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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 Romantic art : 浪漫主義美術 )
낭만주의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전 유럽에 탄생한 예술적 경향이다. 개성을 구가하고 자아의 해방을 주장하며 상상과 무한적인 것을 동경하는 주관적·감정적인 태도가 두드러진 특색이다. 미술상으로는 고전주의, 바로크에 대해서도 이 경향은 언급되지만, 일정하고도 명확한 양식을 낳은 것은 아니다. 조각 분야에서는 프랑스와 뤼드, 건축에서는 이른바 신고딕 양식과 상통하는 바가 있는데, 회화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낭만주의'란 용어는 '영국식 풍경정원(English landscape garden)'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즉 1745년에 프랑스人 르블랑(J. Leblanc)은 [일부 영국인들은 정원을 소위 낭만적인 모양으로 꾸미려고 애쓰는데, 이말은 생생하게 꾸민다는 것과 거의 같은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풍경정원으로 인해 흔히 영국은 낭만주의의 발상지로 인정된다. 영국 풍경정원은 주로 끌로드 로렝의 그림에서 유래한 것으로, 구불 구불한 작은길, 불규칙한 수목 배치, 비스듬한 강둑, 무계획적으로 보이는 호수나 개천 등 '계획된 불규칙성'을 통해서 자연 그 자체 위에 그것을 투영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서는 헨리 플리트크로프트(Henry Flitcroft)와 헨리호어(Henry Hoare)의 [아폴로 신전이 있는 대정원](1744-65, 영국, 스투어헤드)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예술품답게 보이지 않도록 의도한 예술품'인 풍경식 정원은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었던 예술성과 현실성과의 구별을 불명확하게 하였으며, 단지 정원 설계의 새로운 방법으로서만이 아니라 낭만주의적 정서의 전달 수단으로서도 환영받았던 것이다.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 존주에 대한 반동이라는 형태로, 프랑스의 그로에서 시작되어 제리코를 거쳐 들라크루아에 이르는 동안 분방한 색채, 유동적인 필치, 동감에 찬 구성을 갖춘 영웅적 작품을 남기고 있다.
특히 들라크루아의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를 비롯한 그의 작품은 들라크루아의 동방 취향 또는 이국 취미에 의한 후기 작업으로 낭만주의의 한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낭만주의의 이와 같은 특색은 회화사상 독일 중세 혹은 초기 르네상스의 종교적 정열과 결합된 작품, 나잘레파, 룬게, 프리드리히의 범신론적 풍경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20세기 미술에 있어서 낭만주의는 보다 복잡다단해서 19세기의 그것처럼 크게 분류될 수는 없다. 비합리적이고 공상적인 예술은 어떤 면에서 낭만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일지 모르나 결코 그렇지는 않다. 공상만을 즐기는 낭만적인 경향, 혹은 감상적이라는 의미에서 현대 미술의 낭만주의자를 든다면 장 뤼르사, 레오폴드 쉬르바지등이 있으나 이들의 공상은 초현실주의와 같이 비유, 암시, 변모가 아니라 단지 신선하고 아름다운 화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정도이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즘, 특히 나폴레옹 제정을 정점으로 대혁명 전후에 걸친 신고전주의의 딱딱하고 까다로운 규범에 거세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나 로마적인 고전을 버리고 중세와 민족적 과거, 특히 고딕양식을 지향하게 되고, 오리엔탈리즘을 단순한 이국취미 이상으로 승화시켰으며, 자기의 상상력과 숭고한 비장감, 조국애, 인간과 자연과의 융합감 등의 감정 표현, 즉 들라크루아가 말한 ‘순수한 환상(幻想)’ 을 자유분방(自由奔放)하게 발휘하고 표출시켜나갔다. 이렇게 해서 그들, 특히 프랑스의 낭만파들은 이념보다는 현실에 밀착해서 시사적인 문제나 역사적인 사건, 또는 셰익스피어나 바이런 등의 문학에서 얻은 제재에 정열을 기울여 서사적·서정적인 파토스적 세계를 즐겨 그려내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시대정신이며, 그 운동인 낭만주의는 미술상에서는 고전주의에 대립하는 것이지만, 고전적 양식 또는 바로크 양식과 같은 독자적인 명백한 양식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술의 각 분야에서 각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낭만주의 회화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그려지는 것, 곧 주제보다는 그리는 방법, 즉 주체적 방법 또는 주관적 표현에 있다.
