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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58. [역경의 열매] 유대열 (1-20) 나는 고향이 평양인 탈북자다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곳과 학교… 북한 선교와 교회의 역사 배어 있어
유대열 서울 본향교회 목사가 지난 1일 경기도 파주 임진각을 찾았다. 유 목사는 평소에도 가끔 고향 생각이 날 때면 이곳을 찾는다.
나는 북한에서 고통당하며 죽어가는 동포들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간절히 기도하는 목사다.
얼마 전, 북한 동포들의 구원과 북한교회의 재건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목사님으로부터 귀한 책 한 권을 받았다. ‘북한교회 사진명감’(北韓敎會 寫眞名鑑)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한국교회가 북한교회의 재건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수년 동안 힘을 모아 만들었다. 6·25전쟁 이전까지 북한에 존재했던 교회 3000개를 발굴해 내력과 사진을 수록했다.
평양에 있던 교회들을 하나하나 기록한 부분의 맨 뒤에 무명(無名)교회 두 곳이 기록돼 있다. 그중 한 교회에 이런 질문이 있다. ‘대동문 옆으로 멀리 보이는 교회는 어느 교회인가.’ ‘평양 사람은 대답하라’. 평양 대동강변의 대동문이 찍힌 사진인데 6·25전쟁 당시 국군이 평양을 탈환했던 날 종군 사진기자가 찍은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오른쪽 뒤편으로 한 교회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을 보는 순간 내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그 교회가 장대현교회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향이 평양인 탈북자다. 초등학교는 대동문인민학교를 나왔다. 대동문 옆에 있는 학교였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대동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술래잡기했다.
중학교는 바로 옆에 있는 련광고등중학교를 다녔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모란봉에서 김일성광장으로 이어지는 평양의 중심도로가 나온다. 그 도로를 건너면 큰 언덕이 있는데, 그 언덕 위에는 평양학생소년궁전이 있다. 그 언덕을 장대재 언덕이라 하는데 장대현교회가 있던 자리다. 나는 학창시절 평양학생소년궁전에서 친구들과 놀곤 했다. 장대현교회 터가 어린 시절 놀이터였던 셈이다.
탈북한 뒤 1997년 한국으로 와 신학교에 다니며 북한선교에 대한 꿈을 안고 북한교회사 공부를 한 적이 있다. 북한교회 자료들을 연구하던 중에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다닌 대동문인민학교와 련광고등중학교 자리에 마포삼열(새뮤얼 A 모펫) 선교사의 사택과 평양신학교가 있었다는 점이다.
마포삼열 목사는 평양신학교와 장대현교회를 설립한 분이다. 당시 난 매일 새벽 김일성과 김정일의 거대한 동상이 있는 만수대언덕에 올라 교인들이 새벽예배 드리듯이 절을 하곤 했다. 그곳이 평양신학교 자리였다니 놀라웠다.
아버지는 인민군 군관(장교)이었다. 우리 가족은 3~4년에 한 번씩 이사해야 했다. 내겐 형님 두 분과 여동생 둘이 있는데 5남매 모두 출생지와 고향이 서로 다를 정도였다. 중학생 때부터 군복무 때까지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돌이켜보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놀던 곳, 살았던 곳뿐 아니라 다니던 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북한선교와 교회의 역사가 진하게 배어있는 곳들이었다. 이사를 가는 곳마다 정이 들었고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는 참으로 신비하고 놀랍다. 하나님은 북한 선교와 교회 재건을 위해 한 사람의 인생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시고 인도하셨다. 나는 이제 겨우 그 뜻을 알게 됐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 [역경의 열매] 유대열 (1) 나는 고향이 평양인 탈북자다
* [역경의 열매] 유대열 (2) 성분 좋은 가정서 태어나… '무조건 충성' 가정교육
* [역경의 열매] 유대열 (3) 특수부대서 인정 받으며 잘나가던 어느 날…
* [역경의 열매] 유대열 (4) 반동 출신 극복하려 5년을 매일 4시간 이상 안자
* [역경의 열매] 유대열 (5) 남한 학생이 가져온 고추장, 죽기를 각오하고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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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1961년, 평양 출생. 조선로동당 국제관계대학 및 김정일정치군사대학 졸업, 중국 베이징외국어대 수료. 조선로동당 대외정보조사부 공작원, 평안남도 S시 행정경제위원회 지도원 역임. 1994년 탈북해 1997년 한국 입국. 합동신학대학원대 졸업, 여명학교 설립, 남포교회 부목사 역임, 하나로교회 개척.
***[역경의 열매] 유대열 (2) 성분 좋은 가정서 태어나… ‘무조건 충성’ 가정교육
새벽에 깨끗한 수건 들고 김일성 동상에 절한 후 주변 쓸고 닦아… ‘김일성 소년 영예상’ 금훈장 받기도
유대열 본향교회 목사가 1998년 11월 28일 송파제일교회 박병식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다. 유 목사는 94년 탈북해 97년 한국에 들어왔다. 본향교회 제공
나는 북한 사람들이 말하는 이른바 ‘성분이 좋은 가정’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군 장교로 근무하셨는데 내 기억 속 아버지의 첫 계급은 상좌(중령과 대령 사이 계급)였다. 우리 가족은 북한 인민무력부 군관들이 사는 전용 아파트에서 살았다. 내 친구들의 아버지들보다 우리 아버지는 이미 몇 계급이나 더 높았다. 그만큼 능력을 인정받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버지는 인민군 특수 8군(현 폭풍군단) 참모장(한국의 준장급)을 마지막으로 예편하셨다. 아버지는 1970년 김일성군사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셨다. 당시 출셋길이 열렸다고 평가받는 김일성 호위사령부 작전국에도 배치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력이 발목을 잡았다.
어머니의 오빠, 즉 나의 큰 외삼촌이 만주에 살다 도쿄로 고학을 떠나시면서 소식이 끊긴 것이다. 북한에서 이런 경우는 행방불명으로 처리하고 아주 좋지 않은 부류로 본다. 이 일이 아버지의 진급을 가로막은 것이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너희 아버지의 발전을 막을 수 없다. 이혼해야 한다”시며 우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결국 인민무력부 작전국에 배치되셨다. 당시로써는 이것도 매우 출세한 것이었다.
나에게는 집안에서 셋째이신 작은 할아버지도 계셨다. 작은할아버지도 출세 가도를 달리셨다. 해방 후 그는 김일성의 눈에 띄어 소련 모스크바 법학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됐고 노동당 정치국 위원이자, 대남담당 비서까지 오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아버지나 작은할아버지는 참 고지식하신 분들이셨다. 그들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충실했고 김일성에게 충성만 했던 사람들이었다. 한번은 내 큰 형님이 아주 좋은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됐다. 그러자 어머니가 작은할아버지를 찾아가 김일성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전화 한통만 넣어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하지만 작은할아버지는 그 부탁을 단칼에 자르셨다. 사람들은 큰 형님이 진짜 실력이 아닌 작은 할아버지가 힘을 써서 들어갔다고 생각할 것이란 게 이유였다. 큰 형님은 그렇게 군대에 가게 됐다.
나 또한 어려서부터 그런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 ‘김일성에게 무조건 충성해야 한다’는 가정교육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충성심이 배어 있었다. 내가 열한 살 때 모란봉 옆 만수대 언덕에 조선 혁명박물관이 세워졌다. 그 앞마당에 북한에서 제일 큰 김일성 동상이 건립됐다.
내가 다니던 대동문 인민학교에서 그곳까지는 도보로 10여분 거리였다. 교실 창문으로도 동상이 보일 정도였다. 난 다른 아이들처럼 새벽에 잘 수 없었다. 새벽마다 깨끗한 수건과 청소 도구를 갖고 그 동상을 찾았다. 그리고는 동상 앞에 도착해 먼저 엎드려 절을 했고, 30분 동안 그 주변을 먼지 한 점 없이 쓸고 닦았다. 그렇게 사계절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자발적으로 새벽마다 찾아갔다.
그런 내 행동이 당 고위 직위자에게까지 보고됐다. 1975년 6월의 어느 날 난 평양 학생 소년궁전의 한 접견실로 호출을 받았다. 몇몇 간부의 안내로 간 접견실에는 이미 여러 학생과 사람들이 와 있었다. 나처럼 모두 각 분야의 모범생으로 뽑혀온 사람들이었다. 그날 나는 김일성으로부터 ‘김일성 소년 영예상’이라는 금 훈장을 받았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3) 특수부대서 인정 받으며 잘나가던 어느 날…
작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신분 박탈로… 평생 노역에 시달리다 죽을 신세로 전락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 발생한 일명 ‘도끼만행사건’ 모습. 국민일보DB
이듬해인 1976년 8월, 북한에는 준전시 상태가 선포됐다. 판문점에서 8·18 도끼만행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방송에선 연일 ‘6 25전쟁 이후 북한 역사에 가장 엄중하고 준엄한 정세가 조성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처럼 전군에 전투태세가 발령됐고, 전국에 동원령도 발포됐다. 공장과 농장, 대학에서 수많은 청년이 군에 자원입대했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내 나이는 만 15살에 불과했다. 당시 나는 ‘전쟁이 일어날 텐데,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학교가 아닌 총을 들고 ‘어버이 수령’을 결사옹위하는 것’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북한 해상저격여단(해군특수전 부대)에 들어갔다.
