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여행
정동식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다. 가족들과 집에서 연유 라테를 마시며 여행 후담을 하는 중이다. 연유의 달콤함에 즐거운 추억 한 스푼을 더하니 피로가 녹아내린다. 우리는 주말 이틀 동안 효도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일정은 예약부터 실행에 옮기기까지 우여곡절이 많다. 아흔의 장모님과 함께 한 여행이라 맛있는 거 먹고, 편하게 쉬다 오는 식도락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는 2주 전에 괜찮은 숙소를 알아보고 있었다. 큰아들이 ‘야놀자’에 올라온 호텔을 검색하더니 평점이 좋은 C 시의 N 호텔에 바로 예약을 했다. 그런데 카눈 태풍이 예보되어 한 주 내내 취소냐 강행이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아내는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고 큰아들과 나는 태풍의 경로를 봐 가면서 결정하자고 했다. 이번 태풍은 예상경로를 가늠하기 힘든 괴짜 태풍이어서 우리의 마음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수시로 흔들렸다.
태풍이 남해안에 상륙한 날, 대구에도 강풍이 불며 비까지 내렸다. 못 갈 것 같은 분위기로 기우는가 싶더니 다행히 큰 피해 없이 우리나라를 관통하며 저녁에 소멸되었다. 우리는 금요일 밤, 가족회의를 열어 일단 여행을 떠나기로 확정 지었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어느 시골 군립공원이었다. 공원 내 저수지는 태풍의 영향 때문에 물 전체가 흙탕물이었다. 떠내려온 부유물도 많아서 관광하기엔 아직 미흡해 보였다. 관리사무소에도 ‘3시 반까지 정비 중’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아침 통화 때 와는 사정이 달랐다. 우리는 저수지를 횡단하는 출렁다리를 걸으며 장모님 사진을 많이 찍어드렸다. 장모님도 여느 때 와는 달리 웃는 얼굴로 포즈를 취하며 좋아하셨다. 무빙보트는 다음 기회에 타기로 하고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다음 코스는 삼천포 수산시장이다. 보트 타려던 계획이 무산되어 이동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14번 국도를 타고 고성을 거쳐 가면 될 것 같았다. 큰아들이 길 안내와 조수 역할을 잘해주어 해가 설핏할 무렵 삼천포에 도착했다. 시장 안에는 내가 십 년째 찾는 단골집이 있다. 나는 단골이라며 들리지만 정작 여사장님은 우리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림짐작으로 아는 척할 뿐이다. 기껏해야 한 해 두 번 정도 가니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곳을 찾는 이유는 여름에는 갯장어, 겨울에는 방어회가 일품이기 때문이다. 힘이 넘치고 쫄깃쫄깃한 갯장어는 여름 보양식으로 최고이며 겨울 대방어는 고소하고 단백질이 풍부하며 뭉티기처럼 식감이 좋다. 이 맛을 보러 먼 곳까지 정례적으로 나들이를 오곤 한다.
그런데 물가가 많이 올랐다. 네 명 가족에 율곡의 어머니가 그려진 화폐 두 장 정도면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는데 작년보다 kg 당 만원을 더 달랜다. 아내가 실컷 먹자고 하여 갯장어와 잡어를 섞어 푸짐하게 시켰다. 둘째가 있으면 음식 남는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섯 사람이 오랜만에 싱싱한 활어회로 포식을 했다. 인당 삼만 원 정도에 제철 여름 보양식을 배불리 먹었으니 이보다 좋을 수 있겠는가.
N 호텔에서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조식에 기대를 잔뜩 하고 있던 큰아들은 알람까지 설정해 두고 먼저 일어나 있었다. 큰아들이 태풍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강행하자고 한 이유는 조식이 너무 좋다는 평판 때문이었다.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둘째가 일어났다. 아들 둘과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아내도 장모님을 모시고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배식시간이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도 눈에 띄었다.
차려진 반찬이 정갈하고 깔끔해 보였다. 이른 아침이라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도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많이 먹지 않을뿐더러 고기반찬은 거의 입에도 대지 않는데 군침이 돌고 그냥 손이 간다. 전체적으로 조식 평이 하도 좋아서 나는 여러 가지 반찬을 맛보기로 했다. 좋아하는 반찬은 말할 것도 없고 아침에 즐겨 먹지 않는 돼지 불고기, 훈제 고기, 유부초밥, 소시지 등을 모두 시식해 보았다. 빵과 케이크 종류도 다양했다. 소문만큼 맛이 좋았다. 아니 기대 이상이었다. 추가로 서너 접시를 가져다 먹었다. 식탐 때문이 아니라 어느 요리가 맛있는지 음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남는 게 아니라 밑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객에게 서비스 차원으로 조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침 식사를 이렇게 즐겁게 먹은 적이 있었던가. 너무 정성을 다한 상차림에 사장님께 고마운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어제 체크인할 때 로비에 있던 분이 사장님 같은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반찬을 하는 요리사에게 빈 접시를 반납하며 인사를 드렸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서울에서 KTX 타고 전날 도착하여 푹 자고 , 아침 먹고 또 편안하게 쉬었다가 오후 1시에 상경하는 가족이 있다고 한다. 여기의 체크아웃 시간은 흔치 않게 12시라고 한다. 그렇다면 충분한 시간이 될 것 같다. 얼마나 마음에 들면 아이 셋을 데리고 천 리를 달려와 그렇게 할까 싶었다.
우리도 지금 연유 라테를 마시며 N 호텔 조식과 서비스 전반에 대해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고 있다. 방 두 개에 14만 원, 그 숙박비에 수라상 같은 조식까지 무료이니 귀빈 대우를 받은 것 같았다. 여름휴가 성수기에 이 정도의 서비스 수준이면 전국에서 가성비 최고의 호텔로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번 여행은 식도락을 겸한 여행이라 여느 때 보다 즐거웠다. 특히 여름철에는 더 그런 것 같다. 땀을 뻘뻘 흘리며 여기저기를 힘들게 다니느니 먹고 싶은 거 먹고 시원한 곳에서 쉬다 온 이번 휴가는 여러 의미에서 특별한 여행이었다. 특히 구순의 치매 장모님을 모시고 다녀온 나들이여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2023.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