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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9.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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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겠다.>(에제34,1-11)
1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2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예언하여라. 그 목자들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3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4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5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8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의 양 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 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 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 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 9 그러니 목자들아, 주님의 말을 들어라. 10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그 목자들을 대적하겠다. 그들에게 내 양 떼를 내놓으라. 요구하고, 더 이상 내 양 떼를 먹이지 못하게 하리니, 다시는 그 목자들이 양 떼를 자기들의 먹이로 삼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 떼를 그들의 입에서 구해 내어, 다시는 그들의 먹이가 되지 않게 하겠다. 1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내 양 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복음<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20,1-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5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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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9.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19 05:38
- 세상과는 참 다른 하느님 나라 공정(公正)
오늘 복음의 비유에 이름을 붙인다면 두 가지일 것입니다 ‘포도밭 일꾼들의 비유’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후한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는 마치 루카복음 15장의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도 하고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의 비유’라고 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 제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개념 정리를 해 봤습니다.
주인의 포도밭: 하느님 공동체 포도밭 일꾼들: 공동체 구성원 품삯과 품삯 계산: 종말의 상급(구원)
그러니까 주님의 포도밭에 시간 차이가 나게 가서 일꾼들이 일한다는 것은 하느님 공동체에 일찍 속하는 사람과 나중에 속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그런데도 품삯이 같다는 것은 일찍 가거나 늦게 가거나 같은 상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공정(公正)은 세상의 공정과 아주 다릅니다. 세상의 공정은 자기가 일한 만큼이고 능력 대로입니다.
그러니까 주인의 부(富) 증대에 얼마나 기여했냐 그것에 따라서 상급을 많이 주거나 조금 주는 것이 이 세상의 공정인데 하느님 나라에서는 주인이 일을 시키는 것의 목적이 주인의 부 증대가 목적이 아니라 일꾼의 행복이 목적이고, 또 일꾼 모두가 행복한 것이 목적이기에 공정도 다릅니다.
쉽게 얘기하면 회사의 부의 증대가 아니라 직원들의 복지 증대가 목적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의 이름은 ‘후한 주인의 비유’라고 함이 맞고 그래서 오늘 비유도 이런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친구여,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악덕기업가가 아니고 우리가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분이며, 일찍 오면 일찍 행복하고 늦게 오면 늦게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분인데, 이런 하느님의 사랑과 후하심을 모르고 인간은 경쟁하고 욕심부립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문제는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아니, 나만 살기 위해서는 지붕에 올라간 뒤 사다리를 걷어차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도 세상살이에 경쟁이 심하다 보니 하느님 나라 구원에 있어서도 차등이 있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먼저 세례받고 사는 동안 하느님 계명 지키기 위해 그렇게 힘들었는데 어떤 사람은 제멋대로 실컷 죄짓고 살다가 죽기 직전에야 세례받고 구원받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심지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먼저 세례받고 하느님 계명 지키는 것이 하느님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고, 그러는 것이 먼저 행복한 것임을 모르면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먼저 세례받은 것이 억울한 사람입니까? 먼저 세례받은 것을 행복해하는 사람입니까? 누구든 늦게라도 세례받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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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9.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8.18 20:37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0,1-16
이 비유는 처음 들으면 어딘가 ‘불공평’해 보입니다. 온종일 뙤약볕에서 일한 이와 한 시간 일한 이가 같은 품삯을 받다니요. 그러나 주인의 대답을 자세히 들어 보면, 그는 ‘불의’를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온종일 일한 이에게 ‘합의한 품삯’을 그대로 주었습니다. 문제는 ‘적게 받은 것’이 아니라, ‘남이 더 받는 것을 본 것’이었습니다.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는 이 비유에서 ‘하느님의 셈법’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삯을 지불하는 고용주’가 아니라, ‘넘치게 베푸시는 너그러운 분’이십니다. 하늘 나라는 ‘일한 만큼 받는 임금’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래서 ‘다섯 시에 온 이’ ― 곧 늦게 회개한 이, 마지막에 부름받은 이에게도 ‘온전한 한 데나리온(구원)’이 주어집니다.
