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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전 유럽 여행을 시작하면서 투어로 바티칸 시국을 돌아볼 때 일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당시 유명한 미술가 중 한 사람 라파엘로의 작품 '아테네 학당'을 접했을 때 참 가슴 설레게 하는 작품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 시대를 풍미했던 학자들이 한곳에 모여 끊임없이 토론을 이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 도산서원에 처음 도착했을 때 문득 이 작품이 딱 떠올랐다.
안동역에서 버스를 타고 도산서원 입구까지 바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초입부에서 내려 더운 날 굳이 그들의 숨결을 조금이라도 더 느낄 수 있도록 걷는 걸 택했다. 여름이 한창 진행 중임을 알리는 녹음 짙은 나무들과 매미들의 사이렌 소리는 마치 도산서원이 제모습을 갖추기 전 도산서당 당시의 모습이 남아있는 그곳으로 날 인도하는 듯했다.
단풍나무가 빨갛게 물들기 전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 여름날의 여행길이었다. 날은 습했고 무엇보다 처음 찾은 안동의 그 방대한 크기에 놀라는 와중이었다. 버스를 타고 도산서원 입구까지 바로 갈 수 있었지만 좀 내려걸어보도록 한다. 안동 하회마을 옆에 자리한 병산서원의 경우 서원이 한창 운영되던 당시의 분위기를 현실감 있게 조성하고자 비포장 도로로 놓아둔 반면, 도산서원으로 향하는 길은 아스팔트로 덮여 있었고 햇빛을 막아주는 나무들만이 그 당시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해 보였다.
도산서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날씨가 순간의 더위도 잊을 만큼 산뜻하게 펼쳐진다. 퇴계 선생으로 시작해서 퇴계 선생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곳을 찾기 전 저 멀리 한양에서 안동까지 이황의 가르침을 받으러 그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다는 이야기와 동시에 중국과 일본까지 유학자로서의 명망이 상당하다고 하니 그가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머물렀던 도산서원이에 더욱 호기심이 간다.
(1) 도산서원과 세계유산 이야기
봉정사를 시작으로 안동 곳곳에 퍼져있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들을 전부 다 돌아보기 위해 1박 2일 일정으로 안동역에 숙소를 잡았던 난 안동역에서 하루 5번 정도 운행하는 67번 버스를 타고 도산서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교와 함께 이념의 양대산맥으로 성리학의 그 가치가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으며 2019년 7월 6일 밤 등재가 결정되며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1,500원으로 09:00~18:00 동절기의 경우 09:00~17:00까지 관람 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더불어 멀지 않은 곳에 퇴계 선생님이 태어나고 자랐으며 지금까지 그의 후손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퇴계종택 또한 자리하고 있으니 여건만 괜찮다면 예약 후 하룻밤 묵어 가는 것 또한 이곳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경험이 아닐까 싶다.
(2) 안동에서 치뤄진 과거 시험 이야기
도산서원 입장권 구매 후 입구에서부터 5분 정도 걸었을까? 도산서원을 본격적으로 구경하기 전에 저 멀리 비각 하나가 홀로 우두커니 자리하고 있었다. 궁금증 해소를 위해서라도 저기를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근처 선착장이나 갈 수 있는 방법을 열심히 찾아봤지만 결국 말짱 도루묵이었다.
조선의 제22대 왕 정약용을 시켜 화성을 건축한 인물로도 유명한 정조 대왕의 어명으로 도산서원 근방에서 과거를 봤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비각을 짓고 그 비석에 당시에 대한 기록을 남겨 뒀다고 한다. 퇴계 이황은 동양 철학에서도 일가견을 넘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오늘날에도 천원권에 새겨져 우리 곁에 함께 하고 있는 분이시다. 그런 분의 삶의 기운을 더 가까이 느껴보기 위해 찾은 도산서원 시작부터 맑은 하늘 아래 안동댐 건설과 동시에 만들어진 인공섬이 가져다주는 이 분위기는 퇴계와 율곡이 학을 타고 내려와 섬에 안착 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학문을 논하는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시사단의 경우 1976년 안동댐이 완공되면서 지금과 같은 섬의 모습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도선사원 앞 현 시사단 주변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이 주변에 모여 과거 시험을 치렀다고 하니 이 또한 조선 시대 지배층의 입신양명에 대한 열정의 가늠자 역할과 더불어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또 하나의 웅장한 경관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그렇게 시사단과 맑은 하늘을 즐긴 다음 뒤로 돌면 퇴계 선생께서 말년을 보내면서 전국 곳곳에서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왔다는 곳 도산서원이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두 눈을 편안케 해줬다.
