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 년 8월 29일 토요일 운악산 종주
사니조은 님과 함께
교통편 : 07:30 동서울 터미널에서 사창리 가는 버스를 타고 운악산 휴게소에서 하차 (6,800원)
50분 소요
16:00 현등사 입구에서 청량리행 시외버스 타고 상봉 전철역에서 하차 ( 2 시간 소요)
산행 코스 : 운악산 휴게소 – 운악사 – 서봉 – 동봉 – 현등사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2311919
거리 6.8 km
소요 시간 6h 10m 46s
이동 시간 4h 6m 6s
휴식 시간 2h 4m 40s
평균 속도 1.7 km/h
최고점 935 m
총 획득고도 420 m
난이도 보통
프롤로그
태풍 이름도 참 요상하다. 바비인형의 그 바비(Bobby)가 아니다. Bavy 는 베트남에 있는 산 이름으로 베트남 최고봉은 아니지만 산의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신성시되는 산이다. 제 8호 태풍 바비가 수요일(26일) 아침 제주 서남쪽 해상을 지나 서해 바다로 올라올 때만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재난 안전처에서는 재난문자를 쉴 새없이 내보내고 TV에서는 바람에 뽑혀 쓰러진 나무와 건물 벽체가 떨어져 나간 영상을 보내면서 바비의 위력을 알려왔다. 마치 링 위에 선 상대편 선수의 힘 과시에 주눅이 들어 있는 형국이었다. 오후 들어 평택을 거쳐 밤에 인천을 지나갈 것이라 했다.
수요일 퇴근할 때 태풍의 북상 속도가 느려져서 목요일 새벽에 인천 서쪽 해상을 지나 북한 황해도로 상륙하여 지나갈 것이라 했다. 창문이 깨지지 않도록 테잎으로 단단히 고정시키라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장마 끄트머리에 섬진강 둑이 무너져 막대한 피해를 입은 탓인지 전반적으로 긴장한 분위기다. 밤에 창문을 꼭 닫으니 너무 더워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잠들었다. 어렴풋이 잠결에 바람부는 소리가 들린다. 일어나서 창문을 닫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설핏 잠이 든 사이 윤이가 바람 소리에 잠이 깨어 돌아다니면서 창문을 다 닫는다. 그 와중에도 센 바람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니 큰 바람은 이미 지나가고 뒤 따르는 바람인지 열어 놓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은 그저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태풍 바비는 많은 양의 비를 동반하지 않은 덕분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주말에 비 소식이 있으나 이는 태풍과 관련이 없고 여름철 소나기라고 한다.
지난 8월 15일 광화문 집회 이후 코로나 확진자 수가 서울 경기도를 중심으로 많이 늘어났다. 하루에 600 ~ 800 명까지 늘어나자 정부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로 격상하고 더 심해질 경우 3단계로 올리겠다는 계획을 알렸다. 점심시간에 식당에 가니 이름과 전화번호를 기재해야 하고 서로 마주보지 않도록 식탁을 배열하였다. 음식점이나 대형 마트는 밤 9시 이후에는 영업을 할 수 없고 편의점에서 음식을 조리하거나 섭취할 수 없다. 원 스트라이크 제도를 실시하여 식당이나 유흥업소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 곧바로 영업정지 명령이 떨어진다. 그런 탓인지 산악회의 일정도 모두 취소되었다.
이처럼 코로나 문제의 심각성에다 비까지 예보되어 있어 먼 산행을 피하고 가까운 곳에 가기로 하고 한참동안 찾아가지 못한 운악산을 선택했다. 금요일 늦게 정한 일이나 사니조은 하대감이 같이 가겠다고 한다.
산행기
7시 30분차를 타고 운악산 휴게소에 8시 20분에 도착했다. 약 2년만에 찾아온 운악산 휴게소는 큰 변화가 없다. 다만 휴게소 매점과 주차장 사이에 철망으로 된 울타리를 쳤다. 매점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휴업상태다. 휴게소 뜰에 앉아 옥수수 하나씩 먹고 여유있게 산행을 시작한다.
낮은 산이지만 경사가 급한 편이라 조금 올랐는데도 몸에서 땀이 흘러내린다. 운악산 정상쪽은 구름에 덮여 있다. 10여분 올라가니 산길 옆으로 연등이 걸려있어 운악사가 가까워짐을 알려준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부처님 오신 날 행사도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는데 연등이 달려있는 걸 보면 이 절의 신도들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운악사 (雲岳寺)
운악사 입구에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바위에 기대어 앉아 쉬고 있다. 남편은 힘이 좋아 더 위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것이라고 한다. 올해 70인데 이 산 아래 마을에 살면서 일 주일에 한 두번씩 이 운악사까지 올라온다고 한다. 끊임없이 운동해야 근육을 유지할 수 있다면서. 본인도 부자지만 자식들도 잘 돼서 돈 걱정 안하고 해외여행을 다니고 골프도 즐기면서 여유 있게 사는데 올 해는 코로나로 인해 해외 여행을 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고 한다. 속세에서 얘기하는 팔자 좋은 사람이다.
