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溪 박희용 南禪軒日記 2024년 10월 20일]
『대동야승』 제3권 「오산설림초고」 중 ’박란의 시와 太羹玄酒 不下酷酢‘
매일 남선헌에 앉아 『대동야승』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40년 전 책이라 삭아가는 종이에 검정이 옅어지는 작은 활자라 읽기가 불편해서 하루에 서너 장씩 읽으며 옛 문사들이 풀어놓은 이야기를 음미한다.
아래 두 이야기가 들어있는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의 저자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자는 복원(復元), 호는 오산(五山)으로 화담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직전인 1589년 통신사 황윤길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고전국역총서 대동야승』 제3권 「오산설림초고」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영동(嶺東) 아홉 고을은 모두 바다에 연해 있으나 평해(平海) 망양정만은 몇 리 바다로 들어간 지점에 있다. 뛰어난 시로서는 오정(梧亭) 박난지(朴蘭之)의 시를 절창으로 삼는다.
“나는 듯한 정자의 뛰어난 경치가 우리나라에 으뜸이라,
영 밖 누대(樓臺)들 모두 와 항복을 하네.
양곡(暘谷 해 돋는 곳)에 치미는 물결은 솟는 해를 떠받쳐 올리고,
고깃배 돛에 심한 바람이 불어오니, 휘청거리는 돛대만 앙상하구나.
누가 앞으로 낚시질을 배워서 자라를 여섯씩 한 줄에 꿸고,
나는 신선을 따르고자 神을 한꺼번에 둘씩 들어보네.
천고의 뛰어난 재주가 물가 성에 오니,
부끄럽게도 장관인 바다와 강을 한꺼번에 읊기 어려움이여.”
하였는데, 이 시는 오정이 강릉의 교수로 있을 때에 앞의 운으로 지은 것이다.
갑술년(甲戌年 1574년) 겨울 아버지께서 평해 고을에 살으실 (吾先君之守平海也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평해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상공(相公) 이준민(李俊民)이 절귀 한 수를 보냈는데,
“평생에 바란 곳은 평해 망양정.
그대를 보내고 그 틈에 놀게 하오니,
벼슬길에 얻은 정이 끝이 없어라.”
하였다.
박오정이 이 글을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영공의 시가 어찌하여 평측(平側)을 잃었습니까. 모름지기 고쳐야 할 것입니다.” 하니, 이상공이 말하기를, “양념을 하지 아니한 고깃국과 현주(玄酒 물의 별명)가 초맛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하였다.」
[팔경논주]
登望洋亭 등망양정
梧亭 朴蘭 오정 박난
飛亭勝絶冠吾邦 비정승절관오방
嶺外樓臺盡乞降 영외누대진걸항
暘谷浪飜掀出日 양곡낭번흔출일
漁帆風急露危杠 어범풍급로위강
誰將學釣鼈連六 수장학조별연육
我欲追仙寫擧雙 아욕추선사거쌍
千古雄才慙水郭 천고웅재참수곽
壯觀難賦海兼江 장관난부해겸강
附望洋亭 부먕양정
新菴 李俊民 신암 이준민
平生大醉處 평생대취처
平海望洋亭 평해망양정
送子樂其間 송자낙기간
風塵無限情 풍진무한정
평측을 잃었다는 박난의 질문에 이준민이 답하기를,
“太羹玄酒 不下酷酢 爾豈知之 태갱현주 불하혹초 이기지지!”
태갱 太羹 : 양념을 하지 아니한 고깃국
현주 玄酒 : 고대 제사에서 술 대신 쓰던 맑은 물
혹초 酷酢 : 술이 너무 잘 익은 식초
“양념을 하지 아니한 고깃국과 현주(玄酒 물의 별명)가 초맛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
“내 시가 비록 평측은 조금 어긋나나 평측 맞은 시보다 못할 게 없느니”
“형식에 꼭 맞고 기교를 부린 시도 좋지만 형식에 조금 어긋나더라도 근본을 읊은 시가 그에 못지 않느니”
“오정 박난의 시는 너무 익어 식초가 되었으나 내 시는 그렇지는 아니하다”
이준민(1524~1590)은 관향이 전의이며 호는 신암이다. 남명 조식이 외숙이다. 경기관찰사와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조정의 공론이 분열해 동인·서인의 붕당이 일어나자 이를 매우 염려했고, 당론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를 존경하였다. 1584년 이이가 사망하자, 당인들이 그를 탄핵해 공격하니, 이에 맞서 강경하게 불가함을 주장하는 의기를 보였다.
