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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독특한 여행에 취미를 가지고 있는 후배들과 술을 마시다 베트남 사파트레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망설임 없이 나는 동행을 선언했다. 사파트레킹과 판시판 산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었고, 언젠가 꼭 한번은 가봐야 할 곳으로 기억하고 있었기에....
사파는 하노이 북서쪽 350km 떨어진 라오까이주(Lao Cai Province)에 있는 국경근처의 산악마을이다. 해발 1,650m에 위치하여 베트남의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시원한 지역이어서 프랑스 지배시절, 피서지로 개발되어 숙박시설이 많고, 아름다운 카페나 맛있는 레스토랑이 도처에 널려있다. 또한 인도차이나의 최고봉(3143m)인 판시판(Pansipan) 산이 인근에 있고, 자오족(Dao), 몽족(Hmong) 등 소수민족 마을과 우리의 다랑이 논과 같은 급경사의 계단식 논이 넓게 펼쳐져 있는 특이한 자연풍광을 가진 곳이다. 다만 3,000m가 넘는 판시판 산이 인근에 있어 날씨가 흐리고 안개에 묻히는 날이 많다.
10월 22일(토) 민경재 박사와 김영술 교수는 오전 비행기로 먼저 출국하고, 나와 광주MBC의 이경찬 PD는 오후 비행기로 출국하기로 하여 좌석을 받으려고 하는데, 이 PD는 명단에 없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고, 베트남에 있는 민 박사와 통화하는 등 한바탕 소동을 벌렸으나 결국 만석인 관계로 나만 홀로 비행기를 탈 수밖에 없었다. 하노이까지는 약 4시간, 저녁을 먹고 법정 스님을 주제로 한 소설 ‘바람 불면 다시 오리라’를 읽다 보니 벌써 하노이 국제공항에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어차피 1시간 후 이 PD가 도착을 하니 바쁠 일도 없었지만 캐리어가 나오지 않아 열쇠를 채우지 못한 게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데(나중에 확인해 보니 고어텍스 자켓이 없어졌다) 1시간이 거의 다된 마지막에 캐리어가 나왔다. 밖으로 나와 민 박사와 반갑게 해후를 하고 2층 레스토랑에서 분짜(Bun Cha, 새콤달콤하게 맛을 낸 차가운 국물에 숯불에 구워낸 돼지고기와 쌀국수를 적셔 먹는 하노이 지방의 대표 음식)에 맥주를 마셨다. 이 PD를 만나 함께 택시로 시내에 들어가 야경을 보려고 했으나 시간이 늦어 숙소(섬머셋 그랜드 하노이 레지던스)로 가서 하노이의 첫 밤을 보냈다.
23일, 마침 숙소 옆에 프랑스 지배 당시 만들어진 호아 로 감옥(프랑스인들은 메종 상트랄이라 부름)이 있어 그곳을 먼저 돌아봤다. 입구는 마치 미술관이나 박물관처럼 단아했지만 이곳은 프랑스 지배 시절(1896년) 독립투사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사형시켰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호아 로(Hoa Lo)’라는 뜻은 베트남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인데 독립에 대한 투지를 불살랐던 ‘화로(용광로)’라는 뜻이다. 감옥에서는 모두 족쇄를 채워 활동에 제한을 했고, 단두대가 있어 이곳에서 사형도 집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뒤편에는 죽은 독립투사를 추모하기 위한 기념조형물이 있으며, 베트남전쟁 당시에는 미군포로들을 수용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 바로 하노이 힐튼(Hanoi Hilton)이다. 2층에 각종 사진과 영상들이 있는데 미국 상원의원을 지낸 존 멕케인의 낙하산과 옷이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특이한 것은 아주 좁다란 하수구가 있는데 그 좁은 틈으로 독립투사들이 탈출했다는 사실(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도 무오이도 1945년 이곳을 통해 탈출)과 그걸 막기 위해 쇠창살을 만들었는데도 그 쇠창살을 마저 자르고 탈출했다는 유적이 전시되어 있다.
