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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자신은 강아지가 되어도 좋다며 예수님 발치 앞에 엎드린 이방인 여인의 모습을 묵상하며, 이제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어린 시절 죽을병에 들린 어떻게든 한번 살려보겠노라며, 당신 등에 업고 이 병원 저 병원 뛰어다니면서 의사 선생님들께 사정사정하셨던 어머니였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라시며 병원 성당에서 밤을 지새우며 울부짖으셨습니다.
어머니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언제나 송구스러운 마음과 함께 ‘어머니를 봐서라도 더 잘 살아야 하는데...’하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혹시라도 너무나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때로 너무 간절해서 누군가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간청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결코 만만치 않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부족한 우리 인간 존재인지라 별의별 상황 앞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너무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주님 앞에 부르짖기도 합니다.
‘주님,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제가 뭐 그리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차라리 저한테 그러시지 왜 저 어린것에게, 저 딱한 사람에게 저런 끔찍한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교도 어머니가 그랬습니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만 더러운 영에 들렸습니다. 어머니는 차라리 딸 대신 자신이 악령에 들렸으면 했습니다. 지금이라도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딸은 살고 자신이 대신 죽었으면 했습니다.
위대한 모성을 지닌 이방인 어머니가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딸만 살릴 수만 있다면, 자신은 죽어도 좋다, 한 점 먼지가 되어도 좋다, 한 마리 개가 되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 살짝 뜸을 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상관없었습니다. 딸만 낫게 된다면 그 어떤 수모도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아래 있는 강아지들도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그런 놀라운 모성 앞에 예수님께서도 두손 두발 다 드신 것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혹시라도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이 너무 커서 할 말을 잃고 계신가요? 혹시라도 지금 너무나 큰 시련 앞에 일어설 힘조차 없으십니까?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 끝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아직도 마지막 카드가 한 장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딸을 대신해서 기꺼이 한 마리 강아지라도 되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 딸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겠다는 그 각오로, 주님께 간절히 한번 매달려 봐야 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 그리고 사도들의 활발한 복음선포 기간을 끝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적과 치유의 시기는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기적의 시대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직 아닙니다.
우리가 보다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머리를 조아린다면, 우리가 보다 간절하게 부르짖는다면, 온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을 다 바쳐, 성심성의껏 기도드린다면, 자비하신 주님께서 결코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움직이실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변화는 희망을 품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좋은 청을 곧바로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에 대해 묵상하려 합니다. 마르코 복음 7장 24-30절에서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악령에 사로잡힌 딸을 위해 예수님께 간청하지만, 처음에는 거절당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고, 예수님께서는 결국 그 딸을 치유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은 단순히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자라도록 하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희망을 지속하게 하시는 이유는 결국 ‘하고 싶다’가 ‘할 수 있다’로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믿음이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성장하면,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세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은 믿음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우리는 그것 없이는 결코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희망이 지속될 때, 그것이 점점 더 깊은 믿음으로 자라나며, 결국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경험합니다.
사울 왕의 이야기는 믿음과 희망이 부족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울은 하느님의 명령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여 왕위를 잃게 됩니다. 반면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거절당하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간청했고, 결국 믿음이 드러나면서 딸이 치유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희망이 결국 믿음을 키우고, 믿음이 행동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은 처음에는 단순히 감옥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하지만 희망을 놓지 않고 준비하며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화합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감옥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며 작은 도서관을 확장시킵니다. 도서관을 키우기 위해 교도소장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내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교도소장은 이를 허락하게 되고, 죄수들에게 지식을 나눌 기회가 생깁니다.
앤디는 또한 한 죄수의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도와줌으로써, 희망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이후 그는 감옥의 방송 시스템을 해킹하여 전 교도소에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틀어주며, 감옥 안의 모든 죄수들에게 자유와 희망의 순간을 선물합니다.
