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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손자취를 따른 한국 근현대 자수
기자명 문지윤 기자
숙대신보 기사 입력 : 2024.05.27.
바늘로 수놓은 자수 작품 하나, 자수 작가 한 명을 떠올릴 수 있는가. 서울 중구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선 지난 1일(수)부터 오는 8월 4일(일)까지 ‘한국 근현대 자수 :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자수는 여성의 부업’이란 사고를 바로잡는 해당 전시엔 200여 점의 작품이 함께한다. 본 전시는 ‘백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 ‘그림 갓흔 자수’ ‘우주를 수건 삼아’ ‘전통미의 현대화’란 이름의 전시실 4개로 구성됐다. 박혜성 학예사는 “자수는 시대 변화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했지만 미술사에서 주목받지 못했다”며 “한국 자수의 가치를 알리고자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여성이 써 내려간 자수의 역사를 알아보자.
실과 바늘로 이뤄낸 여성 자립
19세기까지 여성의 취미로 인식되던 자수는 조선 후기에 들어 공예품으로 인정받았다. 제1전시실을 들어서자 구름과 박쥐가 새겨진 장식품 ‘보로’가 보였다. 조선시대 자수는 왕실 수방 소속 궁녀들이 제작한 ‘궁수’와 민간 여성들이 수놓은 ‘민수’로 나뉜다. 지난 1893년 조선이 제1회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보로는 왕실에서 제작된 궁수다. 출품 당시 동봉된 조선에 대한 소개서는 세계에 조선의 위치와 전통을 알렸다. 19세기까지 자수는 양반 가문 여인의 ‘규수 취미’로 여겨져 작품 활동이라 불리지 못했다. 수를 놓는 이가 도안 밑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아 자수는 저평가됐다. 차영순 한국현대자수연구소 대표는 “밑그림을 그리는 일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며 “당시 여성에게 배움이 허락되지 않아 수와 밑그림의 주인이 달랐다”고 설명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자수는 여성 교육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당시 공포된 학교령에서 여성 교육의 목적은 여성에게 ‘적당히 아름답고 우아한’ 예술을 가르쳐 안으론 현모양처, 밖으론 국가를 위한 봉사자를 양성하는 것이다. 자수는 여성이 근대국가의 국민으로서 교육 받을 수 있는 소수의 분야 중 하나였다. 비교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여성은 일본 도쿄에 위치한 ‘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 자수과에 진학했다.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대다수는 한국으로 돌아와 전국의 여학교나 기예학원에서 교사로서 제자를 양성했다. 교육의 영역 이 된 자수는 여성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마련했다.
하나의 교과목이 된 자수는 ‘기술’을 넘어 독창적인 창작과 표현이 강조되는 ‘미술’의 영역이 됐다. 제2전시실 중앙으로 향하는 길엔 1930년대 여자미술전문학교 재학생의 풍경 사생작이 보였다. 한 뼘짜리 작은 비단에 섬세하게 수 놓아진 풍경작은 마치 수채화처럼 보일 정도로 자연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여자미술전문학교는 학생 본인이 자수의 밑그림을 직접 그리도록 했다. 자수가 고등 교육화되며 야외 사생처럼 도안 제작에 대한 훈련이 교육과정에 편성된 것이다. 1932년 조선총독부 주관의 미술 대회인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엔 자수 분야가 포함된 공예부가 신설됐다. 당시 자수는 직접 그린 실물이나 경치를 바탕으로 그림처럼 수놓아진 작품이 주를 이뤘다. 자수를 놓는 사람을 ‘쟁이’라 칭하던 과거 인식에서 벗어나 ‘자수 예술가’로 불리게 된 시기였다.
근대 자수의 위상은 점차 높아졌지만 일본 화풍 전파로 한국 전통 자수가 단절됐다. 1900년대 국내 여학교에선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생이 주요 지도자가 돼 일본 전통 자수의 영향을 받은 수업이 이뤄졌다. 제2전시실 한쪽 벽에서 마주한 ‘등꽃 아래 공작’은 1939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3년에 걸쳐 공동 제작한 대형 자수 병풍이다. 해당 병풍엔 흰 꽃이 등나무 아래 한 쌍의 공작이 노닐고 있는 장면이 수놓아져 있다. 이는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 자수의 대표적 소재로 활용된 공작도다. 제2전시실을 조금 더 들어가자 박을복 작가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작품인 ‘국화와 원앙’이 눈에 띄었다. 불로장생을 의미하는 국화와 부부의 원만과 장생을 기원하는 한 쌍의 원앙이 수놓아진 해당 작품에선 고즈넉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를 향하는 대각선 구도는 당시 일본 미술계에서 유행하던 구도다.