온종일 일한 이들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비교’를 시작한 순간 평화를 잃었습니다. 주인은 묻습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본디 ‘네 눈이 악하냐?’는 표현입니다.) 남의 몫을 시기하는 ‘악한 눈’이 자기가 받은 정당한 은혜마저 ‘불평’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일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비유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일꾼들은 ‘일한 시간’은 저마다 다르지만, 끝내 ‘똑같은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우리의 일치도 그러합니다. 저마다 걸어온 길과 전통은 다르지만, 받은 ‘한 주님, 한 구원’은 같습니다. ‘우리가 더 오래 일했다’는 비교를 내려놓고 ‘같은 한 데나리온’을 함께 기뻐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됩니다.
평화·인내의 관점에서 보면 온종일의 인내도 ‘비교’ 앞에서는 무너집니다. 참된 평화는 ‘남이 얼마 받았나’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받았나’에 눈을 둘 때 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남과 비교하는 눈’으로 평화를 잃지 않는가? 나는 남이 더 받는 것을 ‘시기’하지 않는가? 나는 내가 받은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는가? 나는 늦게 온 이도 ‘같은 형제’로 환영하는가?
주님, 남과 비교하는 ‘악한 눈’을 거두어 주소서. 당신의 너그러움을 시기하지 않게 하시고, 제가 받은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며 하나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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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9.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8.18. 17:03
예언자의 길은 언제나 공동체와 함께 걷는 여정입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살아가는 일과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결코 홀로 감당하도록 주어진 과업이 아닙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히브리 예언자들 예언자의 길은 언제나 공동체와 함께 걷는 여정입니다. 2026년 8월 18일 화요일 2024년에 주님 품에 안긴 바바라 홈즈 박사(Dr. Barbara Holmes:1943–2024)는 CAC 공동체의 사랑받는 교수님으로서, 예언자들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말씀을 전할 때 청중 안에 일어나는 복잡한 마음의 움직임을 깊이 성찰합니다: 예언자와 함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구도 그 이름을 스스로 붙이거나 그 사명을 감당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시대에 사람들은 예언자와 함께하는 것을 불편해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듣고 싶지 않을 때에도 외치며, 피할 수 있는 어려움조차 기꺼이 감수합니다. 그들의 존재 안에는 세상의 기준이나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향한 불편한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지도자이지만, 스스로 선택하여 그 자리에 서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느님과의 특별한 만남을 통해 부름을 받습니다.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서거나, 한밤중에 들려오는 부르심을 듣거나, 환시와 꿈을 통해 소명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종종 기이하고 세상 눈에는 조금은 이상하게 보입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는 늘 눈물을 흘리며, 이사야는 단식하며 땅바닥에 엎드려 있고, 세례자 요한은 메뚜기를 먹으며, 훌다는 심판을 예언합니다. 결국 예언자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세상의 질서와 체제에 불편한 도전을 던지는 존재라는 점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직접 말씀하시며, 그 말씀은 결코 모호하거나 가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깊은 친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기도와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주님과 소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고 말씀하시며(비록 문자 그대로가 아닐지라도), 그들에게 은총의 은사들을 주시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징과 기적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또한 예언자들은 공동체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하여 행동합니다. 필요할 때에는 공동체의 도움에 의지하며, 언제나 신앙 공동체 안에서 그 사명을 살아갑니다. 예언자들은 흔히 고독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홈즈 박사는 그들의 소명이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언자의 소명에는 종종 간과되지만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민수기 11장 24–29절에서 모세는 백성들 때문에 지쳐 있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래, 좋다! 원로들을 모아라. 공동체를 바라보아라. 나는 너를 그저 홀로 감당하도록 예언자로 부른 것이 아니다. 내가 너를 불렀지만, 홀로 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기 몫이 아닌 짐을 지고서 스스로 의롭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살아가는 일과 죽음을 맞이하는 일, 자녀를 키우는 일, 공동체를 이끄는 일은 결코 홀로 감당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인 원로들 외에 진영에 있던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이 예언을 하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민수 11,28)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잠시 그 말씀 안에 머물러 봅시다. 여러분은 주님의 성령께서 자신 위에 머무르신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성경 속 많은 예언자들이 홀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속한 예언자들의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공동체는 누구입니까? … 예언자의 사명으로 부름받았다면—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그 부름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여러분을 먹이고, 지지하며, 인도하고, 도와줄 여러분의 "예언자적 공동체"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제 이웃 한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는 응급실에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차량이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사실 저와 특별히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고, 그때 저는 하루 종일 바쁘고 지쳐 있었던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병원은 차로 약 20분 거리였지만, 저는 "예"라고 응답하고 갔습니다. 이상하게도 다시 힘이 솟았고, 이웃은 해가 지기 전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주님께서 나를 편안한 자리에서 불러내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부르심은 물론이고, 제가 기꺼이 "예"라고 응답할 수 있었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Connie V. References Adapted from Barbara A. Holmes, “We Shall Also Be Prophets,” Living School Symposium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22), unpublished transcript.