그 후로 8년간 군 복무를 했다. 훈련이 너무 가혹하고 힘들어 3년째부터 후회가 밀려왔다. 나이도 가장 어렸고 체격도 제일 작았다. 그러나 특수부대는 요행이 통하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마다 34㎏의 배낭과 무기를 휴대한 채 12시간 동안 80㎞를 주파해야만 하는 행군을 했다.
내가 쓰러질 때면 선임들이 나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데려갔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지지 않으려 한 나의 악바리 근성이 부대 내에 알려지면서 모범생으로 소문이 났다. 그렇게 3년 만에 최고 군관학교인 정치 군관학교에 갈 수 있는 특혜를 보장받았다. 출신 성분이 좋은 가문 태생이었는 데다 특수부대에서 최연소 모범생으로 뽑힌 내게 어찌 보면 그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렇게 정치 군관학교 입학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고위직에 있었던 작은 할아버지께서 온 가족과 함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것이다. 당시 특수 8군 장군으로 계셨던 아버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외딴 시골의 상하차 공(하역부)으로 추방되셨다.
북한은 철저한 신분(성분)제도가 실시되는 나라로, 본인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런 경우 인생의 모든 길이 막혀버리게 된다. 제대하면 아오지 탄광에서 일생 노역에 시달리다 죽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그때부터 난 인생을 포기한 채 매일 같이 술로 밤을 지새우는 삶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본 영화 한 편이 나를 다시 일으켰다. 당시 북한 TV에서 방영하던 ‘만수대 텔레비전’을 통해 ‘참된 사람의 이야기’라는 소련영화를 봤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투기 추락 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잃은 소련군 조종사 이야기였다. 그도 나처럼 한때는 술에만 의지해 살았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전투기를 몰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어려서부터 외우고 공부한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주체사상이 떠올랐다. 그때부터 난 매일 4시간씩 잠을 잤다. 토요일 강행군을 한 날이든, 얼음을 깨고 바다에 들어가는 냉한 훈련을 한 날이든 4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다. 솔선수범하며 훈련을 받았고 군인 사상교육시간에는 항상 10점 만점을 받았다. 그렇게 군 복무 8년 차가 된 1984년 3월 초 어느 날, 여단 최고 실권자인 정치위원이 나를 불렀다. 나를 즉시 제대시켜 평양에 있는 대학에 보내고, 민족 간부로 양성하라는 ‘김정일 명령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이런 특혜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싶었다. 그 명령서를 받고 정치위원 사무실을 나오는데 하늘이 열리는 것 같았다. 남보다 열심히 살면 남보다 잘 된다는 나의 ‘주체 인생관’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4) 반동 출신 극복하려 5년을 매일 4시간 이상 안자
동기생 절반이 로열 패밀리 출신, 이들과 경쟁하려니 눈 앞이 캄캄… 졸업반 돼서는 상위권까지 올라
1989년 7월 1일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 모습. 당시 남한 측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참가한 임수경의 방북이 논란이 돼 유 목사 독일 유학이 무산됐다. 게티이미지
내가 간 평양의 국제관계대학은 당시 북한 내 최고 인기 대학이었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 공사가 나의 대학 동문이다. 그 학교는 들어가기도 어렵고 졸업하기도 어려운 대학이었다. 입학하고 보니 동기생들의 절반이 이른바 로열 패밀리 출신들로서 유학 경력도 갖고 있었다.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들과 경쟁을 한단 말인가. 눈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이들과 경쟁을 해야 하고 이겨내야 했다.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학에 입학해 졸업할 때까지 5년을 매일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 5학년 졸업반이 돼서야 상위권까지 오를 수 있었다.
졸업시험을 마친 2월 말, 나는 노동당 중앙위 대외정보조사부 공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것은 졸업생 중에 최고로 뽑혔다는 얘기다. 졸업 발령을 받고 대학 교정을 나오며 푸르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하늘이 또 열리는 것 같았다.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작은 할아버지를 둔 반동 출신인데 어떻게 최고의 성분만 갈 수 있는 곳으로 배치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하늘이 열리는 것 같았다.
노동당 중앙위 대외정보조사부 공작원이 된 난, 평양 룡성구역과 평남 평성 사이에 위치한 조사부 초대소(안가)로 배치 받았다. 본격적인 공작원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우리 팀은 7명으로 구성됐다. 모두 김일성대 김책공대 평양의대 등에서 뽑혀온 최우수생들이었다.
먼저 우리는 6개월 내에 독일어 기초를 떼는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치는 대로 독일의 각 대학에 입학해 필요한 공부를 하기 위함이었다. 군복무와 대학을 마친 최우수 학생들을 선발해 이렇게 외국대학에 보내 공부시킨다. 이후 세부화 된 교육과 훈련을 거처 외국인 신분으로 위장시킨 후 해외로 침투시킨다. 조사부는 그렇게 공작원들을 양성한다.
6개월 훈련을 마친 우리 일곱 명은 독일의 각 대학으로 가게 됐고 전공도 정해졌다. 며칠 안에 출발할 것이란 명령도 내려졌다. 그런데 갑자기 명령은 취소됐으며 독일 행도 금지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88년 당시 평양에서는 남한의 88서울올림픽에 준하는 국제 행사를 개최한다는 명목으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열었다. 거기에 남한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임수경이 참가했다.
그녀는 출국 당시 행선지를 일본으로 하고, 출국 목적을 관광으로 밝힌 뒤 비밀리에 평양에 들어왔다. 서부 독일에 있던 북한 공작 기관이 그녀의 북한 입국을 도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게 우리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우리들의 유학을 후원했던 북한 공작 기관이 안전상 서독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서독행이 취소된 우리에게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입학하라는 명령이 다시 내려왔다. 그곳에서 난 또다시 공작원 교육을 받아야 했고, 동시에 해군특수부대에서 받았던 것과 비슷한 강도의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1년간 그곳에서 받은 교육과 훈련은 철저한 보안 속에 이루어졌다. 이듬해 8월 나는 평양 시내의 평범한 아파트 초대소로 다시 발령 받았다. 그렇게 2개월 동안 중국어 기초 공부를 한 뒤 북경외국어대학으로 가게 됐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5) 남한 학생이 가져온 고추장, 죽기를 각오하고 먹어
‘철천지원수’라 생각했던 남한 사람, 늘 밝은 얼굴로 대하고 문전박대에도 김치와 고추장 가져와
유대열 목사가 2002년 11월 경기도 수원 합동신학대학원대 시절, 북한 청년 선교를 위해 만든 한마음축구단 모습.
우린 신분을 위장한 채 베이징으로 떠났다. 나는 평양외국어대 3학년생으로 유학을 간 것으로 위장했고 베이징 주재 북한대사관에도 그렇게 등록했다. 물론 이름도 가명을 썼다. 베이징에서의 삶은 내 생각을 조금씩 바꿔주는 계기가 됐다. 한번은 저녁거리를 사려고 대학 옆에 있는 시장을 들렀다. 북한 사람들은 어디를 가나 김일성초상 휘장(배지)을 달고 다녀야 하는데 그때 배추를 팔고 있던 한 중국 아저씨가 우리에게 “북한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그러더니 “김일성은 도대체 백성 다 굶겨 죽이고 뭐 하고 있느냐”며 우리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멱살잡이까지 갔다. 감히 북한의 지도자를 아무 존칭도 없이 동네 애 이름 부르듯 한 그의 언사가 기분 나빴고, 무엇보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그의 모습은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결국 공안원들이 달려와 싸움을 말렸고 우린 그 아저씨로부터 구두 사과를 받는 선에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사실 중국에는 북한 사람들을 가난한 나라 사람들, 불쌍하고 천한 사람들로 보며 천시하는 시선이 많았다. 그 사건이 있은 뒤부터 우리는 김일성 배지를 달고 다니지 않았다. 사실 그걸 달고 다니는 게 부끄러웠다. 대사관에 가는 날에만 그 앞에서 배지를 달고 들어갔다.
당시 베이징에서는 남한 사람들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수업을 위해 기숙사를 나서던 나는 수많은 무리의 남한 학생들과 마주쳤다. 160명이 넘는 남한 학생들이 우리 대학에 들어온 것이다. 북한에서는 ‘남조선’을 우리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라고 부른다. 돈 몇 푼을 위해 부모도 죽이는 강도 같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갑자기 몰려온 남한 학생들 앞에서 나는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마음은 누그러졌다. 우리는 그들을 원수라 생각하며 멀리했는데 그들은 우리를 향해 늘 밝은 얼굴로 대했다.
당시 우리는 중국 정부로부터 150위안을 생활비로 받았다. 그 돈으로 먹고, 책 사고, 옷 사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시장에서 제일 싼 식품들을 사다 기숙사에서 함께 먹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한 남한 학생이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같이 밥 먹어도 될까. 우리, 고추장도 있고 김치도 있어”하며 말했다. 우리는 잠시 당황했지만 대답은 분명했다.
