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목월
해방 전후 우리나라 서정 시인의
대표적 인물로는
북에는 소월 남에는 박목월이 있었습니다.
그 2분 중 박목월 시인의 아들인
현 문학평론가이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신
박동규 국어국문학 박사님의
어릴 적 이야기에서,
어머니(박목월의 아내)는
이런 분이라고 소개하는 글
목월의 아들 박동규 서울대 명예 교수
그 분은 저의 어머니는 이런 분 이라고 썼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 전쟁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 말씀 잘 듣고 집 지키고 있어"
하시고는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셨습니다.
그 당시 내 여동생은 다섯 살이었고
남동생은 젖먹이였습니다.
인민군 치하에서
한 달이 넘게 고생하며 살아도 국군은 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서
아버지를 따라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우리 삼 남매와 어머니는
보따리를 들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남쪽으로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일주일 걸려 겨우 걸어서 닿은 곳이
평택 옆 어느 바닷가 조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인심이 사나워서
헛간에도
재워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느 집 흙담 옆 골목길에
가마니 두 장을 주워 펴놓고 잤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던 우리는
개천에 가서 작은 새우를 잡아
담장에 넝쿨을 뻗은 호박잎을 따서
죽처럼 끓여서 먹었습니다.
3일째 되는 날
담장 안집 여주인이 나와서
우리가 호박잎을 너무 따서
호박이 열리지 않는다고
다른 데 가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밤 어머니는
우리를 껴안고 슬피 우시더니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기다리자고 하셨습니다.
다음 날 세멱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신주처럼 소중하게 아끼던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쌀로 바꾸어 오셨습니다.
쌀자루에는 끈을 매어서
나에게 지우시고,
어머니는 어린 동생과
보따리를 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평택에서
수원으로 오는 산길로 접어들어
한참을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서른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청년이 내 곁에 붙으면서
"무겁지 내가 좀 져 줄게"
하였습니다.
저는 고마워서
"'아저씨 감사해요" 하고
쌀자루를 맡겼습니다.
쌀자루를 짊어진 청년의 발길이 빨랐습니다.
뒤에 따라 오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으나
외길이라서 그냥 그를 따라갔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갈라지는 길이 나왔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놓칠까 봐
"아저씨, 여기 내려주세요.
어머니를 기다려야 해요"
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따라와"
하고는 가 버렸습니다.
저는 갈라지는 길목에 서서
망설였습니다.
청년을 따라 가면
어머니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앉아 있으면
쌀을 잃을 것 같았습니다.
당황해서 큰 소리로 몇 번이나
"아저씨!" 하고 불렀지만
청년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냥 주저 앉아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 즈음
어머니가 동생들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길가에 울고 있는 저를 보시더니
첫마디가
"쌀자루는 어디 갔니?!"
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청년이 져 준다면서
쌀자루를 지고 저 길로 갔는데,
어머니를 놓칠 까봐
그냥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한참 있더니
내 머리를 껴안고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
하시며 우셨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
어느 농가 마루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디에 가셔서
새끼 손가락만한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얻어 오셔서
내 입에 넣어 주시고는
"내 아들이 영리하고 똑똑해서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하시면서 우셨습니다.
그 위기에 생명줄 같았던 쌀을 바보같이 다 잃고
누워 있는 나를
영리하고 똑똑한 아들이라고
칭찬해 주시다니...
그 후 어머니에게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가 되는 것이
제 소원이었습니다
제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결국은 어머니에게
기쁨을 드리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이 그 토양이 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때는
남들에게 바보처럼
보일 때가 많았지만
나를 똑똑한 아이로 인정해 주시던
어머니의 칭찬의 말 한 마디가
지금까지 제 삶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적 지주였고
오늘의 저를 있게 했습니다.
박목월시인의 아내는 요로코롬 어진 분이었습니다.
이런 어진 아내를 버리고
1952년 6. 25 전쟁이 끝나갈 무렵
박목월 시인이 중년이 었을 때
그의 제자인 여대생과
사랑에 빠져
아내와 자녀를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가정과 명예
그리고 서울의 대학 국문학과 교수라는
자리도 버리고
사랑하는 제자 여대생과 함께
2년여를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목월의 아내는
그가 제주도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을 찾아 나섰습니다.
부인은 남편과 함께 있는 여제자를 마주한 후
어렵게 살아가는 궁한 모습을 본 후...
두 사람에게 힘들고 어렵지 않으냐며,
돈 봉투와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라며
두 사람에게 겨울 옷을 내밀고
고걸 준 후
아내는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박목월과 그 여제자는
그 모습과 아량에 감동되어 뉘우쳐
고게 가슴을 너무 아프게 해
그들의 사랑을 끝내고
서로 헤어지기로
울면서 합의합니다. 그리고,
목월은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 이별의 노래란 시를 지어
사랑하는 그 애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는데,
그 때 목월이 고 여자에게 써준 시가
바로 이별의 노래였습니다.
고때 박목월이 작시한
고걸
김성태가 작곡하였고
그가 작곡한 이 서정 가곡은
1950년대에
선율이 너무 곱고
호소력이 넘 좋아서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골구러 가장 많이 즐겨 듣고
부르기도 했던 노래가 되었습니다.
아미시(Amish village)
아미시(Amish)마을이란? : 현대 문명을 거부하고
소박한 농경생활을 하는
미국의 한 종교집단으로
펜실베이니아, 인디애나, 오하이오 등지에
거주하고 사는 사람들 마을
박목월의 얼룩 숭아지 노래비 경주 황성공원의 얼룩 송아지 노래비
경주 박목윌의 생가 초가집 앞의 약력비와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