 보이는 사람은 바로 자족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물먹고 물마시고 풀밭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줄 아는 멋있고 아름다운 사람은 만족할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때 그 사람에게서 나는 예수의 향 기, 하늘 냄새를 맡기 원합니다.
하나님 주신 분깃으로 만족하며 순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여유가 있고 느긋해 합니다. 물질이나 권세 때문에 아웅다웅 안절부절하지 않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고 오늘은 오늘 주어진 일에만 최선을 다 하며 오늘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사는 멋진 성도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땅에 오셨고 나를 구해 주시려고 십자가 지신 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즉 우리가 살아갈 모든 삶의 요소인 공기와 물과 온도와 자연을 하나님의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거운 짊을 짊어지고 힘겨워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주신다.
고민으로 죽게 되었다고 체념하고 절망하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내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맡기기만 하면 그 모든 문제와 고민을 그분이 때를 따라 적절하게 해결하고 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부터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즐거워하며 기쁘게 편하게 삽시다.
탐욕으로 세상 모든 걱정 근심 염려 고민 혼자하며 못 살겠다 죽겠다 못해먹겠다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친 서민정책, 민주화와 복지정책 등 괄목한 만한 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못해먹겠다][나 한사람 없어지면 해결될 일] 자살한 한 것 때문에 그는 실패한 대통령이요 패배자 이기주의자 일뿐입니다.
꿈과 비전과 용기를 가지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내 모든 삶은 내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께서 내 안에서 나를 조정하시는 주님의 삶임을 인정하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가볍고 시원하게, 편하게, 자유롭고, 느긋하게 자족할 줄 알며 향기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족할 줄 아는 분수를 아는 성도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둘째로 주의 말씀을 나에게 먼저 적용하라. (삼하11:14-15)
밧세바와 간음을 한 다윗은 밧세바가 임신했다는 말을 듣자 우리아를 불러 밧세바와 동침하게 해서 간음사실을 감추고 우리아의 아이라고 우기려던 비열한 간계가 실패하자 이제는 요압에게 편지해서 우리아를 최선봉에 내보내어 죽게 하라는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들려 보냅니다.
점입가경입니다. 해도 해도 너무 합니다.
다윗은 평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고 이를 시기한 수많은 사람들이 함정을 파놓고 다윗을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구해 주셨습니다.
시7:15“ 저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는 찬양이 떠나지 않던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윗이 함정을 파놓고 우리아를 죽이라는 편지를 우리아의 손에 들려 보내다니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요?
이러한 행동은 아흔 아홉 마리 가진 다윗이 한 마리 가진 우리아의 처까지 빼앗으려 갖은 음모와 술수를 저지르고 있는 추악한 다윗을 봅니다.
우리 속담에 아흔 아홉마리 가진 사람이 백마리 채우게 한 마리 달라며 빼앗아간다는 말처럼 탐욕스런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웃의 실수는 내 앞에 있고 내 실수는 등뒤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한 사람의 속성을 꼬집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신앙의 세계에서 이러한 경향이 있습니다.
스스로 말씀을 잘 안다고 신앙생활 잘 한다고 율법을 안다고 자랑하고 있진 않으시는지요?
다른 사람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모든 말씀과 판단을 자기 가면을 쓰고 자기 가면 속에 숨어 제 눈에 안경이라고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예단하고 비평하진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 말씀은 oo집사가 들어야 되는데 하필이면 오늘 안 나왔대, 하는 사람
‘그 말씀은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이 잘하면 되지 우리는 상관없어’하는 분들은 없으신가요?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시지 못하셨으며 설령 보셨다고 해도 이정도는 용서하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관대해져 마치 자신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제외되고 축복만 받을 사람인양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판단 경험과 다른 설교가 선포되면 그것도 설교냐고 눈을 감고 듣지 않거나 눈에 쌍심지를 켜고 화를 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이나 선인 모두에게 햇빛과 비를 내려 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셔서 믿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는 참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믿음이란 정말 진실로 확실히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믿거나 생각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믿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믿는대로 행동이 수반되어야 비로소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자기 생각이 믿음으로 구원 받는 다는 진리보다 크므로 쉽게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반은총을 주시어 문화를 발전시키고 세상 법을 정의롭게 개혁하고 의술과 과학을 발전시켜 주시어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 믿지 못하여 죽음에 이르는 악한 상황들을 연기시켜 주시고 보완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축복이나 심판에 대해 나만 예외 되었다거나, 오직 나만, 우리 교회만, 우리 교단만 구원을 독점했다는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적용할 때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지 말고 그 잣대를 자기에게 먼저 적용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 비추어보면, 자기의 추한 모 습 잘못된 모습 허접한 모습 모순된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먼저 비추어 볼 때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 내 죄가 얼마나 크고 더러운 존재인가 비로소 자기분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말씀으로 판단하고 예단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자기를 말씀으로 비추어보고 자기 부족한 것과 죄악된 존재를 확인하고 회개에 이르러야 합니다.