[추모조형물]
[하수구유적]
감옥을 나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집중돼 있다는 구시가지 호안끼엠 호수 옆 카쿠라는 레스토랑에서 분짜를 먹고, 역사박물관으로 가기 위해 나왔다. 호안끼엠 호수는 ‘하노이의 영혼’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생각보다 아담한 이 호수는 길이가 약 700m인데, 호수의 물빛이 녹색이라 해서 ‘룩투이 호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이 호수 남쪽에는 거북이 탑(Thap Rua)이 있는데 15세기 레 러이가 호수에서 용왕의 보검을 얻어 명나라를 물리치고 자신의 왕조를 세웠는데 전쟁 승리 후 호수를 돌아보던 중 황금거북이가 나타나 검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달라고 하여 호수 한복판에서 가까운 작은 섬에 보검을 묻고 그 후 거북을 기리는 탑을 세웠다는 전설로 인해 ‘환검호(還劍湖), 호안끼엠’이라고 불리게 됐다고 한다. 또한 북쪽에는 13세기 몽고의 침략을 막아낸 쩐 흥다오 등을 위해 세운 응옥썬 사당(Den Ngoc Son, 玉山祠)이 있는데 1968년 호수에서 잡았다는 길이 2m, 무게 250kg에 달하는 거북이 박제가 있어 전설에 나온 거북이의 후손이 아닐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마침 일요일이라 호수 주변은 차량통행이 금지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자유스럽게 도로까지 나와 휴일을 즐기고 있었다. 호수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역사박물관을 가는 도중에 프랑스 시절(1911년) 바로크양식으로 만든 오페라하우스가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었고, 많은 대학생들이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졸업 단체사진을 찍고 있었다.
[하노이 대표 음식 분짜]
[오페라하우스]
1926년 개관했다는 역사박물관은 베트남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많은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구석기시대 도구와 참파 유적에서 출토된 조각, 동손문화 시대의 청동기 제품 등이 시대별로 구분되어 베트남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역사박물관에서 걸어서 공자를 모신 문묘를 찾았다. 호안끼엠 호수에서 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유교사원인데 문묘 앞과 안에도 많은 학생들이 사진을 찍고 있어 정숙해야할 문묘는 그야말로 혼잡 그 자체였다. 문묘는 1070년 3대 황제인 리탄통(Ly Thanh Tong)이 공자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며, 베트남 최초의 대학(국자감)이다. 리 왕조의 통치 기간에 국교를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했는데, 문묘가 정신적 중심지 역할을 했다. 경내에는 문묘문, 규문각, 연지, 대성전, 공자사당, 종루 등이 있으며, 특히 19세기 원조시대에 만든 규문각은 하노이의 상징이며, 문묘 안 거북 머리 대좌 위에는 1440여년부터 300년 동안 116회의 과거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비석들이 있다. 공자사당은 공자를 중심으로 증자와 맹자, 그리고 안자와 자사를 봉안하고 있었다.
[문묘의 규문각]
[문묘에서 하노이대학생들과]
리 왕조는 전(前) 레 왕조의 장군이었던 이공온이 군권을 장악해 레 왕조를 무너뜨리고 리 왕조를 수립했는데, 9대 217년을 지속하여 베트남에서 가장 장기 집권한 왕조다. 왕조 멸망 후 황제의 숙부가 고려로 피신하여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문묘를 나와 탕롱왕궁을 찾았다. 탕롱왕궁은 리 왕조가 탕롱(昇龍)을 수도로 정하면서 세운 성의 중앙부인데 남문을 중심으로 일부분만 남았다. 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남문이 옛 왕조의 번창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우리가 갔던 날은 빈 공터에서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어 주변이 어수선했지만, 남문 위에 올라 주변 경관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일부에서는 유적발굴을 하고 있었으며, 용 모양의 아름다운 계단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북문은 왕궁 안에서는 볼 수 없고 밖으로 나가야 볼 수 있으며, 베트남전쟁 당시 이곳은 사령부로 사용되어 지하벙커 등을 관람할 수 있다.
[탕롱왕궁 남문]
왕궁을 나와 택시를 타고 하노이에서 꼭 봐야할 서호 야경을 보기 위해 판 패시픽호텔로 가서 20층의 서밋라운지로 올라갔다. 오후 4시부터 영업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도착했을 때(4시 30분경)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어 하나 남은 테이블을 어렵게 차지할 수 있었다. 석양을 보기에는 하늘에 구름이 너무 많았지만 서호와 어우러진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은 꼭 놓치지 말고 봐야 할 좋은 구경거리였다.