부드럽고 생생한 표현양식은 고전주의와는 전혀 대조적으로 극히 유동적이고 약동적이며, 극적인 움직임과 안에서 우러나오는 힘의 인상을 만들어 낸다. 형식보다는 표현이 선행되고, 딱딱한 선이나 단정한 형태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것으로서의 산뜻하고 강렬한 색채를 우선시킨다. 이리하여 오로지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추한 것까지도 그려내는 것이다.
낭만주의 회화는 이성이나 자연이라는 이름 아래 바로크의 ‘꾸민 듯한 것’에 대한 반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 견해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한 사람은 그리스 미술의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성’이라는 말을 한 미술사가 J.빙켈만이다. 그의 생각은 프랑스의 화가 비앙과 로마에 있던 독일의 화가 멩스, 스코틀랜드의 해밀튼 등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낭만주의 회화의 요소는 이미 J.미셸의 풍경화, 지로데의 인물화, 그로의 전쟁화, R.보닝튼의 풍경화 등에 선구적으로 나타나 있었으나, 1818년 [메뒤즈호의 뗏목]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T.제리코에 의하여 분명히 제기되었고, 낭만파의 거장인 들라크루아에 의하여 승리를 거두게 된다. 24년은 들라크루아가 살롱에 출품한 《키오스섬의 학살》로 명성을 얻는 해가 되었다. 이때 고전주의의 완성자 앵그르의 [루이 13세의 성모에의 맹세]도 [키오스섬의 학살]과 함께 출품되었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고 보수주의자들은 회화의 학살이라고 비난했으나,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열광적으로 환영함으로써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앵그르와 들라크루아는 자타가 공인하는 라이벌이 되었고, 양극을 걷는 이 두 사람의 예술 경향은 양파로 갈라진 비평가들에 의해 부채질됨으로써 파리의 화단을 둘로 갈라놓게 하였다. 그리고 31년에 살롱에 출품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들라크루아는 혁명의 영광을 선양했고, 위고나 보들레르와의 친교를 통해서 낭만주의 문화혁명 속에서 문학이나 연극과 긴밀히 교류하였다. 이 밖의 주요한 화가들로는 A.셰페르, B.웨스트, 코플리, 스텁스, 퓨슬리, W.블레이크, A.카즌스, J.컨스타블, A.터너, 드베리아, P.유에, 그리고 바르비종파(派)의 H.루소, 드비니, 밀레, 코로 등과 고야, H.도미에 등이 있다. A.J.그로와 T.제리코 등도 낭만주의적 영웅을 그 작품에서 보여주었다. 독일에서도 영국과 마찬가지로 풍경화는 낭만주의적 회화의 가장 훌륭한 성과였으며, 그 밑바탕에 있는 생각도 때로는 놀라울 만큼 닮은 것이었다. 독일 최고의 낭만파 화가는 C.D.프리드리히였다.
낭만주의시대의 조각의 발전은 회화가 발전한 자취를 그대로 좇았다. 조각은 회화나 건축의 경우보다는 훨씬 덜 모험적이다. 조각의 독특한 장점과 그 공간을 채우는 확고한 현실성은 낭만주의적 기질에는 적합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낭만주의 미술에서 조각은 회화만큼 화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낭만주의적 이상에 가장 가까운 개성을 가진 프레오 같은 조각가도 있었다. 그 외에도 단젤스, F.뤼드 같은 사람이 있고, 동물 조각가인 A.바리도 유명하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의 작가와 작품은 체질적으로 조형적인 데 비하여, 독일의 낭만파들은 극히 관념적이며 문학과 방식을 같이 하여, 낭만적 심정이나 정취를 담은 풍경화에 인간과 자연과의 친화력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국민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는 나자레파의 오베르베크, G.샤도 등을 비롯하여 리히터, 슈빈트 등과 초상화가 룬게 등을 들 수 있다. 영국에서는 블레이크, 컨스타블, 터너 등이 신비적인 자연을 표현하였고, 프랑스에서는 그로, 제리코를 거쳐서, 들라크루아에 이르러 낭만파회화를 대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자유분방한 색채, 유동적인 필치와 극적인 주제와 구도를 가지고 신고전주의와 대결해 마침내 낭만주의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초기 낭만주의 운동의 성장에 큰 기여를 한 화가로서 베저민 웨스트 (Benjamin West, 1738-1820)와 존 코플리(John S. Copley, 1738-1815)를 들 수 있다. 전자의 작품 중 [울프장군의 죽음](1770)은 영웅적인 인물의 태도·표정, 바로크적 명압법에 의한 극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하며 후자의 [와트슨과 상어](1778)는 정확한 세부묘사, 감정적 표현, 한 사람의 모험에 성서가 전하는 이야기의 정서적이고도 상징적인 성질의 반영이 나타나 각각 낭만주의의 특성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존 헨리 퓨슬리(John Henry Fuseli, 1741-1825)의 [악몽](1785-90)에서 볼 수 있듯이 어두운 심리의 깊숙한 내면에까지 미칠 수 있었다. 