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 29권, 중종 12년 8월 30일 계유 7번째기사 1517년 명 정덕(正德) 12년
대신(大臣)과 예조(禮曹)·성균관(成均館)의 당상(堂上)을 연방(延訪)하였다. 우의정(右議政) 신용개(申用漑)가 아뢰기를,
"국가의 전장이 이미 상세하고도 극진하므로 더 법을 세울 것이 없으며, 사장(師長)이 능히 마음을 다한다면 오히려 인재를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항간의 동몽학은 문자를 가르칠 뿐인데, 어떻게 의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문자를 익히거나 자기를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아, 작으면 작은 것을 이루고 크면 큰 것을 이루면 될 것입니다. 또 《소학》의 글은 어린 아이의 학문일 뿐 아니라 노대(老大)한 사람들도 배워야 합니다. 국도(國都)로부터 촌간에 이르기까지 다 학당이 있으니, 큰 고을이라면 면(面)마다 학장(學長)을 두어 《소학》의 도를 가르쳐 뭇사람이 이를 거치게 하면 사람들이 다 자연히 성취하여 교화가 절로 아름다와질 것입니다. 다만 두 정자(程子)가 사람을 가르친 규모가 지극히 상세하고도 갖추어졌으며, 주자(朱子)에게도 백록규(白鹿規)758) 가 있었으니, 이런 일을 따서 학자의 규모로 삼아야 합니다."
하고 성균관사(成均館事) 남곤(南袞)이 아뢰기를,
"학교를 흥하게 하는 것은 교화가 크게 행해지게 하는 일 가운데의 하나입니다. 한가지 일로 학교를 흥하게 할 수는 없으나, 임금의 일신(一身)에 있어서는 할 수 없다 하여 그만둘 수도 없고, 법제(法制)로 구박할 수도 없습니다.송 이종(宋理宗) 때에 진유(眞儒)가 많이 났는데, 이는 한때 작흥(作興)한 공효(功效)뿐이 아니라 그렇게 된 까닭이 깊습니다. 송나라의 태조 황제(太祖皇帝)가 무장(武將)으로부터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천품이 순수하게 아름다우므로, 비록 유도(儒道)를 배우지는 않았으나 말하기를 ‘마치 내 마음처럼 중문(重門)을 열어 조금이라도 비뚠 것이 있으면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한다.’ 하였으니, 그 광명 정대함이 이처럼 성인(聖人)의 도리에 암합(暗合)하였는데, 이것으로 규모를 세웠고, 또 인종(仁宗)이 유구히 함양한 공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인재가 자연히 배출되고, 성명(性命)의 학문도 밝혀진 것이니, 이는 워낙 일조일석에 된 일이 아닙니다. 풍속은 하루아침에 크게 고치려고 마음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상께서 몸소 정도(正道)로 모범을 보이면서 유구히 기다리셔야 합니다. 근일 《소학》을 진강하라 하신 분부를 소신(小臣)이 친히 들으니 지극히 아름답습니다. 매양 이렇게 마음을 가지시면, 호걸(豪傑)한 선비가 자연히 일어나고 한때의 취향도 정해질 것입니다. 《소학》의 가르침은 삼대(三代) 이후로 사람들이 모르던 것을 주자가 그 글을 만들어서 가르치매, 후학(後學)이 이 때문에 향방이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옛사람의 가르치는 방도로 말하면,
사람이 나서 8세가 되면 다
소학에 넣어 쇄소(灑掃)·응대(應對)·진퇴의 절도와
예(禮)·악(樂)·사(射)759) ·어(御)760) ·서(書)761) ·수(數)의 글을
가르쳤는데, 지금은 이 방도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상께서 능히 몸소 행하시면, 30∼40세가 된 사람일지라도 배우게 될 수 있을 것이며, 그러면 참으로 미열(迷劣)한 자가 아니면 아마도 학문을 위하여 공부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금자에 과거(科擧)에 쓰이는 글을 퇴폐한 학문이라 하여 정학(正學)을 해친다고 하나, 과거의 학문은 삼대 이래로 폐지할 수 없었던 것이니, 선비를 뽑기를 마치 삼대의 향거(鄕擧)·이선(里選)처럼 하여, 덕행(德行)·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부득이 과거로 뽑아야 하며, 과거로 선비를 뽑더라도 어진 사람이 나올 수 있고 마침내 군자 대인(君子大人)이 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송나라의 정자·주자가 다 과목(科目)을 거쳐서 나온 사람입니다. 또 사장(詞章)을 하는 자라고 어찌 죄다 부박(浮薄)하겠으며, 경학(經學)을 닦는 자라고 또한 어찌 죄다 부화(浮華)하지 않겠습니까? 사장을 숭상하는 일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니, 이른바 수(隋)·당(唐)·송(宋)의 진사(進士)가 그것입니다. 과목에 의하더라도 삼대의 정치를 할 수 있으나, 당나라 때에 진사를 귀하게 여기고 경학을 천하게 여겨 ‘분향하고서 진사를 예대하고, 막차를 거두고서 경생을 대접한다. [焚香禮進士 撤幕待經生]’는 시구(詩句)가 있게까지 되었는데, 이런 풍습은 그릅니다. 사장과 경술(經術)은 한결같이 해야 하며 치우치게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영의정 정광필이 아뢰기를,
"사장을 하는 자도 쓸만하나, 사장을 하면서 아울러 경술을 닦는 자는 더욱 쓸만합니다. 향거·이선은 오늘날의 일이 아니니 행할 수 없습니다."
