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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베드로는 갈릴래아 지방 티베리아 호수(갈릴래아 호수)에 인접한 마을인 ‘벳사이다’ 출신으로 요한(요나)의 아들입니다. 그는 당시 결혼한 상태로 그의 동생과 함께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제베대오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의 동업자였는데,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기에 베드로 역시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유대교 안에서 율법에 관한 교육을 많이 받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나 제자들 명단에서 그의 이름이 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예수님의 제자 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성인이었는데, 열두 제자들은 베드로와 그의 일행으로 불리기도 했고 그는 제자들을 대표하거나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러한 역할은 예수님께서 부여해 주신 것으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그에게 장차 교회의 기초가 될 것임을 선언적으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는 동생과 함께 고기를 잡다가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 17) 하며 부르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물을 버리고 바로 따라나서게 되는데, 요한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의 인도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갔고, 예수님으로부터 ‘케파(베드로와 같은 의미의 아람어 이름)’, 즉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 1, 35-42) 당시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늘 가까이서 함께했는데,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베푼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과 카파르나움에서 자신의 장모가 치유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고,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갔을 때 그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물음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 16)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8)라고 말씀하시며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 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가톨릭교회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수위권을 받은 첫 번째 교황이 되었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실 때나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 그리고 겟세마니에서 번민에 싸여 기도하실 때 그를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따로 부르실 만큼 예수님과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약 성경에서는 그를 예수님께 충실하고 헌신적인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나 한편으로 그는 간혹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을 잘못 이해하거나 그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그리고는 마침내 스승을 배신하는 잘못을 저지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에 힘입어 인간적인 실수와 나약함을 극복하고 그분의 제자로서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철저하게 수행하게 되는데, 열두 제자 가운데서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제자들 사이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다시 한번 강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셨을 때, 회개하고 다시 일어선 그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9)라고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 신자들의 으뜸으로서 초대교회를 이끌며 배신자 유다를 대신할 사도 ‘마티아’를 선출하는 일을 주도했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첫 번째 사도이자 기적을 행한 첫 사도였으며, 오순절 설교 등을 통해 많은 사람을 개종시킨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43년경에 헤로데 아그리파에 의해 투옥되었으나 천사의 도움으로 피신하기도 했으며(사도 12, 1-19),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다른 민족들도 복음 말씀을 듣고 은총으로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사도 15, 7-11).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의 사도 회의가 끝난 이후부터 베드로의 행적에 관하여 아무런 기록도 전해주고 있지 않은데, 전승되는 그의 나머지 행적에 대해서는 아마도 안티오키아, 코린토 등 여러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다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 후 로마로 가서 그곳의 초대 주교가 되었다가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벌어진 64년경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바티칸 언덕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는데,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매달릴 자격조차 없는 죄인이라며 스스로 선택한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전은 그의 무덤 위에 건립되었던 성전 터에 세워졌습니다. 그는 순교 직전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려다가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가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양 떼를 버리고 도망친 로마로 간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발현을 몸소 체험한 성 베드로는 곧바로 로마로 돌아가 용감하게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성경에서, 단순하고 우직하며 열성과 활력이 넘치지만 다소 성급하고 충동적이며 때로는 경솔하고 소심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는 사도 성 베드로는 나약한 인간적인 모습을 숨김없이 그대로 드러내 보임으로서 우리에게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성인입니다. 교회 미술에서 사도 성 베드로는 배, 열쇠 등의 상징들과 함께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예수님으로부터 열쇠를 하사받아 천국의 문지기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 베드로는 사도 성 바오로와 함께 6월 29일에 기념하고 있으며, 축일 외에 2월 22일을 ‘성 베드로 사도좌(使徒座) 축일’로 지내고 있는데, 이날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 성 바오로(바울로)는 로마 제국 치하의 소아시아 킬리키아(현재 튀르키예의 길리기아) 지방의 중심 도시 타르소스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출생 연대는 신약성서학계에서 기원후 5년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그의 출생 지역과 연대로 미루어 보아 바오로는 로마제국의 시민권이 있었는데, 이는 그의 조부가 로마의 용병으로서 군에서 복무한 대가로 그 가문에 주어졌다고 전해집니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이를 통해 그는 유대인 혈통이었으나 할아버지 대부터 로마인이 되었으므로 유대인다운 소양은 물론 그리스어와 고대 그리스의 학문적 소양들을 익힌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편, 사도행전(22:25-29)에도 그가 로마 시민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 속한 유대인인 그는 당대의 유명한 유대인 랍비인 가믈리엘의 문하생으로 예루살렘에서 공부했는데, 회심하기 전까지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그는 성장하여 천막 만드는 일을 생업으로 살아가던 엄격한 바리사이(신약 시대에 팔레스티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유다교 분파) 인으로 그리스도교를 완강히 배척하고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현장에도 있었는데, 서기 34~36년 사이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환시는 그의 극적인 개종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사도 9,1-22)
그 후 그는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지낸 후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의 선교활동이 유다인들의 맹렬한 반발에 직면하면서 그에 대한 위협 또한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아레타 왕의 총독은 그를 잡으려고 성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를 미리 파악한 그는 밤에 비밀리에 성벽을 타고 도시를 빠져나가 어렵게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사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박해자였던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던 사도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는데, 이후 그가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사도 ‘성 바르나바’의 적극적인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이 계속해서 그를 해치려 하자 타르수스로 거주지를 옮겨 몇 년을 지내다가 43년경 그를 찾아온 바르나바를 따라 안티오키아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교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는데,(사도 11,25-26) 이것이 이방인을 상대로 전교하는 선교활동의 시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서기 45년경부터는 세 차례의 선교 여행을 하게 되는데, 45년부터 49년까지 안티오키아 교회에 파견되어 바르나바와 함께 키프로스, 페르게,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리카오니아 지방의 이코니온과 리스트라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여행에서 그는 ‘사울’이었던 이름을 ‘바오로’로 개명하게 됩니다.
