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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킴벌리 http://www.yuhan-kimberly.co.kr/ 유한킴벌리는 유한양행과 미국 킴벌리클라크의 합작 기업이다
2003년부터는 유한킴벌리의 최대 지주회사인 「킴벌리클라크」의 北아시아 총괄사장을 겸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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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유일한 박사 네이버 소년한국일보 어린이 | 2004.12.12 (일) 오후 4:36
‘버드나무’ 큰 그늘아래 자부심 갖고 일한다 네이버 한겨레 사회 | 2007.09.10 (월) 오후 3:00
[역사 인물의 흔적을 찾아서] 유일한 박사 가난한 동포 위해 회사 창립, 전 재산 기부한 참 기업인 유일한은 우리 나라 최초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 준 훌륭한 사업가입니다. 10 세 때 외국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유학 간 유일한은, 32 세의 젊은 나이에 고국으로 돌아와 제약 회사 ‘유한양행’을 설립, 질병 퇴치에 앞장 섰습니다. 그는 또 자신이 애써 키운 회사를, 가족이 아닌 종업원들에게 모두 물려준 참된 기업인이었습니다. ▲ 10 세에 미국 유학길 올라
당시 일본과 청나라는 우리 나라를 서로 먼저 집어 삼키려고 싸웠습니다. 그리고 두 나라 간의 싸움에서는 작은 나라 일본이 크게 이겼습니다. ‘서구 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섬나라 일본이 중국을 물리치다니……. 서구 문물이 이처럼 강하단 말인가!’ 유일한의 아버지는 오랜 고민 끝에 선교사의 도움으로 큰아들 유일한을 미국에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동생들은 유일한과 헤어지기 싫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낯선 나라 미국에서 유일한은 ‘리틀유’라고 불렸습니다. 유일한은 땔감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양어머니집에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처음엔 영어를 못한다고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지만, 리틀유는 스포츠를 좋아하고 공부도 잘 해서 많은 친구들이 따랐습니다. 리틀유는 어느 새 커서 헤이스팅스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이 곳에서 유일한은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하며 축구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슬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평양에 살던 가족이 생활이 어려워져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사를 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또 북간도에서 시작한 사업도 잘 풀리지 않아, 유일한이 돌아와 사업을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편지도 함께 전해졌습니다. ▲ "나라 살리는 길은 사업뿐" ‘여기서 학업을 중단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그렇다고 가족의 어려움을 모른 척 할 수도 없고…….’ 유일한은 결국 상담 선생님께 고민을 이야기했고 한 은행을 소개 받았습니다. “저는 조금 있으면 고등학교를 졸업합니다. 100 달러를 빌려 주시면 취직을 해서 일 년 안에 모두 갚겠습니다.” “학생은 헤이스팅스의 고슴도치라고 알고 있네. 100 달러를 빌려 주지.” 유일한은 졸업 후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변전소에 취직했습니다. 그리고 1916년, 유일한은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고 마침내 미시간 주립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졸업반이던 1919년 4월 14일, 우리 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한인 자유 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습니다. 유일한은 이 대회에서 ‘한국 국민이 독립 운동을 일으킨 목적과 바람을 알리는 글’을 직접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제너럴 일렉트릭이라는 큰 회사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러나 월급을 받으며 일생을 편하게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힘없는 우리 나라를 살리는 길은 사업밖에 없어. 사업가가 되어야 해.’ 유일한은 1922년 ‘라초이 주식 회사’를 차려 숙주 나물을 통조림에 담아 팔기 시작했습니다. 회사를 세운 지 4 년 만에 50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 1926년 '유항양행' 차려 1925년 31 세의 청년 사업가 유일한은 무려 21 년 만에 북간도에 살고 있는 가족을 만났습니다. “그래, 그렇게 어렵사리 공부해서 겨우 한다는 사업이 숙주나물 장사냐?” “숙주나물 사업은 돈을 많이 버는 큰 사업이에요.” “내가 보기엔 숙주나물 장사나 사업이나 그게 다 그거로 보인다.” 아버지는 유일한이 하는 사업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습니다. 짧은 기간 동안 조국을 돌아본 유일한은 너무나도 슬펐습니다.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동포들을 보면서, 이들을 위해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926년 유일한은 미국에서 사업을 정리하고 우리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제약 회사를 차려 질병 퇴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회사 이름도 자신의 이름에서 ‘유한’을 따고, 세계로 통하는 회사라는 의미로 ‘유한양행’이라고 정했습니다. 1936년에는 개인 회사였던 유한양행을 주식 회사로 바꾸고 종업원들이 주인인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했습니다. ▲ 죽은 뒤 전 재산 사회 환원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 졸업 때까지 학비 1만 달러를 마련해 준다. 딸 재라에게는 유한중ㆍ고등학교 안에 있는 땅 5000 평을 물려준다. 이 땅을 유한 동산으로 꾸며 주기 바란다. 단, 유한동산은 학생들이 마음껏 뛰놀며 쉴 수 있도록 울타리를 치지 마라. 아들 일선은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앞으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라. 나머지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모두 한국 사회 및 교육 신탁 기금에 보내, 뜻 있는 교육 사업과 사회 사업에 쓰도록 하라!’ 유일한 박사는 이 편지를 남긴 채 1971년 3월 11일 일흔 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유언 대로 학생들이 뛰노는 ‘유한동산’에 잠들었습니다. 대재벌이었던 그가 남긴 것이라고는 구두 두 켤레와 양복 세 벌 그리고 손때 묻은 가방ㆍ안경ㆍ만년필ㆍ지팡이가 전부였습니다. 유일한 박사가 죽은 뒤 20 년이 흐른 1991년 어느 날, 딸 유재라 여사는 200억 원을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낌없이 사회에 내놓았습니다.
/김남석(작가) 입력시간 : 2004-12-12 16:32 |
[흔들리는 한국호](6)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네이버 강원일보 사회 | 2007.04.19 (목) 오전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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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패러다임센터 http://www.newparadigmcenter.or.kr/
공동체 기업의 성공조건 : 이론과 사례 국립중앙도서관, 도서
공동체 기업의 성공조건 : 이론과 사례 | 김종걸 김재구 |
한양대학교 명지대학교 |
2005. 12 |
...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의 연대 및 협력의 관계는... 통한 고성과 기업 1. 회사개요 유한킴벌리는 1970년 3월 30일 유한양행과 미국의 위생용품 회사인 킴벌리클라크의 40:60 합작투자로 설립되었지만, 지난 외환위 기를 거치면서 유한양행이 10%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