“야, 우리 밥 다 먹었어. 문 닫으라우. 가라우”. 한참 후 문을 열어보니 그가 가져왔던 김치와 고추장이 문밖에 놓여 있었다. 남한 물건을 처음 만져보는 데다 고추장 냄새가 너무 향기로웠다. 하지만 우리 중 한 친구가 “야, 그거 쓰레기통에 버리라우. 원수가 가져왔으니 독약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하며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렇게 노크 방문과 문전 박대는 일주일간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먹다 죽으면 한이 없다 했잖아. 한 번 먹어라도 보자”고 했다. 그렇게 우린 고추장에 비빈 밥을 게눈 감추듯 먹었다. 그리고는 모두 말이 없었다. 독약을 먹었기에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다. ‘원수가 그렇게 마음이 선할 수 있는가?’. 우린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날부터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북한에서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6) 일본에는 무조건 이겨야… 또 하나의 코리아팀 결성
경기 당일 남북한 함께 응원하며 함성… 단일팀 사기 하늘을 찌르며 일본 대파
일본 지바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에 단일팀으로 참가한 탁구팀의 현정화(오른쪽), 리분희조가 경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남한 학생들과 마주친 지 1년이 돼가던 1991년 4월, 일본 지바에서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때 남북한이 처음으로 단일팀을 만들어 출전했다. 이제 국가가 정식으로 단일팀도 만들었으니, 혹시 통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공부는 둘째가 됐다. 학교 수업도 빠진 채 기숙사 내 공용 TV 실에서 함께 경기를 봤다. 남북이 힘을 합쳤는데도 중국에 계속 지니 너무 화가 났다.
그런데 어느 날 이변이 일어났다. 남북 여자단일팀이 단체전 결승에서 중국과 맞붙어 우승한 것이다. 최종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뛰어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옆 친구들을 부둥켜안고 얼씨구나 춤을 췄다. 그렇게 한참이나 만세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다 주변을 둘러봤는데, 눈앞이 아찔해졌다.
북한 법으로는 만나기만 해도 감옥에 가는 남한 학생들을 우리가 부둥켜안고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른 것이다. 이건 즉각 총살형에 해당하는 행위였다. 정말 당황스럽고 눈앞이 새까매졌다. 어쩔 줄 몰라 있는데 남한 학생회장이 “우리가 힘을 합해 강대국을 꺾은 날입니다. 우리 다 같이 나갑시다”하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라 우린 근처에 있는 한 중국식당으로 갔다. 이날 난생처음으로 남한 사람들과 한잔했다. 그 자리에서 우리도 남북 축구 단일팀을 만들어보기로 결의했다.
얼마 전 북한 유학생 팀과 일본 유학생 팀끼리 축구시합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실망스러운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 일본에는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그렇다. 경기를 주선한 칭화대 친구들은 일본 학생들 실력이 별로라고 했다. 하지만 일본에 질 수 없기에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갔다. 베이징에 있는 북한 유학생 150여명이 응원을 나왔다. 일본도 일본대로 지지 않겠다고 모두 응원을 나왔는데 1만명은 돼 보였다. 응원 함성의 열세 속에 결국 2대2로 비겼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일본에 비길 수 있냐. 겉으로는 일반 학생 같지만 사실 우리 중에 절반이 군 복무를 한 사람들이고 또 몇몇은 ‘특수공작원’ 아닌가. 우린 좌절했다.
그 좌절감은 우릴 남북 단일팀 결성으로 이끌었다. 우린 남한 학생들에게 변명 삼아 우리가 실력은 있지만, 응원에서 밀렸다고 했다. 경기 당일 함께 남북한 모두 함께 응원단을 꾸리기로 약속했다. 시합 날이 왔다. 경기장으로 갔더니 이게 웬일인가. 남한 학생들이 운동장을 이미 다 점령한 것이다. 한국인 판이 돼버렸다. 일본 학생들은 ‘시간을 잘 지켜’ 왔는데, 그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됐다. 경기가 시작되고 일본말은 어디에도 들리지 않았다. 우리 단일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전혀 지치질 않았다. 시합 결과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4대 0으로 일본 유학생 팀을 짓뭉개버렸다. 모두가 감격했다. 눈물이 났다. 시합이 종료되자 응원하러 왔던 모든 학생이 경기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모두가 얼싸안고 만세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날 이후 남북 학생들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대사관 번호를 단 차가 우리 기숙사에 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내리더니 기숙사로 들어가 친구들을 수갑을 채워 끌어냈다. 남한 학생들을 만났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날 우리 중 6명이 북한으로 끌려갔다. 한 달 후 방학을 맞아 북한으로 들어간 나 역시 감옥형을 받았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7) 희생만 강요하는 북의 악함과 위선에 탈출 결심
출신 성분에 인생 좌우되는 북에 환멸, 북 정권 무너지는데 일조하기로 작정…미국으로 가기로 마음 먹어
김일성 주석 사망 25주기를 앞두고 지난달 27일 북한 근로자들과 청소년, 인민군 장병 등이 평양 만수대 언덕의 김 주석 부자 동상을 참배하고 있다. 유대열 목사는 25년 전 김정일 정권의 붕괴를 바라며 북한을 떠나기로 다짐했다. 연합뉴스
그렇게 난 공작원에서 해임돼 평안남도의 한 시청으로 발령이 났다. 거기서 시 행정경제위원회 지도원이 됐다. 강등된 셈이다. 그런데 얼마 후 같이 처벌받을 줄 알았던 몇몇 친구들이 다시 중국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학생 중에는 고위 간부나 대사관 간부 자녀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아무 제재도 받지 않은 것이다. 고위 간부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성분이 좋지 않거나 권력을 쥐지 못한 부모를 둔 이들을 희생양 삼아 대신 감옥과 탄광에 보내거나 시골로 추방했다.
그때 비로소 인생이 뭔지 알게 됐다. 남보다 더 공부하고 더 일하고 더 애쓰면 잘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 신념이었고 내가 배운 주체사상이었다. 너무 천진난만한 생각이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주체사상이라는 허울로 북한 주민들을 속였다. 내 부모도, 나도 결국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 대신 살아온 인생이었을 뿐이다. 언젠가는 다 뺏기고 그들을 위해 희생돼야 했던 게 우리네 인생이었다. 그후 내 모든 세계관과 인생관이 바뀌었다.
시에서 지도원으로 2년간 일하는 동안 이미 많은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군인들조차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내 도시락을 싸주시던 어머니는 “그렇게 고생하며 유학까지 가서 잘될 줄 알았는데, 이제 이렇게 강냉이밥도 겨우 먹게 돼 마음이 아프다”며 매일 우셨다. 나도 ‘김일성 김정일과 그 정권을 위해 충성한 것밖에 없는데 왜 내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 싶었다. 북한 정권의 악함과 위선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속으로는 하루속히 정권이 뒤집혀 다른 나라들처럼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사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1994년 7월 어느 날이었다. TV를 통해 김일성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모두가 머리를 숙이고 흐느꼈지만 난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외쳤다. 김일성이 죽으면 북한이 흔들릴 것이고, 그러면 다른 나라처럼 자유의 때가 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일상은 달라진 게 없었다. 주민들도 동요하지 않았다. 모든 실권이 김정일에게 있었기에 북한은 끄떡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절망스러운 땅 북한에선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북한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북한을 떠나 북한 정권이 무너질 수 있도록 뭐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미국으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한 정권에 반대해 뭔가 꿈을 이루려면 미국에서 활동하는 게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다른 하나는 미국에 가면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보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북한은 미국에 큰소리를 치지만 실제로는 미국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래서 미국으로 넘어간 탈북자 가족들은 어쩌지 못한다. 인권을 문제 삼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가기 위해 먼저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했다.
그렇게 북한을 떠날 준비를 했다. 가능한 한 부모님께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떠나는 전날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떠나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어머니께 “제가 지금 위가 많이 아파 약초를 좀 구하러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시골에 사시는 이모 댁에 며칠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가 해주시는 아침을 먹은 뒤 배낭을 메고 대문 밖으로 나오려는데 아버지가 마당에 서 계셨다. 꾸벅 인사를 드리고 대문을 열고 길을 나섰다. 한참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버지는 아직도 내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8) 날 위해 모든 것 바치신 부모님, 생사도 몰라…
객지서 공부하는 아들 배 곯을까봐 당신들 앞으로 나온 식량 증서 내주고 화전 일궈 감자로 끼니만 때우셔
유대열 목사(화살표)가 1998년 11월 28일 서울 송파제일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후 세례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
“그만 들어가시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끝내 동구 밖까지 따라 나오셨다. 25년 전 마지막으로 뵌 모습이다. 어머니는 아마 내가 먼 길을 떠난다는 것을 짐작하셨을 것이다.
길을 떠나기 며칠 전 나는 짐을 모두 정리하며 이상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은 다 태워버렸다. 그중 하나가 중국에서 유학할 때, 어느 남한사람으로부터 선물 받은 영한사전이었다. 이 사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보위부에서는 이미 ‘사상이 변한 자’로 판단할 것이고 부모님께 더 큰 형벌을 가할 게 분명했다.
