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16(수)
느헤미야기 1장~7장
(느헤 2,2)
임금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어째서 슬픈 얼굴을 하느냐?
네가 아픈 것 같지는 않으니,
마음의 슬픔일 수밖에 없겠구나.”
(느헤 2,4)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느헤 2,6)
얼마동안 가 있어야 하느냐?
언제면 돌아올 수 있느냐?
묵상-
에즈라에 이어 느헤미야 역시,
유다로부터 슬픈 소식을 듣는다.
포로살이를 모면하고 그 지방에
남은 이들은 큰 불행과 수치 속에
살고 있고,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은 불에 탔다는 것이다.
슬픔에 겨워 단식에 돌입한
느헤미야는 하느님께 탄원기도를
올린 후, 임금에게 유다로 보내
주셔서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에 임금이 느헤미야에게 던진
질문들이 어찌나 고급스럽고,
상대 중심적이며 공감적인지
감탄했다. 이런 질문을 열린질문
이라고 한다.
주종관계나 상하관계에서 임금은
부하에게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공감적으로 질문하는게 쉽지가 않다.
공적인 일들 앞에서, 임금이
견지해야 할 입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크타크세르크세스’라는
읽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임금은,
상대가 말하지 않은 마음 속 슬픔까지
읽어내서 대화를 이어가는 이른바,
비언어적인 소통 법을 쓰고 있다.
내가 CPE(임상사목)교육을 하면서
가장 많이 훈련된 것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잘 듣고, 상대가 표현하지 않은
말들 속에서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고 공감하는 ‘경청’의
능력이다. 환자와 임종자, 위기에
처한 이들을 만나 돌보고 기도해주는
영적 돌봄가로서, 자칫하면 내 중심,
내 방식대로 질문하고 대화하며,
상대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돌봄을 하기가 쉽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불안할 땐 손동작이나 얼굴
표정을 어떻게 짓는지, 상대를 믿지
못할 땐 몸을 뒤로 젖히면서 경계를
두려 한다던지, 또 상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이 순간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서 표현을 하지 않는지 등
비언어적인 관찰을 필요로한다.
느헤미야의 청을 들은 임금은
거두절미하고 사족 없이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얼마동안 가 있어야 하느냐?”
하고 물으면서, 신뢰했던 부하가
어떤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고하게 만든다.
이 구절을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면서, 이런 게
공감이고 소통이고, 상대중심적인
대화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환자를 만나거나 트라우마
증세에 시달리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나를 안전하다고
믿고, 미처 꺼내지 못하고 억눌렀던
말과 생각과 느낌, 그리고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럴 때마다, 성경 속에서 병자와
가난한 사람, 소외된 이들을 만나
따스하고도 비유적인 질문을 던지며,
상대가 스스로 생각해보고 대답할 수
있게끔 열린 질문을 하셨던 예수님이
생각난다.
느헤미야는 에즈라가 했던 말을
똑같이 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내 하느님의 너그러우신 손길이
나를 보살펴 주셨으므로,
임금님께서는 내 청을 들어주셨다.“
매사 주어지는 모든 것을,
주님의 너그러운 손길 덕분이며
은총이라고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모든 예언자들의 덕목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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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피나의 성경통독 묵상글
119.느헤미야에게 던진 임금의 열린질문(느헤미야 1장~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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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셉피나님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