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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몽준의 일생
2. 일생
1951년 11월 15일 경상남도 부산시 초량출장소 범일동(現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8남 3녀 중 6남으로 태어났다.
정주영 현대그룹 초대 회장의 6남으로, 현대중공업그룹의 총수와 전직 7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또한 축구행정가로서 한국 축구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FIFA 부회장(4선, 현 명예 부회장), 대한축구협회장,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를 역임했다.
여담으로 과거 언론 등에서 국회의원들의 재산 조사를 하면 항상 정몽준의 조 단위의 재산 때문에 평균치가 급격히 오르는 탓에 자료가 곡해될 수 있어서, 그는 빼고 조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정몽준이 떠난 이후의 국회도 비슷해서, 수백억 이상의 자산가들은 빼고 계산하는 경향이 있다.
3. 정치인이 되기 전
3.1. 학창시절
서울장충국민학교,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61회)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1970학번)에 진학한다. 초졸 학력에 컴플렉스가 있던 아버지 정주영은 정몽준이 서울대 상대에 입학하여 평생의 한을 풀어준 것이 기뻤는지, 다른 재벌 총수들을 만날 때마다 아들 자랑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여담으로 정몽준의 자녀들 중 정기선, 정예선, 정남이는 모두 연세대학교 출신이다. 어쨌든 정주영이 정몽헌과 더불어 가장 예뻐한 아들로서, 형제들 중에서 가장 빠른 31세에 사장이 되었고, 부친인 정주영과 술집에 가서 자신이 외상으로 달아놓은 술값을 그 천하의 정주영한테 덤태기 씌우는 용자짓도 했다고 한다. 정주영 본인도 어이없어 했다고.
정주영은 정몽준이 머리가 좋다보니 현대그룹을 물려 줄 생각도 해봤으나 정몽준 본인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치자금 겸 현대중공업과 산하 계열사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정치란 게 어느 정도는 정치자금이 있어야 돌아가는 법이기도 하고, 정주영 본인도 대선출마 경험이 있던 만큼 정계 진출의 꿈을 이해해 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통령의 꿈을 아들이 이루어주길 바랬던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못 이뤘다.
군 전역 이후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가 MIT로 옮겨 졸업했고 이후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3.2. 병역
정치인·재벌가 사람들 중 병역문제에서 깨끗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대한민국 육군 ROTC(13기)에 입단하여 후보생 시절 동기들의 단가방을 자비로 다 갈아치우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1975년 3월 1일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1977년 6월 30일 중위로 만기전역하였다.
사실 범 현대가에는 남자는 대체로 꼼수 쓰지 않고 군대는 가는 전통이 있다고 하는데, 이 전통은 정주영 때문에 생겼다. 뭔 소린고 하면, 정주영은 어느 순간 대통령이 되고 싶어했고 그래서 실제 1992년 대선 출마도 한 적이 있었다. 정주영은 투표가 가능한 국민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예비역이니 아들들의 병역을 확실하게 해두지 않으면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정주영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서 일족들의 병역부터 제대로 관리해왔다는 후문이다. 다만 정주영 본인은 병역과는 해당사항이 없는데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의 일본군 징집은 1944년에 이뤄졌으며 이 무렵에 정주영은 이미 29세이자 3남 1녀의 아버지였다. 거기다 광복 이후에도 1949년 잠시 징병제를 시행할 시점에 이미 34세였고 5남 1녀의 아버지인 상태였다.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한민국 징병제 시행의 본격적인 계기가 된 6.25 전쟁 때는 35세 였기에 이미 징집 연령에 해당사항이 없다.
정몽준의 장남 정기선도 연세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군사교육단에 입단하였고, 졸업 후 2005년 3월 1일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1군단 701특공연대에서 소대장과 연대 작전장교로 복무하였고, 2007년 6월 30일 중위로 만기전역하였다. 당시 아들이 복무하는 부대를 방문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피자 한 판 & 치킨 한 마리씩을 돌렸으며, 낙후한 시설을 보고 사비로 군 시설을 개선해 주고 싶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후자는 당시 지휘관에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아마 선거법상 문제의 소지가 있었던 것 같다.