사전을 집 뒤에서 몰래 불태우고 있는데, 어머니가 보시곤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사전을 왜 태우는 것이냐. 혹시 너 아예 떠나려는 거 아니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런 일 없다고 서둘러 얼버무렸다. 그 후 지금까지 부모님 소식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떠난 후 부모님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심한 악형을 당한 건 아닌지, 아직 살아계시는지 궁금하다. 부모님께 나는 너무 큰 죄인이다.
부모님은 오랫동안 북한정권으로부터 피해를 본 분들이다. 작은할아버지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시고 아버지도 장군의 자리에서 쫓겨나 시골의 하역부로 추방당하셨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아버지는 심장병을 얻어 오랫동안 고생하셨다.
대학에서 공부할 때, 나는 집에다 ‘량권’을 보내 달라고 종종 부탁했다. 량권은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돈과 함께 내야 하는 증서 비슷한 것이다. 동기들은 모두 부유한 집 자제들이었기에 배고픔을 몰랐지만, 객지에서 혼자 공부하는 난 늘 배가 고팠다.
부모님은 그때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편지봉투 속에 량권을 넣어 보내주시곤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여름방학을 맞아 집으로 간 어느 날이었다. 더위를 식히려 앞마당에서 등목하는 아버지를 보고 있는데 아버지 배 위에 난 수술 흉터를 보게 됐다. 아버지는 황급히 수건으로 가리시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어머니를 통해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아들이 대학에서 힘들게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님은 자신들 앞으로 나오는 식량 배급을 거의 모두 량권으로 바꾸셨다. 그것을 내게 보내주시고는 화전을 일궈 감자 농사를 지어 식량을 대신하셨다. 어느 가을, 수확한 감자를 손수레에 싣고 산비탈을 내려오던 아버지가 산에서 굴러떨어지며 배를 다치셨는데 장이 파열됐다. 병원에 실려 가 수술을 받았지만, 북한의 의술이 좋을 리 없었다. 부모님은 그렇게 자식을 위해 굶주리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신 분들이었다. 두 분만 생각하면 늘 목이 멘다. 너무나 그리워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아버지, 어머니, 지금 잘 살아 계신지요?’
부모님께 큰 죄를 지어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이따금 아내에게 들킬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아내는 “여보,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에요.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일생을 드려 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아버님, 어머님을 보호해주시지 않겠어요”라고 이야기해준다. 나는 아내의 그 말을 믿는다. 그리고 그 말에 큰 위로를 받곤 한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9) 위험 감수하고 달리는 기차 지붕에 목숨 맡겨
빨리 북한 벗어나야 추적 피한다 생각, 이틀 안에 국경 넘어가기로… 기차 환기통에 매달려 국경선 역까지
유대열 목사(오른쪽 두번째)가 1997년 12월 강원도의 한 군부대에 안보 강의 차 방문했을 때의 모습.
북한을 떠나는 내게 제일 큰 문제는 이틀 안에 북한 영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무단결근을 하면 즉시 행방을 추적하고 조사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특별한 경력이 있기에 더 신속한 추적과 조사가 진행될 것이 분명했다. 이틀 내로 압록강 국경도시인 자강도 만포를 거쳐 중국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북한에서는 자기가 사는 시·군의 경계를 벗어나려면 안전부(경찰서)에서 통행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추적과 조사를 피하고자 통행증을 발급받지 않았다. 이 경우 기차를 탈 수 없다. 하지만 기차를 타야 만포까지 하루 안에 갈 수 있기에 난 기관차 조종실을 이용해보기로 했다.
역전 표 내는 곳에서 통행증을 검열하는 안전원(경찰관)에게 약간의 돈을 건네면서 “손님을 배웅하러 잠깐 승강장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그 길로 바로 기관차 조종실로 갔다. 노크하고 들어서자 쉰 살 가까운 기관사와 젊은 조수가 있었다. 놀란 그들에게 “이곳 시 행정경제위원회 지도원인데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러 평북 희천에 가는 중이다. 그런데 통행증을 발급받지 못해 할 수 없이 폐를 끼치게 됐으니 좀 도와달라”고 말했다.
미리 준비해 간 좋은 음식과 돈도 조금 건넸다. 그렇게 오후 1시쯤 얻어 탄 기차는 북쪽을 향해 3시간 정도 달렸다. 중간에 김정은이 탄 ‘1호 열차’를 먼저 보내느라 2시간이나 지연됐다. 예정보다 훨씬 지체된 저녁 7시가 넘어서 희천에 도착했다. 기차가 황해도 사리원 기관차대 소속이라 희천에서 기관차를 교체한 뒤, 기관사는 사리원으로 복귀해야 했다. 나는 조종실에서 내려 객차 안 화장실 칸에 숨어들었다.
여기서 오래 있을 수는 없기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했다. 집을 떠나며 추억이 될 만한 사진 몇 장과 물건 몇 가지를 배낭에 넣고 나왔는데, 검문에 걸리면 내가 탈북하려는 게 탄로 날 것은 분명했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사진을 잘게 찢어 밖으로 버렸다. 소지했던 물건도 모두 버렸다. 그때 모든 걸 버리다 보니 지금 내겐 고향을 추억할 만한 사진 한 장, 물건 한 점이 없다. 지금도 그때 너무 떨지 말고 사진 몇 장이라도 끝까지 갖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와 달리는 기차의 객실 문을 열고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다. 검문 안전원들에게 체포되지 않으려면 위험해도 기차 지붕에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붕에 있는 객실 환기통을 두 손으로 꽉 쥐고 납작 엎드렸다.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기차가 역전에 들어서 정차할 때 경비대원들에게 발각될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1호 열차’로 인해 시간이 지연됐기에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결국 ‘1호 열차’ 통과가 나의 탈북을 도운 셈이다. 조명시설이 좋지 않은 북한의 역사도 나의 탈북을 도왔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기차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는 경비병이 있었는데 그들도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셔서 무사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기차 지붕 환기통에 매달린 채 5시간 정도를 더 갔다. 이윽고 만포역이 희미하게 보이자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만포역은 국경선 역이라 다른 곳보다 경비가 몇 배나 삼엄했다. 기차에서 뛰어내리며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장 만포 시내로 들어갔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10) 드디어 중국 땅, 그날은 1994년 9월 6일
장소 확인 중에 마주친 국경 경비병 주민인 척 연기 하다 격술로 제압… 배고파 강물 마셔가며 압록강 건너
유대열 목사가 1994년 9월 중국으로 탈북한 뒤 현지에서 숨어 살 때의 모습. 오른쪽 사진은 유 목사가 중국 베이징 국제신우회에서 예배드릴 때 사용하던 영어 성경으로, 요한복음 3장 16절에 빨간색 줄이 쳐져 있다.
만포 시내는 캄캄했다. 시내를 통과한 뒤 저수지인지, 강인지 알 수 없는 넓은 물가에 섰다. 여기가 압록강이라면 곧 중국 땅에 들어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이곳이 정말 압록강인가 하는 것이었다. 확인이 필요했다. 그렇게 강기슭을 따라 숨소리를 죽인 채 조심조심 가고 있는데, 몇 미터 앞에서 불쑥 사람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나지막하지만 위협적으로 “섯”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국경 경비병임을 알아차렸다. 경비병 두 명이 나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그들에게 “수고하십니다. 나 여기 만포 타이어공장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 언젠가 만포에는 타이어공장이 유명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경비병은 “증명서 좀 봅시다”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들은 경험이 없는 신병들이었던 것 같다. 보초를 설 때는 한 명이 증명서 검열을 하면 다른 한 명은 몇 발자국 떨어져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말아야 하는데 둘이 함께 다가왔다. 나는 상의 주머니에서 공민증을 꺼내 건네는 척하면서 오른손으론 증명서를 받으려던 병사의 기도를 타격했다. 동시에 발로는 옆에 있는 병사의 사타구니를 찼다.
10년 넘게 군대에서 격술(실전 무술)을 연마한 나였다. 내가 정확하게 그들을 타격하자 두 병사 모두 그 자리에 ‘헉’하고 쓰러졌다. 곧바로 경비병들의 총과 탄창을 분리해 강물에 버리고는 신속히 자리를 떴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달리자 산이 보였다. 산에 숨어 주변을 확인하고 압록강과 중국 땅의 방향을 확인해야 했다.
나는 산기슭으로 난 길을 따라 다시 1시간가량을 안전한 곳이라 생각되는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산 정상에 올라 얼마 지나자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지난밤 일어난 사건으로 경비대에는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심한 갈증과 배고픔을 참아가며 산 정상에 머물러 있었다. 산 밑으로 비교적 큰 강이 보였고 건너편 강변에 집 한 채가 보였다. 그런데 거리가 멀어 그 집이 중국 집인지, 북한 집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하루를 꼬박 새우고 다음 날 정오쯤 됐을 때였다. 강 건너편 길을 따라 트랙터 한 대가 멀리서 오고 있었다. 그 트랙터는 분명 북한 트랙터가 아니었다. 북한 농장들에서 사용하는 트랙터보다 작았다. 달구지 같은데 앞에 한 사람이 앉아 운전하는 소형 트랙터였다. 중국에나 있는 것이었다.