앤디는 말합니다. “희망은 좋은 것이고, 아마도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좋은 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이는 희망이 단순히 개인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변까지 밝히는 힘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마더 데레사 또한 처음에는 한 명의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다는 작은 희망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녀는 거리에서 굶주린 이들을 보며 돕고 싶었고, 이 작은 희망이 그녀의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를 가난한 이들로 가득 채우고 싶다.”라는 희망으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 사람에게 밖에 사랑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작은 일을 위대한 사랑으로 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하며 가난한 이들을 위한 수도회를 세우게 되었고, 그녀의 봉사는 전 세계로 확산하였습니다. 그녀의 희망이 믿음으로 변화되었고, 그 믿음은 결국 사랑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사명에 동참하며 함께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는 작은 희망이 어떻게 믿음이 되고, 믿음이 결국 세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녀는 어릴 적 시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던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작은 희망을 품었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의 끊임없는 노력과 그녀의 불굴의 의지는 결국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변화하였고, 헬렌 켈러는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위대한 교육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희망을 품는 순간 우리는 이미 변화를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개인적인 극복을 넘어서 장애인을 위한 교육과 인권운동을 펼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희망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행동으로 이어져 사랑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는 성 바오로 사도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 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1코린토 13,13)
베드로 사도는 희망했습니다. 물 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잘 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믿음을 성장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을 본 다른 사도들을 변화시키는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끝까지 희망하기를 바라시며, 그 이유는 믿음을 성장시켜 결국 세상을 더 밝히는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믿음이 되고, 믿음이 사랑으로 성장하여 세상을 밝히는 존재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7,24-30: 강아지도 빵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티로 지방으로 가신다. 예수님은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시리아 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 그 간청을 들으신다.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개라고 불렀고,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말로 개라는 표현을 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려고 하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인의 대답은 어떠했는가? 그런 말씀에 하나도 섭섭함이 없이 오히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태도인가? 마치 유다인이 다른 민족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고 딸을 치유해 주신다.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다. 우리 자신이 이제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업신여긴다든지,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귀중한 사람들이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초등학교 3학년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100km라 생각했을 때, 시속 20km로 날아가는 비둘기는 서울에서 천안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답은 어떻게 될까요? 그러자 철수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6시간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에 선생님께서는 한숨을 내쉬며 “틀렸지. 100을 20으로 나누니 5시간이 정답이지. 이렇게 쉬운 것도 틀리면 어떻게 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철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비둘기도 서울에서 천안까지 날아가려면 중간에 한 시간 정도는 쉬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선생님 5시간이 정답일까요? 아니면 아이의 6시간이 정답일까요? 아이의 상상력이 더한 대답이 더 정답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대답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세상의 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로 듣는 것만 진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의 눈과 귀를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만 하느님의 지혜 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을 예수님 소문을 듣고 찾아옵니다. 어떤 사람도 외면하지 않으셨고, 또 사랑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부인을 외면합니다. 단순히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말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이 부인은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교도로 무시하고, 개로 비유하며 멸시하던 민족 출신의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했던 대로 예수님도 그대로 하신 것입니다. 아마 이 부인 역시 이런 무시와 냉대를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지요.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의 숨은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부인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간절히 주님께 매달릴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다면 주님께 굳이 매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체면만을 생각했다면 모욕적인 수치심에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사랑이 믿음을 만들어 하느님 안에 머물게 해 줍니다.
오늘의 명언: 도전은 인생을 흥미롭게 만들며, 도전의 극복이 인생을 의미있게 한다(조슈아 J.마린).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창세 2,25)
우리의 마음이
성령으로 가득 차 있으면
타인의 단점이
단점으로 보이지 않는다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죄로 가득 차있으면
우리는
부끄러운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싶어서
타인의 약점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지적하게 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부족한 제가 사제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이
참 많은 것을 저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예수님을 더 잘 알게 되고
그분을 아는 만큼 더 사랑하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만큼 더! 더! 더!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되고 한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물불 안 가리는 페니키아 여인처럼
이웃을 사랑하는데 전심으로 투신할 수 있게 해 줍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주 하느님께서 여자를 사람에게 데려오셔서 둘이 한 몸이 되게 하셨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2,18-25
18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
19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흙으로 들의 온갖 짐승과 하늘의 온갖 새를 빚으신 다음,
사람에게 데려가시어 그가 그것들을 무엇이라 부르는지 보셨다.
사람이 생물 하나하나를 부르는 그대로 그 이름이 되었다.
20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21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22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23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25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24-30
그때에 24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25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26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29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30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