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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에 있는 분들 보면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너무 빨리 찾아온 여름 속에서 어떻게 한 주간 잘 버티시고 견디셨습니까? 정말 무더위가 잠깐 비가 와서 주춤한 것 같은데 또 오늘 또 더워진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들 우리가 이 자연의 지금 변화 속에서 깨달아야 될 메시지들이 참 많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길 원하고요. 교회 안에서도 가정에서도 우리의 삶의 터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탄소 금식, 이 자연 만물을 회복하게 하는 귀한 일에 우리 모두가 함께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주에 우리 데살로니카 교회에 대해서 나누고 어떻게 여러분들 삶에 이 말씀을 적용점으로 가지고 한 주간 살아오셨는지 오늘 여러분들 소그룹 모임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저도 이 말씀을 묵상하고 또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그런 과정 속에서 계속적으로 도전하는 마음을 주세요. 또 제 마음에 질책하는 마음도 생기고요. 또 한편으로는 이 데살로니카 교회에 대한 부러운 마음도 생기고 또 도전할 마음도 생기고 다양한 복합적인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얼마나 이 교회가 매력적인지 우리 하늘 소망교회가 처음에는 안디옥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기도 제목을 선포했는데, 또 그와 동일하게 데살로니카 교회와 같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오늘 좀 더 우리가 묵상하고 살피면서 두 번째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요. 먼저 지난주에 함께 나눴던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카 교회를 생각할 때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도하게 되는 세 가지의 요인이 있다고 말씀하였죠 여러분들 기억나시나요? 세 가지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
네 좋습니다. 잘 기억 안 날 때는 주보를 얼른 보시면 돼요. 제가 주보에 컨닝 페이퍼를 다 넣어놨습니다. 이 세 가지를 조금 더 확장해서 우리가 이해해 보려고 하는데요. 먼저 믿음의 역사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 믿음의 역사라는 말을 윌리엄 헨드릭스라고 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비롯된 역사라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보여준 믿음의 역사는 그 데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의 그 믿음의 행동이 이 9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믿습니다 하고 그냥 끝난 것이 아니라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행함으로 드러냈다는 거예요. 그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우상을 버렸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죠. 데살로니카에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그 당시에 이교도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우상숭배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삶의 환경들이 그 당시에 다른 곳과 비교할 때 넉넉했고 또 평안했기에 그들은 더 우상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듣고 우상을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믿기로 결단하였다. 이게 바로 데살로니카에 일어난 믿음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조상 대대로 믿어오던 그러한 신을 버리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여러분들 가운데는 모태 신앙인들도 있지만 모태 신앙인들은 아마 이 부분이 별로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왔으니까요. 근데 제가 지난 주 중에 어떤 동역자와 양육을 나누는 가운데 그런 고백을 들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유교적인 그리고 불교적인 집안에서 살아왔는데 그리고 가정적으로 자기가 제사를 드려야 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살아왔는데 제사를 자기가 안 드리겠다 거부하는 그 순간 자기는 그 가족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그리고 손해를 감수해야 되는 상황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래서 도대체 어떤 손해가 있느냐 이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눠봤는데요. 생각보다 여전히 지금도 유교적이고 불교적인 집안 안에서는 제사를 드리는 것 때문에 신앙적으로 부닥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혜롭게 기도하면서 잘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여러분 그런 것들을 그냥 어쩔 수 없어라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도우심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 복음이 들어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 때문에 박해를 당했습니다. 유교적 관습 아래에서 제사를 포기한다는 것은 가문에서 떨어져 나가는 호적에서 지워버리겠다. 파버린다는 말도 그런 때 나온 거죠.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제사라고 하는 것, 그것이 우상숭배라고 그들은 판단했기 때문에 그것을 과감히 버렸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의 역사이죠. 오늘날 우리가 수많은 교회들이 있고 수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거의 믿음의 역사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참 많이 듣는데요. 현재 진행형인 믿음의 역사 이야기들을 요즘 여러분들 듣고 계신가요? 아니면 여러분들이 경험하고 계신가요? 한번 비교를 해보면요. 예전에 믿음의 역사와 지금 현재 진행형인 믿음의 역사에 차이가 굉장히 커 보여요.
왜 그럴까요?