흔들리는 자수의 위상
광복 직후 1945년, 이화여대의 자수과 개설은 전통자수 회복의 물꼬를 텄다. 이화여대 자수과의 초기 교수진은 여자미술대학 출신으로 구성됐지만 외국 화풍에 국한되지 않도록 교육과정에 전통자수를 포함했다. 1950년대 이후 이화여대 출신 작가들의 작품에선 일본 전통 자수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화여대 자수과를 졸업한 박을복 작가 의 ‘정’이 그중 하나다. 이화여대 자수과 76학번이자 2022년까지 27년간 이화여대 자수과(현 섬유예술과) 교수로 재직한 차 대표는 “재학 당시엔 일본 유학 출신보다 국내에서 작품활동을 하셨던 교수님이 대부분이었다”며 “전통 자수 수업은 학부 시절부터 교수로서 재직 시절까지 계속 존재했다”고 당시 자수 교육 방식을 설명했다.
광복 후 자수계는 미술로서 확고히 인정받고자 추상적 표현을 시도했다. 당시엔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대상을 재구성 하는 추상 미술인 ‘큐비즘(Cubism)’ 양식이 대세를 이뤘다. 제3전시실을 따라 들어가면 최유현 작가가 1968년 제작한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이 위치해있다. 해당 작품에선 당대 유행한 추상적 화풍을 따라 바늘을 움직였던 노력이 드러났다. 새의 형태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다채롭고 촘촘한 색실에서 새의 깃털이 연상됐다. 직선과 곡선의 조화에 선 마치 새가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졌다. 박혜성 학예사는 “태양은 예술가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로, 이를 향해 달려드는 새들은 여성 자수 작가들로 여겨져 해당 작품을 전시의 부제로 선정했다”고 얘기했다.
자수 작가들의 시대 흐름에 발맞춘 도전에도 불구하고 학계 내에서 자수는 주류 예술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추상 미술이 주류인 당대에서 섬세한 표현이 부각되는 자수는 역사를 잇기 어려웠다. 일제강점기부터 대상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수놓는 자수가 재료와 시간을 낭비하는 예술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1970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선 자수를 포함한 공예부를 제외시키려는 논의가 오가자 공예부 작가 일동이 건의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1981년엔 이화여대 자수과의 명칭이 섬유예술과로 변경됐다. 이는 전통자수가 학계에서 견고하고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음을 드러낸다.
저물지 않는 자수 역사
1960년대 이후 학계 내 상황과 달리 학계 밖에선 자수가 산업화 시대에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전통 공예로 평가됐다. 산업화 시대에 여성의 사회진출은 제한됐다. 여성은 보수적 사회 분위기에 어긋나지 않는 부업인 자수로 경제활동을 이어갔다. 한국의 미가 담긴 자수품은 국내외에서 혼수, 예단, 장식 등에 사용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제4전시실 중앙 벽면은 성인 키보다 큰 한상수 작가의 ‘궁중자수 모란도 병풍’이 채우고 있었다. 명주실을 굵게 꼬아 무늬의 결을 강조한 해당 작품은 만지지 않아도 눈으로 입체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 폭마다 배치된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에선 호화로움이 전달됐다. 1980년대까지 이어진 학계 밖 전통 자수의 호황은 여성의 손에서 시작됐다.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며 전통을 이어가던 자수는 재료 비용이 증가하고 임금이 줄어들자 설 자리를 잃어갔다. 차 대표는 “20세기 이후 실 수급이 원활하지 않고 자수 작품에 들인 노력에 비해 제대로 된 대가를 받지 못했다”며 전통 자수 쇠퇴의 원인을 설명했다. 이는 실 산업 급감으로 이어졌고 남은 작가들은 비싼 수입 실을 사야 했다. 실 가격이 높아지자 전통 자수는 쇠퇴하게 됐다. 박 학예사는 “서구와 달리 한국에선 자수가 산업품으로만 주목을 받은 것도 명성 하락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1960~70년대 서구에선 페미니즘적 사상을 담은 자수 작품이 나타났다. 단순 공예를 넘어 사상운동의 매체가 된 서구의 자수는 시대의 변화에도 쉽게 하락세를 보이지 않았다.
