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1962 유학자, 독립운동가, 정치인.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
어려서 유학을 배웠고 문장에 능했다. 1909년 성명학교를 창립, 육영사업에 종사하고 을사오적 매국성토 상소사건으로 옥고를 겪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한 유림단진정서를 가지고 상해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했고, 임시정부 의정원의원이 되었다.
1920년 귀국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유림단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 1921년 신채로 등과 함께 독립운동지 천고의 발행에 이어 박은식 등과 사민일보를 발간,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한편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선전 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손문과 교섭, 독립운동 기금을 원조받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다가 1927년 상해주재 일본영사관원에게 피체, 본국으로 압송되어 14년형을 선고받고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중 해방을 맞았다.
미군정이 실시되자 민주의원 의원을 역임했고, 재단법인 성균관과 성균관대학을 창립하여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육이오 사변후 대통령 이승만 하야 경고문사건으로 40일간 부산형무소에 수감됐었다. 1952년 부산에서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이시영, 김성수 , 조병옥 등과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발표하여 테러를 당했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김창숙은 1919년 망명을 결심하고 전국 유림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건너가 프랑스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프랑스어로 번역해 우송하였다. 그 해 김창숙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으려고 국내에 잠입했다. 독립자금을 모아, 나석주에게 무기를준다. 나석주는 그 폭탄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 시킨다.
결국 김창숙은 국내에 왔었다는 사실이 들통나 상하이 병원에서 잡혀 감옥으로 가게 된다. 김창숙은 대구감옥에 갇혀 심한 고문을 당하는데, 이 때 당한 심한 고문이 김창숙을 평생 앉은뱅이로 살게 했다.
김창숙은 나는 대한 사람인데 어찌 일본법을 따르냐며 변호도 거부하며 옥중투쟁을 하였다. 그의 옥중투쟁은 신문을 통해서 국민들에게 알려지면서, 국민들에게 몸소 실천하는 애국이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김창숙은 독립이 된 후에도, 이승만 정권이 독재를 하려는것에 반대를 하며, 각계 인사들이 모였을때 국제구락부사건이 일어났다.
김창숙은 선비정신을 살려, 우리 나라를 지키려고 애썼고, 또 지켜내었다.
김구 선생과 같이 앉은뱅이가 되어서 까지 우리 나라 독립을 지키고 힘쓴 김창숙 선생님을 아는 사람이 많이 없는것 같아, 아쉽다.
심산의 詩 5편
(서울강변 모래 위에 앉아서 울었도다) 서울강물 늘상 이렇게 흐르누나
무궁화꽃이 학을 짝벗으로 했는데
억년을 허락한 길한 궁궐인데
원숭이가 어찌 오래도록 머무랴.
려구연 <失國詩>에 또 <坐舊慶運宮大安門前而泣>이 있습니다.
임진왜란에 궁궐이 잿더미로 되었도다.
승지가 넓고 빈집을 찾아 나섰다.
문이름 大安, 선조임금 명이라.
이집은 오늘부터 행궁으로 불러라.
광해군이 명하기를 慶運宮으로 했도다.
고종임금이 다시 그 빈집에 돌아왔네
이등박문 싫어함이 문이름에 安이어라.
오랑캐가 하고자함은 큰부랑쟁이로 통하도록
괴물 우두머리를 大漢이라고 일컫는다..
漢의 뜻에 부랑쟁이 부르기가 있도다.
문이름을 박문이 바꾸었으니 눈물이 줄줄
외쳐서 물리치기에 능하지 못하니 화가 나도다.
박문이 고종을 죽이려고 선위를 운운
덕수궁 이름이 여기에서 나왔도다
大漢문 이름 불길이 깊으니
어느때 安자를 관리가 걸어서 바꾸랴. (굶주린 개 남선) 옛날 독립을 선언하던 날
의롭다는 소리 벽력같이 진동하여 세계만방을 이웃으로 했도다.
굶주린 개가 되어 도리어 원식을 위하여 짖어대고 있으니
량씨 집에서 칼날 들 사람이 어찌 없으랴 3. 놈들의 매에 못이겨 병든지 여덟 해 그러나 내 할 일 하니 무엇이 아프리오
머리 굽혀 절하고 아첨하는 자 분한 눈물이 애를 끓게 하는구나 4.(촉석루차판상운) 지난 세월 얘기하자니 울분에 눈물이 흘러 근심스레 머리 돌려 옛 강변을 바라본다. 수를 놓은 듯한 저 강산은 누구의 것이더냐? 비바람에 황량한 것은 이곳 장사루로다. 대독으로 호령하던 일 옛 꿈속에 아련하고, 왜놈들 멋대로 날뛰니 새로 근심이 생기는 구나. 의기암 물가엔 파도가 더욱 성을 내니, 우리들은 무슨 심사로 한가롭게 노닐기나 할건가. 5.(의기암 이절) 빼어나다! 우리나라 역사에 창가의 여인으로 의암을 남겼구나. 한심하다! 고기로 배부른 자들 나라를 저버리고 아직도 무얼 탐하는가! 사당은 의암 위 벼랑에 우뚝하고 강물은 의암 아래 못으로 잠기네. 요즘 탐욕스런 무리들 이 의리를 아는 이 적으리라. |
1962년 5월 5일,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선생의 병상을 찾은 박정희
1962년 5월 11일, 김창숙 선생(5월 10일 타계)의 빈소를 찾은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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