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근일 조종(祖宗)의 규모를 좁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자는 워낙 죄주어야 합니다. 일대(一代)의 정치에는 반드시 일대의 정규(定規)가 있는 것이니, 폐단이 있는 법이라면 고쳐야 하고 그 법을 쓰면서 좁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정광필이 아뢰기를,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더라도 상께서 믿고 들어 주실 것은 없습니다."
하고, 남곤이 아뢰기를,
"신(臣)이 글을 배우기 시작한 뒤로는 심학(心學)을 하는 자가 없고, 다만
김굉필(金硡弼)·정여창(鄭汝昌)이 김종직(金宗直)에게서 배워 마음을 닦는 학문을 했고 끝내 실천했다고 하나,
신은 그 말을 듣기만 하고 그 일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폐조(廢朝) 이후로 심학을 전혀 하지 않다가, 근래로 혹 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데 부질없이 말하기는 쉬우나 마음을 닦기는 어려우므로, 심학을 닦는 자가 많이 있기는 하나 성현(聖賢)의 길에 곧바로 들어갈 줄 모르니, 밝은 스승이 있어서 바로 잡는다면 될 것입니다. 송나라 때 주돈이(周惇頤)가 성리의 학문을 맨먼저 밝혔는데, 이어서 두 정자가 그 설(說)을 밝혔고, 주희(朱熹)에 이르러서 그 도(道)가 크게 갖추어졌으니, 이렇게 오래 견지한 뒤에야 성취가 있을 수 있습니다. 대저 성명의 학문이란 지극히 미묘한 것이어서 정도(正道)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송나라 때에는 문운(文運)이 한창 일고, 육구연(陸九淵)의 학문도 우연한 것이 아니었으나 진유(眞儒)가 되지 못하였으니, 진유는 진실로 말로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사습(士習)이 교만하고 사나우며 거세고 어그러지는데, 사람마다 말이 충신(忠信)하고 행실이 독경(篤敬)하게 하자면, 교화가 크게 행해진 뒤에야 바랄 수 있을 것이며, 또 교화를 행하는 근본은 집마다 사람마다 풍족한 데에 있습니다. 정치를 말하는 자는 삼대의 정치를 즐겨 말하나, 부득이 삼대와 같은 보좌가 있고서야 그 정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얻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였다.
[註 758]
백록규(白鹿規) : 백록동 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學規). 백록동에는 당(唐) 이래로 국학(國學)을 두었고 송초(宋初)에 서원을 두었다. 그 뒤에 황폐해진 것을 주자(朱子)가 복구하고 교학(敎學)의 요령을 만들어 게시하였는데, 이것을 백록동 서원학규라 한다. 여기에는 오교(五敎)의 목(目), 수신(修身)·접물(接物)·처사(處事)의 요(要), 위학(爲學)의 서(序)에 관한 규모가 들어 있다.