운악사 입구에서 내려다보니 스님이 빨래줄에 이불을 내다 널면서 내려와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권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절이니 그렇쟎아도 잠시 둘러보고 갈 참이었기에 사니조은 님에게 쉬었다 가자하고 돌계단을 내려갔다. 장마가 끝나고도 비가 계속되니 이불이 습기차서 눅눅하다고 한다. 운악사는 사방이 암벽으로 둘러쳐져 있는데다 작은 물줄기가 옆으로 흐르니 늘 습한 기운을 안고 살아야 한다.
뒷곁에 있는 산신각 주변에 핀 더덕과 꼬리풀 등 야생화를 둘러보고 나오니 커피를 타 놓았다.
“보살님은 어디 가셨나요?“ 하고 물으니 나보고 오랜만에 찾아온 모양이라고 한다. 벌써 다른 세상으로 간지 오래 되었단다. 내가 운악사에 마지막으로 찾아온 것이 아마도 2~3년은 된 것 같다. 서울에서 가까운데다 조망이 좋고 바위타는 재미가 쏠쏠하여 자주 찾아왔었는데 백두대간을 시작하면서 발길이 뜸해진 것 같다. 윤이는 운악사에서 끓여준 뽕잎 국수가 맛있었다고 가끔 회상한다. 주지스님이 근처 산에 있는 산뽕나무 잎과 잔가지를 채취하여 지붕위에 말렸다가 물에 넣고 끓여 국물을 낸다. 거기에 국수를 삶으면 잔치국수 맛이 깔끔하다. 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뽕잎 국수가 별미였는데 보살님이 없으니 이제는 일회용 커피로 산객을 대접하는 모양이다.
“이 절은 태고종 소속이네요?” 사니조은 님이 대웅전 기둥에 붙은 간판을 보고 묻는다. 태고종은 조계종과 달리 주지스님을 중앙에서 파견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건물을 소유하고 종단에 등록하는 것이라 한다.
“절에 사는 개는 짖지도 않아요.” 대웅전 앞 뜰팡에 누워 있는 누렁이를 보며 사니조은 님이 신기해한다.
“맞아요. 나도 마곡사에 갔을 때 마루에 누워있는 삽살개가 움직이지도 않고 짖지도 않아 꼭 죽은 줄 알았다니까요.”하고 내가 맞장구를 쳤다.
“마곡사에 자주 가시나요?” 주지스님이 묻는다.
“고향이 유구라서 가끔 찾아 가지요.” 하니 주지스님이 반색을 한다. 스님도 고향이 우성이라고 한다. 지금도 동생이 그 곳에 살고 있어 가끔 찾아간다고 한다.
법명을 혜거(慧炬)로 쓰는 노스님은 1945년 해방둥이다. 그러니까 올해 만으로 75세다.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지만 운악산에 들어와 폐가처럼 남아 있던 허름한 건물을 치우고 건물을 올리면서 살아온 지 20여년이 되었다. 절 터는 그리 크지 않지만 주변 경관이 좋으니 건물만 반듯하게 올리면 명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살고 있으니 절을 거저 먹겠다고 하는 놈들이 많어요.” 노스님의 얼굴에 잠시 속세의 주름이 잡힌다.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헐값을 주고 절을 인수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듯하다.
“산에서 돌이 굴러 떨어지지는 않나요?” 이 절을 처음으로 방문하는 사니조은 님의 눈에 절 위에 층층 절벽으로 서 있는 바위가 위태로워 보이는 모양이다.
“가끔 떨어져요.” 노스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담담한 표정이다.
“자고 있는데 ‘쿵’하고 소리가 나면 잠에서 깨곤 했는데 이제는 무덤덤해졌어요.” 돌이 건물에 직접 떨어지지 않아서 위험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한다.
가을 단풍이 들면 더욱 예쁘다며 가을에 다시 찾아오라는 스님의 인사를 뒤로 하고 운악사를 나선다.
사부자암(四父子岩)
오늘따라 사니조은님이 무척 힘들어한다. 일주일간 집 안에 콕 박힌 채 운동을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한 구비 한 구비 오를 때마다 철푸덕 앉아서 물을 마신다. 원래 바위가 많고 경사가 급해서 악(岳)자가 들어갈 만큼 험한 산이지만 안전 계단을 곳곳에 설치하여 산행하기에 아주 좋다.