4.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4.1. 정계 입문 ~ 국민의 정부
현대중공업의 회장으로 재직중이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울산광역시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범현대가에서 처음으로 정치로 외도를 한 케이스가 되었으며, 아버지인 정주영이나 현대건설 사장 출신인 이명박보다도 먼저 정치를 시작했다. 1990년 3당 합당을 전후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다 1992년 초 아버지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자, 민자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으로 당적을 옮겨 14대 총선에 출마하여 아버지와 함께 당선되었다. 통일국민당의 대변인, 정책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당내에서 정주영 다음가는 2인자로 대접받아 여러 직책을 소화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선대위를 총지위하며 정주영을 도왔다. 대선 직전 초원복집 사건 때 이들의 대화를 도청하여 언론에 폭로했으나, 언론이 불법도청에 초점을 맞추고 보도하면서 역풍이 불게 되어 정주영은 대선에서 3위로 낙선하게 되었다. 정몽준은 대선 직후 범인도피죄로 기소되었으나, 항소심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아 의원직 상실은 면하게 되었다. 정주영은 대선에서 패배한 뒤 정치에 흥미가 떨어져버려 정계를 은퇴하였고, 얼마 안 가 통일국민당이 와해되자 정몽준은 탈당하여 다시 무소속 의원이 되었다. 이후 2007년까지 무소속 신분, 혹은 1인 정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제3지대 및 독고다이 행보를 보였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현대그룹은 국내 은행과의 대출이 막히는 등 사실상의 정치보복을 당했고, 이에 분노한 정주영이 김대중을 밀어주게 되며 정몽준도 아버지의 행보에 발을 맞추기도 했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자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제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과반 이상을 차지하고 당시 연립여당이었던 자민련이 비충청권에서 의석을 잃어버리자 정몽준은 교섭단체를 유지하기 위해 이들의 연정에 일시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비하인드가 있다면,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준공할 당시 DJ가 건설을 승인한 건 정몽준의 설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2011년 OBS 인터뷰에서 정몽준이 밝힌 바에 따르면, 정몽준이 설득을 위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DJ는 IMF 극복이 우선이라 경기장 건립에 많은 돈을 투자하기 어렵다며 부탁을 거절하였으나, 정몽준이 나가려던 DJ를 붙잡고 "IMF 사태는 몇 년 안에 극복이 되어 월드컵 전까지는 수습이 가능할 텐데, 월드컵 때 다른 나라에 우리가 IMF를 극복했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려면 메인 스타디움이 있어야 한다"라고 설득을 했고 이에 DJ가 준공을 승인하면서 상암구장을 지을 수 있었다.
4.2. 화려했던 전성기
이때까지만 해도 정몽준은 국회의원은 몰라도 대통령과는 인연이 멀어보였는데, 2002년 그에게 천운이 다가온다. 바로 한일 월드컵을 유치하는데 그가 많은 힘을 썼기 때문. 게다가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대표팀이 기적적인 4강에 오르자, 당시 축구협회장으로서 한국 축구를 적극 후원한 그의 입지 역시 급격히 올라가 이전까진 거의 거론도 안되던 그가 고작 몇 개월 만에 유력 대선 후보가 된다. 한때 여론조사에서는 당시 유력대권주자였던 노무현을 제치고 이회창을 위협하기도 했을 정도.
이에 정몽준은 대선 출마를 결심하고 국민통합21을 창당한다. 처음에는 당시 이회창에 반발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다 자신처럼 붕 떠버린 동병상련 박근혜와 힘을 합쳐보려 했으나, 식사 자리에서 박근혜로부터 다짜고짜 당시 정몽준 캠프에 있던 김재규를 변호한 변호사 강신옥을 내치라는 요구를 받았고, 이에 결국 측근이던 강신옥이 곁을 떠났으나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 것도 있고 애초에 정몽준과 박근혜는 성향이나 결이 좀 달랐던 것도 있어서 박근혜는 한나라당이 콜하자 다시 복당해 버린다.