버릴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것들이 점점 우리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길 원합니다. 야고보는요 그런 믿음을 향하여 죽은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믿음은 역사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거창해도 죽은 건 생명력이 없으니까 열매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죽어 있는 믿음을 가져버린다면 그건 겉으로 위선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고 형식주의자로 남게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에게 지금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내가 여전히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한번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 사랑의 수고입니다. 이 사랑의 수고라는 말을 윌리엄 핸드릭스는 사랑에 의해 촉진된 수고라고 번역했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은 수고를 동반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떤 일이든 귀찮지 않습니다. 희생하는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내 것을 내어주어도 결코 아깝지 않은 것이죠.
사도바울은 1장 4절에서 데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이 데살로니카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 사랑의 수고의 모습을 사도바울은 발견한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들이 부모의 말씀을 잘 순종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들, 그거는 어떠한 자녀들이 그런 효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까요? 부모의 사랑을 깨달은 자녀가 가능합니다. 부모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효도는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거지, 어렸을 때 야 부모님 앞에서 숟가락 들기 전에 숟가락 들지 마라 인사해라 공경해라 가르치는 것 그것만으로는요.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형식만 갖출 뿐이지 진정으로 효도하는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 부모를 괴롭히는 자녀들도 있어요. 근데 그 부모가 그 자녀를 사랑하지 않을까요? 근데 그 자녀는 부모가 자기를 사랑함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사랑을 깨닫지 못한 철들었지 않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을 여전히 아프게 하고 효도하지 못하는 거예요. 사랑을 받은 사람은요. 그 사랑을 깨달으면 그 사랑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데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이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었던 이유, 그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그들은 느낀 겁니다. 깨달은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사랑의 수고를 했던 대표적인 사례가 무엇이냐면, 가뭄으로 인해 궁핍한 가운데 놓여진 예루살렘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의 모체 어머니 같은 교회 아닙니까?
그런데 그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기꺼이 헌금을 하는 일에 동참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1절에서 3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하도록 자원하여
아멘 여러분 여기 마게도냐 교회들의 이 데살로니카 교회가 속해 있는 겁니다. 데살로니카 교회 성도들도 지금 핍박 짧게 들은 그 복음을 가지고 1년 반이라고 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교회가 건강하게 막 이렇게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됐다고 했잖아요.
근데 그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핍박과 어려움이 늘 존재했습니다. 그들도 역시 위로가 필요한 이들이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체들을 향하여 기꺼이 그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의 수고를 한 것입니다. 그냥 형식적인 사랑의 수고가 아니라 말씀을 보면 그들이 힘대로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하도록 자원하였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크니까 그 사랑에 대한 반응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죠. 이 일을 보고 들은 사도바울은 감동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늘 감사의 제목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세 번째로 소망의 인내입니다. 이 소망의 인내도 소망에 의한 고무된 인내라고 해석이 되어 있는데요. 한마디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인내를 이룰 수 있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똑같은 상황에도요. 소망이 있는 사람은 인내가 가능하지만 소망이 없는 사람은 포기하고 맙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여러분들 인생에서 그거 경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데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이 근데 가진 소망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환란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게 만드는 소망 그 소망은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함께 읽은 10절 말씀 바로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재림의 소망이 그들 안에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환란이 일어나도 그들은 인내하며 소망을 품고 인내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재림의 신앙에 대한 부분을 좀 점검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한때 우리가 80년대 90년대에 신앙생활했던 분들은 이 재림의 신앙이 얼마나 우리 가운데 뜨거웠는지를 기억하실 겁니다. 재림의 신앙은요. 우리 성결교단의 4대 전도 표제가 있잖아요. 중생 성결 신유 재림 이 네 가지가 성경의 핵심이다.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전도 표제입니다.