그는 환상적인 주제, 에로티시즘이 가미된 밤풍경, 마술적인 장면, 세익스피어의 주제를 선호했다. 비슷한 시기의 윌리암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는 판화나 퓨슬리의 영향을 통해서 미켈란젤로와 매너리스트적인 모티프의 폭 넓은 영역을 확보하였으며 중세에 대해 열광, 르네상스 이전의 포름을 부활시켰다. 그의 [천지창조주](1794)에 보이는 인물은 매너리즘에 근원이 있음과 동시에 콤파스는 신을 세계의 건축가로 여기던 중세의 관념에 의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신은 이성의 힘을 의미하며, 시인은 그 이성의 힘을, 비전과 영감을 질식시키는 것,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파괴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내면에 있는 눈'을 가장 중요게 여겼으며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것에 물든 신비한 광경에 몰두했다.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는 블레이크에 앞서 이러한 환상세계를 표현한 중요한 화가로서, 후기 로코코의 흐름을 탄 그의 초기 작품들은 프랑스 혁명을 고비로 계몽주의·자유주의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였다. 그는 중년과 노년에 특히 인류의 본질적인 사악함과 광기 어린 잔혹성에 관심을 쏟았으며 대단히 정교하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사실주의에 뿌리를 둔 기괴한 이미지로 그러한 불길한 환상을 표현하였다. 그의 [보바빌리콘](1818)은 주관적으로 경험되는 공포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영국식 풍경정원은 영국의 '풍경화'에서 더욱 예술적 표현을 일구어내게 되었는데, 특히 존 로버트 카즌즈(John Robert Cozens, 1762-99)에서 비롯된 수채화의 발명은 그 연약함과 투명성, 순수성, 밝고 재빠르며 쉽게 다룰 수 있는 기법상의 특징으로 인해 화가들로 하여금 풍경화에 감돌고 있는 장면의 서정적 직관과 화가-자연 사이의 끊이지 않는 심비한 교감을 더욱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듯 폭넓고 자유로우며 또한 개성적인 묘법에 도달했던 대표적인 영국 풍경화가로서 존 콘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과 윌리암 터너(William Turner, 1775-1837)를 꼽을 수 있다. 콘스터블은 풍경화란 관찰할 수 있는 사실에 입각해야 하며, '자연효과의 순수한 지각을 구현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헴프스테드 히이드](1821)에서 나타나듯이 풍경의 구체적인 세부보다도 하늘이나 빛, 대기의 상태 등에 더욱 관심을 가져, 순간적으로 변화해가는 효과를 기록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비해 수채화가로 출발한 터너는 회화적인 것과 숭고한 것, 즉 산이나 바다 또는 역사적 사건과 결부된 광경을 택하여 환상적인 일몰이나 신비한 빛, 자연의 난폭한 폭발, 묘사적 효과를 추구하였다. 그의 [폭풍 속의 증기선](1842)은 빛으로 가득차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환상세계를 얼마나 동적이고도 현란하고 화려하게 표현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독일에서의 낭만주의 회화는 중세 내지 초기 르네상스의 종교적 정열과 결부되어 발전하였는데, 나자르파(Nazarener), 룽게(Philipp Otto Runge, 1777-1810), 리히터(Adrian Ludwig Richter, 1803-84),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등의 범신론적 풍경화가 있다. 룽게나 프리드리히는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이들의 사상은 당시의 과학자·철학자들의 그것과 유사하며 기본적으로 계몽주의 사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룽게는 [자연과의 친밀한 교감은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영혼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 물질세계에 대한 정신세계의 승리를 주장했다. 자연에 대한 독일 낭만주의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였다고 평가되는 프리드리히는 자연의 충실한 재생, 객관주의를 지향했으며 여기서 비롯된 몰개성적이고 극단에 이르는 정치한 기법은 그의 [북극해](1824)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풍(作風)은 독일 낭만파 회화 특유의 것으로, 멩스나 해밀튼, 비앙 등 초기의 신고전주의 화가들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1850년경 부분적으로 영국의 라파엘로 전파(Pre-Raphaelite)화가들에게 자극을 주었고 미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회적 대격변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프랑스 낭만주의회화는 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존중에 대한 반동으로 그로(Antoine Jean Gros, 1711-1835)에서 시작하여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를 거쳐 들라크르와(Eugène Delacroix, 1798-1863)에 이르는 과정에서 분방한 색채, 유동적인 필치, 운동감으로 가득한 극적 구도에 의해 혁명적·영웅적 경향을 드러낸다. 