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Valentin Walter, untitled (detail), 2019,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흐르는 물이 바위를 끊임없이 깎아내듯, 아모스 예언자가 외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부름이 메아리칩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가 약속한, 어떤 장애물도 넘어서는 평화의 은총이 함께 울려 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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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9.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8.19. 05:09 하느님 나라는 일할 일꾼들이 필요한 곳이 아니라 사랑받을 자녀들이 필요한 곳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이야기 끝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같은 말씀이 이야기를 시작할 때와 끝에 반복되어, 전체를 하나의 틀로 감싸고 있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이 비유는 그 원리를 실제로 보여줍니다. 랍비들은 어떤 밭 임자가 두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 온종일 일한 사람과 같은 품삯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이 두 시간 동안 다른 이들이 하루 종일 한 만큼의 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만 예수님의 비유와 비슷할 뿐, 본질은 "공로"에 관한 것이지 "은총", 즉 거저 주어지는 선물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늦게 온 일꾼들이 다른 이들만큼 받을 자격은 없었지만, 밭 임자의 너그러움으로 같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밭 임자는 사람이 한두 시간의 품삯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가족을 위한 품삯"을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일꾼들을 단순한 "일손"으로 보지 않고, 온전한 인격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온종일 일한 이들은 "시기심"을 품었습니다. 어떤 영어 번역본에서는 "내가 선하다고 해서 네 눈이 악하냐?"라고 표현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눈은 악한 눈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은총을 받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밭 임자의 너그러움을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에고"가 보는 방식입니다. 에고는 '나'만을 생각하지 '나'와 연결되어 있는 '우리'를 보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이야기에 '나'를 대비시킨다면 '나'는 어느 부류의 사람들에 속할까요?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이라면 아마도 나중에 지주의 너그러움에 대해 공정하지 않다고 하며 시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중간이나 맨 나중에 와서 일한 사람들에 속한다면 아마 '나'는 지주의 너그러움에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을 느낄 뿐 아니라 아침 일찍부터 나와 일한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마지막 심판과 관련되어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전제로 새겨 보아야 합니다. 만일 '내'가 '나'의 많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그 크신 은총에 의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면 다른 그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실 어찌 보면 우리 중 누구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나'보다 부족함과 결점, 죄가 더 많은 사람도 하느님 나라로 초대를 받아 '나'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식구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아침 일찍부터 일한 사람도 밭 임자가 일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면 그날 가족을 부양할 품삯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일을 한 것 그 자체도 밭 임자의 너그러움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이룬 공로도 사실은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깊이 묵상하고 새겨야 할 것은 주님께서 다른 이에게 사랑을 베푸신다고 해서 우리에 대한 사랑이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논리요 하느님 사랑의 논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다른 이에게 흘러간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손실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늦게 회개하거나 우리가 더 자격 있다고 생각하는 이보다 큰 축복을 받을 때, 우리는 기뻐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모든 영혼이 포도밭에 들어오는 것은 감사의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너그러우심에 대한 올바른 응답은 비교가 아니라 감사이며, 원망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의 논리나 우리의 상거래식 논리로 이 이야기를 본다면 그렇게 볼 수 없겠지요?! 왜냐하면 사실 그 포도밭 임자도 자기 밭을 잘 일구고 포도나무를 잘 보살펴 많은 수확을 내기 위해서는 밭에 일할 사람이 필요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누구나 다 밭 임자, 즉 하느님 너그러움의 대상이라는 것에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는 일할 일꾼들이 필요한 곳이 아니라 사랑받을 자녀들이 필요한 곳이고, 또 우리가 모두 예외 없이 그 사랑의 대상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합리적인 계산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무한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자만 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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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9.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3797 2026.08.19 01:49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세 번째 이야기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작은 형제는 자신의 생활 방식을 돌아봅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대신 필요한 만큼만 가지고, 새것을 쉽게 구입하기보다 오래 사용하며, 버리기 전에 나누고 고쳐 쓰는 길을 선택합니다. 편리함만을 기준으로 결정하지 않고 그 선택이 다른 생명과 공동의 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묻습니다. 생태적 회심은 거대한 환경 정책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매일의 식탁과 방과 이동과 소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먹을 만큼만 준비하고, 물을 소중히 사용하며, 쓰레기를 줄이고, 지역의 생명과 땅을 돌보는 작은 행동들이 창조 세계와 맺는 형제성입니다.