그 후 후단협의 압박 등으로 새천년민주당 후보 노무현과 여론조사 방식에 따른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으나, 여론조사 결과 간발의 차로 패하고 만다. 그래도 단일화 후 이에 승복하여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 선거 운동에 나섰으나, 갑자기 선거일 전날 밤 지지를 철회한다. 지지 철회 이유로는 외교 정책상의 이견, 차기대권주자로서 인정받지 못한 소외감 등이 거론됐지만, 결국 대선 전날 극단적인 지지 철회를 선택한 것은 감정 문제가 컸다.
당시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측에 섰던 김민석의 증언에 따르면 기존 단일화 합의는 모든 유세장에 단일후보 둘만 오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명동 유세에서 당 관계자의 실수로 노 후보 진영 인물 대다수가 단상에 오르게 된다. 김민석은 사고를 직감했고, 종로에서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본인이 커버를 칠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종로 유세에서 서갑원의 지시로 또다시 모든 인물이 단상에 오르게 된다. 게다가 직후 정몽준 진영에서 어떤 사람이 '차기는 정몽준!'이라 적힌 피켓을 보이자 노무현 후보가 '너무 속도위반하지 말자. 정동영, 추미애 최고위원도 있다.'고 한 것이 결정적으로 정몽준의 심기를 건드리게 된다. 이후 이동하게 된 냉면집에서 정몽준은 화가 나 소주만 마시고 있고 당직자들은 가만히 냉면만 먹는 분위기 속에서 정몽준의 측근인 가수 김흥국이 열이 뻗쳐 막 떠드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직후 정몽준은 지지철회 오더를 내린다. 그리고 이 날 밤 집에 찾아온 노무현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밖에 세워두다 돌려보내면서 정몽준과 노무현은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하지만, 제16대 대통령 선거 결과 노무현이 극적으로 당선되면서, 결과적으로 하루만 더 참았으면 얻을 수 있었던 국무총리직을 스스로 날려먹은 셈이 되었다.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하면서 후일을 준비했다면 미래가 어찌 됐을진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그 이상 못 가고 정계 은퇴를 한 지금에 와서 보면 여러모로 기회를 놓친 행보긴 하다. 어쨌든 서로 간의 감정을 정산하는 문제는 이긴 뒤에 해도 늦지 않은데 굳이 선거 전날에 판을 깨야 되겠냐는 비판이 거세지면서 뭔가 쪼잔한 인간처럼 되어버려 정계에서의 입지도 확 줄어버리고 만다. 여기엔 후술되어 있듯 버스비 발언 등 본인의 실언도 한몫했다.
이렇게 월드컵으로 얻은 정치적 위상 및 입지를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신기루처럼 흩어보낸 후, 국민통합21을 이끌고 17대 총선에 나섰으나 본인 1명만 당선된다. 결국 국민통합21을 해체하고 다시 무소속으로 있다가,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렇게 약 20년간의 제3지대 활동을 마무리지으며, 이때부터 2016년까진 보수 진영 인사로 활동하게 된다.
사족으로 노무현과는 정치적으로 결별한 이후에도 공식석상에서는 몇 번 만나 인사를 했지만, 더 이상의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고 노무현이 사망할 때까지 교류는 없었다. 더군다나 대선 이듬해인 2003년, 형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DJ정부 시기 대북송금 관련 특검을 받다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게 되자, 두 사람의 사이는 더 악화되고 말았다.
다만 역설적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한 뒤엔 이때 노무현 후보와 단일화했던 경력 때문에 공격을 받기도 했다. 때문에 정몽준도 2008년 당 대표 경선에 나갔을 때 노무현과의 단일화를 후회한다고 밝혔는데, 이 때문에 친노 지지자들에게는 또 한번 찍히게 된다. 그래서 고작 1년 후인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땐 정몽준도 봉하마을에 조문하러 갔으나 진입도 못 하고 쫓겨났다.