산 아래 흐르는 강은 압록강이고 건너편 땅은 중국 땅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밤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전에 한 가지 더 확인할 것이 있었다. 여기는 국경지대라 경비가 삼엄하다. 국경 경비대원들의 초소와 잠복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자세히 보니 도로에서 좀 떨어진 곳들에 잠복초소가 100m 거리마다 있었다.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산을 살금살금 내려갔다. 산에서 내려간 뒤에는 납작 엎드린 상태에서 손과 발만을 사용해 기어갔다. 국경 경비대 잠복초소 사이를 2시간 정도 기어서 강까지 갔다. 드디어 압록강에 이르렀다. 수영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강 가운데에 이르자 유속이 매우 빨라졌다. 경비병에 들킬까 헤엄도 못 치고 그저 떠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꼬박 3일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상태였기에 강물을 마셔가며 마침내 압록강을 건넜다. 강변에 이르러 두 발로 섰다. 중국 땅이었다. 나도 탈북자가 된 것이다. 1994년 9월 6일이었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11) 두고 온 가족 생각에 하염없이 북한 땅 바라봐
베이징행 기차에서 멀어지는 고향 보며 부모·형제 언제쯤 다시 만날까 생각
유대열 목사가 1998년 1월 한국복음주의협회 조찬기도회에 초청돼 간증하고 있다.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에 들어서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신속히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가능한 한 빨리 시내로 들어가 숨어야 했다. 그렇게 중국 지안시에 도착했다. 준비해 온 중국 옷으로 갈아입었다. 내가 유학할 때 입었던 옷이었다. 누가 봐도 중국 사람과 비슷한 차림새였다. 그리곤 기차역으로 갔다. 열차 시간을 확인해보니 오후 1시쯤 베이징으로 출발하는 열차가 있었다. 당시 내겐 비상금으로 미화 100달러와 중국 돈 100위안이 있었다. 북한을 떠나기 전 중국에서 유학을 같이한 동생을 찾아갔을 때 그가 건네준 피 같은 돈이었다. 표를 산 뒤 열차에 올랐다. 기차가 출발하자 승강대로 나가 점점 멀어지는 압록강과 그 너머 북한 땅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언제 다시 저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형님 동생들을 만날 날은 언제일까’ 하는 생각이 마음에 가득 차올랐다.
30대로 보이는 여성 검표원이 내게 다가왔다. 내 열차표를 보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가슴이 덜컹했다. 혹시 공안에게 데려가면 큰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눈치가 보이면 돈을 줘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검표원은 예상외로 상냥했다. “베이징까지 가려면 다른 열차표를 사야 한다”고 했다. 표를 잘못 산 것이었다. 나는 “몰라서 그랬다”면서 “지금이라도 방법을 알려주면 다시 사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열차원이 “괜찮다. 누군가 다시 이 문제를 갖고 물어보면 검표원이 이미 검열했다고 말하라”고 했다. 중국도 북한과 같이 열차 공안원들의 검색이 심한데도 나는 무사히 베이징까지 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열차원 아가씨도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려고 붙여주신 도움의 손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에서 벗어나 있는 게 있겠는가.
베이징역에 내린 난 베이징어언대학교로 향했다. 함께 유학했던 외국 친구들에게 당시 베이징 상황을 알아보면서 소개받은 일본인 여학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만 알 뿐이었지만,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던 내겐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이었다. 학교 교무처에서 물어봤지만 일본 이름밖에 모르는 터라 찾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근처 기숙사를 찾았다. 그의 이름을 물으며 수소문하던 내게 기숙사 관리원이 4층의 어느 방으로 가보라고 일러줬다. 방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그 일본인 학생이 문을 열어줬다. 그는 탈북하며 고생을 해 피골이 맞닿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난 유학 이야기를 꺼내며 설명하니 마침내 날 알아봤다. 두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더니 “칭 찐, 칭 찐(어서 들어오세요)”하며 나를 반겨줬다. 마주 앉은 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미국으로 가려고 한다고 했다. 이 말을 듣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얼굴만 한참 바라봤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어디 갈 곳이 없을 테니 일단 내 방에서 며칠 쉬세요”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부터 난 그의 방에서 신세를 지게 됐다. 그는 다른 친구 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며칠이 지나자 그가 말했다.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도울 길이 전혀 없네요. 그저 이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앞이 막막해진 내게 그는 봉투 하나를 건넸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12) 다롄서 노숙자들 틈에 숨어 있다 공안에 체포
탈북자 신분 드러나면 압송될 처지… 큰돈으로 남한 사람인 척 위기 모면
유대열 목사가 중국 베이징 국제신우회에서 예배드릴 때 사용하던 영어 성경으로 요한복음 1장 12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다.
봉투를 열어보니 미화 3000달러가 들어 있었다. 너무 놀랐다. 평생 처음 보는 큰돈이었다. 놀라 당황해하는 나를 본 그가 말했다. “너무 적어 별로 도움이 안 될 거에요. 그저 마음뿐이에요.”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몰랐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오려 했다. 난 그저 “감사합니다. 미국에 가면 꼭 소식을 알리겠습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이 일본 고베인 그의 이름은 니시나 도모코다. 나보다 일곱 살 연상인 누님이었다. 그는 당시 베이징에서 7년 가까이 중국문학을 공부하며 대학원에서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의 부모님이 목회자로 일생을 헌신하다 은퇴했고 막내 남동생도 목사로 사역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튿날 그가 택시비와 여비를 챙겨 주며 나를 배웅해줬다. 나는 기차를 타고 해안도시 다롄에 가보기로 했다. 큰 해안 도시라 미국으로 가는 여객선이든, 화물선이든 많을 것 같았다. 저녁 9시가 넘어서야 다롄에 도착했지만 갈 곳도 대책도 없었던 나는 신문을 주워다가 노숙자들 틈에 숨어 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났다. 공안이 우리를 급습한 것이었다. 난 꼼짝없이 체포돼 임시구류시설로 보내졌다. 큰일이었다. 탈북자인 게 드러나면 북한으로 압송될 것이고 그러면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나는 눈앞이 까매졌다.
이틀이 지난 뒤 공안들이 나를 불러냈다. 방으로 들어선 나는 무작정 “당신들 어떻게 이렇게 무법이요. 나는 남한 사람이요. 그런데 당신들이 나를 이틀 동안이나 불법으로 구류했소”라고 큰소리로 항의했다. 그러자 그 공안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여권을 잃어버렸다고 둘러대는 내게 공안들은 “그럼 남한 대사관에 전화를 해보겠다”고 했다. 난 “괜히 전화비 낭비하지 마시고 여기 내가 남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할게요”하며 도모코 누님이 준 미화 100달러짜리 지폐 30장을 책상 위에 꺼내놓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공안들은 ‘돈이 많은 걸 보니 남한사람 맞는 거 같다’며 수군거렸다.
결국 그들은 내 사진과 지장을 받는 선에서 풀어줬다. 천만다행으로 풀려난 나는 도모코 누님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괜히 잘못 돌아다니면 또다시 위험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으로 돌아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나를 본 누님은 깜짝 놀라셨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듣고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를 받아줬다.
다시 그의 신세를 지는 동안 난 예전 중국 유학 시절 인정도 많고 학생들의 존경도 받던 한 중국인 여교수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 역시 나를 위해 미국으로 가는 방법을 백방으로 알아봐줬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갔다.
난 극심한 좌절감에 빠졌고 북으로 압송되는 악몽까지 꾸며 나날이 피폐해져만 갔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도모코 누님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검은색 표지의 한국 책이었다. ‘현대인의 성경’이라고 쓰여 있었다. 성경이 뭔지를 묻는 내게 누님은 많은 이야기가 있어 다 설명할 수는 없고 우선 ‘요한복음’을 먼저 읽어보라고 권했다. 거기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무슨 희망이지? 혹시 미국으로 가는 길을 찾는 방법인가’ 하는 생각에 성경책을 와락 붙들었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13) 요한복음에서 ‘희망’ 찾으려 성경 펼쳐
날 도와준 누님 제안 무시하지 못해 성경 읽었지만 어렵고 이해할수 없어…누님 도움 받아 성경공부 하기로
유대열 목사(왼쪽 두번째)가 1999년 9월 송파제일교회를 방문한 남아프리카공화국 교회 대표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당시 유 목사는 통역사로 봉사했다.
니시나 도모코 누님이 일러준 대로 요한복음을 펼쳤다. 내 평생 그렇게 빨리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고 하는데 그 희망이 무얼까’ 너무나 궁금했다. 그런데 읽을수록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고 이해가 안 됐다. 누님은 희망이 있을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책을 덮었다. 그리고 누님께 “여기 책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 같은데 이런 말씀은 하지 마시라. 나는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믿었고 그 신념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건 우리를 속이는 사상이었고, 거기에 속아 인생의 모든 것을 빼앗겨 지금 이렇게 탈북자 신세가 돼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게 됐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도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종종 들어왔다. 하나님은 미신이라고, 그걸 믿는 사람은 나약한 바보들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분이 내게 종교 책을 보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이 조금 불편해졌다. 하지만 함부로 밖에 나갈 수도 없었고 미국으로 가는 방법도 마땅히 없었다. 방에 혼자 남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언제부턴지 마음 한구석에 ‘성경을 다시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를 도와준 누님을 생각하면 그의 제안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난 그의 말대로 한번 더 성경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구약과 신약을 틈틈이 읽어봤지만, 여전히 어려웠다. 이를 안 누님은 내게 성경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제안해왔다.