현재 여성 자수 예술가와 전문가들은 전통자수의 역사를 계승한다. 한상수 작가는 자수의 작품성을 증명한 공을 인정받아 1983년 자수 분야 최초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한 작가는 60여 가지의 유실된 전통 자수 기법을 바로잡아 체계화하고 전통 자수 작품을 복원하는 등 꾸준히 전통 자수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 한 작가를 포함하여 박을복, 정영양 작가는 본인의 이름을 내세운 박물관을 개관해 대중에게 자수 작품을 알리고 있다. 차 대표는 “자수의 가치와 위대함을 알리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전시를 열어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다”고 얘기했다. 박 학예사도 “자수 예술을 부흥시키기 위해선 알려지지 않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한국 근현대 자수의 기록을 다시 쓰는 ‘한국 근현대 자수 :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에서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그려진 자수의 역사를 마주했다. 잊혀져 가는 줄도 모른 채 흘려보냈던 자수라는 예술을 들여다보자. 그 세심하고 다채로운 실들의 그림 속엔 혁명 같은 여성의 발자취가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국립현대미술관. (2024). ‘한국 근현대 자수 :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도록.
박혜성. (2020). 1950~1980년대 한국 자수계 동향 연구 : ‘전통’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예술체육, 21권4호, 1598-8635.
이화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학센터. (2011). 여성의 눈으로 보는 근대기의 여성 자수 : 2011 specialist workshop- 아시아 여성과 공예 II.
붓 대신 바늘을 휘두른 여성들···‘규방공예’ 편견 깨고 ‘예술’이 된 자수
이영경 기자
경향신문 기사 등록 : 2024. 6. 5. 18:26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
‘규방 공예’로 폄하되던 19~20세기 자수
예술 장르로 재조명
인물부터 추상까지 주제 다양
나혜석 조카 나사균 작품부터
‘전위 작가’ 송정인 작품까지
자수 그대로도 충분했고, 자수 이상으로도 충분했다.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은 그동안 ‘규방 공예’로 여겨지며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에 있었던 자수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 호명하고, 재조명하는 전시다. 자수라는 장르에 덧씌워진 편견과 무관심을 걷어내는 동시에,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자수 작가들의 이름을 호명하는 전시이기도 하다. 나혜석의 조카 나사균, ‘전위자수’ 작가로 불린 송정인 등이 이번 전시를 통해 발굴·재조명된다. 전시명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처럼 자수 작가들은 자수라는 장르의 경계를 확장하고 넘어서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로 성큼 나아갔다. 붓 대신 바늘을 휘두른 여성들의 자수는 섬세하고 아름다워 그 자체로도 경탄을 불러일으키지만, 현대 미술의 흐름에 발맞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한 작가들은 ‘자수’라는 장르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문화유산이나 전통 자수에 초점을 맞춘 전시들은 있었지만 근현대 자수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작가와 양식, 매체를 재조명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처음으로 한국 근현대 자수의 흐름을 조망하는 전시를 개최해 전통공예, 규방공예로만 인식되던 한국 자수의 미학과 역사성을 확장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나혜석 조카 나사균 작품부터 여학생들 ‘집단창작’ 대작까지
1전시실에선 19세기말 제작된 전통 자수를 볼 수 있다. 활옷, 침구, 노리개 등 일상용품부터 혼례 등 잔치에 감상을 목적으로 제작된 대형 자수 병풍까지, 궁중에서 궁녀들이 수놓은 궁수와 민간에서 제작한 자유분방한 민수까지 다채로운 수의 향연을 볼 수 있다. 장수를 기원하는 십장생, 꽃과 새를 그려넣은 화조영모도 등이 10폭의 너른 병풍에 한땀한땀 수놓아졌다. 198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됐던 궁에서 제작한 보료는 박쥐, 구름, 꽃을 섬세하면서도 과하지 않게 수놓아 고급스러운 궁수의 면모를 보여준다. 자수 제작은 주로 여성들이 했지만, 안주수라는 남성 자수장인 집단이 만든 작품들도 다수 선보인다. 평안도 안주 지역의 남성 자수장인들이 집단 제작한 병풍은 왕실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서민들의 집 한 채 가격에 맞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2전시실에선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 자수과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인다. 가정에서 여성들 사이에 전수되던 자수는 20세기 초 ‘수예’로서 공교육의 영역으로 들어가 여성교육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인 나혜석, 박래현, 천경자 등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전시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 속에 자수를 재배치한다. 나혜석의 조카였던 나사균의 작품이 눈에 띈다. 나사균(1913~2003)의 ‘죽계’는 닭의 볏의 입체감과 깃털의 부드러운 흩날림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대나무의 광택과 입체감을 생생하게 수놓았다. 나사균은 결혼 후 작품활동을 중단해 남긴 작품 수는 많지 않다.