4.3. 한나라당 입당 이후
한나라당 입당 후엔 계파색이 뚜렷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굳이 따지자면 범친이계로 분류되었고,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는 기존 지역구인 울산 동구를 측근인 안효대에게 넘기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을로 지역구를 옮겨 당시까지만 해도 민주당 거물이었던 정동영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동작구을 지역구는 당시 최대 격전지로 보도되었으나 투표함을 까고 보니 생각보다 쉽게 정몽준이 승리했다.
2008년 8월에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2위로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2009년 9월, 박희태 대표가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출마를 이유로 대표직을 사퇴함에 따라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직도 승계하였다. 다만 이 시기 후술된 버스비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패배에 대한 책임으로 당 대표직을 사퇴했다.
대권 욕심도 여전히 있었는지 당내 유력 대선 주자인 박근혜와 대립했는데, 박근혜가 2011년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기고문에 대해 "내가 잘 아는 교수가 대필한 것이다"라고 깎아내리거나, "식자층에선 박 위원장이 대통령이 되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 있다고 걱정한다", "당이 유신(독재)의 그림자에 덮여있다" 등 독설에 가까운 멘트를 날려 친박 세력에 제대로 찍히기도 했다. 허나 당시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고, 이후 경선에서도 큰 바람은 일으키지 못하고 물러나고 만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동작 을에 출마해 당선되는데, 재미있게도 당시 상대 후보는 17대 국회 당시에 이 지역구의 의원이었던 현대자동차 사장/현대카드 회장 출신의 이계안 전 의원이었다. 조선 시절 정감록에 데인 이씨의 반격?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로 나섰다. 당초에는 출마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마땅한 후보가 없던 새누리당의 강력한 요청과 함께 당시 안철수의 신당 창당 활동으로 야당 표가 갈릴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입장을 바꿨다. 같은 당의 총리 출신 김황식, 재선 의원 출신의 이혜훈 후보와 경선을 치러 5월 13일에 최종 서울시장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후보 등록과 함께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26년 만에 국회를 떠난 셈이다. 그러나, 선거 결과 현직 시장 박원순에게 큰 표차로 참패하면서 낙선하고 만다. 정치 인생 최초의 낙선이라 뼈 아팠을 듯 하다. 더군다나 대선을 제외하고 보면 한국에서 가장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직 중 하나인 서울시장 선거였으니.
패배한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후보자 토론에서의 발언 문제, 그리고 당 차원에서 너무나 어설펐던 네거티브 전략 등이 있다. 박원순이 포스터에서 정면이 아닌 측면 사진을 쓴 건 '떳떳하지 못해서'라고 하는가 하면, 맥락도 맞지 않는 '박원순 부인 잠적설'을 꺼내는 등, 안하느니만 못한 무리수같은 네거티브였다. 자세한 내용은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화젯거리 문서 참조.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건 아래의 논란에서도 설명하는 가족들의 팀킬이었을 것이다.
2016년 20대 총선에는 아예 불출마했다. 대신 이런 글을 블로그에 올려 지역구를 물려줄 정도였던 자신의 측근인 안효대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나, 안효대는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울산연합 계파인 김종훈에게 패배하여 낙선하고 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분당 사태까지 벌어진 2016년 12월 29일 새누리당을 전격 탈당했다. 개혁보수신당으로의 합류는 부인했으며, 이후 별다른 정치 활동이 없는 상황. 나이도 든 만큼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것으로 여겨진다.
4.4. 탈당 이후
2020년, 박원순 사망 당시 조문을 하면서 오랜만에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한때 경쟁상대여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점도 있지만 상기했듯 둘은 사적으로도 친한 사이였다.
2022년, FIFA 회장 선거에 다시 도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는데, 진짜 도전할지는 미지수.
2024년 3월 27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힘 소속으로 용인시 정 지역구에 출마한 강철호 후보의 지지를 선언했다. 강 후보는 현대로보틱스 대표이사 출신이다. 같은 날 국민의힘 소속으로 수원시 을 지역구에 출마한 홍윤오 후보의 캠프에도 격려차 방문했다. 홍 후보는 2002년 대선 당시 정몽준 후보가 이끌었던 ‘국민통합21'에서 공보특보와 대변인을 맡았고, 이후 한나라당 대표 시절 대표실 부실장을 맡은 바 있다. 이런 개인적 인연으로 지지를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부 낙선했다.
