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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효순(韓孝純)
[문과] 선조(宣祖) 9년(15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9위(29/34)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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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면부(勉夫)(주1)
생년 계묘(癸卯) 1543년 (중종 38)
졸년 신유(辛酉) 1621년 (광해군 13)
향년 79세
합격연령 34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면숙(勉叔), 호는 월탄(月灘).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상경(韓尙敬)의 후손으로, 증조부(曾祖父)는 한사무(韓士武)이고 조부(祖父)는 한승원(韓承元)이다. 아버지는 한여필(韓汝弼), 어머니는 유엄(柳渰)의 딸이다.
1568년(선조 1) 생원이 되고, 1576년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 검열ㆍ수찬을 거쳐 1584년 영해부사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월 영해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경상좌도관찰사에 승진, 순찰사를 겸임해 동해안 지역을 방비하며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다.
1594년 병조참판, 1596년 경상도ㆍ전라도ㆍ충청도의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다. 그 해 한산도무과(閑山島武科)에 시관(試官)으로 참여하고, 통제사 이순신(李舜臣)과 함께 수군강화에 힘썼다.
그 뒤 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남해 지역의 도순찰사로 해상군비강화에 계속 노력하였다.
1598년 전라도관찰사로서 병마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이듬해 전라좌수사 이순신 막하의 전선감조군관(戰船監造軍官)으로 있으면서 거북선 건조에 공이 많았던 나대용(羅大用)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북선 모양의 소형 무장선인 창선(鎗船) 25척을 건조하도록 하였다.
1604년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다음해 평안도관찰사ㆍ판중추부사 등을 거쳐, 1606년 우찬성ㆍ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다시 이조판서를 역임한 뒤, 161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듬해인 1617년 이이첨을 중심으로 폐모론이 일자 소극적인 자세로 관망하는 동시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였다.
폐모론자들은 한효순의 이러한 태도를 문제 삼아 기자헌 등과 함께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한효순의 태도는 『광해군일기』(중초본)에 자세히 전한다.
합사(合辭)하여 올린 상소문에서, “전 좌의정 한효순은 본래 견해를 달리했던 사람인데 인재가 부족했던 탓에 정승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당초 대론이 일어났을 때 관망한 채 거취를 결정하지 않았는데 공의가 발의되자 어쩔 수 없이 일어나긴 했으나 본래 성의가 없어 겨우 책임만 때웠을 따름입니다. (후략)” 이에 대해 광해군은, “번잡스럽게 소란 떨지 말라. 한효순의 일도 그렇다. 고관대작으로서 서궁(인목대비)을 비호한 자가 효순 한 사람만이 아닌데, 그렇다면 일일이 죄를 주어야 하는가? (후략)”
1621년(광해군 13)에 판중추부사로 졸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폐모론에 가담한 죄로 관직이 추탈되었으나 1908년에 신원되었다.
