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황학산 수목원의 단풍 나들이
글/김덕길
가을이 깊습니다.
산의 본 모습은 산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알 수 있습니다. 단풍도 그렇습니다.
손도 발도 없는 시간이란 녀석은 겨울을 향해 막 뛰어갑니다. 자칫하면 가을을 잊은 채 겨울을 맞을 것 같습니다. 지나면 늘 바라봐 주지 못한 가을에게 미안합니다.
나는 이렇게 곱게 치장하고 널 기다리는데 왜 아니 오느냐고 단풍이 나를 막 혼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중 나온 가을을 만나러 떠납니다.
어느 회원님이 적극 추천해 준 곳은 여주 황학산 수목원과 광릉숲 그리고 화담숲입니다. 광릉숲은 십 수 년 전에, 화담숲은 수년 전 이미 그 유명세에 끌려 다녀왔습니다. 광릉숲은 숲의 전통을 그대로 살린 채 오랜 세월 이어온 명풍숲입니다. 화담숲은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단풍관광지이기도 하지요. 가능하면 가지 않은 곳을 가는 게 우리나라를 조금이라도 더 알게 되지 않을 까 싶어 이번엔 여주 황학산 수목원을 선택합니다.
한번 감탄한 곳을 다시 가면 다시 그만큼의 감탄사를 연발하면 좋으련만, 사실은 뭐든 처음 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보는 눈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기대를 낮추면 낮춘 만큼 보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기대가 높으면 기대를 맞춰야 하기에 최상이 아니면 쉬이 가슴의 미지근한 심장을 뜨겁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여주 황학산 수목원입니다.
아내는 강천섬을 가고 싶다고 합니다. 강천섬의 은행나무가 좋다고 하는데 저는 잘 모릅니다.
아침 일찍 출발합니다. 장에서 산 누룽지를 끓여 아침식사를 합니다.
용인에서 여주로 가는 고속도로는 웬일인지 한산합니다. 아마 일요일이고 코로나19영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시간 만에 수목원에 도착합니다. 마스크를 쓰고 소독을 한 후, 방명록에 전화번호를 적습니다.
이름도 생소한 황학산 수목원을 어느 회원님의 추천만 믿고 성큼 나선 길입니다. 속으로 내심 걱정합니다.
‘아내에게 큰소리를 치고 왔는데 수목원이 볼 것이 없으면 어쩌지? 이거 큰일인데......’
그러면서 수목원으로 들어섭니다. 입장료와 주차비는 무료입니다.
수목원에 첫 발을 착 내딛는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습니다.
“아!”
뒤따라오던 아내가 왜 그러냐며 깜짝 놀라 나를 바라봅니다.
“저기 좀 봐!”
말을 이을 틈이 없이 시선은 눈앞에 펼쳐진 매룡지로 향합니다. 작고 앙증맞은 호수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납니다.
조그맣게 수목원 입구에 펼쳐진 매룡지에는 가을의 수생식물이 잔잔한 물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합니다. 단풍나무는 무르익은 가을을 보내기 아쉬운지 더디 물드네요. 어떤 잎은 옅은 녹색으로, 어떤 잎은 연한 주황색으로, 어떤 잎은 반쯤 말라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다 툭 떨어집니다.
길섶에는 추위에 몸을 웅크린 나뭇잎이 바람의 부채질에 너댓바퀴 구르다 잔디에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마른 이파리가 잔디에 엎드려 바람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한편의 시입니다.
아내는 너무 좋아 양팔을 벌려 타이타닉의 그녀 흉내를 냅니다.
나는 고독한 가을 남자의 진한 침묵을 허공에 묻습니다. 메타세콰이어 붉은 잎이 호수에 들어가 파르르 떱니다.
형형색색의 단풍나무는 나뭇가지에도 한 아름, 바닥에도 한 아름 단풍 물을 뿌립니다. 나는 이미 이 아름다운 수목원의 가을 절정에 혼곤히 젖고 말았습니다.
청아한 공기가 여린 햇살에 달궈지고 채소밭에선 계란가지가 샛노랗게 웃습니다. 달걀 모양의 과일채소가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데 이 채소가 계란을 닮았다 해서 ‘계란가지’라고 합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채소입니다. 익지 않았을 때는 계란가지는 흰색인데 익으면 노란색으로 변하네요.
항아리광장의 항아리에 튕긴 햇빛이 국화꽃을 비춥니다. 15개의 테마정원은 나름대로 멋을 안고 가을 앞에 당당히 꽃을 피우고 때가 되면 꽃을 떨굽니다. 가을은 꽃보다 단풍이 먼저 눈에 듭니다.
그저 청초한 초록으로 강산이 물들었을 때는 눈길도 주지 않던 나무에게도 사랑스러운 눈으로 들여다 봅니다. 이 가지 저 이파리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나무가 없습니다. 길가에 이유 없이 흔들리는 억새조차 아름답습니다.
산의 조그만 계곡을 따라 소박하게 꾸며놓은 정원은 산길 탐방로를 따라 곱게 단풍듭니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수목원은 불야성을 이룹니다. 넉넉하게 한 시간 반 정도면 숲의 구석구석을 힐링하며 걸을 수 있습니다.
걸으면서 ‘참 좋다’ 는 말만 반복합니다. 화담숲의 인산인해를 이루는 인파도 없고 광릉숲의 수백 년 된 고목의 웅장함은 없지만, 무료로 운영되는 수목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하고 여주시를 칭찬합니다. 여주는 그러고 보면 가볼 곳이 참 많습니다.
천년의 고찰 신륵사, 핑크뮬리 천국인 남당리섬, 캠핑과 은행나무와 억새의 나라 강천섬, 세종대왕릉과 명성황후 생가 등 그래서 이번엔 아내가 추천한 강천섬으로 향합니다.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누워 흔들리는 억새의 꽃술에 빛내림을 합니다. 희부옇게 빛나는 억새의 춤사위는 그 어떤 나비의 춤보다 화려합니다. 나는 절로 노래를 흥얼거립니다.
산책로를 따라 사람들은 벌써 하루를 충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지, 좁은 길에는 마치 피난을 갔다 돌아가는 것처럼 저마다 보퉁이를 들고 있습니다. 돗자리, 텐트, 취사도구 등 리어커 대신 핸드카로 또는 유모차에 가득 피난짐을 싣고 피난을 다녀오는 듯한데 표정은 너무 행복해 보입니다.
‘이 장면은 참으로 아름다운 피난이구나!라고 생각을 하며 절로 웃습니다.
주차장에서 20여분을 들어가자 비로소 은행나무 길이 끝없이 펼쳐집니다. 반쯤 물들어 아직은 이파리가 떨어질 기미가 없습니다. 훨훨 날리는 은행잎 무리를 보려거든 한주정도 더 늦게 와야 할 것 같습니다. 강천섬을 한 바퀴 돌고 떠나는 나도 어느새 피난 대열에 합류합니다.
달빛에 반사되는 하얀 억새를 따라 걷고 또 걷습니다.
단풍에 취하고 억새에 취하고 은행잎에 취했던 하루였습니다.
여러분도 이 아름다운 가을에 흠뻑 취해보세요.
이상은 2020년 10월 25일의 여주 나들이였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