첫 선교 여행을 마치고 49년경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 및 다른 사도들을 설득하여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처럼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키는데 성공하므로써 그리스도교의 보편성 확립에 기여한 한편, 그의 이방인 선교를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도록 하는 등 교회의 체제 면에서도 한층 더 진보된 단계를 맞이하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이후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직후 그와 바르나바는 제2차 선교 여행을 계획하면서(49-52년) 1차 선교 여행 중에 세운 교회 공동체를 재차 방문하고자 했는데, 요한 마르코를 동반하려는 바르나바와 의견 차이가 생겨 서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바르나바는 요한 마르코를 데리고 키프로스로 떠났고, 바오로는 ‘실라스’와 함께 시리아와 킬리키아의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사도 15장) 이후 그는 마케도니아를 가로질러 유럽으로 들어가 최초로 그곳에 복음을 전파하게 되는데, 필리피와 테살로니카, 베레아 등에 교회를 세웠으나 아테네에서는 ‘알지 못하는 신’을 비판하는 ‘아레오파고스’에서의 설교를 통하여 다소 효과를 내었을 뿐 별다른 열매를 맺지는 못했습니다. 그 후 안티오키아 교회로 돌아온 그는 다시 3차 선교여행을 계획했으나(53-58년), 2년 동안은 코린토스 교회를 위하여 헌신했고, 에페수스에서는 우상을 만드는 데메트리오스라는 은 세공업자와의 사건으로 한때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까지 했습니다.
서기 58년, 기근으로 고통받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받아온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교회에 헌금을 무사히 전달하고 야고보와 원로들을 만나 세 차례에 걸친 선교여행의 결과를 낱낱이 이야기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원로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7일간의 정결예식을 치르다 예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 평소 그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다인들에게 폭행을 당하여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으나 출동한 로마군에게 넘겨져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여러 차례의 재판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개종 과정과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를 설명하고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결국 황제에게 상소하여 60-61년 사이에 몰타 연안을 따라 고난의 항해를 한 끝에 로마에 도착하여 가택 연금 상태로 지내며 비교적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사도 21~28장).
그러나 그 후의 바오로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가 없는데, 로마로 압송되어 온 뒤 2년 동안 갇혀 있다가 서기 62~64년경 처형되었다는 말도 있고, 약 2년 후 일단 풀려나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66~68년경에 순교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편, 최초의 가톨릭 교부(敎父)로서 이후 1,000년 동안 서방 그리스도교의 어휘 및 사상 형성의 기초를 다지는 데 이바지한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면 그는 64년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저술가로 꼽힙니다. 신약성서에서 실제 그의 편지가 몇 개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존재하는데, 전통적인 교회의 견해에 따르면 서신은 14개로, 현대의 신학자들은 서신에서 사용된 언어와 내용을 고려하여 아래와 같은 의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 확실히 바오로가 작성한 서신 :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
◉ 바오로가 썼을 가능성이 있으나 증거가 부족한 편지 : 데살로니가후서
◉ 바오로가 쓰지 않았으나 그의 사상이 담긴 편지 : 골로새서, 에베소서
◉ 바오로의 이름이 나오나 그와는 다른 시대, 다른 상황에서 기록된 편지 :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 바오로의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그와는 전혀 다른 사상과 문체로 기록된 편지 : 히브리서
성 바오로의 공식 축일은 성 베드로와 함께 6월 29일이고, 1월 25일은 그의 회심을 기념하는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