그렇게 누님과 성경공부가 시작됐다. 누님은 당시 논문을 쓰는 중이라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됐기에 어떤 날은 아침 9시부터 저녁까지 내게 성경을 가르쳐줬다. 그렇게 3개월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예전 중국 유학 때 친하게 지냈던 지인을 통해 베이징 서북지역에 있는 한 동네에 거처를 마련했다. 주인은 한족 부부였는데, 내가 2년 반 정도 머무는 동안 기꺼이 나의 끼니를 책임져 주셨을 뿐만 아니라 중국 공안들의 불심검문이 있을 때마다 피신을 도와줬다. 나도 그의 자녀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며 빚진 마음을 조금이라도 갚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한족 부부의 도움을 받아가며 누님과 성경공부를 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성경도 일독했고 성경의 웬만한 인물은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 막히는 부분이 생겼다. 목사가 된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성경을 조금 공부하긴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게 누님이 ‘교회에 한번 가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누님은 교회에 가면 좋은 사람들도 많고 마음도 편안해진다고 했다. 나도 매일 이렇게 방 안에서 공부만 하는 것보다는 교회에 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내가 머물던 집에서 자전거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국제신우회’라는 교회에 가게 됐다. 성도들은 주일마다 넓은 회의장 같은 곳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첫 주일을 맞이한 아침, 자전거를 타고 교회로 가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에 기대감이 생겼다. 교회에는 왜 좋은 사람들이 많을까, 교회에 가면 왜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하는 것인가 기대감에 마음이 설렜다. 자전거를 세우고 걸어가 교회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기대하고 상상했던 모습과 많이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14) 누가 날 위해 기도하며 눈물 흘릴 수 있을까
왜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 날 위해 기도하며 우는지, 이들이 믿는 하나님이 궁금해져 교회 다니기로
유대열 목사(오른쪽 첫 번째)가 1999년 9월 서울 송파제일교회를 방문한 남아프리카공화국 교회 대표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유 목사가 탈북해 중국에서 생활할 당시 그를 위해 기도해 준 이들은 모두 이들과 같은 외국인이었다.
교회 안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피부색과 하는 말들도 모두 달랐다. 영어도 익숙하지 못한 나는 이들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시 머뭇거린 나는 이내 문을 닫고 나와 버렸다. 순간 ‘저들이 과연 내게 좋은 사람일 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교회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고 마음도 편안해진다고 했던 누님의 말이 사실 같지 않았다.
하지만 땀을 흘려가며 거의 한 시간을 달려왔는데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교회란 곳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한번 보고라도 가자는 마음에 다시 문을 열고 예배실로 들어갔다. 맨 뒤에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한 사람이 앞으로 나가더니 기도를 했다. 그 모습이 참으로 놀랍고 신비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노래하고 기도하는데 하나같이 진지했다. 진실하고 간절해 보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수많은 사람이 모였는데 그 모습이 하나와 같았다. 북한에서도 모임이 있을 때는 모두 한목소리로 노래 부르고 주먹을 휘두르며 구호를 외친다. 그러나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감시와 통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감시와 통제가 없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토록 진지하게 마음을 다해 노래하고 기도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날 이후로 난 예배에 참석해 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조금씩 익숙해졌다. 영어로 진행됐던 설교도 조금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예배에 나오는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인 것까지는 모르겠는데, 모두 착한 사람들 같아 보였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교회 사람들도 내가 탈북자라는 것과 지금 살길을 찾아 헤매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던 어느 주일, 예배가 끝난 뒤 베이징경제무역대 미국인 교수 하비 테일러의 사택을 방문하게 됐다. 그의 집에 가보니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와 있었다. 점심을 함께 먹고 난 뒤 쉬고 있는 내게 테일러 교수는 이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를 일러줬다. 바로 나를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먼저 한 사람씩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더니 이내 방 안에 모인 모두가 내 주변으로 빙 둘러섰다. 그리고는 내 머리와 어깨에 손을 얹고는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이 형제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이 형제의 살길을 열어주시고 도와주시옵소서!”
한참이 지났을까. 내 어깨와 머리에 얹은 그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모두 간절히 기도하며 울고 있었다. 그 기도 소리에 나도 울었다. 난 이제야 누님이 하셨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를 위해 기도하며 눈물 흘리는 이들은 사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난 국적 상실자다. 어디서도 보호받을 수 없는 사람, 잡히면 끌려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아무 유익도 없이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가 싶었다. 이들이 이렇게 좋은 사람들일 수 있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혹시 이들이 믿는 하나님이 좋은 분이기에 이들도 좋은 사람일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질문이 내 마음속에 생겼다. 난 교회에 계속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일 예배 뒤 광고 시간을 통해 ‘공안 당국으로부터 외국인과 중국인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기에 다음 예배 때부터 중국인은 참석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막막해졌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15) 누님이 건네준 학생증 덕에 검문 위기 넘겨
나 돕느라 학업까지 포기한 누님 “주님이 길 열어주시고 인도하시니 믿음과 소망 잃지 말라” 당부
유대열 목사(가운데)가 2017년 9월 22일 극동방송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에 출연해 간증한 뒤 출연자들과 함께했다.
동양인인 데다가 아무 신분증도 없는 내가 교회에 출석하면 중국 공안의 검문에 걸릴 것이 뻔했다. 이 사실을 일본인 누님께 알렸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교회는 꼭 가야 해요. 갈 방법을 놓고 우리 하나님께 기도해요”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도하는 그의 모습에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무릎과 발목도 아프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3분도 못 견디고 일어나버렸다. 사실 나는 그동안 남이 기도하는 것은 들었어도 직접 해본 적은 없었다. 누님은 30분 넘게 기도하고 일어나더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서 한 주일 동안 꼭 기도하시고, 다음 주일도 꼭 교회에 나가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난 도무지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토요일이 됐다. 그날도 누님은 나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기도를 마친 누님은 내게 학생증 하나를 건네주셨다. 누님 학생증이었다. 누가 봐도 여자 사진이 있는 그 학생증을 가져가라고 했다. 난 분명히 검문에 걸릴 것이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일단 그거라도 가져가 보라는 그의 말에 학생증을 상의 윗주머니에 넣고 일단 집을 나섰다.
이튿날 난 자전거를 타고 여느 때와 같이 일단 교회로 향했다. 교회 문이 가까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하나님, 나 교회 가고 싶습니다. 이 좋은 교회 다니고 싶습니다. 오늘 잡히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순간 “멈춰!”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내 앞으로 공안원 네 명이 서 있었다. “신분증!”하고 말했다. 얼떨결에 상의 윗주머니에 있는 학생증을 꺼내려 했다. 공안은 내가 학생증을 내밀기도 전에 “오케이, 들어가세요” 했다.
그 학생증을 그대로 들고 문을 통과하는데 마음속에서 환희가 터져 나왔다. 순간 ‘와, 기도가 응답받는구나.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난 진짜 예배를 드렸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은 친히 예배를 받으신다는 믿음으로 드렸다. 진짜 예배의 맛이 느껴졌다. 내 평생 그날 예배처럼 잘 드린 예배는 없는 것 같다. 그날부터는 누가 기도하라고 하지 않아도 혼자서 내 처소, 그 골방에서 매일 기도했다. 그렇게 1년 넘게 그 교회를 신분증 검사 한번 없이 무사히 다닐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님은 “일본에 다른 좋은 직장을 얻게 돼 돌아가게 됐다”며 내게 미화 3000달러가 담긴 봉투를 건넸다. 박사학위를 위해 7년을 공부했고 이제 거의 마무리되는 시점에 돌아간다니 이해가 되질 않았다. 누님은 그저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고 인도하실 것이니 믿음과 소망을 잃지 말라”고만 했다. 이게 그와 나눈 마지막 말이다.