프란치스코의 피조물 찬가는 아름다운 시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소유가 아니라 친교로 바라보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태양을 형제라 부르면서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태워도 되는 에너지원으로만 생각할 수 없고, 물을 자매라 부르면서 오염시키거나 낭비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의 신음과 가난한 이들의 울음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기후 위기와 환경 파괴의 고통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먼저 닿습니다. 물과 땅을 잃은 사람들, 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이들, 변화에 대처할 자원이 없는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습니다.
생태적 정의는 가난한 이를 향한 사랑이며, 가난한 이와의 연대는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공동의 집을 지키는 일은 모든 생명이 함께 살아갈 권리를 지키는 보편적 형제성입니다.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고통받는 사람의 곁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자리에서는 우리의 말이 자주 가벼워집니다. 우리는 이유를 설명하고, 의미를 붙이며, 빨리 희망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깊은 상실과 아픔 앞에서 설명은 위로가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아픔을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아픔이 사라질 때까지 함께 머무는 사람입니다. 울고 있는 이에게 눈물을 그치라고 재촉하지 않고, 슬픔의 시간을 존중하며, 아무런 답이 없어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세상 속의 복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멀리서 설명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눈물을 즉시 없애 주는 방식으로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버림받음과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 그곳을 당신의 현존으로 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은 고통받는 이에게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답을 쉽게 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여기 함께 있다.”는 몸의 언어를 건넵니다.
함께 있음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고통의 무게를 혼자 지지 않도록 나누는 것이며, 세상과 하느님에게서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임마누엘의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교회와 공동체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집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성당의 문을 열어 두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을 나서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로 가야 하고, 병원과 시장과 일터와 거리와 외로운 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교회 안으로 데려오는 일만이 아니라 교회가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스승으로만 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배우는 제자가 되고, 사람들에게 말하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는 작고 열린 집이었습니다. 지친 이가 들어와 쉴 수 있고, 죄인이 자비를 구하며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며, 형제들이 기도한 뒤 다시 세상으로 파견되는 집이었습니다.