[서밋라운지에서]
저녁 10시, 슬리핑버스를 타고 사파로 이동했다. 버스는 일반 관광버스를 개조한 것으로 3줄, 2단으로 되어있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움직임도 자유롭지 못한 쉽게 말해서 천장은 낮고, 폭은 좁고, 길이는 짧아 제대로 누울 수조차 없는 구조의 아주 불편한 버스여서 잠을 깊이 잘 수가 없었다. 중간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03시 반에 사파에 도착했다. 보통 05시까지는 버스에서 잘 수 있다고 하는데 나와 김 교수는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흥정하여 예약된 호텔로 갔는데 우리가 예약한 호텔은 문이 잠겨, 옆 호텔의 종업원을 깨워 샤워할 수 있는 방을 부탁하여 투숙했다.
사파는 생각보다는 큰 도시였다. 그리고 비슷한 이름을 가진 호텔과 식당이 있어 예약할 때 주의가 필요한 곳이다. 우리 역시 하노이에서 예약을 했는데 주소는 맞는데 이름이 틀려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또한 예약한 호텔과 가이드와 만나 출발하기로 한 장소가 틀려 다시 이동을 해서 짐을 맡기고 오늘 1박에 필요한 조그만 배낭만을 챙겨 9시경 가이드를 만났다. 우리 일행 외에도 스페인 출신으로 오스트리아에 근무하고 있다는 두 커플이 우리와 동행이 예정되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출발했다.
오늘은 약 12km를 걷는다고 한다. 라오차이 마을에서 점심을 하고 타반(자오족 전통마을)에서 홈스테이 1박, 그 다음날 폭포를 구경하고 사파로 되돌아오는 코스였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흐몽족 가이드와 우리에게 물건을 팔려는 블랙흐몽족 여인 10여 명이 마치 오랜 지기처럼 일행을 이루게 되었다. 사파의 중심지에는 성당과 광장이 있는데 깟깟마을 가는 큰길을 따라가다 왼쪽 내리막 밭길로 접어들었다. 앞으로는 판시판 산에서 내려온 지맥(호앙리엔산맥)들이 도열하듯 장벽을 이루고 깊은 계곡 아래 흐르는 강을 중심으로 양 옆에는 다랑이 논들이 한없이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수확을 앞둔 계절이라면 황금빛 물결이 우리를 더욱 설레게 했으리라는 상상을 하며 급한 내리막을 내려갔다. 수확을 끝낸 논에서는 새순이 다시 나오기 시작했고, 논에 돼지나 오리, 그리고 닭들이 한가롭게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가끔 산길에는 무성한 왕대가 무리지어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쳐 우리를 놀라게 했다. 길은 대개 경사진 논사이로 이어졌다. 사실 사파의 길은 우리나라의 길처럼 멋진 경관이 있다거나 옛길이라거나 하는 그런 만들어진 길이 아닌 사람의 냄새가 물씬 나고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그런 삶의 길이다. 그러다보니 그늘을 이룰 숲도 없어 뜨거운 태양을 직접 맞으며 걸어야 한다. 이린호 마을을 지나고 마침 경관이 트인 언덕 위에 휴게소가 있는데 귀한 냉장고가 있어 시원한 맥주 한 캔씩 사서 마시니 그 시원함에서 오는 행복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다.
휴게소를 지나면서 길은 급한 내리막으로 라오차이 마을까지 이어진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어디에서 왔느냐’, ‘이름이 무어냐’고 말을 걸며 동행했던 블랙흐멍족 여인들은 이곳 다리입구까지만 갈 수 있다며 가이드가 ‘여기에서 물건을 하나씩 사줬으면 좋겠다’고 권해 우리들은 만 원짜리 기념품을 하나씩 샀다. 철로 만든 흔들다리를 건너 왼쪽 식당가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출발하려고 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쉬이 그치지 않을 비여서 우리는 비옷을 입고 출발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오늘 우리의 숙소가 있는 타반마을까지는 3~4km 정도가 남았는데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다. 트레커는 유럽인들이 많았고, 가끔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보였는데 한국인들은 휴가기간이 아니어서인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2~3km정도 가서 갈림길이 나왔는데 왼쪽 길이 타반마을로 가는 길이다. 살던 집을 개조해서 만든 기념품이나 식료품을 파는 가게와 직접 잡은 소나 돼지를 파는 식육점과 과일과 먹거리를 파는 노점상이 줄지어 있고, 아담한 초등학교도 있었다. 윗길로 올라가니 카페와 홈스테이 집들이 연이어 있고 우리들의 숙소는 안쪽으로 더 들어가서 있었다.