롬2:1“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게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라는 말씀을 기억해야합니다.
나는 심판에서 제외되고 너는 심판 받을 존재라는 혼자 독야청청 하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말씀 앞에 자신을 먼저 비추어 보고 똑바로 온전히 바로 섬으로 티 없고 부끄러움 없는 온전한 모습으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당당한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스스로 족할 줄 아는 분수를 아는 성도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셋째로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신본주의적 삶을 살라. (창11:3-4)
창11장은 노아 홍수 이후 시날 평지에서 흩어짐을 면하고 인간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기 사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서로 의론하여 말하기를 벽돌을 구워 만들어 성과 대를 쌓아 대를 하늘 꼭대기까지 쌓자고 했습니다.
이들이 바벨탑을 쌓기 시작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오직 인간들만의 뜻과 의론의 결과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벨탑 사건은 인본주의 사고의 부산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르레상스 이후 휴머니즘이 대단한 것으로 존중되고 귀히 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본주의로 살라 말씀하시는데 세상은 휴머니즘이 최고라고 자랑하고 인본주의로 살라 요구 합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의 부산물입니다.
바벨탑을 건축한 목적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창9:1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계획과 행동 곧 인본주의적인 노력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이 없다는 세상 사람들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무서운 인본주의는 항상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 외우고 지키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종교재판으로 지구가 둥굴다 주장하는 갈릴레이를 죽인 사람들은 로마교황청입니다.
수 많은 흑인들을 짐승처럼 잡아서 아메리카로 팔아넘긴 악랄한 노예상들은 다 예수 믿는 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흑인들을 보며 저런 짐승 같은 것들은 지옥에 갈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던 그리스도인 백인들이었습니다.
중국에 아편을 통해 인간성을 황폐하게 만들고 자금성 소방솥의 금까지 벗겨가고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간 사람들은 다름 아닌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영국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러한 인본주의는 비록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은 실패하고 그로 인해 씻기 어려운 고통만 받게 된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던 이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시므로 인간들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참 이때 이들이 바벨탑만 쌓지 않고 알아서 오대양 육대주 남극 북극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로 각각 흩어졌다면 요즘 이렇게 영어교육 때문에 골치 아프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 많은 언어교육에 투자되는 시간과 경비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들의 자기 이름을 내려고 했던 욕심이 오늘 우리에게 엄청난 경비가 들게 하고 노력 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탐욕을 버리고 스스로 족한 줄 알고 분수에 맞게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겠지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 대신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는 세상사람, 아니 성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 노회 총회 기독교 단체 안에서 하나님을 제거하고 사람의 계획 생각 판단으로 사업을 진행하려는 인본주의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 정치적인 권모술수로 각종 이권 찬송가 공회, 성경발간등에 개입합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독교단체는 금권선거로 타락했습니다.
한기총이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동춘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합니다.
금년 5월 15일 스승의 주일은 스승의 주일로 지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스승이 되어야 할 목회자들이 너무 많은 비리와 죄로 인해 비난 받고 있는 현 상황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랍니다.
혹시 방송이나 언론 매체 등을 통해서 목회자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를 듣게 되면 [저런 것들이 목사라고...]하며 욕하거나 비난 하지 마시고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보고 신앙생활하지 마시고 우리의 영원한 참 스승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믿으며 나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 원합니다.
내 자신의 이름과 명예의 탐욕을 쌓은 바벨탑이란 인본주의적 계획과 생각과 행동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름만을 전하고자 전진하는 신본주의적 삶을 살아가는 온교회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스스로 족할 줄 아는 아는 성도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첫째로 현재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라 (잠30:15-16)
둘째로 주의 말씀을 나에게 먼저 적용하라. (삼하11:14-15)
셋째로 하나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신본주의적 삶을 살라. (창11:3-4)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소중한 날입니다.
가장 귀한 은혜의 말씀을 주신 날입니다.
내가 받은 은사 내가 받은 축복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내 가정 내 교회, 내 나라가 정말 귀하고 소중해서 꼭 지키고 발전시키고 부흥시키고 번성케 하고 하나로 통일시켜야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족할 줄 아는 성도,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사는 성도에게 더 좋은 것을 예비하시고 항상 함께 하시며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는 놀라운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현재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성도는 복을 받습니다.
모든 말씀은 남이 아니라 나에게 먼저 적용하여 부끄러움 없는 성도로 바로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온전한 하나님 중심적인 신본주의 삶을 살아내는 성령충만 은혜 충만한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