나중에서야 누님이 본인의 학위보다 나를 돕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 본인의 학비와 전 재산을 내게 주고 학업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사람이 있을까. 누님으로 인해 난 예수님을 만나게 됐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던 그분, 주님께로 날 인도하기 위해 몸소 희생했고, 그것을 더없는 기쁨으로 보람으로 여겼던 누님. 그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과 붙드심을 믿게 됐다. ‘하나님, 나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지 못해 떠돌아다녀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 저도 예수님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16) 철책선과 험한 산지 넘어 자유의 땅 홍콩으로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신변 보호 위해 망명 대신 바다 건너 몰래 들어 가기로
유대열 목사가 2009년 10월 서울 남포교회에서 하나로청년회 회원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도모코 누님이 일본으로 돌아간 때가 1996년 1월이었다. 그 무렵 중국 신문들에는 1997년 7월에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다는 소식이 계속 실리고 있었다. 홍콩으로 가면 인권을 존중받고 자유를 얻을 수 있을지 알아보고 싶었다. 그날부터 집 근처에 있던 샹그릴라 호텔로 가 각종 신문과 잡지를 보기 시작했다. 하루는 홍콩에서 발행되는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에 아주 자그맣게 탈북자 소식이 하나 실렸다. 홍콩으로 넘어가 경찰에 단속되자마자 남한으로의 망명을 요구했고 현재는 홍콩 당국으로부터 보호와 도움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당시 나는 단파 라디오를 구매해 매일 BBC나 VOA 방송을 들었는데 늘 ‘자유와 기회의 나라 미국’을 외치며 방송이 시작됐다. 그 말이 내겐 너무 소중하게 들렸다. 그때마다 간절히 기도하곤 했다. ‘하나님, 제게도 자유의 길을 열어주세요.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세요. 자유의 땅에 가고 싶습니다.’ 도모코 누님이 주고 간 한국찬송가 테이프도 그런 내 마음을 위로해줬다. 잔잔히 들려오는 찬송을 들으며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하심을 믿습니다. 주님이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내 무거운 짐을 주님께 다 드립니다. 주님만 따라갑니다’라며 매일같이 눈물로 기도했다.
시간이 흘러 여름이 됐다. 다른 탈북자들은 육로를 통해 홍콩에 간 뒤 경찰에 잡혀 합법적 절차를 밟고 망명하는 방식을 택했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의 신변을 위해선 바다를 건너 몰래 들어가야 했다. 홍콩으로 간 뒤엔 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홍콩으로 가려면 베이징에서 기차로 광저우까지 간 뒤 선전 경제특구를 통과해야 한다. 선전 경제특구는 일반인은 들어갈 수가 없기에 철책선을 불법으로 통과한 뒤 험한 산지를 지나야 한다. 이를 안 당시 하숙집의 중국인 주인 내외는 나를 위해 배낭을 마련해줬다. 나를 친동생처럼 여겨 준 분들이었다. 주인 누님은 일반 배낭을 손수 위장용 배낭처럼 만들어줬다. 주인 형님은 휴가까지 내고 나와 선전까지 같이 가주기로 했다. 실제로 난 주인 형님 덕에 열차의 검문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광저우에 무사히 도착한 우린 근처에서 하루를 묵었다. 거기서 난 해발 1000m 높이의 가파른 우퉁산을 넘기로 계획을 짰다. 적의 감시와 경계에서 벗어나는 첫 번째 원칙이 험한 노정을 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날이 밝자 우린 선전지구 철책이 깔린 산골짜기 작은 마을로 갔다. 철책 앞에서 주인 형님과 작별을 고했다. 그가 “꼭 살아나야 해, 그리고 다시 만나”라며 인사했다. 그에게 인사를 하고 비탈길을 돌아 내려갔다. 철책에 이르러 난 서둘러 철책의 철사를 하나씩 잘랐다. 몸 하나가 통과할 수 있는 구멍이 생기고 뒤를 돌아봤다. 3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환갑쯤 돼 보이는 노인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지체할 수 없었다. 서둘러 철책을 넘은 뒤 수풀을 헤치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추격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노인이 고발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고마웠다. 혹시 내 눈빛에서 간절함과 진실함을 봤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내가 통과해야 하는 산길은 상상외로 험했다. 그곳은 아열대 기후의 산지로 특별경계지역으로 지정돼 20년 넘게 사람의 접근을 금지한 지역이었다. 사람이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수풀과 가시덤불이 우거졌지만 길을 내가며 조금씩 산을 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17) 홍콩 도착 알리자 수화기 넘어 ‘할렐루야’
산 넘다 죽을 지경 이르러 배낭 비우기로… 모두 버렸지만 물과 성경책 두 권은 남겨
유대열 목사(오른쪽 빨간색 동그라미)가 1999년 9월 서울 송파제일교회를 방문한 남아프리카공화국 교회 대표들과 함께했다. 베이징 국제신우회에서 만난 성도들도 이들처럼 피부색이 달랐지만 유 목사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했다.
아열대 지역이라 무척 더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야말로 찜통더위였다. 열사병으로 쓰러질 뻔한 순간도 여러 차례 있었다. 필요한 것만 담는다고 담았는데도 배낭의 무게는 20kg이 넘었다. 길을 떠날 때는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절 고마운 분들이 주신 것이라 평생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살리라’는 생각에 배낭에 넣었다. 힘이 다 빠져 죽을 지경이 되고 보니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 비우고 나자 배낭 맨 밑에 있던 성경책 두 권이 나왔다. 한 권은 도모코 누님이 처음으로 준 ‘현대인의 성경’이었고, 다른 한 권은 국제신우회 예배에 참석하면서 사용했던 영어 성경이었다. 성경을 버리려고 손에 들었는데, 내 마음에 갑자기 ‘너 성경 버릴 거야. 그거 버리면 너도 죽는 거야’란 생각이 들었다. 성경을 도로 내려놓았다. 그렇다. 죽어도 성경은 버릴 수 없었다. 성경은 그저 책이 아니었다. 말씀을 통해 우리 구주를 만나게 한 생명의 책이었다. 성경책들을 다시 배낭에 넣었다. 물과 성경책 두 권만 짊어지고 다시 산을 넘기 시작했다. 작열하는 태양에 물도 다 마셔버려 남은 건 오직 성경뿐이었다. 점점 의식을 잃어갔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 한 가지 생각만 또렷이 떠올랐다.
‘하나님, 예수 믿는 사람은 죽으면 천국에 간다지요? 그렇게 바라던 자유의 땅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내가 천국에 갈 줄 믿습니다. 하나님, 고향 땅에 계신 사랑하는 부모님을 천국 가면 만나게 해주세요.’
그 순간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너와 함께하마, 어서 일어나 가거라’.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다시 내 귀에 들려왔다. ‘얘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마. 어서 일어나 가거라.’ 아주 분명하고 또렷한 음성이었다.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다시 힘을 내 산을 올랐다. 네발로 기어가다시피 하며 겨우 산 정상에 올랐다. 산 아래로 바다가 보였다. 건너편으로 홍콩 땅이 멀리 보이는 듯했다. 산 정상에서 하룻밤을 쉰 뒤 반대편 능선을 따라 내려갔다. 마침내 해안가에 이르렀다. 이제 바다를 건너야 했다. 상어 출몰 지역임을 알리는 바다 위 깃발도, 해상 경계를 서던 홍콩 해양경비대의 쾌속정도 기도와 함께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가는 내 길을 막지 못했다. 몇 차례 고비가 있었지만 결국 주님은 날 홍콩 땅으로 인도하셨다. 육지에 다다르자 절로 기도가 나왔다.
‘살아서 이 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나를 두 팔로 안아 넘겨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하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해변을 따라 길게 뻗은 산등선을 따라 한참 걸었다. 작은 마을에 이르자 어느 집 마당에 걸려 있는 옷가지를 몇 개 주워 입었다. 바다를 건너느라 흠뻑 젖은 속옷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시내로 들어선 나는 루켕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기로 했다. 열차를 타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베이징 국제신우회 분들에게 내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베이징경제무역대학의 하비 테일러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건너편으로 ‘할렐루야’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동안 국제신우회 성도들이 나를 위해 밤마다 모여 기도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났다. 식인상어가 출몰하는 바다를 살아서 건널 수 있었던 데에는 나 혼자의 기도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테일러 교수와의 마지막 통화를 마쳤다. 꼭 한 번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싶지만, 지금까지도 그를 찾지 못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18) 홍콩 특별수용소 수감… “예수쟁이” 소문
다른 탈북 수용자들도 가까이 안 해… 중국 도피 생활 도와준 주인집 부부 교회 개척하며 다시 만나
유대열 목사(앞에서 강의하는 사람)가 2010년 8월 서울 남포교회 하나로청년회 여름수련회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고 있다.
열차를 타고 홍콩 중심으로 들어갔다. 다음 목표는 국제앰네스티 홍콩지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근처 호텔을 통해 수소문해 그곳을 찾았다. 사무실로 들어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직원들에게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을 간략하게 이야기하며 도움을 받으러 왔다고 말했다. 이틀에 걸친 조사 끝에 내 담당자가 정해졌다. 북한에 계시는 부모님의 안전을 위해 철저히 비공개로 해달라는 내 요구를 받아 준 그는 내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는 길은 홍콩 정부 기관이 이 사건을 담당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게 난 홍콩 이민국으로 공식 인도됐다. 그들은 날 ‘상수이 특별수용소’에 가뒀다.
이 수용소는 중국에서 민주화 활동을 하던 인사들이 중국의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넘어왔을 때 외국 망명이 이루어질 때까지 임시로 수용되는 곳이었다. 한국으로 가는 탈북자들을 다음 절차 전까지 임시 수용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내 신상과 탈북 이유, 동기, 홍콩까지 온 경로 등을 조사했다. 어느 나라로 가기를 원하는지도 질문했다. 특히 중국에서 홍콩으로 넘어온 경로를 자세히 물었는데, 내가 식인상어 출몰지역을 무사히 건너왔다는 말에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심문이 끝난 후 그들은 내 손에 쇠고랑을 채웠다. 일단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내 소지품도 모두 조사했는데 내게 남은 건 약간의 돈과 성경책 두 권이 전부였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난 노동자, 과학자, 군인, 의사, 지하교회 성도 등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만났다. 그중 평성 국가과학원에서 근무했다는 분을 만났는데 그는 내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보며 매일 기도한다는 걸 알고는 경악했다. 주체사상의 허상에는 동의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그 후로 그는 ‘예수쟁이, 미친 사람’이라며 나에 대한 소문을 냈고 다른 탈북자들도 웬만해서는 내게 가까이 오질 않았다.