근데 여러분 이 재림이라는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 중에 하나인데 이게 80년대 90년대에 이단 사이비들이 이걸 가짜로 날짜를 정해놓고 그걸 가지고 사람들을 몰아가고 이게 언론에 이슈화되고 이런 과정 속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재림의 신앙은 부정적인 단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왠지 재림을 이야기하고 휴거를 말을 하면 이단 사이비로 여기는 우리의 마음들이 생겨버렸습니다. 심지어 이게 문제인 걸 알면서도 재림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왠지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내 때에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생각합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무관심한 이유가 무엇일까? 지금 현재 내 눈에 보이는 내 삶에 집착하는 삶을 내 삶에 모든 시선을 두고 있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오직 내 관심은 내 일 내 집 내 가족 내 취미 내 직장 거기에만 내 관심이 매어져 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신앙적인 이기주의 신앙적인 세속주의, 기복주의 이런 것들이 이 교회 안에 가득하게 만든 요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상태에서는 믿음의 역사도 사랑의 수고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 재림에 대한 신앙 이 소망을 가지고 인내하는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조금만 어려워도 쉽게 포기하고 시험에 들고 왜 그럴까요? 산소망을 붙들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로마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5장 3절 말씀 4절 말씀을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이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는 것은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희망을 갖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은요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로서 재림의 신앙을 갖고 살아간다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안에 환란 중에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환란 중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이미 주신 줄 믿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승리할 수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이 세 가지의 모습이 이 데살로니카 교회 안에 가득 차고 넘친다는 것을 보면서 듣고 보면서 그게 감사의 기도의 제목이었습니다. 간절히 바라고 고악기는 우리 하늘 소망 교회 공동체의 이 세 가지가 더욱더 풍성하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여기에서 포인트를 한 가지 또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게 뭐냐면요. 이렇게 데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이 이 세 가지의 모습들을 갖출 수 있었던 이런 세 가지의 신앙생활을 견고하게 세울 수 있었던 그 배경은 뭘까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물론 지금 전한 내용과 약간 연결 구도가 있는 부분이긴 하지만요. 한번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1장 6절에 보면 이 데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많은 환란 가운데에서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라고 하는 이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요즘 신앙생활함에 여러분들 안에 기쁨이 있으신가요? 지금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어떻게 좀 마음이 기쁘신가요? 아니면 어떤 마음으로 앉아 계시나요? 제가 지난주에 행복이라는 찬양을 찬양하면서 여러분들 표정을 이렇게 보는데 행복하지 않은 것 같은 거예요. 느낌이 그래서 이 표정으로 찬양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라고 생각해서 여러분들한테 찬양을 멈추고 행복합니다. 행복합시다 하고 나서 찬양을 했더니 그때는 좀 표정들이 밝아졌어요.
여러분 예배를 드림도요. 드린다고 우리가 표현하잖아요. 예배를 예전에 본다고도 많이 말을 했거든요. 예배 보러 가자. 예배 보러 가자 이랬잖아요. 근데 예배를 본다는 말이 잘못했다 드린다는 표현이 맞다. 그래서 요즘은 예배를 드린다는 말을 해요. 이게 별거 아닌데 이런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봤는데도요. 다양한 모습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데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은요.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머릿속에 지금 막 여러분들이 가득한 어떤 고민 아픔, 여러분들을 짓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 관계에 깨어진 다양한 것들을 확 가슴에 쥐고 말씀을 들으면 아마 이 컵에 물을 가득 채워놓은 상태에서 물을 부어봐야 들어가겠습니까?
그게 예배를 드릴 때 먼저 우리 안에 옥토와 같은 밭이 되기를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졌을 때 옥토밭이 되어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근데 그 첫 번째가 기쁨으로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난 주일날 제가 선포했죠. 예배 전에 10분 전에 와서 우리 기도하면서 우리 한번 시작해 봅시다. 네 오늘부터 도전하기 시작한 분들도 계시고 아직 못한 분들도 계십니다. 여러분 미리 준비되면 마음이 좀 더 편안해집니다.