5. 국제정치학 박사
1993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SAIS)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본인의 프로필에도 '국제정치학 박사'임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이 점은 본인의 주도로 설립된 아산정책연구원은 국내 유수의 국제정치 연구기관, 싱크탱크로 성장하고, 자신이 주장하는 핵무장론이 국내외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단, 정몽준의 박사 논문 주제인 일본의 정부-기업간 관계: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원제: The government-business relationship of Japan : a case study of the Japanese automobile industry)는 외교, 국제분쟁과 같은 일반적인 국제정치보다는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비교정치, 정치경제 부문에 더 가깝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국제정치는 이런 지역정치학 역시 포괄하는 넓은 개념이기 때문에 납득의 여지는 있는 편이다.
전공이 국제정치학인 데다가 오랜 국회의원 경력과 피파부회장 경력 때문에 글로벌 인맥을 따라올 사람이 없다. 헨리 키신저와 매우 가깝고 마이클 블룸버그와도 교분이 있다. 조 바이든, 블라디미르 푸틴, 시진핑을 위시해서 전세계 거물들과도 교류한다. 분명 인맥은 세계구인 인물이다.
실제로 18대 대선을 앞두고 2011년에 『세상을 움직이는 리더와의 소통』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쓴 책이 아니고 대담집이다. 키신저를 포함해서 마이클 샌델, 기 소르망, 도널드 럼스펠드 같은 유명 인물들과 대화한 내용을 정리했다. 헤리티지 재단 회장 에드윈 풀너도 있다.
국제적 활동의 베이스는 아산정책연구원이다. 매년 아산플래넘이라는 컨퍼런스를 개최하는데 거의 800명 가까운 국내외 인사들이 참여한다. 단순히 국제 인맥교류가 아니고 콘텐츠 기반으로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비중을 확보하는 데 기여한다고 보면 된다. 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이 이사장인데 자문위원단 면면이 화려하다. 전 세계은행 총재 폴 월포위츠, 전 브루킹스 연구소 소장 마이클 아마코스트도 있다.
6. 재산
2000년에 한국 부호 1위였다. 부친 정주영 회장이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1993년 이래로 현역 국회의원 당시, 재산 1위를 항상 고수했다. 알려진 재산 총액은 2조원대다. 대선 출마 경력까지 생각하면 사실 한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인물. 김세연, 안철수, 박덕흠도 어디가도 꿀리지 않을 자산가지만 엄연한 재벌인 정몽준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난다. 워낙 혼자서 튀는 수치라서 국회의원들의 평균 재산액이 언론에 보도될 때, 정몽준 재산은 반드시 빼고 평균을 계산하는 것이 거의 불문율이다. 정몽준을 제외한 국회의원 총 재산 평균은 대충 30억 원 정도 하는데, 정몽준을 평균에 포함시키면 거의 100억 원으로 3배(!)나 증가한다. 2조 원을 국회의원 총 인원인 대략 300으로 나누면 67억 원이다. 그러니까 다른 국회의원 299명의 재산을 다 합쳐도 정몽준의 반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재산 때문에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주로 활동했다. 공직자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와 주식 및 해당 기업이 전혀 무관함을 입증하지 못하면 관련 주식을 비롯한 자산을 3,000만 원만 남긴 채 모두 처분하거나 금융기관에 신탁 처분해야 한다. 이를 주식백지신탁제도라고 한다. 처분이라 해서 나머지 재산을 버리라는 건 아니고 주식을 매각해서 현금으로 바꾸거나 직무와 관련없는 분야의 주식으로 바꾸거나 하면 된다만, 정몽준이 가진 정도의 자산이면 변환 과정의 번거로움과 손실을 고려했을 때 그냥 안 하는 게 낫다는 것. 그래서 현대중공업과 무관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박사 전공 국제정치학도 살릴 수 있는 외교, 통일 분야에서 활동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거시적인 외교정책을 다루는 외통위는 대표적인 거물들의 상임위, 말년병장 상임위로 꼽히기에 국회의원 재직 당시 다른 의원들이 고개도 못 들 정도의 거물이었던 정몽준이 가기에 적합했다.
