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놀다가 심심하면 더위를 피해 당산나무로 달려간다. 나무 그늘에 앉아 계신 마을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매달려 이바구 한자리 해달라고 졸랐다. 이 시절의 이바구는 야담이나 장화홍련전 등의 옛이야기의 대유(代喩)다. ‘이야기’를 경상도에서는 ‘이바구’라고 했다.
재미있는 이바구를 들려주던 할아버지의 표정과 몸짓이 더 재미있었다. 짓궂은 할아버지는 한창 이야기가 재미있을 무렵이면 딱 멈추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보자.”
대가는 받지 않았지만 요전법(邀錢法)비슷한 태도를 보여 우리를 애타게 했다.
“요놈들, 이바구 더 해줄까 말까?”
곰방대 한 대를 피우고 나면 또 이렇게 우리를 애태웠다.
“꼬치 하나 따주면 이바구 마저 해주지.”
아랫도리를 벗은 아이 마음을 졸이게 했다.
“호! 꼬치 맵다.”
아이가 손짓으로 할아버지 입 가까이 대면 과장된 표정으로 이리 말한 후 이바구를 이어갔다. 이바구에 대한 어릴 때 추억이 어제 같지만 수십 년 세월이 지났다. 여름철 놀이터였던 아름드리 당산나무도 흔적 없는 고향엔 이제 이바구할 거리도 사라졌다.
부산 동구 초량에는 이바구길이 있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6・25 전쟁으로 임시수도가 되어 우리에게 어둡던 역사의 흔적들이 이바구 거리로 남아 있다. 초량은 부산포의 중심 어촌이었고 개항 후 부산 발전의 중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량에는 부산 최초의 물류창고 터가 있다. 부산 앞바다에서 잡은 어류가 이곳에 보관되었다가 서울로 운반되어 수라상에 오르기도 했다.
백 년에 이른 오층 벽돌 건물로 서양 의료진을 둔 근대식 개인종합병원 건축물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행려병 사망자를 연구용 인체 표본으로 보관한 것이 외부로 알려져 폐업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부산이 경상남도에 포함되어 경남 제일의 병원으로 짐작된다.
1892년 고종 때 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초량교회도 있다.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로 부산이 임시수도일 때 이승만 초대대통령도 이곳에서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개교한 지 팔십 년이 넘는 초량초등학교는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가수 나훈아, 개그맨 이경규를 배출했다. 사회의 한 분야에 두각을 낸다는 것은, 자랑할 만하다. 경사진 담벼락이 화랑으로 변신해 이들의 사진을 매달고 있다. 여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이들 연예인에 대해 도란거리며 사진 촬영에 바쁘다.
부산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도시로 피난민이 밀려왔다. 지금의 초량 산복도로 마을에 터를 닦아 판잣집을 짓고 서로 기대어 살았다. 비탈진 곳에 있는 168계단 양쪽으로 늘어선 작은 집들이 전란의 흔적처럼 보인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창문을 열면 앞집 지붕이 뒷집의 마당이다. 걸어 다닐 수 없는 마당,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뜰이다. 층층이 붙은 집들이 남해 다랭이논을 연상시켰다.
계단을 올라갔다. 중간지점에 환한 얼굴에 혈색 좋은 할머니가 운영하는 구멍가게 찻집이 보였다. 동행한 친구들이 ‘계단카페’라 이름 짓고 원하는 메뉴대로 한 잔씩 주문해 마셨다. 이곳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 고생이 많겠다고 하니 할머니는 전혀 뜻밖의 말을 했다.
“계단에 앉아가꼬 전망을 좀 보소.”
연안과 부산항대교가 내려다보이고 들고 나는 선박들과 국제연안여객터미널이 손에 잡힐 듯했다. 이곳에 정이 들면 주거를 옮기고 싶지 않은 푼푼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평지처럼 번다함이 없고 확 트인 전망과 뒤로는 공기 맑은 산을 벗해 살고 있다고 자랑했다. 아파트는 층간 소음에 손자 손녀들이 와서 주눅 든 모습이 싫다고 했다. 비록 작은 공간이라도 마음껏 뛰고 노는 손자 손녀들 보는 행복에 아파트와 비교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더구나 이웃 간에, 두터운 정이 들어 비탈진 곳임을 잊고 산다고 말했다.
무료로 운행하는 복지시설인 모노레일이 있지만, 168계단을 일부러 걸어 올라갔다. 이름도 생소한 이바구공작소가 있어 살아온 주민들의 생활상과 이곳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다. 이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수집하여 이바구로 만든다고 한다. 경사가 급한 산중 허리를 관통하는 산복도로 망양로(望洋路)에는 시내버스와 마을버스가 수시로 달려 주민들의 교통에는 큰 불편이 없는 것 같다.
산복도로 곁에 한국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고 장기려 박사의 기념관이 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들을 평양에 두고 아들 하나만 데리고 자유를 찾아 월남한 분이다. 천막병원으로 시작한 그곳에 기념관을 건립되었지만, 그분의 위대한 업적과 봉사 정신에 비해 초라하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검소한 생활로 여든다섯 해의 생애를 마감한 장기려 박사는 ‘우리 곁에 살다간 성자(聖者)’로 불리며 만인의 귀감이 된다.
고 장기려 박사의 존함을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한다. 시골에 고등학교가 없어 숙부댁에서 기식했다. 숙모님이 가끔 학비와 용돈을 쥐여 주고 어머니처럼 학업을 돌봐주셨다. 건강이 좋지 못한 숙모님은 수시로 복통이 심했는데 진찰 결과 담석증이었다. 고신의료원에서 수술하게 되었다. 집도의인 장 박사가 수술에 앞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동안 수술의 공포감이 사라지고 믿음이 생겼다고 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숙모님은 같은 장 씨라는 신뢰도 있었지만 간절한 기도의 말에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염불도 좋지만, 기도의 말씀도 새길 게 많다고 말씀하셨다.
기념관에서 성산(聖山) 장기려 박사의 성자 같은 모습을 보니, 늘 베풀다 극락왕생한 숙모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저며왔다. 초량 이바구길에서 많은 이바구를 품은 채 모노레일을 타고 내려왔다.
첫댓글 아직 부산에 이바구 길이 있었다는 걸 몰랐습니다. 선생님 의 이야기가 바로 이바구 길의 한 대목입니다.
건강하시고, 틈틈이 좋은 이야기 많이 들려 주십시요.
/꼬치 참맵다/ 옛날생각납니다.
재미있는 얘기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