저도 오늘 조금 더 앞에 들어와서 여기 앉아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좀 이렇게 보니까 여유가 생기고 좀 더 평안해져요. 한번 여러분들도 해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내 마음에 기쁨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드릴 때 그냥 이게 하나의 여러분들의 습관 또는 하나의 규율이 되면 이 예배 시간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듭니까? 1시간 하나님과의 만남이 기대되고 소망이 되고 우리 또 옆에 있는 동력자들이 지난 한 주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어떻게 승리했을지 또 얼마나 고생했는지 내가 한마디 말로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좀 우리 안에 그러한 기쁨들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 이 데살로니카 교회 안에는요 이 복음을 증거하기에 충분히 준비된 전도자들이 있었다는 것도 우리가 볼 수 있게 됩니다. 1장 5절 말씀을 보면 이 복음이 말로만 잃은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다.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다. 한마디로 바울 일행은 이 데살로니카 교회에게 복음을 증거할 때 단순히 말로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준비와 성령의 역사를 의지함으로 그곳에서 말씀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지금 말씀을 전하는 저에게 먼저 적용해야 될 말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과정 속에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제가 더욱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철저히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의 역사함을 의지하여 복음을 증거하는 증거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런데 여러분 또한 지금 이 시대는요. 마님 제사장 여러분들이 다 선지자 같은 그러한 존귀한 존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이 말씀을 적용해야 합니다. 소그룹 모임을 할 때에도 소그룹 안에 연약함이 있고 또 관계가 아직 완전히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나다 보면 서로 마음이 다르고 또 적용점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게 한 이 모임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또 이제 새롭게 리더들이 세워졌는데요. 리더들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돕는 자가 되십시오. 제가 볼 때 우리 하늘소망교회에 지금 있는 분들은 누구든지 리더를 할 만한 충분한 자질이 있는 분들이에요. 한마디로 여러분들 소그룹은 리더 모임들하고 똑같습니다.
근데 그 가운데 조금 이제 역할을 맡은 분들이 리더를 하시니까 그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여러분들이 리더의 아픔, 리더의 어려움을 아시고 그 리더를 위해 기도하면서 도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기쁨이 일어나는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이요. 코미디언들에게 가장 힘든 대상들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외국에서 코미디 원들이 코미디를 하면 일단 그래 웃을 준비를 하고 시작을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러고 시작한다는 거예요. 웃겨봐 여러분 말씀을 증거할 때도요. 말씀을 증거하는 입장에서 여러분들의 지금 이 반응과 이 자세도요. 저에게 굉장히 많은 적용점이 됩니다. 말씀을 우리 춘천 사람들이 말씀을 전해 듣는 데 어려운 성향일까요? 쉬운 성향일까요? 여러분 들어보셨죠? 한때 유명한 누구도 춘천에 와서는 울고 갔다더라 이런 소문이 있을 정도로 춘천분들이 제가 볼 때 약간 이런 성향이 있어요. 한번 내가 은혜받게 해봐. 그럴 능력은 저한테 없습니다. 저는 다만 통로의 역할을 할 뿐이에요.
근데 여러분 수도관에서 아무리 물을 전달을 통로를 통해서 해줘도요. 우리 집에서 수도꼭지를 열지 않으면 물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쵸? 트셔야 됩니다. 이건 여러분들이 하셔야 될 역할이에요. 미리 예배를 위하여 기도하고 미리 준비하고 또 예배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함께 기쁨으로 나아가라. 이것이 이 데살로니카 교회가 짧은 그 기간이었지만 그렇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회가 세워질 때 전도자들로 파송된 사람들의 섬김과 헌신이 있었는데 그들의 헌신을 2장 7절과 7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어떤 모습으로 섬겼는지가 나오게 됩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시작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됨이라.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아멘 저는 저를 비롯해서 우리 공동체 안에 이렇게 우리 공동체, 우리 옆에 있는 동력자들을 섬기고 헌신하는 그러한 은혜의 물결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데살로니카 교회는 본받을 사람이 있었던 거예요. 근데 그 본받을 사람이 지금 이 앞에 있는 목회자만이라고 하면 저는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근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본받을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데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은 이 복음 전도자의 짧은 3주간의 복음 증거 기간이었지만 그 기간에 그들의 헌신된 그들의 희생을 보면서 보니 된 거죠. 그리고 본받은 대로 그들이 본을 끼치는 그런 삶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7절에 있는 말씀처럼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 특별히 8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 데살로니카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그러니까 그들의 신앙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거예요.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 대표 기도할 때 이제 대표 기도하시는 분들 잘 이 말씀을 한번 생각하면서 정리를 해 보십시오. 대표 기도할 때 기도 안에 회개의 기도가 있어요. 그래서 주로 어떤 내용이냐면 주님 지난 한 주간도 우리가 세상 가운데 넘어지고 자빠져서 또 주님 앞에 용서를 구합니다. 주여 용서하옵소서 회개의 기도를 드려야 틀린 건 아닙니다.
