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부모님
어머니의 등불
유인석
내가 태어나 성장한 곳은 두메산골이었다. 6.25 전쟁이 휴전될 무렵 내가 전학한 중학교까지는 편도(片道) 6km 이상이나 먼 거리였다. 14살 중학생이 통학하기엔 너무나 멀고 험한 길이었다. 등굣길은 지각도 많이 했고, 하굣길은 툭하면 밤길이었다. 해가 짧은 10월경부터는 6시간 공부가 끝나면 이미 해가 져서 어둑했다.
종례(終禮) 마치고 종종걸음쳐도 집에 오면 늘 밤중이다. 통학 거리가 가까운 읍내에 사는 친구들이 항상 부러웠다. 재잘대던 친구들과 하나둘씩 집 가까운 순서대로 중간에서 헤어지고 나면 맨 끝에는 나 혼자 깜깜한 산 고갯길을 넘게 된다. 돌부리 나무뿌리에 채이고 넘어지며 고갯길을 넘으면 어린 몸에도 등짝에 땀이 밴다.
달빛도 감춰버린 그믐쯤이면 산 고갯길은 더욱 호젓하다. 길섶에서 부스럭 소리만 나도 깜짝깜짝 놀랜다. 밤에 걷는 산길은 왜 그리도 무섭던지…. 가끔 건너편 바위산에서 들려오는 부엉새 울음소리는 더욱 음산했다. 겁쟁이 소년의 밤길에 두려움은 더욱 무거웠다. 고갯길에 올라서면 등잔불빛 도란대는 우리 동네 밤 풍경이 빤히 내려다보인다.
그때는 면(面단)위에 공립 국민학교 1개, 군(郡) 단위에 공립 중·고등학교가 1개씩뿐이었다. 내가 진학한 중학교는 읍내 외곽 남쪽 공동묘지 터에 지어진 지 얼마 안 되는 우리 지역 최초의 공립(公立) 중학교였다. 운동장을 만들기 위해 학년별로 매주 1회씩 공부가 끝난 후 개인별로 면적을 할당해 주고 책임제로 흙을 파내도록 했다.
책은 교실 책상 위에 놓아둔 채 책가방을 들고 나가 흙을 파 날라야 했다. 할당 목표를 채우려면 어두울 때까지도 작업을 계속했다. 작업량을 채우고 나면 늦가을 짧은 해는 이미 어두워 읍내에 나오면 전깃불이 환했다. 교복에 흙투성이가 된 열네 살 중학생인 내 모습이 초라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터덜터덜 집으로 오는 길은 산골 통학생의 슬픔이었다.
우리 동네에서 중학생은 나 혼자였기에 더욱 외로웠다. 읍내에 사는 친구들보다 항상 교복도 남루했고, 학용품도 가난했다. 추우나 더우나, 또 눈이오나 비가 오나 남들보다 많이 뛰고 달려도 번번이 지각이다.
어느 날이다. 그날도 운동장 터 흙 파내기 작업을 마치고 하교시간이 늦은 날이었다. 허덕허덕 무서운 산길 등성이에 올라서니 저 아래 모퉁이 길 솔숲 사이로 등불 하나가 반작댄다. 고개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초승달은 이미 기울어졌고 별빛들만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허기진 배는 더욱 고파온다. 가까워지는 등불이 내둘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린다. 분명 어머니 목소리다.
어머니~, 소리쳐 대답하고서도 괜스레 울음이 복받친다. 어디로 숨고 싶은 철없는 반항심도 생긴다. 등불에 흙투성이가 된 내 모습을 본 어머니가 “너 누구랑 싸웠느냐?”라며 다그치신다. 길거리에서 싸움질이나 하느라 늦은 줄 아신다. 나는 서러움에 복받쳐 울기부터 했다. 집에 들어가니 영문도 모르시는 아버지는 호통부터 치신다.
“초년의 고생은 사서도 하랬다.” 라는 옛말은 그때부터 익힌 아버지의 교훈이다. 다음날 아버지가 나도 모르게 우리 학교 교장실에 찾아가 어젯밤 사정을 이야기하셨던 모양이다. 오후 2교시 영어 시간이다. 나를 데리러 오신 담임 선생님 따라 영문도 모르고 교장실까지 갔다. 교장실까지 불려가 보기는 처음이다.
교장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며 “통학 거리가 머니 방과 후 운동장 작업을 면제시키라”라며 담임 선생님께 당부하신다. 바로 그날이다. 6교시 공부가 끝난 종래시간에 담임선생님이 61명 학급생 전원에 대한 통학 거리조사를 한다. 1학년 3반에서 나보다 먼 거리 통학생이 2명이나 더 있었다.
그날 이후 운동장 조성 공사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일은 없어졌다. 산골에 사는 초라한 학부모의 한마디가 교장 선생님의 생각을 바꾼 것이다. 그 이후부터 나는 아버지에 대한 무언의 존경심이 더 두터워졌다. 잠재의식 속에서 각인돼 있던 먼 통학 거리 불평도 차츰 지워지고, 가난한 집안 형편도 탓하지 않았다.
그날 밤 이후 어머니의 등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내 인생의 등불이 됐다. 중학 졸업 후 진학한 고등학교도 비슷한 거리인 읍내 변두리에 있었다. 점점 자라면서 밤길도 익숙해졌다. 어두우면 달빛별빛이 모두 친구가 되고, 배고프면 길가 남의 밭에 지천인 무나 고구마 한 뿌리씩 캐 먹으며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
통학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 때는 산 아래 모퉁이 길 나무숲에서 반짝거리던 그날 밤 어머니 등불을 떠올리곤 했다. 이젠 아버지도 가시고 어머니도가신 지 오래다. 14살 어린 중학생 때 어머니가 마중하시던 산길 속의 등불이 아직도 내 가슴 속에서 비추고 있다. 평생 험난한 세상사, 곡절 많은 인생사 모두 거쳤어도 어머니의 등불은 꺼지지 않는 내 인생의 영원한 등불이었다.
첫댓글 격월간 그린에세이
2025년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