○迎訪大臣、禮曹、成均館堂上。 右議政申用漑曰: "國家典章, 已詳且盡, 不必加立法, 而師長若能盡心, 則猶可以作興人才矣。 閭巷童蒙學, 但敎文字而已, 何有敎其義理者乎? 然以此, 或習爲文字, 或爲修己治人之本, 小而成小, 大而成大則可也。 且《小學》之書, 非徒小子之學, 至於老大, 亦當學之。 自國都以及閭巷, 皆有學, 若大邑則面面置學長, 以敎《小學》之道, 與衆由之, 則人皆自然成就, 而敎化自美也。 但兩程夫子敎人規模, 至詳且備, 朱子亦有白鹿規, 如此事可采取, 以爲學者規模也。" 成均館事南袞曰: "興學校, 乃敎化大行中之一事。 不可以一事, 而興學校, 然亦在人君一身, 不可謂不得爲, 而止之也, 然亦不可驅以法制也。 宋 理宗朝, 眞儒輩出, 此非徒一時作興之效也, 其原之所自來也, 深矣。 宋 太祖皇帝, 雖自武將而起, 而天資粹美, 故雖不學儒道, 而其曰: ‘洞開重門, 正如我心, 少有邪曲, 人皆見之。’ 其光明正大, 暗合於聖人之道如此。 以此而立規模, 又有仁宗悠久涵養之功。 是以, 人才自然輩出, 而性命之學, 亦明矣, 此, 固非一朝一夕之事也。 風俗不可以一朝丕變爲心也, 當自上躬率以正道, 悠久而待之也。 近日進講《小學》之敎, 小臣親聞之, 至美矣。 若每以此爲心, 則豪傑之士, 自然興起, 而一時趨向, 亦定矣。 《小學》之敎, 自三代以後, 人不知之, 朱子爲其書以敎之, 後學因此而知有向方矣。 若古人敎之之道, 則
人生八歲, 皆入《小學》, 敎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
禮樂、射御、書數之文, 今則無是道焉。
然若上能躬行, 則雖三四十歲之人, 亦可追學矣。 然則苟非迷劣者, 庶幾知爲學工夫矣。 今者以科擧之文爲廢學而害正學云, 然科擧之學, 三代以下, 所不得廢也。 若取士如三代鄕擧、里選, 以德行、孝悌爲本, 則可矣, 不然則不得已, 以科擧取之矣。 雖科擧取士, 而亦有賢者出焉, 終爲君子大人, 如宋之程子、朱子, 皆由科目, 出者也。 且爲詞章者, 豈盡浮薄; 治經學者, 亦豈盡不浮華哉? 尙詞章之事, 其來已久, 所謂隋、唐、宋進士, 是也, 以科目而猶可爲三代之治矣。 唐時貴進士, 而賤經學, 至有詩句曰: ‘焚香禮進士, 撤幕待經生。’ 如此習尙則非矣。 詞章、經術, 所當如一, 不可偏廢也。" 領議政鄭光弼曰: "爲詞章者, 可用也, 然爲詞章而兼治經術者, 尤爲可用也。 鄕擧、里選, 非今日之事, 不可行也。" 南袞曰: "竊聞, 近日有言以祖宗規模爲狹隘者, 如此言之者, 固當罪之也。 一代之治, 必有一代之定規, 若法之有弊者, 當改之, 不可用其法, 而又謂之狹小也。" 光弼曰: "雖有以是爲言者, 自上不必信聽也。"
南袞曰: "自臣學文之後, 無爲心學者, 但有
金宏弼、鄭汝昌學於金宗直, 以爲治心之學, 終爲踐履之事矣。 然臣但聞其語, 而不見其事也。
自廢朝以後, 專不爲心學, 近來或有爲之者矣。 然徒言則易, 治心則難, 雖多有治心學者, 但不知直入聖賢之蹊逕也, 若有明師而正之則可矣。 宋時周敦頣, 首明性理之學, 繼而有兩程夫子發明其說, 至於朱熹, 其道大備。 如此持久然後, 可以有成矣。 夫性命之學, 至爲微妙, 入於正道爲難。 宋時文運方興, 陸九淵之學, 亦不偶然, 而不得爲眞儒, 眞儒固不可以言, 而得也。 今士習驕暴强戾, 若欲使人人, 言忠信, 行篤敬, 則敎化大行, 然後可冀也, 且其行敎化之根本, 則在於家給人足矣。 言治者, 雖好言三代之治, 而不得已有三代之佐然後, 可致其治也。 然得此人甚難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