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그러한 생각은 하느님이 이 세계와 분리된 존재라는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리된 초월자가 말하자면,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리모콘으로 조정하다가 재미 없으니 관심을 돌려 버린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하느님과 분리된 사물이 아니라, 신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버릴래야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흔히 인간은 살기 싫어 자살을 한다고 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자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살처럼 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은 자기를 보존하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외부 사물의 원인이 되어 자기를 스스로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할복이나 임금의 사약을 받아 죽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살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자살처럼 보이는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사는 자연 자체이므로 자연과 그 속한 사물을 모두 사랑한다고 할 수 있으며, 결코 버릴래야 버릴 수 없습니다. 악이 난무하고 정의가 실종되고 불공평이 판치는 세상은 인간의 관점입니다. 즉 인간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사물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속성이 변용되어 나타난 양태입니다. 즉 토기장이는 귀히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자유 원인에 의해 만드는 것이지 자료인 흙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변용이므로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하느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것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하느님을 인간과 똑같은 사물로 취급하는 오류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정의와 공의를 통해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필요에 따라 필사적으로 노력할 때 자연(=하느님)선택을 받아 호모데우스(하느님의 아들)로 진화하게 되는 것이며, 비로소 악이 사라지고 인간의 자유와 행복이 완전히 실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자유 원인에 따라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인공인 하느님의 일부라는 관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힘써 노력하여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를 도래시킬 수 있다는 자긍심과 확신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 신체가 사라져도 하느님의 일부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구성한 원소와 에너지들은 자연에 어떤 용도인가로 사용되게 됩니다. 다만 인간은 자기를 보존하려는 욕망에서 계속하여 의식을 가지고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것을 '선택'이라 하고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을 '유기'되는 것으로 신학은 설명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유기된다고 해서, 하느님의 관점에서 유기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용도가 다르게 사용될 뿐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관점은 우리가 이 상태를 유지하면서 의식을 가지고 자유와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부지런히 노력하면 자연의 선택을 받게 되는 것은, 그것이 자연의 진행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시한부 인생의 짧은 시간의 관점에서 벗어나, 신의 직관지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 본다면, 더 큰 희망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취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