저서로는 『신기비결(神器秘訣)』, 『진설(陣設)』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효순(韓孝純))]
[생원] 선조(宣祖) 1년(1568)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 [생원] 3등(三等) 13위(43/100)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비변사(備邊司)
[중앙관] 조선중기 중앙관 좌의정(左議政)
[관인정보]
제수년월 1616 [병진(丙辰)] 이조판서(吏曹判書) 배(拜)
[품관 정보]
품관 정1품
[과거 정보]
과거 선조(宣祖) 병자식(丙子式)
[관력 정보]
관직 좌의정(左議政)
[가족 관계]
부 한여필(韓汝弼)
조부 한승원(韓承元)
증조부 한사무(韓士武)
6대조 한상경(韓尙敬)
[비고]
비고 기자헌(奇自獻) 복(卜)
기년입각(耆年入閣: 늙어서 재상이 됨) : 74(七十四)
[상신(相臣)] 외손(外孫) : 외손 여성제(呂聖齊)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
『비변사선생안(備邊司先生案)』(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6005])
[이력사항]
선발인원 34명 [甲3‧乙7‧丙24]
전력 생원(生員)
관직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문과시제 전(箋):의본조유희춘진유선록(擬本朝柳希春進儒先錄)
타과 선조(宣祖) 1년(1568) 무진(戊辰)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三等) 13위
기타 광해무오흉 논정청 계해추탈(光海戊午凶論庭請癸亥追奪) 진산삼배상 위지산삼각로(進山蔘拜相謂之山蔘閣老)
부모구존 자시하(慈侍下)【補】(주3)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여필(韓汝弼)
품계 : 통훈대부(通訓大夫)
관직 : 행문천군수(行文川郡守)【補】(주4)
[조부(祖父)]
성명 : 한승원(韓承元)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사무(韓士武)
[외조부(外祖父)]
성명 : 유엄(柳渰)[生]
본관 : 문화(文化)【補】
[처부(妻父)]
성명 : 안정(安珽)[文]
본관 : 순흥(順興)【補】
[처부(妻父)2]
성명 : 강효윤(姜孝胤)
본관 : 미상(未詳) 진주(晉州)
[안항(鴈行)]
형(兄) : 한효윤(韓孝胤)[生]【補】(주5)
[가족과거]
자(子) : 한이겸(韓履謙)[文]
[주 1] 자 : 『[만력4년병자식년]문무잡과방목([萬曆四年丙子式年]文武雜科榜目)』(『병진증광사마방(丙辰增廣司馬榜)』, 고려대학교 도서관[만송 B8 A1 1616B]) 내의 급제 기록에는 자가 "면숙(勉叔)"으로 나옴.
[주 2] 거주지 : 『[만력4년병자식년]문무잡과방목([萬曆四年丙子式年]文武雜科榜目)』(『병진증광사마방(丙辰增廣司馬榜)』, 고려대학교 도서관[만송 B8 A1 1616B])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 구존 : 『[만력4년병자식년]문무잡과방목([萬曆四年丙子式年]文武雜科榜目)』(『병진증광사마방(丙辰增廣司馬榜)』, 고려대학교 도서관[만송 B8 A1 1616B])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모 구존을 추가.
[주 4] 부관직 : 『[만력4년병자식년]문무잡과방목([萬曆四年丙子式年]文武雜科榜目)』(『병진증광사마방(丙辰增廣司馬榜)』, 고려대학교 도서관[만송 B8 A1 1616B])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부 관직을 추가.
[주 5] 안항 : 『[만력4년병자식년]문무잡과방목([萬曆四年丙子式年]文武雜科榜目)』(『병진증광사마방(丙辰增廣司馬榜)』, 고려대학교 도서관[만송 B8 A1 1616B])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
한이겸(韓履謙)
[문과] 광해(光海) 8년(1616) 병진(丙辰)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 2위(12/41)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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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수익(受益)
생년 신사(辛巳) 1581년 (선조 14)
합격연령 36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41명 [甲3‧乙7‧丙31]
전력 현감(縣監)
관직 분승정원승지(分承政院承旨)
문과시제 책문(策問):적전(籍田)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효순(韓孝純)[文]
[조부(祖父)]
성명 : 한여필(韓汝弼)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승원(韓承元)
[외조부(外祖父)]
성명 : 강효윤(姜孝胤)
본관 : 미상(未詳) 진주(晉州)
[처부(妻父)]
성명 : 기효증(奇孝曾)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형(兄) : 한유겸(韓有謙)【補】
형(兄) : 한수겸(韓守謙)【補】
형(兄) : 한치겸(韓致謙)【補】
제(弟) : 한윤겸(韓允謙)[文]
제(弟) : 한극겸(韓克謙)[文]
제(弟) : 한호겸(韓好謙)【補】(주1)
[주 1] 안항 : 『만력44년병진3월증광사마방목(萬曆四十四年丙辰三月增廣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6024-209])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안항을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九(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한상경(韓尙敬)
[고려문과] 우왕(禑王) 8년(1382) 임술(壬戌) 임술방(壬戌榜) 을과(乙科) 3위(3/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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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숙경(叔敬)
호(號) 신재(信齋)
시호(諡號) 문간(文簡)
생년 경자(庚子)【補】(주1) 1360년 (공민왕 9)
졸년 계묘(癸卯) 1423년 (세종 5)
향년 64세
합격연령 23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숙경(叔敬)·경중(敬仲), 호는 신재(信齋).