다비드의 제자인 그로는 나폴레옹 신화의 중요한 화가로서 그의 [아르콜라 전장의 나폴레옹](1796)은 낭만적인 정열을 가지고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나폴레옹의 신비로움을 전해준다. 한편 나폴레옹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된 제리코의 예술은 계몽주의의 이상과 역사적 현실의 좌초속에서 한 세대의 정신적 투쟁을 그려내고 있다. [말을 탄 근위사관](1812)은 루벤스풍의 정력적인 그림으로 낭만주의적 영웅을 보여주고 있다. 또 [메뒤사의 뗏목](1818-1819)은 힘찬 사실적인 세부묘사가 주목을 끄는 작품인데, 그러한 노력도 결국은 화면을 지배하는 영웅적 드라마의 정신에 종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로와 제리코를 숭배했던 들라크르와는 프랑스의 가장 대표적인 낭만주의 화가로서, 그림에 있어서는 소묘보다 색채가 , 지식보다는 상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즉 그는 특정한 현실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보다도 시적 진실(詩的 眞實)에 목적을 두었다. 대표작으로 [군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1>이 유명하다.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79)는 현실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은 위대한 낭만파 화가로서 정통적인 단련을 보여주는 초기의 풍자화를 거쳐 이후 대담하고 개성적인 소묘화 양식을 보여주는데, 그의 주제는 도시의 일상생활의 여러 모습이었지만 그의 관심은 접촉할 수 있는 표면이 아니라 그 배후의 정서적인 의미에 있었다. 예를 들어 [삼등열차](1862)는 특수한 근대인의 상황, 즉 고독한 군중을 포착한 것이다. 그 외의 유채화 - 예를 들면 [풍차로 돌진하는 돈키호테](1866)를 통해 정신과 육체의, 이상적 대망과 냉혹한 현실과의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인간적 내면의 비극적 갈등을 구현하고 있다. 한편 프랑스 낭만주의 풍경화를 주도했던 바르비종 화파는 영국 풍경화 전통보다는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 전통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이 화파는 무엇보다도 통일되고 조화된 채색을 중시했는데, 분위기 효과를 통해 만질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해석으로 간주된다.
낭만주의 건축은 새로운 중세정신(특히 교회 건축에 있어)의 표현과 건물배치에 있어 과학적인 접근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양식적으로 볼 때 주로 신고딕 양식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고딕의 부활'은 영국을 선두로 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예컨대, 호레이스 월포울(Horace Wapole)의 [스트로베리 힐](1749-77)은 낭만적인 중세의 고성처럼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엑조틱한 양식의 하나로 간주된다. 또 낭만주의의 상상력은 고딕과 신비로운 동방을 거의 같은 눈으로 바라보아, 존 내쉬(John Nash)의 [로열 퍼빌리언](1815-18)에서는 타지마할의 크리?(cream-puff) 모양을 번안한 도움(dome)이 나타나기도 한다. 1800년 이후 건축은 고전- 고딕의 갈림길에서 대개의 경우 고딕으로 기울었는데, 이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국수주의적 감정이 고조되었고, 독일·영국·프랑스 등에서는 고딕이 국민정신의 고유한 표현이라고 생가되었기 때문이다. 차알스 배리경(Sir Charles Barry)과 웰비 퓨진(A. Welby Pugin)의 [국회의사당]( 1836년 착공)은 고딕 부활에 있어 최대의 기념비적인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로는 바로크 양식이 다시 선호되어 '네오바로크'양식이 나타났는데, 가르니에(Charles Garnier, 1825-98)의 파리 [오페라 하우스]가 대표적이다.
조각에 있어서도 낭만주의는 바로크 양식으로의 복귀로 나타났다. 예컨대 프레오 (Auguste Préault, 1809-1879)의 [학살](1834)은 바로크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육체적·정신적인 격렬성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표현상의 일그러짐이나 괴로와하는 형상들을 폭발할 만큼 꽉 채워 넣은 비합리적인 공간은 고딕 조각을 연상시킨다. 보다 진정한 낭만주의풍을 보여주는 조가가 뤼드(François Rude, 1784-1855)는 파리의 개선문에 그의 걸작, 매우 화려한 [라 마르세이예즈](1883-6)를 남겼다.
