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4,26-34 |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이 비유는 1절-9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점들이 많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씨의 성장에 좋은 토질과 풍성한 수확이 강조되었으나, 여기서는 씨앗을 자라게 하며 풍성한 수확을 이루게 하는 신비로운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이 비유는 하느님 나라와 관련이 되어 있는데, 특히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는가에 관련이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땅과 태양과 온도, 비 등의 작용으로 씨앗에서 싹이 나오고 자라난다.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의 활동은 작은 씨가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즉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 가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농부를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말씀의 씨를 뿌림으로써 시작되고 성장한다. |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농부가 씨를 뿌린 다음에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에서 싹이 터서 자라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는 말은,
첫째, 씨앗을 뿌린 농부가 씨앗의 성장에 대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단지 적당한 곳에 씨를 뿌리는 일뿐이다. 그는 결코 씨를 자라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농부가 게을러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씨 뿌린 다음에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내버려둔다는 뜻도 아니다.
농부는 당연히 하게 되는 일들, 즉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밭을 가꾸고 돌보는 일들은 생략되어 있을 뿐이다. 농부는 씨에서 싹이 나오고 자라는 생명력의 원천을 알지 못한다. 씨앗을 싹 틔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땅과 비와 공기와 해를 주관하시는 하느님에게 맡겨진 일이라는 것이다.
둘째, 씨 뿌린 농부가 땅에 대하여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씨앗을 뿌려놓고 농부는 전적으로 그 소출을 하느님께 맡긴다. 이렇게 농부가 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추수를 기다리듯이 하느님의 백성들 역시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라는 말씀은 사람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이고, 사실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어떤 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뜻한다. 열매를 맺는 것은 농부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도 사람의 힘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있어서 사람의 힘이 전혀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농부가 농경지를 가꾸거나,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하듯이 그 역할이 있지만 그것이 씨앗이 자라는 결정적인 힘이 되지는 않는다. 농부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협력자가 될 뿐이고, 일은 하느님이 하신다.
구원도 사람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노력이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나 구원의 성취는 오직 하느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따른 것이기에 인간은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와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라는 말씀은 씨앗이 자라나는 자연의 법칙을 이야기함으로써 사람이 온전히 알지 못하는 자연의 법칙처럼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도 하느님 나라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따라서 지금 나타나는 미완성 단계의 과정, 즉 ‘줄기’나 ‘이삭’은 ‘낟알’이 되기 위한 가능태이다.
이 가능태는 완성의 현재적 모습일 수 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현재에도 실현되고 있으며 현재에 실현되고 있는 가능태를 관찰 할 수 있다면 장차 올 완성의 하느님 나라도 확신을 갖고 바라볼 수 있다.
‘열매는 씨앗의 결과이다.’ 라는 말이 있다. 즉 마지막이 처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무한하게 큰 것은 이미 무한하게 작은 것 속에서 활동하고 있다. 진실로 현재는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으나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도록 허락된 사람들은(11절) 보잘것없이 보이는 시작에서 장차 다가올 하느님 나라를 본다.
이 구절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불신이나 사람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힘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느님의 능력에 의존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추수는 종말의 심판을 상징한다. 여기서 ‘익으면’을 직역하면 ‘스스로 영글어 익어 갈 때면’이고, 결실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통치가 완성되고 하느님 나라의 영적 열매들이 완전히 익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종말의 심판이 아니라 추수의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다.
처음에 씨를 뿌린 어떤 사람은 어떻게 씨에서 싹이 나오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지 알지 못한다. 추수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떻게 해서 곡식이 익어서 풍성한 수확을 하게 되었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저 곡식을 수확하면서 기뻐할 뿐이다. 농부의 눈에는 그 모든 과정이 경이로운 기적으로 보일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은 불분명하고 숨겨져 있으나 영광스럽게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스스로 완성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씨앗에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씨를 뿌리는 것은 사람이고, 추수의 기쁨을 맛보는 것도 사람이다. 즉 사람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을 위해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복음의 씨를 뿌리고 하느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따라서 그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 돌려야 한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경이로울 뿐이다. 씨앗 안에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는 그 안에 스스로 발전해 나갈 충분한 내재적 힘이 있다. 이렇게 경이로운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을 그저 구경만 하는 방관자가 될 것인가, 또는 전혀 무관심한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인 협력자가 될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일이다.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운 결실의 혜택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협력을 한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고 그 기쁨은 더욱 클 것이다. |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겨자씨의 비유’는 앞의 26절-29절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뜻이 같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과 하느님의 능력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면,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처음의 모습과 나중에 크게 자란 모습의 대조에 초점을 맞춘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 발전은 사람의 이해를 초월한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이 비유의 시작은 이중적 물음으로 시작한다. 이는 당시 랍비들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사용하던 수사법으로서 물음을 통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깊은 관심과 주의를 유도하고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한다.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랍비들은 작은 것을 비유할 때 ‘겨자씨처럼 작다’ 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만큼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거의 눈에 뜨이지도 않을 만큼 작다고 느껴질 것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눈에서 볼 때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작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미미한 시작과 현재성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미미함은 풍요롭고 풍성한 모습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미래를 담고 있다는 점을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작은 것 속에는 이미 가장 큰 미래가 담겨 있는 것이다. |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겨자 나무는 자라면 1,5 미터 정도로 성장하는데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는 3미터 정도 높이로 자라기도 하고 큰 가지들이 있어서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정도가 된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처음에는 아주 작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나중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발전을 하게 될 것이다.
앞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는 어떤 농부가 어떻게 씨에서 싹이 나오고 그 싹이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는지를 몰라도 결국에는 추수의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면, 여기 ‘겨자씨의 비유’에서는 아주 작은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큰 나무로 자라는지 사람들은 알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그 나무 그늘에서 쉴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발전을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말씀, 복음의 확장, 또는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즉 교회의 발전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신자들 각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은총의 씨앗을 뿌리시고, 그 씨앗에서 많은 당신의 선하심의 꽃을 피우신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는 나약하고, 보잘것 없고, 멸시받는 사람을 선택하셔서 큰일을 해내는 도구로 쓰시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항상 하느님의 일에 협력하려는 노력과 의지, 믿음, 희망,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새들이 나무 그늘에서 쉬듯이 하느님의 나라는 수많은 영혼들이 평안히 그리고 영원히 하느님의 평화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보금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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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라는 말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그들’은 제자들이 아닌 일반 청중들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비유로 가르치신 것은 그들이 좀 더 잘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비유란 일상생활의 단면들을 예로 들어 전하고자 하는 말의 요지를 쉽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그것을 듣는 자들의 사고를 자극하고 영적 지각 능력을 일깨워 주는 수단이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에서 이해하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쉽게 가르쳐도 믿음이 없고,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없었던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이라는 책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아니다. 믿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고, 신앙인들이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제들이 강론과 교육을 통해서, 또 수도자들이 성경의 말씀을 우리가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렇게 교회는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친숙해지도록 도와주고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믿으려고 노력하고, 받아들이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가르침이 아니다. |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다른 말씀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즉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대한 설명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라는 말씀은 일반 청중들에게는 어렵게 가르치시고, 제자들에게만 쉽게 가르친 것처럼 해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일반 청중들에게는 그들 수준에 맞게 쉽게 가르치시려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좀 더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 나라의 비밀과 메시아의 비밀을 설명해 주셨다. 즉 듣는 사람들의 믿음과 마음의 준비에 따라서 그에 맞게 교육을 하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