할아버지는 호부상서 한공의(韓公義)이고, 아버지는 판후덕부사(判厚德府事) 한수(韓脩)이며, 어머니는 길창군(吉昌君) 권적(權適)의 딸이다.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예의좌랑·우정언·전리정랑(典理正郎)·예문응교·공부총랑(工部摠郎)·종부영(宗簿令)을 거쳐, 1392년(공양왕 4) 밀직사우부대언에 승진하였다. 이 해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는 모의에 가담하고, 보새(寶璽)를 받들어 이성계에게 바쳤으며, 그 공으로 개국공신 3등에 추록되었다.
개국 후 중추원도승지가 되고,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도평의사사사에 승진되었으며, 충청도도관찰사가 되어 서원군(西原君)에 봉하여졌다. 다시 경기좌도도관찰사에 보직되었다가 태종 때 참찬의정부사·이조판서를 거쳐,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우의정·영의정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상경(韓尙敬))]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서령(署令)
관직 우의정(右議政)(주2)
관직 영상(領相)
기타 훈신(勳臣)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수(韓脩)[麗文]
[조부(祖父)]
성명 : 한공의(韓公義)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악(韓渥)
[외조부(外祖父)]
성명 : 권적(權適)
본관 : 안동(安東)【補】
[처부(妻父)]
성명 : 오준량(吳俊良)
본관 : 해주(海州)【補】
[안항(鴈行)]
형(兄) : 한상질(韓尙質)[麗文]
제(弟) : 한상덕(韓尙德)[麗文]
[주 1]생년 : 「『세종실록』 19권, 세종 5년(1423) 3월 7일」 졸기 기사를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2]관직 : 「대명홍무15년임술년5월일급제동년방목(大明洪武十五年壬戌年五月日及第同年牓[榜]目)」(『고문서집성(古文書集成)』 23책(거창 초계정씨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 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관직을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4650-10])
한공의(韓公義)
출생일 1307년(충렬왕 복위9)
사망일 1365년(공민왕 14)
고려후기 산기상시, 호부상서, 밀직부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무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의지(宜之). 아버지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악(韓渥)이며, 어머니는 동지밀직전리판서(同知密直典理判書) 원경(元卿)의 딸이다.
음보(蔭補)로 녹남부사(錄南部事)에 진출한 뒤, 충혜왕의 신임을 받아 호군(護軍)에 제수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대호군 삼사우윤(大護軍三司右尹)에 올랐다.
집권층의 비위에 거슬려 전주목사(全州牧使)로 좌천되었으나, 선정을 베풀어 충목왕 때 소부(小府)·위위(衛尉)·선공(繕工)의 세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이어 대언(代言)이 되고, 왕이 승하하던 날에 “임금과 신하는 시종(始終)이 있어야 한다.”고 하니, 공민왕이 한공의를 신임하여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임명하였다. 다시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옮겼으며, 2년이 지나자 다시 형부(刑部)로 옮겼는데 송사처리가 공정하였다.
1364년(공민왕 13) 밀직부사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여졌다.
1365년 6월 신돈이 정권을 잡은 지 30여 일 만에 대신들을 참소하자 영도첨의(領都僉議) 이공수(李公遂), 시중(侍中) 경천흥(慶千興)과 함께 파면되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공의(韓公義))]
한악(韓渥)
출생일 1274년(원종 15)
사망일 1342년(충혜왕 복위 3)
고려후기 삼사사, 중찬, 우정승 등을 역임한 관리.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사기(韓謝奇)의 아들이다.
1310년(충선왕 2) 우대언(右代言), 1320년(충숙왕 7)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내고 이듬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어 왕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의 왕위를 노리고 있던 심양왕 왕고(瀋陽王 王暠)가 여러가지로 왕을 참소하였는데 뛰어난 지략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함으로써 인정을 받았으며, 이 때의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다.