이 때문에 현역 국회의원이던 시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은 뇌물 받을 일이 없다'는 평가 내지는 농담이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사람들 사이에 종종 나돌았다. 거기에 주변인 취업 청탁을 받았으면 받았지 할 일도 없다. 현대가에 취업시키면 되니까...
사족으로 재산 꼴찌는 성완종으로 나와있는데, 성완종 게이트 당시 그가 전달했다는 뇌물 액수나 경남기업 회장을 지냈다는 점 등을 생각해 보면 쉬이 납득이 안 되었다. 실제로 당선 직후 재산은 75억 원을 신고했을 정도. 허나 성완종 개인이 경남기업에 무려 2,500억대의 연대보증을 걸어두는 등 경남기업의 경영과 관한 재산상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후 밝혀졌고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은행권 채무가 아들에게로 상속되었다. 결국 성완종은 사망 3년이 지나고 묘소가 경매로 넘어가 파묘되는 일을 겪었고 유골은 베트남(!)에 모셔졌다고 한다. 정말로 수중에 돈이 없었던 것. 그러게 왜 뇌물을.. 참고로 회장 직함 달고도 내실은 부실한 이름만 부자들이 생각보다 꽤 있다.
7. 국내 축구계의 거물
한국 축구 역사에 이바지한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정몽준은 특히 스포츠 외교 쪽으로 한 획을 그었다. 정몽준은 1994~98년 동안 한국프로축구연맹 1-4대 총재를 맡았고, 1993년부터 2009년까지 16년간 47-50대 대한축구협회장을 역임했는데, 특히 2002년 월드컵 유치전 당시 활약상이 많이 회자되는 편이다. 당시 한국은 일본보다 5년이나 늦게 유치 준비를 시작한 데다, FIFA 회장 주앙 아벨란제는 대놓고 일빠였다. 하지만 사실상 패배나 다름없는 상황 속에서 정몽준은 치열한 축구 외교전을 벌였고 현대그룹의 재력과 경험을 총동원하여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레전드인 디에고 마라도나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등의 성과를 쌓아가며 기적적으로 공동개최안을 성사시킨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생각해 보면 대부분 태극전사가 이룬 “4강 신화”를 먼저 떠올릴 테지만, 공동개최를 이끌어 낸 정몽준이나 기타 관련자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당시 성적과 무관하게 대한민국에서 처음 치러지는 월드컵의 큰 감동은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단 월드컵 개최에 성공한 것뿐만 아니라 정몽준은 한국 축구계의 인프라 개선에 자신의 사비까지 써가며 앞장서면서 한국 축구의 발전을 이끌어냈다. 그 결과 한국도 남 부럽지 않은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이후 더 커진 국민적 관심 고조와 인프라 개선 등의 영향인지 이전까진 주구장창 조별리그 탈락만 하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박지성이 이끌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원정 최초 16강 진출의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대한축구협회 일선에서 물러난 지금도 한국 축구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일단 울산 현대 대주주로서 표면적으론 팀을 운영하고 있으며, 실질적으론 2011년부터 2016년까지 그룹 산하 현대오일뱅크가 K-리그 타이틀 스폰서로 연간 35억원씩 후원하기도 했다.
FIFA 회장이나 AFC 회장직도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제프 블라터와 반목했었고 반블라터파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을 지지하며 그의 FIFA 회장 선거를 열심히 도왔으나 완패를 당했고, 이후 요한손이 블라터 지지를 얻은 미셸 플라티니에게 UEFA 회장 재선에 실패하면서 피파 내에서 블라터파에게 많은 견제를 받아야 했다. 결국 2011년 정몽준은 FIFA 부회장 5선을 노렸으나 블라터의 지지를 받은 알리 빈 알 후세인 요르단 왕자에게 패하여 떨어지고 명예 부회장이 됐다. 하지만 말 그대로 명예직이라 아무런 권한이 없기에 더 이상 FIFA에서는 영향력을 가지지 못하고 만다.