2층으로 된 숙소는 1층은 침대가 있는 개별 방이지만 2층은 군대의 내무반처럼 매트리스만 깔고 자는 곳이다. 2층에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우리는 식사 외에 촌닭을 한 마리 사서 백숙을 만들고, 전통주를 주문하여 마셨다. 날씨가 맑았으면 하늘의 별들이 쏟아지는 장관을 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알코올이 달래주었다.
새벽 5시 일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바깥으로 나갔다. 한국에서의 뉴스가 심상치 않다. 마을을 둘러보니 60년 초 우리의 시골처럼 길 옆 도랑에는 닭과 오리들이 무리지어 다닌다. 숙소로 돌아와 ‘바람 불면 다시 오리라’는 책을 펼쳤다. 무소유를 말씀하신 스님의 목소리가 그대로 살아있는 마을에서 나라의 현실을 생각하자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마침 ‘미소 지으며 가노라’ ‘자야의 사랑’을 읽는데, 어머니의 부음을 접하고도 동안거 중이라 가보지 못한 스님의 마음이 짠하고, 슬펐다. 또한 미국에서 대원각 주인인 자야를 처음 만나 대원각을 내놓겠다는 이야기를 듣던 스님은 그가 시인 백석이 그렇게 사랑했던 여인 자야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법정은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좋아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은 수십억도 넘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가겠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권력에 눈이 멀고 많은 국민들에게 좌절과 허탈을 가져다주고도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타반 숙소에서]
가이드만 없다면 새벽 시원한 길에 그냥 떠나면 될 일인데, 더위가 시작되는 9시가 넘어서야 숙소를 출발했다. 어제 비로 오름길이 미끄러워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마을을 벗어나 논 사이로 난 오름길을 오르며 평화로운 건너편 마을과 깊은 계곡 아래 흐르는 강과 논에서 뛰어다니는 물소를 보며 7km의 여정을 시작했다. 폭포를 구경하는 게 목적인 이 길은 팔각정 쉼터까지는 계속 오르막이고 그 다음은 숲길로 평지처럼 산을 끼고 돌아 폭포에 이른 후 내리막을 약간 내려가 강가를 따라 걷다 마을로 치고 올라가는 길이었다. 쉼터에 오르니 멀리 다랑이 논 가운데 청색으로 된 집이 우두커니 홀로 있어 마침 우리 청와대가 떠올랐다. 민심의 바다에서 밀려나 외딴 섬처럼 텅 빈 그곳과 왜 그리 똑같은지.
폭포는 큰 볼거리는 아니었지만, 사파에 이런 곳도 있다는 의미로 들려 볼만 했다. 문제는 폭포에서 내려가는 길이 경사가 있는데다 엄청 미끄러워 사고의 위험이 높았다. 물론 옷을 젖으려면 별것도 아닌 길일 테지만, 많은 사람들이 엉거주춤 걸어가니 정체가 심해져서 그다지 길지 않은 길에 많은 시간이 소비되었다. 폭포 아래에서의 풍광이 그래도 더 나아 기념사진을 찍고 지앙타차이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버스로 사파로 되돌아와 시내에 있는 함롱산공원을 찾았다.
함롱산공원은 성당 옆길로 들어가 왼편으로 가면 입구가 나온다. 입장료를 내고 계단을 올라가면 제일 먼저 판시판 산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오는데 각양각색의 난분재가 엄청 많았다. 다시 비가 내린다. 비를 맞고 계단을 오르니 십이지신상이 하나씩 있는 꽃밭이 계속 이어진다. 그곳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정상으로 향하는 좁은 문(Haven Gate)들이 나오고 자연석사이로 좁은 길들이 이어지면서 함롱산 정상 전망대에 닿게 된다. 비는 계속 세차게 내리고 안개는 오락가락하는데 사파시내와 호수가 번갈아가며 살며시 얼굴을 보였다 숨겼다를 반복한다. 먼저 올라온 다른 일행들과 정답게 사진도 찍고 안부를 나눈다. 아마 안개 때문에 보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던 사파의 아름다운 정경을 살짝이나마 보게 된 기쁨을 서로 나누는 의례였다.