박란(1496 ~ ? )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함경도 북평사와 고원군수를 지냈다. 둘째 아들 박숭원이 충청도관찰사와 임란 때 도승지로 선조를 의주로 호종하여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는 등 귀하게 되어 증영의정밀평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차천로가 박란의 시 「登望洋亭」 을 절창이라고 했지만, 과장이 심하다. 박난 역시 시에서 ’嶺外樓臺盡乞降‘이라며 망양정 자랑이 지나치다. 망양정은 바닷가에 있어 유명하지만 부벽루, 영남루, 촉석루, 영호루 등에 비하며 일개 고을 수준이다. 또한 박란은 상공 이준민의 시가 평측이 안 맞다고 웃으며 말했는데, 벗인 차천로의 아버지와 망양정을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썼을 신암 이준민은 점잖게 ’太羹玄酒 不下酷酢 爾豈知之‘라 하며 박란의 말을 넉넉하게 받는다. 상공의 반열에 오른 현인답게 경륜과 지혜, 관용의 여유가 느껴진다. 양념이 넘치는 음식도 좋은 맛이지만 양념하지 않은 고깃국과 맑은 물도 좋은 맛이다. 조선이 5백 년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의 중심이 相公(종2품 이상)들에게 있었다.
여기까지는 국역에 대한 평면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국역에서 두 가지 오역을 하고 있다. 이 오역을 중심으로 입체적인 해석을 할 수 있다.
첫째는 ’뛰어난 시로서는 오정(梧亭) 박난지(朴蘭之)의 시를 절창으로 삼는다.“에서 ‘ 박난지(朴蘭之)’가 아니라 ‘박난(朴蘭)’이다. 한문 원문이 ’朴梧亭蘭之詩爲絶唱‘이다. 국역은 ’박오정 난의 시가 절창이다‘, ’즉 梧亭 朴蘭의 시가‘라는 말이다.
둘째는 끝 문장 “양념을 하지 아니한 고깃국과 현주(玄酒 물의 별명)가 초맛에 떨어지지 아니함을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에서 ’자네‘이다.
이준민이 이 시를 써서 보낸 1574년에 이준민은 51세였고 박란은 79세로 이준민은 박란보다 28세 연하이다. 한 세대 위다. 그러니 어찌 이준민이 박란을 보고 직접 “자네”라고 부를 수 있었겠는가. 이준민이 재상의 반열에 있었지만 박란은 북평사와 고원군수를 지낸 원로였다. 또한 박란의 아버지 박중손과 아들 박숭원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니 나이든 집안이든 모든 면에서 이준민이 박란을 “자네”라고 부를 수가 없다. 차천로가 부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오산설림초고」에 쓴 때는 아마 임진왜란을 겪고 세상이 조금 조용해진 1600년 이후일 것이다.
원문은 ’이기지지 爾豈知之‘이다. ’이 爾‘ 자는 ‘너 汝, 그 其’의 두 가지 뜻을 가진다. 국역자는 이중에서 ‘너’를 취해서 “자네”라고 한 모양이다. 그러나 후자인 ‘그’의 뜻을 취하면 “그가 어찌 알리”가 된다. ‘그’, 즉 ‘박란이 어찌 알겠는가’라는 말이 된다.
차천로가 쓴 원문이 오역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원문은 박란과 이준민이 한자리에 앉아 대화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역위원들의 국역은 박란과 이준민이 직접 만나 대화하는 모습을 멋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나이로 보면 두 사람은 한자리에 앉아 담소화락할 사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두 사람이 만난 게 아니라, 박란이 자기의 시에 대해 ‘평측이 안 맞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전해 들은 이준민이 자기변명 삼아 한 말이 돌고 돌아 차천로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爾‘를 ‘그’로 읽으면 국역이 훨씬 자연스럽다.
차천로가 박란의 시를 말한 다음에 이준민의 시를 말하고, 이어서 ‘太羹玄酒 不下酷酢 爾豈知之’를 말한 까닭은 무엇일까.
「오산설림초고」 에는 아버지 차식(車軾)과 형의 시와 일화가 상당히 많이 실려 있다. 일화를 쓰다 보니 차식이 평해현감 때 이준민으로부터 받은 시를 거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준민의 시 <附望洋亭>은 오언절귀 형식을 취하지만 평측이 안 맞고 내용도 가볍다. 내용도 ‘送子樂其間 風塵無限情’하며 차식을 평해현감으로 보낸 자기 공을 은근히 자랑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를 읽은 박란이 한마디 했을 것이다. 평측도 안 맞지만 연줄 정실인사로 차식을 평해현감으로 보낸 데 대한 비판하는 마음이 약간은 있었을 것이다. <附望洋亭>에 대해 박란이 한마디 했다는 소문이 선비 사회에서 돌고, 세간 인심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 차천로로서는 아버지와 함께 이준민의 시를 변호할 필요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마침 「오산설림초고」를 쓰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책에다 쓰면 이준민의 시도 살고 아버지도 빛난다.