반대로 중국에서 숨어 살 때 내 거처를 마련해주고 선전까지 나와 동행해 준 중국인 주인집 형님 내외 분은 나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됐다. 다시 못 볼 것 같던 그들과의 재회는 16년 만에 이뤄졌다. 난 한국에 온 후 2011년 3월 하나로교회를 개척했다. 교회 개척을 위해 함께 기도하던 목사님, 장로님들과 함께 중국 투먼의 두만강 가를 찾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북한을 위한 기도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현지 선교사들과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 사연을 듣던 한 선교사가 내게 중국 주인집 형님의 연락처를 아느냐고 물었다. 형님은 가난했기에 전화가 없었다. 난 형님의 처가댁 번호만 알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형님 집 근처에 있는 샹그릴라 호텔에서 기적적으로 다시 만났다. 16년 만에 다시 만난 형님 내외분은 당시 내가 그곳에 살 때 갖고 있던 소지품도 모두 갖고 나오셨다. 우린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그리고 형님 내외는 “만약 네가 그 바다를 무사히 건너 살아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하나님이 진짜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도 하나님 믿겠다고 다짐했어”라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난 그들에게 중국 목사님을 소개해줬다. 중국에서 살 때, 같이 교회에 가자고 그렇게 권했지만 끝내 가지 않던 그들이었다. 내가 살아 돌아옴으로써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됐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19) 사선을 넘어 생명의 땅 한국 도착
미국행 어려워져 일정 촉박, 체류기한 넘기면 북으로 송환될 위기…언론 비공개 약속 받고 한국행 결정
유대열 목사가 홍콩의 수용소 직원에게서 받은 결혼식 사진이다. 형제처럼 친하게 지낸 그는 자유의 땅으로 가면 꼭 놀러오라며 이 사진을 건넸다.
수용소에 있는 동안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 망명을 결심하고 홍콩으로 왔지만, 송환될 위기에 처하자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이들이 많았다. 탈북자들도 홍콩 수용소에 2주 동안만 체류할 수 있었기에 나도 그들과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나처럼 미국행을 요구하는 경우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아 일정이 더 촉박했다. 시일이 다가오자 홍콩법원에서는 나를 중국으로 송환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럼 북한으로 송환될 것이 뻔했다. 희망이 사라지자 최후의 방법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송환을 거부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던 그들처럼 말이다. 나는 밤새 ‘하나님, 제게 이 길밖에 없다면 기꺼이 가게 하소서. 다시 북한 악한들의 손에 넘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저를 붙드소서. 저를 담대하게 하소서’라고 부르짖으며 직접 만든 자살용 칼을 손에 쥔 채 무릎을 꿇고 매일 기도했다. 밤새 기도하며 새벽이 밝아오던 어느 날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너를 몇 번 살려주었더냐. 내가 수용소라고 어찌 함께하지 않겠느냐’는 음성이었다. 칼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를 사랑하는 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수용소에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믿음이 내게 생겼다.
그동안 자살을 시도하는 수감자를 몇 번 도운 일로 수용소 직원들과도 친해졌다. 틈틈이 탈북자들이 들어오면 그들의 통역과 서류 작성을 돕기도 해 호형호제하는 사이까지 됐다. 비록 수감자의 몸이라 남루한 행색이었지만 그들은 날 존중해줬고 자유의 땅으로 갈 수 있을 것이란 위로의 말도 해줬다. 미국행이 결정될 때까지 나의 홍콩 체류를 연기해달라는 탄원서도 법원에 제출해줬다. 당시를 생각하면 성경의 요셉 이야기가 생각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수용소 안에서도 함께하신다는 걸 몸소 체험했기 때문이다.
수용소에 있을 때, 홍콩의 한국영사관 직원이 여러 차례 날 찾아와 면담했다. 부모님의 안위 때문에 한국행을 선택할 수 없다는 걸 안 그는 원하지 않는다면 한국에 가도 언론에 공개되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듬해 1월 말쯤 내 한국행이 결정됐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만감이 교차했다. 탈북자로 숨어 지낸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날 살려주신 하나님, 그 강하신 두 팔로 안으시고 보호하시며 생명의 땅으로 넘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1997년 봄 한국에 도착했다. 서울시내를 통과하며 놀란 건 63빌딩도, 수많은 차도 아니었다. 건물 높이 걸린 빨간색 십자가들이었다. 북한에는 없고 남한에만 가득한 것이 바로 십자가였다.
몇 달간 조사받은 뒤 9월 말 주민등록증을 받고 정식으로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됐다. 당시에는 탈북자에 관심 있는 교회와 탈북자를 연결해 정착을 돕는 제도가 있었다. 나는 송파제일교회와 인연을 맺었고 박병식 목사님과 귀한 인연도 그때 시작됐다. 98년 11월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교회학교 중등부 교사로도 봉사했다.
사선을 넘어 이 땅에 들어온 탈북자들의 절대다수가 현지 선교사들과 교회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 땅에 와서도 사회에 정착하고 자립하는 데 교회의 도움과 역할이 매우 크다. ‘하나님의 때가 돼 북한에 복음을 전하고 무너진 교회들을 다시 세울 때, 혈혈단신의 나를 위해 고향이 돼주고 친정집이 돼준 교회와 같은 교회들을 세우리라’하는 마음을 다져본다.
***[역경의 열매] 유대열 (20·끝) 통일되면 고향에 하나님 복음 전할 수 있길…
인생의 절망 속에서 인도하신 주님… 북한에 하나님의 제단 다시 세우고 북한선교하라는 주님의 뜻 깨달아
유대열 목사(사진 왼쪽 네 번째)가 2002년 수원 합동신학대학원대 학위수여식에서 동료 목회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1999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목회자 등 30여명이 송파제일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내 간증을 들은 그들은 남아공으로 날 초청했다. 남아공으로 간 나는 현지 학교와 교회 등 많은 곳에서 북한 공산주의 이념에 목숨을 걸었던 한 인간이 어떻게 인생의 좌절을 당했는지, 방황하는 내 인생에 하나님이 어떻게 찾아오셨는지를 간증했다. 소망이 없던 날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증거하며 하나님과 만남으로 인해 내 인생이 얼마나 복된 삶으로 변했는지를 나눴다. 그 인연으로 남아공 양어머니도 얻게 됐다. 아니키란 이름의 그분은 내가 그곳에 머무는 내내 나를 보살펴 주셨다. 2002년 겨울 합동신학대학원대를 졸업하던 날에도 일흔이 넘은 몸을 이끌고 직접 남아공에서 한국까지 오셨을 만큼 나를 아껴주셨다. 그렇게 난 피부색이 다른 남아공 사람들과 교제하며 믿음에는 국경과 인종이 따로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도모코 누님이 그랬고 국제신우회 성도들이 그랬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그들의 사랑과 헌신을 따라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한 난 일생을 목회자, 선교사로 살겠다고 서원하며 신학교에 지원했다. 입학 신청서와 함께 제출한 내 소명진술서에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내 고향, 북한에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북한에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시 세우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지옥 같은 북한 땅에서 나를 이곳까지 살려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이요, 부르심입니다."
내 고향 북한이 남한처럼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날을 보는 것이 내 유일한 소망이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길 바라는 것은 내 소명이었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북한이 선교하기 어려운 나라 중 하나로 분류된 걸 본 후로 그 소명은 더욱 분명해졌다. 하나님이 나를 북한에서 인도하셔서 사선을 넘어 이곳까지 살려주신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고향이 북한이고 그곳에 사랑하는 혈육들이 사는, 나 같은 탈북민이 북한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것이 북한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이곳까지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고 소명이다. 그래서 난 신학교 2학년 때 '북한을 위한 기도 모임'을 만들었고 이는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대안학교이자 미션스쿨인 여명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통일되면 복음을 들고 고향 북한으로 돌아가 무너진 하나님의 제단을 다시 세우는 사명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로 탈북자를 세우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북한선교임을 알게 된 것이다.
남포교회에서 선교 목사로 사역을 시작한 나는 2011년 탈북 청년들과 함께 하나로교회를 개척했다. 2018년 본향교회로 이름을 바꾸며 성전을 확장해 이전했다. 교회이름은 우리의 영원한 본향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이란 뜻을 담고 있다. 하늘의 본향에 가기 전, 복음을 들고 먼저 북한 고향으로 갈 우리 청년들은 요셉과 에스더와 같은 사명자라는 의미도 있다.
이 사명을 위해 불러주시고 살려주시고 인도해주신 우리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린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내게 오직 믿음 하나 보고 시집와 어려운 목회의 길을 함께 가고 있는 아내에게도 늘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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