근데 여러분 기도가 365일 맨날 회개만 하고 있어요. 그러면 그것도 문제죠. 성숙하는 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자라가야 되는 거예요. 지금은 넘어졌어도 내일은 좀 덜 넘어지고 마치 어렸을 때 우리 아이가 맨날 인라인스케이트만 타면 넘어지는 거예요. 무릎이 맨날 성할 날이 없습니다. 맨날 넘어지고 자빠지는데 그냥 나중에는 붙잡아주고 잡아주고 이끌어주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손을 놓기 시작하더니 넘어지는 횟수가 줄어들고 나중에는 절대 안 넘어지고 타더라고요.
그게 성장이잖아요. 신앙에도 역시 성장이 필요합니다. 그냥 의식 없이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행동들이 있어요. 기도도 보면 반복적으로 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기도의 제목이 저는 그렇게 바뀌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이번 한 주간 승리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나의 삶 가운데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저의 삶 가운데 사랑의 작은 수고가 뿌려져서 정말 열매를 맛보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는 우리 하늘소망교회 공동체가 그러한 기도의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내가 아무 할 말이 없다 그냥 그저 내가 그 사람들에게 오히려 본받을 사람들이라고 하는 신앙의 지경에 이르는 성장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까 말씀드린 우상을 온전히 버리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그것이 그들의 기본적인 게 되었기 때문에 이 세 가지가 나타난 것이고요.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재림의 신앙입니다.
데살로니카 교회가 마게도냐와 아가 지방에 있는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교회가 됐다고 했는데, 이것이 데살라니카 교회를 특징지을 수 있는 요인이 아닙니다. 다른 교회들도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고요. 사랑의 수고가 이루어졌습니다.
근데 그중에 이 데살로니카 교회가 특별히 구별되고 특징되는 게 바로 이 재림의 신앙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주의 강림을 사모하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의 강림 다시 오실 것이라고 하는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니까 어떠한 환란이 일어나도 그들은 믿음으로 인내하였습니다. 어떤 환경도 이겨낼 수 있는 무기가 그들에게 장착된 것이죠.
여러분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순교자들이 역사상 있었습니다. 근데 그 순교자들이 죽어가면서까지 그 형장에서 이슬이 되어가는 순간까지 그들에게 그들을 죽이는 사람들은 개종하라고 저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화형을 당하는 순간에도 목이 베어 참수를 당하는 순간에도 사지가 찢겨나가는 그 순간에도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순교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활과 재림을 믿는 그들은 그 믿음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매 예배 때마다 신앙의 고백으로 사 우리가 신앙 고백을 하듯이 그 신앙 고백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처럼 죽은 자와 산 자를 다시 심판하러 오신다고 하는 신앙을 분명히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비굴하게 순교의 현장에서 배반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현상을 좀 살펴볼까요? 요즘 자연이 이게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어렸을 때 여러분들이 경험했던 봄여름, 가을 겨울이 아닌 거 이제 아시죠? 6월달에 지금 이 날씨도 정상적인 게 아닙니다. 지진, 천체의 이상, 자연재해,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그리고 이성주의에 치우쳐서 영적으로는 점점 믿음이 약해져가고 있고, 시험에 잘 빠지고 불법이 성행하고 이단 사이비가 가득한 영적인 침체의 시대 여러분들 보고 듣고 있지 않으시나요?
이런 때에 우리가 다시금 붙들어야 될 핵심 가치, 핵심 믿음 그것은 바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재림의 신앙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마지막 사도바울의 권고의 말씀 골로새서 1장 3장 1절에서 4절 말씀을 같이 읽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지라.
아멘,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우리가 도전을 받길 원합니다. 신앙의 기쁨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또 본받는 자가 되게 하시고, 영향력을 끼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내 삶에 끊어낼 것들을 끊어내게 하여 주시고, 특별히 우리의 믿음의 가장 핵심 가치인 재림의 신앙을 붙들고 하늘의 소망을 품고 그 하늘의 소망을 증거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땅의 것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하늘의 것을 바라보아라. 이 말씀을 이번 한 주간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삶 가운데 또 이 말씀이 능력이 됨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