궁예가 쌓았다는 궁예성터에서 조망을 만끽한다. 이 운악산은 태봉국을 세운 궁예에 관한 전설이 얼기설기 얽혀 있는 산이다. 잠시 쉬고 있는데 지나가던 아주머니 산꾼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궁예가 아주 못된 놈이었대. 마누라가 낳은 자식도 의심하고 내 쫒았대.” 역사는 늘 승자의 손으로 쓰여지는 것이니 궁예를 물리치고 왕이 된 고려 태조 왕건에게는 궁예를 쫒아 내야 했던 수 만가지 이유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부인이었던 강 씨 부인에 대한 악행이 여자들에게 강하게 어필되는 모양이다. 동병상련을 느끼는 걸까?
궁예는 901년 송악에 고려를 건국하고 이후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태봉국으로 바꾸면서 왕권확립에 나섰으나 호족세력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자신의 부하 왕건의 쿠데타 군에게 패배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궁예는 농민에게 쟁기로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면서 이 운악산에 찾아와 피를 씻고 폭포에서 떨어져 자결하였다고 한다. 태봉국이 918년에 왕건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진 지 1,000 년이 넘었지만 포천 일대에는 궁예에 관한 전설이 널리 퍼져 있다. 승자의 손으로 쓴 역사에서 패자의 애환이 느껴진다.
운악산 8부능선에 자리잡은 사부자바위에서 잠시 쉬어 간다. 윤이와 이 산을 찾을 때 늘 자리를 펴고 앉아 쉬던 곳이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던 터라 하늘에 두텁게 낀 구름이 심상치 않다. 사니조은 님이 남쪽으로 흐르는 능선을 보면서 애기봉과 수원산을 구분하여 알려준다. 모두 한북정맥에 걸쳐 있는 봉우리들이다.
“오늘 저 능선을 걸읍시다.” 갑자기 좀 더 긴 산행을 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저래 보여도 만만치 않아요.” 사니조은 님이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혼자서 백두대간과 9정맥을 완주한 노련함과 진중함이 엿보인다.
전망이 좋은 사부자 바위는 인기가 좋다. 우리가 쉬고 있는 동안에 부부 산꾼이 옆에 앉아 간식을 먹는다. 사니조은 님이 막거리를 권하자 전에 산대장을 했었다는 남자가 육포를 꺼낸다. 막걸리잔 너머로 산 얘기가 오고 간다. 부부 산꾼의 무용담이 재미있다. 몇 해 전 한겨울에 눈이 무릎까지 용대리에서 백담사를 거쳐 대청봉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고 한다. 겨울에는 용대리 – 백담사 간 버스 운행이 중단되는지라 약 7 km 구간을 도보로 움직여야 한다. 백담사에서 대청봉까지 약 13 km이니 편도 20 km가 된다. 그러니 용대리에서 대청봉을 왕복했다면 적어도 40 km 되는 거리다. 아마 이 부부 산꾼에게는 평생동안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무용담이 될 것 같다. 한참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또 다른 팀이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나만 알고 있는 자리인줄 알았는데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명당자리인 모양이다.
두 개의 정상석이 있는 운악산
운악산 바위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미끄럽지 않아 바위 타는 재미가 쏠쏠하다. 바위를 오르고 뒤돌아보면 탁 트인 조망이 가슴까지 시원하게 해준다. 긴장감과 격한 운동으로 숨이 턱밑까지 올라온다. 오랜만에 찾아온 운악산이 좋다.
그리고 높지 않은 산은 금방 정상을 보여준다. 마지막 급경사에 설치된 긴 철사다리에 이르는데 안개가 몰려오더니 금새 빗방울을 쏟아낸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지난 주말에 비를 흥건히 맞으며 산행을 한지라 이번에는 꼭 비를 피하고 싶었는데 모든 것이 내 뜻대로는 안되나 보다. 비옷을 입고 우산을 받쳐 쓴다. 지난 주 화악산에서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를 봉합하고 붕대를 감았는데 비가 오면서 혹여 물에 젖지 않을까 몹시 걱정된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장갑을 사서 꼈으나 오히려 장갑이 물기를 머금는다. 이래 저래 상처에 물기가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겠다.
운악산에는 정상석이 두 개다. 포천군과 가평군 경계에 걸쳐 있는 운악산은 서봉(西峯 935.5 m 포천군)과 동봉(東峯 937.5 m)으로 이어져 있다. 동봉은 한때 군인들의 유격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정상 마당 한 켠에 있는 바위에는 돌격대(突擊隊) 구호가 잔뜩 새겨져 있다. 여기서 한북정맥으로 이어지는 절고개 방면은 백호부대를 상징하는 백호능선이고 왼쪽으로 현등사로 내려가는 길은 청룡부대를 상징하는 청룡능선이다. 이미 군부대는 없어지고 유격 훈련장도 폐쇄되었지만 운악산은 남북으로 분단된 나라의 암울한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한다.