[함롱산 풍경]
[함롱산 풍경]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사파에 하나밖에 없는 ‘나바기’라는 이름의 한국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버스터미널 옆 ‘디엔 비에 푸’ 거리에 있는 식당인데 아직 홍보가 안 됐는지 아니면 한국 여행객이 없어서인지 손님이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삼겹살에 두부김치와 된장국 등에 소주를 시켜 포식을 하고 '나바기'의 무궁한 발전을 빌었다.
사파의 마지막 날이다. 광장 앞에 있는 사파뮤지엄에 들러 관람을 한 후, 김 교수와 나는 걸어서 깟깟마을로 가고 민 박사와 이 PD는 스쿠터를 빌려 타고 와서 만나기로 했다. 깟깟마을까지는 포장된 내리막길로 차와 스쿠터 그리고 사람이 뒤섞여 가는 길이다. 사실 한적하고 조용할 것으로 생각하고 사파에 왔는데 건축공사장도 많고 스쿠터와 차량들 그리고 물건을 파는 흐몽족 여인들로 인해 너무나 번잡해 아쉬웠다. 다만 전망 좋은 곳에 아름다운 카페들이 우리의 아쉬움을 달래준다. 깟깟마을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입해서 전통마을로 내려가는데 길옆으로 직접 짠 수공예품 옷이나 가방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계단 맨 아래 강이 흐르고 강가에는 중국영화에서 봤던 큰 물레방아가 하릴없이 돌고 있다. 다리를 건너자 폭포가 있는데 그 옆으로는 전통공연을 하는 소극장이 있고, 계곡이 시원스럽다. 물레방아가 도는 윗길로 올라가니 민 박사와 이 PD가 내려오고 있었다. 스쿠터에 연료가 없어 주유소를 찾다보니 늦었다고 한다. 다리를 건너니 스쿠터들이 사파까지 가자며 계속 따라 붙는다. 아마 내 배를 보고 걷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경사가 제법 심한 도로를 따라 오르니 땀이 줄줄 흐른다. 내려올 때 봐두었던 카페 몽에서 맥주를 마시며 멀리 구름에 가려진 판시판 산과 주변 풍광에 취해 있는데 그때서야 두 사람이 도착했다. 그들의 스쿠터를 타고 사파로 돌아와 점심을 하고 판시판 산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갔다.
[깟깟마을]
판시판 산은 1905년 프랑스인들이 정상석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동안의 전쟁으로 등산로가 무성한 풀로 인해 흔적도 없이 없어졌던 것을 1991년 응우웬이라는 군인이 이 지역에 근무하면서 흐몽족 소년을 안내인으로 하고 산양들의 발자국을 따라 13번의 도전 끝에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고 한다. 등산을 해서 정상에 오르려면 20km의 거리라 대략 2박3일 정도가 소요되며, 3,000m가 넘다보니 늘 안개가 끼고 비가 자주 온다고 한다. 2016년 4월에 개통한 케이블카는 지상 1층에 지하 3층으로 고급 식당과 기념품점이 입점해 있다. 케이블카는 판시판까지 총길이는 6.2km이고, 해발고도차는 1,410m이며 요금은 우리 돈으로 3만원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약 700여 개의 계단을 올라야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판시판산]
35인승의 케이블카는 통유리라 사방이 시원하다. 다랑이 논을 위에서 보니 지도의 등고선처럼 보였다. 15분 동안 호사를 누리다 내려선 산은 안개에 묻혀 있었다. 정상가는 길옆으로는 지금도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종루와 불교사원 등을 건축하고 있었다. 3일간 사파의 구석구석을 다 보지는 못했겠지만 대체로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은 모두 봤다. 우리는 택시를 대절하여 기차역이 있는 라오까이로 가서 역 앞에서 저녁을 먹고, 하노이 보드카를 사서 4인용 침대가 있는 방에서 늦은 시간까지 마지막 밤의 아쉬움을 달랬다. 새벽 5시 하노이역에 도착하여 쌀국수를 먹고 나는 택시로 하노이공항으로 가고 세 사람은 닌빈과 다낭, 후에, 호이안을 구경하기 위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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