첨의평리(僉議評理)와 찬성사를 거쳐 1330년(충혜왕 즉위년)에 삼사사(三司事), 이듬해 중찬(中贊)을 역임하고, 1340년(충혜왕 복위 1) 우정승에 이르렀다.
한어(漢語)와 몽고어에 능하였으며 성품이 신중하고 기량(器量)이 있었다고 한다. 충혜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악(韓渥))]
한사기(韓謝奇)
[고려문과] 충렬왕(忠烈王) 5년(1279) 기묘(己卯) 기묘방(己卯榜) 병과(丙科) 3위(6/4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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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43명
관직 사의대부(司議大夫)
기타 『동문선(東文選)』 권86, 서(序), [하죽계안씨삼자등과시서(賀竹溪安氏三子登科詩序)](李穡)에 한사기(韓謝奇)‧한사겸(韓謝謙)‧한보(韓譜)가 3형제 등과로 나온다.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강(韓康)[麗文]
[조부(祖父)]
성명 : 한광윤(韓光胤)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韓○○)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채인규(蔡仁規)【補】(주)
본관 : 평강(平康)【補】
[안항(鴈行)]
제(弟) : 한사겸(韓謝謙)[麗文]
제(弟) : 한보(韓譜)[麗文]
[주 1] 외조부 : [채인규묘지명(蔡仁揆墓誌銘)]과 『평강채씨대동보(平康蔡氏大同譜)』(1991) 권1, [1쪽]을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 4650-10])
한강(韓康)
[고려문과] 고종(高宗) 99년미상(未詳) 시년미상(未詳)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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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 한경(韓璟)
시호(諡號) 문혜(文惠)【補】(주1)
생년 무자(戊子)【補】(주2) 1228년 (고종 15)
졸년 계묘(癸卯)【補】(주3) 1303년 (충렬왕 29)
향년 76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사마] 고종(高宗) 30년(1243) 계묘(癸卯) 진사시(進士試) 1등(一等) 1[壯元]위(1/20)
[이력사항]
관직 첨의중찬(僉議中贊)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광윤(韓光胤)[麗文]
[조부(祖父)]
성명 : 한희유(韓希愈)【補】(주4)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혁(韓奕)【補】(주5)
[외조부(外祖父)]
성명 : 진각(陳慤)【補】(주6)
본관 : 나주(羅州)【補】
[처부(妻父)]
성명 : 임전우(任全祐)【補】(주7)
본관 : 함종(咸從)【補】
[주 1] 시호 : 『고려사(高麗史)』 제107권, 열전 제20, [한강]과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1949)를 참고하여 시호를 추가.
[주 2] 생년 : [1331년 한강(韓康) 준호구(准戶口)]와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1949)를 참고하여 생년을 추가.
[주 3] 졸년 : 『고려사(高麗史)』 제32권, 세가 제32, [충렬왕 계묘 29년(1303)]과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1949)를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4] 조부 : [1331년 한강(韓康) 준호구(准戶口)]와 『청주한씨대동보(淸州韓氏大同譜)』를 참고하여 조부를 추가.
[주 5] 증조부 : [1331년 한강(韓康) 준호구(准戶口)]와 『청주한씨대동보(淸州韓氏大同譜)』를 참고하여 증조부를 추가.
[주 6] 외조부 : [1331년 한강(韓康) 준호구(准戶口)]와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1949)를 참고하여 외조부를 추가. 이명 진의(陳懿), 고명 진세장(陳世長).
[주 7] 처부 : [1331년 한강(韓康) 준호구(准戶口)]와 『청주한씨세보(淸州韓氏世譜)』(1949)를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출전]
『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朴龍雲, 一志社, 1990.[422_591])
한광윤(韓光胤)
[고려문과] 강종(康宗) 99년미상(未詳) 시년미상(未詳)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D55CAD11C724U9999X0
본인본관 청주(淸州)【補】(주1)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이력사항]
관직 예빈경(禮賓卿)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희유(韓希愈)【補】(주2)
[조부(祖父)]
성명 : 한혁(韓奕)【補】(주3)
[증조부(曾祖父)]
성명 : 한상휴(韓尙休)【補】(주4)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진각(陳慤)(주5)
본관 : 나주(羅州)【補】
[주 1] 본관 :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를 참고하여 본관을 추가.