오늘의 공동체도 포르치운쿨라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상처와 실패를 숨기지 않고 들어올 수 있으며, 가난하다는 이유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신앙에 의문을 품었다는 이유로 배제되지 않으며, 사회가 붙인 낙인보다 더 깊은 존엄을 회복할 수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안전한 집이 되려면 먼저 우리 안의 문턱을 낮추어야 합니다. 사람의 옷차림과 학력과 경제적 능력과 신앙의 정도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경계하며 거리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환대는 미소로 맞아들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고, 우리가 정해 놓은 방식에 일방적으로 맞추도록 요구하지 않으며, 그의 문화와 경험과 상처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환대는 상대방을 우리와 같게 만드는 동화가 아니라, 다름을 지닌 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낯선 사람은 공동체에 적응해야 할 대상만이 아니라 공동체를 더 넓고 깊게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간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우리의 생각과 방식을 세상에 강요하려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언어를 사용하고 우리의 질서를 받아들일 때만 환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정복이 아니라 만남입니다. 상대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에서 새롭게 일하시도록 공간을 여는 것입니다. 선교는 하느님이 없는 곳에 하느님을 가져가는 일이 아닙니다. 이미 사람들의 삶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들과 함께 그분의 현존을 발견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삶을 통하여 복음을 새롭게 배웁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에서 나눔을 배우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의 경건함에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발견하며,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의 정의와 자비의 실천 안에서도 성령의 숨결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경계보다 넓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교회 밖에서도 선과 진리와 아름다움의 씨앗을 키우십니다. 작은 형제는 그 씨앗을 짓밟지 않고, 겸손히 알아보며 기뻐합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의 방식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의 고통 속으로 깊이 들어가되 권력과 경쟁과 소유의 논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세상은 영향력을 얻기 위하여 더 강해지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더 작아지라고 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라고 하지만 복음은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라고 합니다. 세상은 승리하고 지배하라고 하지만 복음은 섬기고 발을 씻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 있는 프란치스칸은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공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규모와 숫자와 명성과 효율만으로 자신의 사명을 평가하지 않고, 관계 안에 얼마나 생명이 살아났는지, 약한 이의 존엄이 얼마나 존중받았는지, 평화와 화해가 얼마나 자라났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모았으나 한 사람의 상처를 외면했다면 그것은 복음적 성공이 아닙니다. 큰 건물을 세웠으나 가난한 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면 그것은 포르치운쿨라의 길이 아닙니다. 많은 사업을 이루었으나 형제들이 지치고 관계가 무너졌다면 우리는 목적을 위하여 사람을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열매는 수치로만 측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한 사람의 회복, 오래 단절되었던 관계의 작은 대화, 병든 이가 존엄하게 돌봄을 받은 시간, 한 젊은이가 자신의 질문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게 된 변화가 하느님 나라의 귀한 열매입니다.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과를 하느님께 맡기는 가난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지만 그 결과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주었으나 상대가 변하지 않을 수도 있고, 평화를 위하여 노력했지만 갈등이 계속될 수도 있으며, 정의를 외쳤으나 구조가 쉽게 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낙심하고 모든 것이 헛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선은 즉각적인 결과로만 판단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세상의 눈에 실패처럼 보였지만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창조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행한 작은 선은 보이지 않는 곳에 남습니다. 한 사람에게 건넨 존중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 뒤에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우리가 보여 준 용서는 또 다른 관계에서 용서할 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씨를 뿌리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어떤 씨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열매를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뿌린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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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치운쿨라 1. 다시 처음으로 ( 2026.08.0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30
포르치운 쿨라 2. 다시 복음으로 ( 2026.08.03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81
포르치운쿨라 3. 관계 속에 흐르는 선의 강물처럼 ( 2026.08.04 ) http://www.ofmkorea.org/ofmkfb/583256
포르치운쿨라 4. 다시 형제성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08.0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330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두 번째 이야기 ( 2026.08.09 ) http://www.ofmkorea.org/ofmkfb/583443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세 번째 이야기 ( 2026.08.10 ) http://www.ofmkorea.org/ofmkfb/583479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네 번째 이야기 ( 2026.08.1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545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다섯 번째 이야기 ( 2026.08.1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568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여섯 번째 이야기 마지막 ( 2026.08.15 ) http://www.ofmkorea.org/ofmkfb/583669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 08. 16 ) http://www.ofmkorea.org/ofmkfb/583688
