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소극장 전개 운동 |
오늘의 연극 잉태한 씨앗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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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빈곤을 운명으로 알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자가 넘쳐나는 세상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싸아리 소극장- 구. 돌체소극장))
고금을 막론하고 재물이 인간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재물이 없는 무재팔자(無財八字)를 타고난 사람도 있는갑 싶다.
이런 팔자를 타고난 자가 돈 맛을 알면 몸에 병이 오거나
팔자에 뻘건 벽돌집에 들어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무리수를 자초했다는 말이다.
자신의 팔자가 재산이 안 붙는 팔자라는 것을 알고 이를 삭히며 받아들일 수 있는
수양이 필요한 것이다.
<배다리소극장>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귀(耳)와 눈(目)이 많아지는 때가 있다.
바로 여(旅) 할 때와 사랑을 할 때.
사랑할 때는 모든 것이 그립고 안타까움이 넘쳐 만상(萬象)이 다 귀와 눈이 되어버리고
여행할 때는 보는 것이 머리에 잔상으로 남고 듣는 것이 본 것과 어울려
기억으로 남으니 '나섬'과 '돌아옴'의 동시적인 여행은 온몸이 귀와 눈이 되는 것이다.
<경동예술극장>
예술! 끝도 한도 없는 욕심의 세계에서 이루어 내야 할
어떤 결정체로 보일리 만무한 형상의 세계라고 본다면
무재팔자를 소유한 자들이 하는 몸짓, 그리고 소리짓이 아닐 수 없다.
가진 사람들이 한다손 오만과 과시에서 시작되는 치졸의 극치일 뿐만이 아니라
깊이가 없는 품(品)이다.
무소유의 찬란한 극빈속에서 일궈냈던 선(先)인들의 흔적을 보면
그 사실이 참 명징함으로,
어느 영역이든 호의호식하며 일군 작품 있을까.
<신포아트홀>
82년, 분가한 인천은 인천대로 인천만의 예술을 만들어가기 바쁜 해.
인천의 연극은 연극대로 무대를 축성하기에 동분서주 했었다.
돌체 소극장에서 '미추홀' 극단의 공연(아빠의 딸)을 시작으로 몸부림을 친 한 해였다.
연극계를 이끌 임원들도 인천인으로 바뀌는 변화를 가져왔었다.
그 변화속에서 인천 연극의 면모를 과시한 것은
제1회 전국 연극제(개최지, 부산)에서 '도시의 나팔소리'(윤조병 작)으로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며 지난한 인천 연극의 어둠을 걷어내게 되었다.
척박한 풍토와 여건속에서 집회 장소로 쓰임새가 더 많았던 공간을 공연장으로 활용했던
그 시기(80년 초) 공연의 성취도를 높이고
관객 유치로 더 나은 지평을 열고자 젊은 연극인들이 중심이 되어
'소극장' 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호산나 합창단'에 관계하던 '유용호'에 의하여 제빙공장을 개조,
창시하게 된 '돌체 소극장'을 시초로
기폭제가 된 80년대적 인천 연극은
경기도에 본적을 둔 때 보다도 더 한층 성황을 이르며
본 궤도에 접어든 호(好)를 누렸다.
정준석이 인수한 돌체는 연극공연 전용으로 큰 기여를 하며
오늘날 기억에 뿌리를 둔 돌체로 남아있기 까지
83년부터 14여년을 부부(최규호, 박상숙)의 땀이 젖어있는 공간이었다.
연극인은 물론 음악인, 문학인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공간으로,
인천 연극사에 길이 남을 곳이다.
84년에 '설중매'의 한명회 역을 맡아 일약 장안의 화제를 낳았던
정진씨에 의하여 탄생된 '경동예술극장'이 뒤를 이었으며
이진성과 권선빈 부부연극인에 의하여 개관된 '신포아트홀'은
5년 후 (개관년도, 87년 6월) 누적된 재정난으로
문을 닫는 비운도 있었다.
낳고, 죽고, 인생사 윤회의 법칙은 이곳에서도 예외일 순 없었을까.
중견의 김종원에 의한 소극장이
88년 내동(홍예문에서 동인천에 이르는 길)의 지하공간에서 탄생된 '미추홀'도 있었으나
2년 여의 말미를 장식하고 말았다.
이와 비슷한 시기 율목동(전 인천고 자리)에 극단 '엘칸토'가
후원자와 단원들의 힘을 모아 '배다리 예술극장'을 개관,
이문형, 이원석의 극성(?)이 빛을 발하며
음향, 조명, 분장실을 고루 갖춘 소극장으로 연극계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다.
허나 무재팔자의 예술인들이 견뎌낼 수 있음은
유재(有財)뿐 별 방도없이 '꿈길' 같은 길에서 춘몽을 꾸었을까,
못내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 노릇, 누구를 탓할까.
참으로 가상한 연극인들의 소극장 전개운동은 창대한 결과를 낳진 못했어도
오늘의 연극을 잉태한 씨앗의 역할을 충분히 했다 싶지만
후론 이렇다 할 조짐없이 인천문화회관(수봉공원)의 공연장 개관으로
더 침체한 분위기를 보낸 것 아닌가 생각된다.
관(官)에 의한 탄생은 장,단을 생성시키는 이유가 뒤따르게 마련이고
개항장 일대의 공연장이
또 생소한 곳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도 한 요인이라면 요인이다.
최장수한 '돌체'가 연극인들의 기억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다시 돌체의 뒤를 이어가고자 하는 극단 '놀이와 축제'는 띠잇기를 시작,
80년대 같은 2008년을 살고자 한다. 인천연극을 위하여.
/ 김학균 ·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