[주 2] 부 :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를 참고하여 부를 추가.
[주 3] 조부 :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를 참고하여 조부를 추가.
[주 4] 증조부 :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를 참고하여 증조부를 추가.
[주 5] 처부 : 『청주한씨대동족보(淸州韓氏大同族譜)』를 참고하여 처부를 추가. 진의(陳懿)라고도 한다. 초명은 진세장(陳世長)임.
[출전]
『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朴龍雲, 一志社, 1990.[411_522])
한희유(韓希愈)
출생일 미상
사망일 1306년(충렬왕 32)
고려후기 동북면도지휘사, 지첨의부사, 첨의우중찬 등을 역임한 관리.무신.
가주(嘉州) 출신. 원래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의 아전이었다.
군졸 출신으로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기 때문에 항상 왕의 은덕에 감격했고, 왕의 뜻이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성품이 소박하고 도량이 넓으며 활 쏘고 말 달리는 것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담력도 대단해, 1280년(충렬왕 6) 5월에는 대장군으로서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고성(固城)·칠포(漆浦)에 침입한 왜적을 방비하는 책임을 맡았다. 일개 대정(隊正)에서 출발해 대장군이 되어, 모함도 많이 받았다.
1282년에는 영통사(靈通寺) 승려 홍탄(洪坦)이 개인감정으로 모함해 국문을 당한 적도 있으나, 무고가 발각되어 홍탄이 오히려 섬으로 귀양을 갔다.
그 뒤 1287년에 호두패(虎頭牌)를 받고 좌익만호(左翼萬戶)가 되었다.
1290년에는 쌍성(雙城)에 주둔해 합단적(哈丹賊:원의 반란군)의 침입에 대비했고, 같은 해 8월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임명되었다.
다음해인 1291년에는 내안(乃顔)의 무리인 합단이 기병대를 거느리고 오자, 원나라에서는 설도간(薛闍干) 및 나만알대왕(那蠻歹大王)을 보내어 구원을 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정병(精兵)이 와서 대진하게 되자, 창을 잡고 말을 달려 적진 속에 돌진하자 적진이 놀라 무너져 버렸다.
또한 용사를 잡아 목을 베어 머리를 창 끝에 매달아 적진이 모두 전의를 잃고 크게 패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충청도에서 합단의 잔당을 추격해 적군 580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충렬왕은 한희유를 소환해 강도(江都)에 머무르게 하다가, 다시 1291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로 임명하였다.
원나라에서는 회원대장군(懷遠大將軍)으로 임명해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주고 궁시(弓矢)·옥대(玉帶)·은(銀) 등을 전공으로 하사하였다.
이어 다음해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삼고 진변만호(鎭邊萬戶)를 삼았다.
1295년 8월에는 김신보(金信甫)의 참소로 조월도(祖月島)로 귀양 가게 되었고, 1299년 만호 인후(印侯)·김흔(金忻)과 밀직 원경(元卿)에 의해 불법한 일을 꾀했다며 체포당했다. 이 사건의 처리를 맡은 좌승 합산(哈散)은 왕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서 닷새 동안 국문했으나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충렬왕은 이 사건이 원나라에 알려지지 않도록하기 위해 인후 등에게 부탁했으나, 인후·김흔은 원나라에 가서 이 사건을 알렸다.
그리하여 원나라에서 파견된 탑해(塔海)·활활불화(闊闊不花) 등에 의해 원나라에 호송되었으나, 1300년 왕이 원나라에 가서 한희유와 인후의 시비곡직을 밝혀 다시 환국하게 되었다.
1302년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첨의우중찬(僉議右中贊)에 임명되면서 7월에는 원나라의 명에 의해 석주(石胄)와 그 아들을 연경으로 압송하기도 하였다.
1305년 11월 충렬왕을 따라 연경에 행차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희유(韓希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