포르치운쿨라 다시 세상 속으로 두 번째 이야기 ( 2026. 08. 1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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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베드로 묵상방
생활묵상 : 신앙과 항구성 (260817)
저의 처절한 경험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물론 이런 주제는 사람마다 다 생각하는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주관적인 면이 많이 좌우하게 됩니다. 주관적인 면이 강하지만 철저히 그동안 신앙이라는 걸 개신교 포함해서 다 포괄적으로 봤을 때 진단해 본 결과를 말씀드립니다. 저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항구하려면 절대적으로 자기의 신앙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알아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학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설프게 알아서는 안 됩니다.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여기서 공부라는 게 학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널리 공인된 자료와 연구를 통해서나 역사적으로 검정되고 축적된 신앙 지식을 통해서 그 지식을 근간으로 해서 자기에게 맞는 지식으로 변환을 해서 자기만의 신앙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건 하느님을 지식으로 알기 위해 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신앙이 좋다고 해서 하느님을 잘 아는 것과도 다릅니다. 신심은 신앙에서 그 출발점을 가집니다. 신심은 신앙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마음으로 신앙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지표를 나타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심이 좋다고 해서 믿음이 좋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경우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입니다. 믿음과 신심은 비례관계이지만 정비례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과 신심도 그 본래의 뿌리인 신앙과 믿음이 자신이 모르는 지식이라든지 이런 것에 기초를 두고 지금 현재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런 근거에 기초해서 판단을 한 후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고, 믿음도 좋다고 판단을 할 수는 있지만, 그 판단이 앞으로의 신앙과 믿음에도 계속 그와 같은 모습으로 유지될 거라는 생각은 절대 금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자신감도 신앙이 무너질 수 있는 기회와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고 신앙적으로 볼 땐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미완성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진단을 해봤을 때 그 진단이 잘 나왔다고 해도 그 진단이 계속 그렇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가 하나 있어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신앙에는 빌미라는 걸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빌미는 처음에는 신앙이 무너질 수 있을 정도의 역할을 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고 그렇게 해서 자신과 양보를 해 타협을 하지만 이게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앙을 과신해 절대 난 그렇지 않을 거야라고 자신있게 생각을 할 수가 있지만 그 어떤 사람도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 다짐을 끝까지 잘 지키려고는 하겠지만 그게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다짐을 지키기 위한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런 환경에 놓이면 자신의 굳은 의지와 상관없이 그 빌미가 자신이 그동안 지키고 간직해온 신앙의 신조와 신념까지도 흔들 수 있는 무서운 파괴력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저의 처절한 체험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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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생활묵상 : 신앙과 항구성(260818. 04:00. Mark Choi )
Knowledge can be like a map. A good map can tell us where the road is, where the mountains are, and where the destination lies. But having the map does not mean that we have actually made the journey. Perhaps faith is something similar. We may know Scripture, understand doctrine, and even know where our faith should lead us. Yet Jesus said, “You have seen me and still you do not believe.” (John 6:36) So perhaps the deeper question is not simply how much we know, but what happens between knowing, believing, and living. Maybe that is why knowledge, faith, and devotion do not always grow at the same pace.
글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신앙을 제대로 알고, 그 바탕 위에서 신앙을 지켜가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신앙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을 미리 생각하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야 한다는 말씀에는 공감합니다. 다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가톨릭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 안에 축적된 성경과 교리의 지식도 상당하지만,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신자마다 그 기본적인 지식의 정도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쩌면 말씀하신 ‘자신의 신앙을 확실히 아는 것’ 자체가 많은 신자들에게는 먼저 넘어야 할 하나의 중요한 단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문득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요한 6,36)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신앙 지식은 갖추었다고 가정했을 때, 또 하나의 질문이 남는 것 같습니다. 왜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고 해서 믿음과 신심이 반드시 그에 비례해서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말씀하신 것처럼 믿음과 신심이 비례관계이지만 정비례는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이에는 지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지점이 신앙을 ‘아는 것’과 실제 삶에서 ‘살아가는 것’ 사이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읽으며 저도 제 신앙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댓글 (260818. 07:02. 어부베드로)
