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621. 묵상글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 재물이 보물이 되도록. 등 )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6.21 05:00
- 재물이 보물이 되도록
“너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제 생각에 오늘 주님께서는 재물을 보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한갓 재물일 뿐인데 어리석은 인간은 그것을 보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지혜로운 프란치스코는 돈을 똥쯤으로 여겼지요.
그것은 돈이 이 세상에서만 쓸모가 있지 천국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거나
보물로 여기며 집착하는 사람에게는 마귀처럼 원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프란치스코가 똥으로 여긴 재물을
천국의 보물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똥이 보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음으로써입니다.
재물을 세상에 쌓으면 똥이 되지만
하늘에 쌓으면 보물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재물을 어떻게 하늘에 쌓느냐인데
어떻게 하는 것이 재물을 하늘에 쌓는 방법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재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겁니다.
욕심을 부리면 재물이 똥이 되고
집착하면 재물이 우리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어둡게 하지만
그것으로 사랑을 실천하면 재물은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어떻게 보면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하늘나라를 사랑하면,
돈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면,
이 세상보다 하늘나라를 더 사랑하면 어렵지 않고 쉽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돈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이 세상보다 하느님 나라를 더 사랑하는 것은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게 해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를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연애의 고수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상대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말에 자기 속마음을 슬쩍 얹어서 이야기하면 열이면 열 넘어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애 때만 그렇겠습니까? 사기꾼들도 그렇다고 하지요. 자기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말해주면서 사기를 칩니다.
공감이 되지 않습니까? 저 역시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누군가 저에 대해 말하면 귀가 쫑긋 세워지곤 합니다. 아마 저만 그런 것이 아닐걸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자기 SNS 계정의 글에 어떤 댓글이 달렸는지 계속해서 확인하면서 신경을 씁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이렇게 신경 쓰면서 정작 주님의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댓글을 달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말씀을 직접 해주지 않아서일까요? 사실 계속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또 이웃을 통해, 무엇보다 자기 삶을 통해 직간접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만 신경 쓰다 보니, 주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요?
침묵 속에서, 또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워낙 다른 사람 말에 집중을 잘하는 우리이기에 조금만 노력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충분히 담을 수 있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웃이나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지요. 보물이 망가지지 않고 안전한 곳인 하늘에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시선에 집중하는 삶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따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귀한 보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따라 우리 몸이 빛을 따라 걸을 수도 있고, 어둠 속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봐야 할까요? 주님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일치할 수 있도록 주님 뜻에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것만을 바라보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삶은 이제 버리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일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오늘의 명언: 걱정 없는 인생을 바라지 말고 걱정에 물들지 않는 연습을 하라(알랭 드 보통).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경건생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보물과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보물’은 보석을 나타내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주님을 경외할 줄 아는 지혜’(이사 33,6)를 상징하기도 하며, 또한 ‘이스라엘’에 견주기도 합니다(탈출 19,5;신명 7,6). 한편, ‘보물’은 획득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으니 찾은 이에게 발견됩니다. 또한 발견하기만 하고 차지하지 못한 이도 있고, 그런가 하면, 아예 찾아 나서지도 않은 이가 있고, 찾았으나 악용하는 이도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마라.”(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둘 수도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둘 수도 있습니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위해 쌓아올린 보물이지만, 좀 먹고 녹슬고 도둑 받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하느님 앞에서 쌓아올린 보물이고, 영원히 남는 ‘의로움의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을 보면, 자신이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곧 값진 보물이라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을 보고 있는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주님의 마음은 분명, 여기 저희 안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 마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당신의 보물인지라 당신의 눈은 지금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당신 목숨을 내어주고 얻은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제 마음에 와 있는 주님의 눈동자를 관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의 눈은 나를 향하여 있는데, 내 마음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3)
그렇습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해질 것입니다” 곧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눈이면, 환하고 투명하게 볼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볼 것”(마태 5,8)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만약,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눈이 성하지 못하면”(πονηροσ)은 직역하면 ‘악하면’으로, 곧 ‘악한 눈’을 뜻합니다. 그러니 보물의 처신이나 사용이 악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보물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자신을 어둠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 6, 22)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있는 것을 쓸모없다고 보는 불평의 눈이 아니라
있는 것을 소중하다고 보는 축복의 눈이 되게 하소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이 아니라
모든 것 안에서 경탄과 탄성, 경배와 경외를 바라보게 하소서.
상처를 보되 그 속에서 구원을 볼 줄을 알고,
죄를 보되 자책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았음을 보는 맑은 눈이 되게 하소서.
진부함을 넘어 경이로움을 보고 행위를 넘어 존재를 보는
거부할 수도 거부될 수도 없는 그 무엇도 떼어놓을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의 눈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께 마음을 두라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살펴보십시오.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은 보물을 하느님 뜻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음 두는 곳으로 몸이 가게 마련입니다. ‘마음을 산에 두면 산으로 몸이 가고, 마음을 바다에 두면 바다로 몸이 갑니다. 마음을 선한 곳에 두면 선한 곳으로 몸이 갑니다. 마음을 나쁜 곳에 두면 나쁜 곳으로 몸이 갑니다.’ 몸은 마음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성한 눈은 맑은 눈입니다. 마음이 맑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흔들림이 없이 마음을 주님께 향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학부모는 하느님께서 최고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자녀가 입시를 준비하면, 성당에 가는 것은 잠시 쉬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네 마음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최고라고 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이 아깝고 성당에 머무는 시간을 아깝게 여기며 공부하라고 한다면 그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최고 이십니다. 이 세상의 무엇과 한 선상에서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하느님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보물 이십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 세상을 동시에 차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셨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7-8) .