(3) 도산서원과 퇴계
아침부터 서원 주변이 북적이고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도산서원에 도착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주변 벤치는 물론 복작거리는 소리가 도산서원 담벼락 너머로 울려 퍼지고 있어 그 궁금증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지금의 신권이 만들어지기 전 구권에서는 앞면은 퇴계 이황 선생, 뒷면은 도산서원 그림이 차지하고 있었으나 신권으로 바뀌면서 "계상정거도"가 그 모습을 대신하게 됐다. 지금도 매주 주말이면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을 위해 다양한 문화행사가 진행 중이라는 내용과 함께 내부가 궁금해 서둘러 발걸음을 서둘렀다.
도산서원은 크게 두 곳으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서당과 서원 권역인데, 도산서당의 경우 퇴계가 여생의 마지막을 후학 양성에 힘쓰던 곳이고, 서원은 이러한 이황의 뜻을 되새겨 퇴계 사후 지어진 사당과 서원이다. 그곳의 경계를 '진도문' 이라 칭하고 있었다. 서원 초입으로 들어와 보니 도산서원을 찾은 이들을 위한 문화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 양반 복식을 갖춘 사람들이 서원 권역에서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설치된 기물들 때문에 사진에 대한 찰나의 염려도 있었지만, 그 순간마저도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고민을 떨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어서 바로 서당 권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퇴계의 손길이 남아있는 도산서당 권역을 좀 더 만끽하기 위해 도산 서당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처음 다른 곳을 돌아보기 전에 도산서당이 자리하고 있는 곳부터 발걸음을 옮겼다. 도산 서원 내 가장 오래된 곳으로, 퇴계가 직접 설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검소와, 겸손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잘 어울리는 건물이었다.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서 바위에 깃들어 조그마한 효험을 바라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암서헌' 도산 서당의 마루는 겸손에 시간과 함께 새겨진 고풍스러움과 함께 그 유구한 가치를 담아내고 있었다.
지어진 지 500년 가까이 된 탓일까? 서원 권역으로 넘어가기 전 서당 권역을 돌아보며 느낀 건 수수해도 너무 수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도산서당 건너편으론 당시 이곳에서 머물렀던 학생들의 기숙사가 위치해 있었고 소수서원에서 느꼈었던 그 수려함마저도 사치로 느껴질 만큼 참 검소했다. 당시 예법의 일인자로 명성을 떨쳤던 그가 직접 설계했기 때문일까? 문득 퇴계 선생의 뚜렷한 주관이 느껴지는 듯했다.
한껏 소박함이 깃든 공간을 지나 건너편 기숙사 건물로 들어가 본다. 농운정사라고 불리는 곳 즉 퇴계의 제자들이 숙식을 해결하던 곳이다. 이곳 또한 이황 선생께서 직접 기본 설계를 맡은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무슨 행사를 한창 진행하고 있는지 여기저기 인공조명들이 설치돼 있었다.
적극적인 행정가였던 율곡과는 다르게 당시 순흥(지금의 영주)에 머물면서 최초의 사액 서원 소수 서원을 짓고 말년에는 안동으로 낙향 후 도산서원을 건립한 후 후학을 양성하며 당대의 유학자들과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 장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주를 여행했을 당시 소수서원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단청이 도산서당 구획에선 찾아보기 힘들었다. 앞서 언급한 도산서당 마루부터 그 앞에 덩그러니 놓인 우물에 이르기까지 수수함 속에 감춰진 겸손과 퇴계의 손길이 담긴 건물들만 담담하게 세월을 인내하고 있었다. 그의 일화를 살펴보면 삶이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았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항상 성심을 다해 주변 사람들에게 헌신했던 그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듯했다.
(4) 사람들과 함께 호흡 중인 도산서원
그렇게 30분 1시간가량을 도산서당 쪽에서 시간을 보내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돌려본다. 저 위로 '광명당'이라고 쓰여 있는 퇴계의 친필 현판이 눈에 들어오면서 어떤 장면들이 펼쳐지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지는 와중에 마침 날도 많이 덥고 마루에 앉아 삼삼오오 모여 땀을 식히며 공연을 즐기고 있었다. 색조가 강한 양반 복색의 사람들 사이를 통과해 도산서원 권역으로 들어갔다.