결국 그의 몰락은 이후 한국 축구 국제 외교력의 몰락이라는 말도 나왔는데, 김운용과 마찬가지로 본인 입지만 신경 쓰느라 제대로 된 스포츠 외교 후계자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은 뼈아픈 지적으로 남게 된다. 그나마 이후 현대가에선 시간이 흘러 사촌동생인 친척 정몽규 회장이 바톤을 이어받지만, 국제 스포츠 외교 무대에선 번번이 주요직에서 떨어지고, 본인은 억울한 점도 있겠지만 국내 여론도 영 좋지 않아 현대가가 이제 축구협회에 관여하지 말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주앙 아벨란제 전 FIFA 회장의 심복이 바로 제프 블라터였다. 덕분에 아벨란제가 물러난 뒤로 터진 그의 비리혐의를 죄다 블라터가 쉴드쳐주거나 덮어버려서 그 어떤 수사도 조사도 이뤄지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IOC 위원장 자크 로게는 전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심복으로 역시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두 조직 부회장, 부위원장인 정몽준, 김운용은 전혀 후계자 및 지지 후임자가 전무했다.
반면 블라터에 맞서다가 지금은 야인이 된 렌나르트 요한손 전 UEFA 회장은 후임을 여럿 둬서 이들이 현재도 UEFA 고위직으로 남아서 플라티니의 경쟁 후보로 남아있다. 그래서 블라터와 플라티니가 요한손 전회장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때 이들이 똑같이 막아버린 거와 달리 김운용, 정몽준은 그러질 못했다. 파벌까지 뿌리뽑고 IOC에서 어떤 명예직도 없고 축출당한 김운용과 달리 그나마 정몽준이야 비리적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기에 명예부회장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걸 내주긴 했지만.
그의 몰락에 대하여 IOC가 안타까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그러나 제프 블래터가 회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FIFA 회장 출마 여부를 국제 축구 인사계들을 만나 경청한 후 좀 더 차분히 결정할 것이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하지만 결국 6월말 들어서 FIFA 회장에 도전한다고 뜻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몽준의 FIFA 회장 당선에 대해서는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아프리카 및 아시아 쪽 상당수 FIFA 임원들이 블라터를 지지하며, 다른 경쟁자들도 무시할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아시아 축구 연맹을 좌우하고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아랍 측에서도 정몽준을 견제해오는 게 사실. 위에 서술한 대로 정몽준을 그동안 FIFA 부회장이나 AFC에서도 견제하고자 블라터가 지지하던 게 아랍 측 인사였듯이. 게다가 블라터 반대파가 가장 많은 유럽 쪽도 유럽파 후보를 지지할게 뻔하다.
2015년 7월 23일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8월에 공식 출마 선언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선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 않지만, 출마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8월 들어서 강력하게 어필하고 개혁을 촉구하면서 강력한 후보인 플라티니 유럽축구연맹 회장을 블래터 전 국제축구연맹 회장과 아들과 아버지라고 비난하면서 나서고 있다. 문제는 2015년 들어서 터진 현대중공업 비리 문제로 반대 후보들이 기업 하나 감당못하는 주제에 어디서 FIFA 개혁을 외치냐고 맞설 거리를 만들어버린 셈. 게다가 더더욱 문제는 AFC 안에서조차 정몽준 지지세는 그리 없다는 점 사실상 정몽준이 승리보단 정치적인 홍보로 이미지를 남기고자 크게 나선다는 반응이다. 이런 가운데 정몽준 사촌동생인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지지를 표명하며 FIFA 내에서 정몽준 입지를 보여주고자 2005년 8월 이후 끊긴 남북친선 평화축구 부활을 부르짖었으나...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 서부전선 포격 사건이 터지는 통에 이건 가망이 없게 되었다.