절고개
비가 그리 거세지는 않지만 금방 그칠 기세도 아니다. 처음 올라올 때는 애기봉을 거쳐 하판리로 내려가려는 욕심이 있었으나 내리는 비와 조망을 가리는 안개로 인해 계획을 거두어 들이고 절고개에서 현등사로 하산키로 정했다. 비가 내리지만 퍼붓듯이 많이 내리는 것도 아닌지라 천천히 걷다 보니 금방 계곡에 이른다. 비도 그치는 기색인데다 배도 조금 고파오기에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배낭을 털어 김밥과 빵으로 요기를 했다.
현등사 (懸燈寺)
절 이름의 한자를 해석하면 ‘등불을 걸어 놓은 절’이라는 뜻이다. 이런 뜻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영조 때 춘천에 사는 성(成)씨 성을 가진 젊은이가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이 절 터를 지나가게 되었다. 날이 어둡고 시장하여 피폐해진 이 저터에서 등에 지고 가던 솥단지를 내려놓고 밥을 지어 먹으려는데 절 안에 모셔놓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눈에 띄는 것이었다. 이에 젊은이는 게면쩍은 나머지 밥 한 그릇을 떠서 부처 앞에 놓았다. 그러나 양반 체면에 절은 할 수 없고 그냥 말로만 한 마디 하였다. “부처님, 내가 밥 한 그릇 올렸으니 이거 드시고 과거 시험에 붙게나 해주시요.”
그러나 성씨 총각은 과거에 떨어졌고 돌아오는 길에 또 이 절터를 지나가게 되었다. 괜히 부아가 오른 성씨 총각은 부처님을 보며 “어이 부처, 내가 밥도 한 그릇 올렸는데 어째서 합격도 시켜주지 않은거야? 누렇게 해가지고 사람이나 속이고 말야.” 하고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날 밤 꿈 속에 신장(神將)이 나타나 총각을 발로 밟으며 “야 놈아! 부처님이 너더러 밥을 달래더냐? 떡을 달래더냐? 누가 네 밥을 먹었다고 그래? 과거에 급제할 자신이 없으니까 요행이나 바라면서 밥 한 그릇 떠 놓고선 왜 허물을 남한테 돌리는거야? 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이라도 베푼 적이 있느냐? 도대체 무슨 공덕을 지은 것이 있다고 원망이야?”하면서 몸을 짓누르니 총각은 가위에 들려 몸을 허우적대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신장의 말씀이 하나도 틀린게 없었다.
총각은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꿈 얘기를 하니 아버니는 “얘야, 그 것은 부처님의 계시가 틀림없다. 너는 이제까지 네 장가들 밑천으로 모아둔 돈이 있으니 이걸 가지고 가서 그 절을 다시 세우고 영험이 있는 스님을 모셔다가 아침 저녁으로 공양을 올리면서 삼 년간 공부에 매진하면 과거에 붙을 것이다..” 하면서 아들을 시켜 현등사 중수를 당부하였다.
총각은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절을 다시 짓고 아침 저녁으로 예불을 드리면서 삼 년간 공을 들여 공부를 하고나서 정말 대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는 그 이야기를 듣고 대견하게 여겨 현등사에 [대선급제사 (大選及第寺)]라는 편액(扁額)을 내려 주었다 한다.
1772년에 쓰여진 운악산 현등사 사적(事蹟)이라는 책에는 신라 23대 법흥왕 대 인도 승려 마라가미가 들어오자 그를 위해 운악산에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그 뒤로 통일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고려 희종 6년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등불이 거듭 보이는 꿈을 꾸어 운악산을 찾아가니 절 앞에 옥으로 된 등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에 지눌은 절을 다시 세우고 절의 이름을 현등사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11년 1411년 함허대사(涵虛大師) 기화가 절을 다시 짓고 왕실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찰로 거듭 낳았다.
영조 39년 1763년 화재로 절이 소실된 후 이듬해 다시 지어 거듭 보수하여 유지되다가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완전히 파손된 것을 다시 지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빗속에 날이 잠시 더워진다. 절 구경을 마치고 일주문을 지나 식당가에 이르러 6시간의 산행을 마무리한다.
천천히 걸어 버스 정류장에 이르니 날은 맑게 개이고 습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는다. 이미 현등사에 도착할 때부터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했다. 마땅히 옷을 갈아입을 장소가 없어 화장실을 찾았으나 수리중이라는 안내문만 걸려 있어 재빨리 웃옷만 갈아입었다. 4시 정각에 청량리로 가는 버스가 도착하니 시원한 버스안에서 자다 깨다 두 시간 동안 편하게 앉아 서울로 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