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포석로 907 (탑동)
경주 오릉 Gyeongju Oreung Royal Tombs
입장료 : 어른 2,000원 / 청소년, 군인 1,000원 / 어린이 500원
경북투어패스를 이용하여 입장료는 내지 않았지만 주차요금으로 1,000원을 내야했다.
사적 제172호 다섯 능묘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의 시조 제1대왕 박혁거세,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 왕비,
제2대왕 남해왕, 제3대왕 유리왕, 제5대왕 파사왕의 능이라고 전하여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박혁거세왕이 자리에 오른 지 61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후 죽은 육체가 흩어져 땅에 떨어졌다. 박혁거세 왕비도 죽자 사람들이 함께 묻어 주려했으나
어디선가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며 방해를 했단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몸의 다섯 부분을 각각 묻어 오릉이 되었단다.
뱀 때문에 무덤이 여러 개 생겼다고 해서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국사책에서 봤듯이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정사고 일연의 삼국유사는 야사다.
먼저 숭덕전으로 이동하였다.
숭덕적은 박혁거세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조선 세종 11년(1429)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고,
이후 선조 33년(1600)에 다시 지어, 숙종 20년(1694)에 수리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대나무 숲을 지나면 알영정(閼英井)을 만나게 된다.
알영 왕비의 탄생설화가 있는 우물이다.
용이 알영정에 나타나 용의 오른쪽 갈빗대에서 계집아이를 낳았고 그녀가 알영 왕비가 되었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내용이 약간 차이가 있긴 한데... 모두 알영정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알영정에 관해서 우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박혁거세 5년 정월에 용이 알영정에 나타났다. 용은 오른쪽 갈빗대에서 계집아이 하나를 낳았다.
늙은 할멈이 이 광경을 보고는 이상히 여기어 계집아이를 데려다 길렀다.
그리고는 우물 이름을 따서 계집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사량리(沙梁里) 알영정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갈비에서 계집아이 하나를 낳았다.
혹은 용이 나타나 죽으니 그 배를 갈라 계집아이를 얻었다.”
라는 기록이 전한다.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와 우물에서 태어난 알영 왕비가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가장 남쪽에 있는 제1릉은 높이 약 10m로 5기 가운데 가장 높고 큰 원형봉토분이다.
제1릉의 동북쪽에 위치한 제2릉은 표주박 형태의 무덤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며,
제3릉은 제2릉의 서쪽에 있는 무덤으로 높이는 약 7.2m이다.
제4릉은 제3릉의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이다.
제5릉은 제4릉의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는 약 1.8m로 가장 낮다.
제2릉이 표주박 형태의 봉분이 2개인 2인용 무덤이기에 실제 오릉에 묻힌 사람은 여섯 명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경주 오릉은 신라의 시작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지이긴 한데...
그만큼 오래되었기 때문에 다소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래도 중요한 건 신라천년의 역사의 시작을 이렇게 명확하게 유적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숭의문(崇義門)의 가운데 문은 신들이 오가는 문이라 사람이 사용해서는 안되며 사람은 양 옆의 문을 이용하여야 한다.
숭의문(崇義門)과 일자각을 잇는 길을 참도(參道)라 하는데,
가운데 넓은 신도(神道)는 신들이 다니는 길이고
참배자는 양 옆의 좁은 어도(御道)를 걸어야 한다.
일자각(一字閣)은 오릉에 대한 제사 등 참배를 위한 공간이다.
나무 뿌리가 이렇게 땅밖으로 나와 있으니까... 옛날영화 천녀유혼 생각이 나서 조금 무섭기도 하고...
마치 요가를 하고있는 듯한 소나무의 웨이브는 해도 해도 너무하셨다. "그냥 쓰러지시는구만..."
아침이슬에게 한 낮에 찌는 더위는 시련일 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묘지는 이렇게 양지바른 곳에 있어야 좋지...
하늘도 너무 이쁘고... 무덤도 이렇게 밝고 이쁠 수 있구나... 가야할 시간이 되어서 돌아 나오는데...
숲 사잇길이 너무 이쁜 거 아님? 완전 대박!
박혁거세는 탄생도 죽음도 설화로 남아있어 의문점이 많다.
다만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정신을 기려 사당의 이름을 '숭덕전'이라고 지었고 그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여러 기록을 참고해
박혁거세는 북방에서 내려온 이주민이고, 일찍이 철기문화를 가진 뛰어난 무기로 보유하며
청동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당시 부족들을 규합해 신라를 세웠다고 분석하고 있다.
무성하게 자란 키큰 나무들을 둘러보면 수령(樹齡)이 상당히 오래 되어,
오릉이 일찍부터 사적지로 조성되어 식목(植木)이 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왕릉인데도 다른 왕릉과 비교해 크지 않은 것이 의아스럽다.
신라 초기이니 국력이 부족하고 기술이 약해서 그런지, 아니면 후대의 왕들이 김씨로 바뀌어서 그런지 알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