퇴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지어진 건물들이다. 이곳에서 부터는 도산서당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단청과 다채로운 색감을 자랑하는 건축 양식들을 한껏 감상할 수 있었다. 한석봉의 친필이 담긴 "도산서원"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서원으로 거듭나게 됐다고 한다. 그곳에서 도산서당과 서원권역을 구분하는 진도문을 지나 앞에 전교당 앞마당에서 한창 떠들썩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서원의 중요 행사인 향사례가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면서 조선시대 당시 도산서원 중심을 잡고 있었던 건물 앞마당에서 조선시대 그 신분 사회를 배경으로 배우들이 맛깔나고 흥겨운 볼거리를 수놓고 있었다. 덩달아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렌즈 교환식 카메라를 들고 찰나의 순간을 잡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 또한 볼거리라면 볼거리라고 할 수 있겠다.
최근 도산서원 관련 기사에서 향사례에서 600년의 금기를 깨고 남성이 아닌 여성이 술잔을 올리는 모습이 보도된 적이 있다. 전통을 지켜가며 시대의 흐름과 함께 발맞춰 나가는 도산서원의 모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만약 현세에 퇴계가 이 모습을 목도한다면 어떻게 생각할지 문득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고 도산서원 권역을 돌아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퇴계와 그의 제자 '월천'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으로 들어가기 위한 '삼문'이 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문이 닫혀 있어 직접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게 참 아쉬웠다. 퇴계의 경우 율곡 이이, 이언적,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와 종묘에 모셔진 6현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함께 알 수 있었다.
도산 서당 권역과 마찬가지로 서원 주변으로도 이곳에 머물며 학문을 갈고닦는 학생들을 위한 시설 그리고 학생들을 뒷바라지를 위한 사람들의 숙소, 서재와 같은 공간들이 이곳저곳 위치해 있었고, 이어서 도산서원 가장 높은 곳에서 저 멀리 안동댐 방향 쪽으로 시사단이 아련하게 눈에 들어온다.
과거 조선의 수도 한양 경복궁을 기준으로 내가 있는 이곳 안동 도산서원까지의 거리는 300km가 훌쩍 넘는다. 오늘날과 다르게 정말 산 넘고 물 건너왔어야 할 옛날의 경우 못해도 수일이 걸리는 기나긴 여정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득 바티칸시국을 돌아보고 있을 당시 봤던 라파엘로의 작품 '아테네 학당'이 문득 떠올랐다. 시대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당대의 학자들이 한 곳에 모여 토론을 이어가는 그 모습들이 문득 서애 류성용을 비롯해 이곳을 찾은 많은 유학자들과 높고 낮음을 개의치 않고 편지로 끊임없이 토론을 이어갔던 그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는 마냥 수수해 보이지만 다른 어떤 곳들 보다도 성리학의 전당과 같은 기분을 내게 선사해 줬다.
그렇게 주변을 한참 관망하다가 아래로 내려와 보면 퇴계의 유품들과 그의 생애를 돌아볼 수 있는 옥진각이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카메라에 내부 모습들을 담지는 않았지만 전시관에 적힌 글들을 따라 읽다 보면 마치 어릴 적 읽었던 위인전을 읽듯 흐름을 타고 부드럽게 즐길 수 있었다. 추가로 도산서원에 남아있던 각종 문헌들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만나볼 수 있으니 도산서원과 퇴계의 흔적을 좀 더 세심히 관찰하고 싶다면 묶어서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도산서원의 모든 것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돌아보고 다른 곳으로 향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문득 시계를 보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고 그 사실은 나를 놀라게 만들기 충분했다. 도산서원을 찾았을 때는 한창 여름 더위가 지속되던 7~8월 사이였다. 하지만 자세히 알아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곳이라 그런지 공간이 마냥 낯설지는 않아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 시대를 풍미한 유학자 더불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토론의 성패와 상관없이 그 소통을 이어가려는 모습은 오늘날 시대의 트렌드와도 맥락을 함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무엇보다 도산서원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퇴계가 말년을 보내며 '아테네 학당'이라는 희대의 작품을 떠오르게 만들어 줬다는 점이다. 안동댐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시점에 시사단 주변에 모인 많은 수의 선비들이 자아낸 장관을 바라보며 얼굴 가득 미소 짓고 있을 그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신문화의 도시 안동 그리고 그 가운데 중심을 잡아 주고 있는 도산서원의 여정은 이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