천재적인 개인의 작품만이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1930~40년대 여학교 학생들이 집단 제작한 자수들은 이런 근대적 예술관념을 깨버린다. 숙명여자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3년에 걸쳐 공동 제작한 ‘등꽃 아래 공작’(1938)은 가로 3m41㎝가 넘는 대작으로 공작의 화려한 깃털을 화폭 전체에 넓게 펼쳐놓았다. 공작의 화려한 깃털의 위세와 흰 등나무꽃의 잔잔한 아름다움이 어우러져 화려함과 섬세함을 극대화해 보여준다. 경북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동제작한 ‘해금강’(1931)은 해금강의 절경을 부드러운 톤의 색상으로 수놓았다. 수평으로 길게 뻗은 풍경의 배경까지 모두 자수로 수놓아 실의 결과 질감이 잘 느껴진다.
이렇게 다양한 자수···엥포르멜, 기하학적 추상까지
3전시실은 벽난로를 쬐며 책을 읽는 여성의 모습을 수놓은 김혜경(1928~2006)의 ‘정야’(1949)로 시작한다.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 출신으로 동대학에서 교수를 지내며 후학을 양성하기도 한 김혜경은 인물화로 유명한 이인승의 그림을 밑그림으로 ‘정야’를 완성했다. 벽난로에서 주위로 퍼져 나가는 난로의 온기까지 느껴지는 작품이다.
해방 이후 자수는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를 중심으로 풍요로운 시절을 맞이했다. 자수과 출신 작가들을 중심으로 추상미술이 대세를 이루던 당대의 흐름을 반영한 다채로운 자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송정인(1937~)은 추상회화인 엥포르멜, 기하학적 추상 작품을 자수로 남겼다. 전통적인 재료인 비단 대신 철망, 마대 등을 바탕으로 삼거나 밀짚, 그물, 노끈, 쇠 등 낯선 재료와 파격적 기법을 사용했다. 박을복과 이신자는 1950~60년대 중반 큐비즘(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선보였다.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순수미술의 새로운 비전을 공유함으로써 순수미술과 동등한 자격을 인정받고자 하는 자수 작가들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송정인은 당시 누구보다 주목할 만한 활동을 했지만 1992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미술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자수가 “재료와 시간을 낭비”하는, 현대화를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며 퇴조의 길을 걸은 것과 무관치 않다.
육아·가사로 지속적 활동 어렵기도···경계를 넘나드는 바늘과 실처럼 예술을 하다
근현대 자수는 다채롭고 풍요로웠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결혼 후 가사·육아를 전담하는 등을 이유로 지속적인 활동을 하지 못했다. 3전시실 마지막에 걸린 이장봉(1917~2016)의 ‘길’과 ‘파도’(1995)는 그래서 오랫동안 눈길을 붙잡는다. 여자미술전문학교 출신인 이장봉은 결혼 후 육아·가사를 전담하다 뒤늦게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파도’에서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여인은 가파른 암석 위에서 거친 바다를 바라본다. 19세기 낭만주의 화가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속의 방랑자’를 차용한 작품이다. 인생의 말년에 딸·아내·엄마로서, 자수 작가로서의 자신의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듯한 여성의 덤덤하고도 고독한 뒷모습을 바라보면 먹먹한 감동이 느껴진다.
여성들에게 자수는 경계를 잇고 이면을 자유롭게 오가는 실과 바늘과도 같았다.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20세기 한국자수의 아름다운 실의 향연 뒷면에는 서양/동양, 남성/여성, 근대/전통, 순수예술/공예 등 무수한 길항 관계가 존재한다”며 “바늘과 실은 바탕천의 표면을 뚫고 이면을 접촉하곤 다시 표면으로 돌아온다. 이분법적 경계에 의문을 던지듯 경계를 넘나 든다”고 말했다. 8월4일까지
실-바늘로 수놓은 자수의 매혹… “반복노동 고통만큼 큰 만족감”
동아일보 기사 업데이트 2024-07-01
김민 기자
뉴욕-런던 등서 텍스타일 전시 열려
국립현대미술관도 ‘근현대자수’展
잊힌 역사 재조명 과정서 주목받아
“주제의식-테크닉 지니면 예술품 돼”
패션 텍스타일과 자수를 전공한 최환성 작가의 ‘불가분의 유동’(2023년). 의류 브랜드와 협업해 자수 장식 의상을 제작하기도 하고, 자아 탐구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물감과 붓으로 그린 회화부터 통조림 수프, 바나나와 덕트 테이프는 물론 인공지능(AI)이 만든 이미지까지. ‘이것도 미술관에 넣을 수 있을까?’ 싶은 것들이 현대 미술관의 문턱을 넘나드는 가운데 최근에는 실과 바늘로 만든 자수와 태피스트리를 조명하는 움직임이 국내외로 일고 있다.
