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와 윤동주에 대한 논평 이육사를 '신념의 시인'이라 본 것은 김춘수일 것이다. 그는 시 '노정기(路程記)'에서는 비유가 많이 사용되었음을 지적하고, '절정(絶頂)'에서는 '원초적'이라 보고 지금 우리 시가 많이 상실하고 있는 부분이라 보았었다. 원심적(遠心的), 외향적인 육사의 시를 그는 '근대적 상징주의의 계보'로 보기도 했다. 우리가 육사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언어 질서, 혹은 그 어법을 챙겨 보아야 한다. 육사와 어법 속엔 경상도 방언이 들어 있다. 그 다음 그가 애용하는 용어 몇을 찾아보면, 사실 이 속에 그의 비밀의 일단이 스며 있는 것으로, '준마 . 고원 . 북방 . 눈 . 서릿발 . 광야 . 항구 . 노정 . 계절 . 세월' 등이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 시의 획을 굵게 하고 남성미를 부여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이 원심적 구심 속에 육사의 열도(熱度)가 있는 것이며, 이 계보엔 청마 유치환이 닿아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광야"의 한 구절)'에서 '차마'의 용법은 청마 시의 한 중요한 표현법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육사의 시에는 매우 중요한 상징이 나오는 바, 그것은 '닭 우는 소리'이다. 20수 편에 불과한 그의 전체 시 속에서 '닭 우는 소리'가 이렇게 자주 나오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것은 육사가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밤, 암흑 시대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다. 닭 소리 들릴 때, 비로소 새벽이 오고, 비로소 인간의 인인(隣人)이 있고, 비로소 '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는 광명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저항 시인 윤동주의 시에서는 '개'가 나온다. '짖는 개', 그것에 쫓기는 자아, 즉 민족아(民族我)는 릴케의 개만큼이나 존재의 본질의 탐구는 아니지만, 그 대신 민족아의 처절함을 유례 없이 절규한 것이다. 육사와 윤동주ㅡ이 두 북극은, 그러나 '닭소리'와 '개소리'로 해서 동곡이음(同曲異音)의 절정을 보이는 쌍벽이다. 전자가 외향적 . 원심적이라면, 후자는 내면적 . 구심적이라 할 것이다. 다시 전자가 호탕 . 웅장 . 장엄의 남성적이며, 북방적 혹은 대륙적 경향임에 비해, 후자는 그 체질의 내면화에 가깝다. 다음에 다시 고찰할 수 있는 점은 육사 자신이 스스로 하나의 선구자로서 자처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육사의 이러한 점은 '생명의 서'의 청마와 매우 흡사하다. 다르다면 육사에 있어서의 대상이 직접적임에 반해 청마의 그것은 보다 보편적인 면이 있는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