찬미예수님!Mark Choi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지금 일어나 답글 확인했습니다. 좋은 피드백 감사합니다. 이해 잘 했습니다. 제가 좀 더 보충적인 설명을 추가해 좀 더 자세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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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Re: 생활묵상 : 신앙과 항구성(260818. 16:32. 어부베드로 )
마르코 형제님, 일단 먼저 제가 올린 글 다시 핵심적인 요지를 먼저 다시 한 번 더 정리해보겠습니다. 신앙이 항구하려면 먼저 신앙을 잘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제가 자기의 신앙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만 여기서는 자신의 신앙 상태가 어떤지 그런 상태를 알아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앙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지식이라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학문적인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남들이 하는 모습 그대로 형식적인 면에 치우쳐서 하게 되면 형식적인 신앙으로 흘러가는 걸 경계하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령 알았다고 해도 그때 신앙이라는 일반 지식을 자기에게 또 맞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게 일률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건 정말 필수적입니다. 어떤 학교가 있습니다. 장애를 가진 학생이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모든 규정을 보통의 학생을 기준으로 해서 규칙이라는 게 설정됐을 겁니다. 이때 이 규정은 장애를 가진 학생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외 규정을 두거나 아니면 특별 조항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하느님을 잘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것은 좀 더 하느님을 잘 알기 위해서 필요한 환경이라는 게 어쩌면 더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 몰라도 된다기보다는 알면 좀 더 하느님을 아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정도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건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다시 말해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이런 의미입니다. 이런다고 해서 하느님을 잘 안다고 하는 건 거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신심을 바탕으로 해서 그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신앙을 받아들이는가 하는 걸로 그 사람의 신앙이 견실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촌부가 어쩌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강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례를 통해서 그럼 굳이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해도 하느님을 잘 사랑할 수 있는데 알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예를 들고 싶습니다. 사람은 다 능력이 다릅니다. 손홍민 같은 선수랑 비교해서 나도 저 정도 열심히 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손홍민 같은 선수가 될 거라는 생각과 같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식을 지식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게 완전히 자기 것으로 체화가 되는 데에는 저마다 그 역량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는 또 이 글이 자신의 신앙이 무너지는 것을 예측해서 이런 염려를 하고 경계를 하자는 게 아닙니다. 신앙에는 빌미를 주면 안 된다는 걸 경계하기 위한 목적이 저의 주된 의도입니다. 빌미는 절대 타협의 대상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의 경험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의 경험을 통해서도 뻐저리게 느낍니다. 비단 신앙이라는 것만 국한된 게 아니라 세상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뜻과 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결과가 전개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그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신앙에 오점이 될 수 있을 소지가 있다면 이건 원천봉쇄를 하는 게 현명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 괜히 자신을 했다가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형국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게 저의 묵상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입니다. 이제 형제님께서 주신 답글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영어로 견해를 밝힌 부분에 대한 설명부터 제 의견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식은 하나의 지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표현 공감합니다. 지도가 있다고 해서 좋은 여정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못한다는 뉘앙스를 전해주셨습니다. 좋은 표현을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좋은 여정을 할 수 없는 건 이유가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를 구체적으로는 상황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을 하긴 어렵습니다. 가령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지도상에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려준다고 해도 그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위치도 중요하지만 그 위치를 잘 찾아가기 위해서는 그 지도를 보고 등고선이라든지 나침반을 통해서 현제 어디에 자신이 위치해 있는지를 먼저 잘 알아야 목적지를 잘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런 독도법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면 지도가 있어도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무엇이라든지 강론이나 피정을 통해서 교육을 받는다고 해도 그게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시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통해 그걸 잘 받아들여야 그게 진정으로 신앙의 삶을 사는 데 자양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 수용된 피정이나 교육은 그냥 소화가 되지 않고 배설되는 것과 똑같을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6장 36절을 인용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형제님이 피력하신 내용은 우리가 더 깊이 고민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믿음과 신앙,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련의 일들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지 않느냐는 것을 말씀하시는 취지로 저는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지식과 같은 속도로 항상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부분부정을 사용해 말씀하셨습니다. 