낭만주의는 예술가와 자연 사이의 신비스러운 교감 및 개인주의, 열정과 감수성, 상상력의 강조, 묘사적이고 섬뜩하며 이국적인 경향을 띤다. 본래 낭만주의는 인생에 있어서의 기본적 태도와 관련된 것으로 광범위하고 다양한 양식을 가지며 계몽주의 문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즉 당시는 역사에 대한 자각과 전체 구조에 대한 인식, 자연에 대한 고조된 감정이 일어난 시기였으며 더불어 낭만주의에 있어 중요한 사회적 요소인 민족주의 감정, 사회주의 등이 출현한 시기였다. 또 낭만주의 작품에 보이는 꿈·신비·밤·무한성·이국땅에 대한 향수 등은 지성의 한계까지 탐구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필요성' 내지는 '이성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낭만주의미술은 신고전주의미술과도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둘 다 눈 앞의 현실세계로부터 이탈하여 동양이나 아프리카, 남태평양의 인상이 불러 일으키는 어떤 현실로, 혹은 고전적 고대나 중세, 르네상스 예술 및 문학으로부터 파생된 가공의 세계로 도피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의 뚜렷한 차이는 특히 회화에 있어 조형적 형태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잘 드러나는데, 먼저 신고전주의는 3瘤澯?전성기나 푸생적인 고전적 바로크까지 뛰어넘을 정도로 균형잡힌 정면성의 원리를 확립한 반면, 낭만주의는 내적 상상력의 표현에 적합한 비대칭, 깊이의 묘현에 있어서의 사선구도, 애매모호한 분위기 위주의 색채효과라는 공식으로 복귀했다.
터너 (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 1775.4.23~1851.12.19 )
영국의 화가. 런던 출생. 14세 때부터 로열 아카데미에서 수채화를 배우고, 이듬해 아카데미 연차전(年次展)에 수채화를 출품하였다. 그는 주로 수채화와 판화 제작으로 일생을 보냈는데, 20세 무렵에는 유화를 시작하여 풍경유채화를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R.윌슨을 비롯하여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국내 여행에서 익힌 각지의 풍경을 소재로 삼았다. 24세 때에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고, 3년 후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02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풍경화의 소재를 모아 500점이나 되는 스케치를 남겼다. 한편, 이 무렵부터 N.푸생, C.롤랭의 고전주제적 풍경화에 끌려, 특히 구도를 잡는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20년 전후부터는 그의 양식에 변화가 생겨, 자연주의적인 방향에서 벗어나 낭만적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19년 T.로렌스의 권유에 따라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색채에 밝기와 빛을 더하게 되었다.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aire》(1838) 《수장(水葬):Peace:Burial at Sea》(43) 《비·증기·속력》(44) 《디에프항》 《노럼성과 일출》 등의 대표작은 그의 낭만주의적 완성을 보여준다. J.라스킨의 절찬을 받았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주목받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중 망명해온 그 후의 인상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도미에 Daumier, Honore Victorin : 1808.2.20~1879.2.11 )
프랑스의 화가·판화가. 5세 때 유리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공증인 사무실의 급사나 서점 점원 일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석판화 기술을 습득하였다. 1830년 《카리카튀르》지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만화기고가로 화단에 데뷔하였고, 32년 국왕 루이 필립을 공격하는 정치풍자만화를 기고하여 투옥되었다. 35년 언론탄압에 의한 이 잡지의 발행금지 후에는 사회·풍속 만화로 전환하여, 주로 《샤리바리》 지상에서 활약하였는데,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한 모습을 때로는 휴머니스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인 유머를 담아 그렸다. 그 후 40년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풍자하였다. 그의 석판화 제작량은 통산 4,000점에 이르고, 이 밖에 목판화가 있다. 그리고 40세경부터는 서민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유화나 수채화 연작을 시도, 날카로운 성격묘사와 명암대조를 교묘히 융합시킨 이색적인 화풍으로 《세탁하는 여인》 《3등열차》 《관극(觀劇)》 《돈키호테》 등 걸작을 남겼다. 석판화의 대표작은 《로베르 마케르》이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죽기 1년 전인 78년에야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거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게다가 만년에는 거의 실명상태로 친구가 제공한 발몽두아의 조그만 집에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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