그러나 <附望洋亭>이 평측과 내용에서 부실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울 것인가. 그 방법으로 가장 적합한 고사성어가 『禮記』에 있는 ‘太羹玄酒’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문장이 미흡하다. 그래서 이은 말이 ‘不下酷酢’이다.
박란의 시는 절창이다. 양념이 잘 된 고깃국과 같다. 그러나 양념이 너무 잘 되면 지나친 맛이 된다. 맛이 지나친 국보다 양념이 안 되더라도 담백한 국이 낫다. 잘 익은 술은 맛이 좋다. 그러나 술이 지나치게 익으면 초가 되어 버린다. 초를 술처럼 마실 수가 없다. 그러므로 너무 익어 초가 된 술보다는 맑은 물이 낫다.
박란의 시는 양념이 너무 잘 된 고깃국과 잘 익은 술과 같지만, 이준민의 시는 양념이 안 된 고깃국이고 맑은 물과 같다. 그러므로 초가 되어 못 먹는 술보다는 오히려 낫다.
박란의 비평을 들은 이준민이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변명 삼아 한마디 답사를 했을 수도 있고, 차천로가 이준민이 한 말이라고 하면서 현장을 꾸며 이준민과 아버지를 변호하는 말을 집어넣었을 수도 있다. 그나저나 ‘자네’라고 국역한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위의 두 가지 오역은 민족문화추진위의 고전국역총서 『대동야승』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한국고전종합DB]에서는 ‘시로서는 오정(梧亭) 박란(朴蘭)의 시를 절창(絶唱)으로 삼는다.’라 하여 ‘박란’이라고 바르게 국역했으나, ‘자네가 어찌 알겠는가.’에서는 여전히 ‘자네’로 국역하고 있다. 「오산설림초고」 의 원문만 보고 그대로 국역했을 뿐, 박란과 이준민의 생몰년도는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에는 국역 그대로 읽고 평면적인 평을 했다. 그런데 한문 원문을 보고 ‘박난지(朴蘭之)’가 아니라 ‘박난(朴蘭)’임을 알았다. 바로 나의 조상이었다. 이어서 연대 검색을 통해 나이 차이가 많음을 알았다.
교묘한 장치에 의한 그릇된 국역을 한 책과 인터넷 정보를 그대로 두면 우리나라 한국문화가 무궁하도록 28세 더 많은 박란이 재상 이준민의 시를 경박하게 평한 ‘자네’로 남는다.
밀양박씨 규정공파 朴蘭은 나의 15대조이시다. 나의 14대조이신 충정공 박숭원의 아버지이시다. 조상의 시를 『대동야승』에서 대하니 감회가 깊다. 차천로와 마찬가지로 시공을 뛰어넘어 조상을 변호한다.
『대동야승』의 「오산설림초고」에 나타난 ‘자네’ 오역을 민족문화추진위와 한국고전번역원에 반드시 수정해야 할 것이다. [한국고전종합 DB]의 「오산설림초고」 국역 중에서 해당 부분의 ‘자네’를 반드시 수정해야 할 것이다. 28세나 적은 연하자가 웃어른을 보고 ‘자네’라고 부르는 법도가 어느 나라에 있는가. 유학조선은 막되먹은 나라가 아니었다.
『대동야승』 은 한국인이 평생동안 읽으며 음미해야 할 필독서이다. 그 속에는 조선 시대를 산 많은 지식인이 쓴 글들이 들어있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971년에 국역본 전질을 발행했다. 하지만 간혹 오역과 오탈자가 있다. 더 깊숙한 곳에는 필자와 저자들의 의도가 숨어 있다. 뒤의 원문과 대조하며 읽으면 그들의 생각과 의도를 훨씬 더 생생하게 느끼고 알 수 있다. 인터넷 [한국고전종합 DB]에서도 읽을 수 있다.
우리 한국이 오늘날 이만큼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은 조상들이 남긴 거대한 규모의 기록문화 유산에서 나온다. 세계 어느 나라가 우리나라만큼 거대한 기록문화 유산을 갖고 있는가. 세계에 널리 크게 자랑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