전형적으로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해석을 하자면 항상 그렇지 않다고 했으니 그럴 경우도 있다는 말씀으로 해석을 해도 틀린 설명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님의 말씀도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다만 저는 부연을 하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을 드리자면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게 상대적으로 더 유리한 것만은 절대적으로 맞다고는 설명을 할 수 없지만 상대적으로는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사실 원래 제가 이 묵상글을 올리면서 이 내용보다는 '감정과 신앙의 이성'이라는 주제로 글을 올리려고 했습니다. 이 내용은 사실 아주 난해한 내용이 될 것 같아 묵상 주제를 좀 더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선회를 했습니다. 신앙이나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수준으로도 힘들 것입니다. 통제를 할 수 없다고 해서 신앙이나 이성이 감정에 굴복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감정에 넘어질 수는 있어도 그 감정에 계속 굴복이 된다면 문제가 있게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이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고민을 하려고 해도 밑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장사를 하려고 해도 종잣돈이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이 종자돈 역할을 하는 게 일종의 신앙에 관한 지식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이해를 한다면 좀 더 제가 말씀드린 의도를 잘 이해하실 거라 봅니다. 이제 형제님께서 한글로 답글 주신 부분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이미 제가 전달한 부분은 생략하겠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다고 하신 부분입니다. "왜 지식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고 해서 믿음과 신심이 반드시 그에 비례해서 깊어지는 것은 아닐까요?" 이 질문에 대해 먼저 형제님께서 말씀하신 이 질문이 국어적으로 호응이 조금 맞지 않는 문장이긴 하지만 보통의 경우 대개보면 표현력이 깔끔하신데 제가 이해를 완전히 하는 데 조금은 어려움이 있지만 문맥상 의도를 고민해봤습니다. 충분히 의도는 알겠습니다. 초반에도 언급을 했습니다만 절대적인 건 분명 아닙니다. 가령 배가 아플 경우를 보겠습니다. 단순히 소화장애로 배가 아파 복통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통이라는 게 소화장애로만 인해서 발생하는 건 아닙니다. 다른 여타 이유로 인해서 발생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보통의 사람은 그 이유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소화기 전문 의사 같은 사람의 경우에는 의학적인 지식이 있기 때문에 더 정확한 진단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병도 진단이 잘못되면 오진으로 인해 치료를 잘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예처럼 신앙도 마찬가지인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의사가 진단을 내릴 수 있으려면 의학적인 지식이 있어야만 할 수 있듯이 신앙도 이런 경우에는 신앙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지식은 갖고 있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언급하신 그 부분은 형제님 말씀 맞습니다. 믿음과 신심은 비례하지만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을 하시면서 그게 '아는 것'과 실제 삶에서 '살아가는 것'의 차이라고 하셨는데 동의합니다. 여기서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게 있습니다. 믿음과 신심은 깊이 들어가게 되면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합니다. 이 차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평신도이기 때문에 신학적인 표현은 생략하겠습니다. 아주 어려운 부분입니다. 신심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외적인 행위나 모습을 통해서 판단을 하는 부분이 많지만 믿음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믿음은 내적인 요소가 더 강한 면이 있습니다. 가령 하나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식사 전 기도를 아주 열심히 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이 신자는 식사 후 기도도 열심히 철저히 잘 하는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이 사람의 신앙을 신앙이라는 눈을 통해서 보고 평가를 한다기보다는 판단을 해본다면 이 사람이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이런 외적인 모습이 교회에서 권장하는 행위를 열심히 하기 때문에 신심은 좋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걸 잘 하는 사람은 같은 조건이면 믿음도 좋다고 할 여지는 있겠지만 이런 기도생활을 잘 한다고 해도 신앙에 시련이 왔을 때 신앙이 흔들리고 안 흔들리고는 근원적으로는 신심의 행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진 믿음 여하에 따라 흔들리고 안 흔들리고 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신앙이라는 틀 안에서 믿음과 신심이는 건 별개인 것도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동일한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동전의 앞뒤와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추가적인 설명이 형제님께 얼마나 저의 이야기를 보충 설명해드리는 부분에서 좀 더 이해가 되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쪼록 조금이라도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1(260818. 16:37 어부베드로)
찬미예수님! 제가 좀 더 답글에 대해 점검을 해야 하는데 지금 사정이 있어서 검토를 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검토를 하겠습니다. 어느 정도는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다 전달해드렸다고 봅니다. 아무쪼록 다시 한 번 더 저도 역시 형제님 덕분에 좀 더 고민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저도 제 생각이 완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런 걸 통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또 고민하고 고민해서 수정하고 하면 신앙에도 도움이 될 거라 감사를 드립니다.
댓글 2(260818. 17:20 Mark Choi )
찬미예수님! 000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형제님,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처음 글에서 말씀하신 취지와 제가 드린 질문에 대한 형제님의 생각을 이제는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신앙에 대한 지식 자체보다 그것을 자기 삶 안에서 어떻게 소화하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 그리고 신심의 외적인 모습과 믿음의 내적인 깊이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 역시 형제님의 설명을 읽으면서 제가 처음 드렸던 질문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저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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