정몽준 본인도 승산이 없다는 걸 아는지 2015년 9월, AFC가 블래터의 똘마니(...)라는 듯한 발언을 하며 하고픈 말을 다했다. 당연히 AFC에서는 분노했다.
시사저널에서도 사실상 정몽준이 회장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기사로 분석한 바 있다. 유럽에서는 플라티니를 비난하면서도 사실상 그가 된 거나 다름없다고 본다고 독일 및 여러 유럽 나라 언론을 보도하고, 남미, 아프리카는 플라티니 절대 지지세, 북중미도 미국 빼고 플라티니 지지세, 오세아니아랑 아시아도 마찬가지라면서...정몽준이 안 된다는 글은 없으나 해외 5대륙 반응, 외신 보도로 보면 딱히 가망이 없어보인다.
여기에 FIFA 윤리위원회에서 2022 월드컵 대회 유치과정에서 한국 유치위원회의 국제축구발전기금 조성안 계획을 각국 집행위원들에게 전달했다는 이유로 자격정지 15년, 윤리위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 혐의로 4년을 구형받았다. 김 이에 한국의 법률회사인 '김앤장'이 정몽준을 변호하기 위해 나섰다는 기사가 떴다. 다만 정몽준 자신은 이에 대해 자신이 개혁세력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꿈보다 해몽'급 해석을 시전했다. 결국 2015년 10월 8일에 FIFA로부터 6년간의 자격정지를 받았다.
이에 항소했지만 기각당해 사실상 FIFA 회장에 도전조차 못하게 되었다. 사실 FIFA 회장은 너무나도 가망이 없었고, 차라리 부회장 선거를 나가고 강력한 회장 후보를 지지했다면 어떨까하는 아쉬움도 있다. 물론 플라티니가 너무나도 굳세 다른 후보로도 도저히 가망이 없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전에 요한손을 이렇게 밀어줬다가 참패하고 자신도 부회장에서 오래가지 못했던 일이 있었기에 이것도 어렵다는 분석도 많았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후 플라티니와 블래터도 정몽준과 같이 징계 및 처벌을 받아 FIFA에서 사실상 매장되었다. 그리고 FIFA 회장은 잔니 인판티노가 새롭게 취임했다.
정몽준은 2017년 3월 항소위원회로부터 결정 이유를 통보받고 바로 4월에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FIFA를 제소했다. CAS는 2018년 2월 정몽준에 대한 FIFA의 제재를 대부분 무효로 하는 판정을 내렸다. 징계가 취소됐다. 그의 징계 취소 후 첫 행보는 2018 러시아 월드컵 F조 1차전 한국-스웨덴 경기 관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FIFA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으며, 국내에서도 재단 이사장으로만 활동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 축구계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선 정몽준 본인이 울산 현대 대주주이며, 그의 장조카 정의선이 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주다. 사촌동생 정몽규는 대한축구협회장 겸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다.
8. 사회복지활동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이다. 이 재단은 1977년에 정주영이 현대건설 주식 50%를 내놓아 만든 것인데 세간에서는 서울아산병원재단으로 통한다. 당시 현대건설은 석유공사 다음으로 큰 국내 2위 기업이었다. 그 지분 50%는 거액이다. 정부 복지 예산의 3배쯤이었다는 말도 있다.
아산재단 사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서울아산병원이다. 미국 뉴스위크가 한국 1위로 평가한 적도 있을 정도로 순위권의 대형병원이다. 3개 과목에서는 글로벌 4~7위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원래 병원은 대학이든 재단이든 별 비중을 두지 않는 곳인데, 아산병원은 정몽준이 지원을 잘해서 의사들의 연구, 진료 환경도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2011년에 정주영 10주기 기념으로 아산나눔재단을 설립했다. 정몽준이 2천억 원을 냈고 범현대 회사들이 낸 기금을 합쳐서 2021년 현재 5,870억 원이다. 주로 청년창업 지원 사업을 한다.
물론 이 공익재단들은 현대중공업지주를 비롯한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들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를 경영승계에 이용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