미국 워싱턴 내셔널갤러리는 20세기 초반부터 현대까지 돌아보는 ‘짜인(Woven) 역사: 직물과 모던 추상’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안데스 문명과 현대 미국 작가를 조명하는 ‘고대와 모더니즘 예술의 직조 추상’전을 열고 있다. 영국 런던 공공미술관인 바비컨센터도 ‘풀기: 예술에서 텍스타일의 파워와 정치’전을 선보인다. 현대미술관은 왜 실과 바늘에 주목할까?
● 잊힌 역사의 재조명
섬유를 소재로 한 예술은 여성 예술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졌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순수 예술 대접을 받지 못했던 텍스타일을 20세기 초 여성 예술가들이 적극 활용했고, 1960, 70년대에는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이 저항의 표현으로 생각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는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도 여성 예술가 재조명 과정에서 탄생했다. 박혜성 학예연구사는 “2017년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를 준비하며 일제강점기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조시비)에 자수를 배우러 간 한국 여성이 많았음을 알게 됐고 여기서 연구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서는 학생, 장인이 만든 자수는 물론 추상 등 새로운 표현을 시도한 흔적을 만날 수 있다. 1992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미술계에서 자취를 감춘 송정인 작가가 그중 하나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권복혜를 사사한 그는 철망, 마대, 그물 등 낯선 재료와 파격적 기법을 사용해 눈길을 끈다. 1967년 ‘새 시대’에 기고한 글에서는 “미술과 자수는 사용하는 재료가 다를 뿐 뚜렷한 주제 의식과 시공에 대한 감각, 테크닉을 지닌다면 예술품이 될 수 있다”고 썼다.
서울 강남구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서 개인전 ‘착륙’을 여는 셰일라 힉스도 1960년대부터 활동했지만 최근에야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착륙’전은 커다란 섬유 덩어리를 쌓거나 다채로운 색감의 덩굴이 흘러내리는 모습 등 루이비통 재단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힉스의 ‘착륙’(2014년)과 ‘벽 속의 또 다른 틈’(2016년) 등을 전시한다.
● ‘반복 노동’의 매혹
실과 천이 주는 따뜻한 느낌, 만져보고 싶은 질감, 독특한 작업 방식 등은 현대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한국 근현대 자수’전에 삼베에 금실로 자수를 놓은 작품 ‘무제’ 등을 전시한 이강승 작가는 “처음에 소외된 장르이자 반복적 노동을 한다는 자수의 개념적 의미를 가져오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다 ‘반복 노동’의 매혹에 빠졌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자수를 놓는) 노동의 고통만큼 작업이 완성됐을 때 만족감도 크다”며 “취미로 십자수를 해본 분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반복적 바느질을 하는 동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이 중요했다”며 “(반복 노동 속에서 깊은 생각이 나온다는 점에서) 개념 미술과 공예는 상반된 개념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 자수에서 사용되는 모양을 회화로 그린 써니 킴의 ‘Underworld’(1999년), 자수를 재료로 ‘자아 탐구’를 그린 최환성의 ‘불가분의 유동’(2023년) 등도 선보인다. ‘한국 근현대 자수’전은 8월 4일까지. ‘착륙’전은 9월 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개최…한국 자수의 역사
문화뉴스 기사 입력 : 2024.04.30.
장진경 기자
국가무형문화재 등 전통자수와 근현대자수, 동시대 미술 전시
2024년 5월 1일(수)부터 8월 4일(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문화뉴스 장진경 기자] 국립현대미술관(MMCA)은 5월 1일(수)부터 8월 4일(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전시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19세기 말 이후 동시대에 이르기까지 급변하는 시대 상황과 미술계의 흐름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해 온 한국 자수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한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필드 자연사박물관, 일본 민예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을 포함한 국내외 60여 기관과 개인 소장품에서 근현대 자수, 회화, 자수본 총 170여 점과 아카이브 50여 점이 전시된다.
특히, 일제 강점기 도쿄에 위치한 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에서 유학해 자수를 전공한 한국 여성들의 활동상과 자수 작품도 소개된다.
전시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며, 각 부는 한국 자수의 역사적 흐름과 변화를 조명한다.
1부에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제작된 전통자수를, 2부에서는 미술공예로서의 한국 자수 변화를, 3부에서는 해방 이후 아카데미 안에서 진행된 현대공예로서의 자수의 면모를, 마지막 4부에서는 한국전쟁 후 자수의 산업공예화 및 전통공예 계승과 현대화을 다룬다.
더불어 전시 기간 중에는 전문가 강연과 현대미술 작가와 함께하는 워크숍 등 다양한 연계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한편,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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