세상의 사람들은 감히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지배하고 소유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피곤하게 합니다. 서로를 섬기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서로를 섬기는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아내는 아내로서, 남편은 남편으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몫이 있고 이웃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인정해 주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기려 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낮추고 섬기는 곳에서는 협력자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밤새워 기도하신 후 특별히 열두 제자들을 뽑으셨는데 뽑힌 이들을 보면 아주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죄인으로 멸시받던 세리 마태오, 혁명당원 시몬, 배반자가 된 유다, 베드로…예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미래를 열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새 희망을 안겨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이웃의 허물을 보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소중한 사람이고 그 사람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용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때때로 기적을 베풀고 죄인들과 어울리면서 능력을 드러냈을 때, 트집을 잡고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소신 있게 당신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도 시작한 일이 선하다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흔들림 없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늘 하느님께로, 그분이 보내주신 예수님께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다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흥부 네는 자식도 많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아이들까지 많으니 흥부 네는 열심히 일해도 겨우 먹고 살기 바쁘기 마련입니다. 은행에서 대출받아 작은 가게를 시작했는데, 토네이도가 발생해서 건물이 부서졌습니다. 누구한테 하소연 할 수도 없고, 한숨만 나오기 마련입니다. 제게도 큰 행사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본당 견진성사와 중남부 꾸르실료 교육이 겹쳤습니다. 둘 다 일정을 제가 잡지 않았습니다. 견진성사도 작년에 이미 날이 정해졌습니다. 꾸르실료 교육도 작년에 이미 날이 정해졌습니다. 제가 댈러스로 오면서 꾸르실료 지도신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꾸르실료 교육을 맡아야 했기에 일정이 겹친 겁니다. 견진성사는 주교님이 오시고, 본당의 큰 행사이니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꾸르실료도 지도신부이기에 당연히 교육에 함께 해야 합니다. 주일 새벽에 꾸르실료 미사를 마치고, 본당으로 와서 견진성사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주교님이 떠나시고, 다시 꾸르실료 마침예식을 위해 갔습니다. 견진성사도, 꾸르실료 교육도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견진성사 미사를 하면서 주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겸손하고 검소하시고 소탈 하신 모습입니다. 작은 차를 손수 운전하고 오셨습니다. 장백의도 직접 입으셨고, 제의는 본당 것을 빌려 입었습니다. 공지사항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교님이 오시니, 제가 순위에서 밀리네요?” 교우들은 웃었습니다. 주교님은 한국말을 이해 못하시니 나중에 교우들이 왜 웃었는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주교님에게 본당 사제와 주교는 순위와 권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교와 본당 사제는 직책이 다를 뿐이지 권위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교님은 점심 도시락을 드시고, 남은 건 가져갔습니다. 저녁에 드신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주교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에게도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30개월 임기를 연장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건 저와 부주임 신부님이 속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께 먼저 청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들에게도 관심을 보여 주시니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권위와 직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겸손과 단순함입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나눔입니다. 그것은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꾸르실료는 교육 특성상 내용을 미리 알려주지 않습니다. 꾸르실료 교육을 마친 사람을 꾸르실리스타라고 합니다. 3박4일 교육을 마친 형제님이 소감을 발표하면서 ‘꾸르실리스타와 바리스타’가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스타는 일정정도 교육을 받은 후에, 커피의 맛과 풍미를 내서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 줍니다. 명동에 ‘하랑’이라는 커피 매장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분은 가톨릭 바리스타 협회를 통해서 교육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자원봉사로 커피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봉사와 노력은 하늘에 재물로 쌓일 것입니다. 그분들의 봉사와 노력도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꾸르실리스타도 3박 4일 교육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의 맛과 풍비를 이웃에게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 꾸리실리스타는 기도, 활동, 공부의 삼박자를 고루 갖추어서 복음을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꾸르실료 교육의 목적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하늘에 재물을 쌓은 것입니다. 저는 32년 꾸르실리스타로 지내고 있지만 그렇게 멋지게 설명하는 분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스타는 별이라는 뜻도 있고, 전문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번 3박4일의 교육에 15명의 봉사자가 함께 했습니다. 그분들 또한 하늘에 재물을 쌓았습니다. 그분들이 쌓은 재물은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을 재산은 무엇일까요? 하늘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금, 다이아몬드, 고가의 미술품, 땅, 현금’은 아닐 것입니다. 하늘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 결코 남들이 가져갈 수 없는 재물, 사라지지 않은 재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결실인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늘나라에 우리의 재물을 쌓아 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맞습니다. 우리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보물은 돈입니다. 그래서 돈을 위해 모든 마음을 사용합니다. 돈을 향해온 마음을 기울입니다.
어떤 사람의 보물은 건강입니다. 그래서 건강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아끼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보물은 무엇일까요? 사실 여러분의 보물을 물어보기 전에 저의 보물을 먼저 찾아보려 합니다.
내 마음의 보물은 무엇인지, 어디에 내 마음이 있는지.
너무나 안타깝게도 돈에 마음이 가 있고 건강에도 마음이 가 있습니다. 명예에도 가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주님께도 마음을 두려 합니다.
참으로 욕심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돈에 있는 마음과 건강, 그리고 명예에 있는 마음을 추스르고 추슬러서 다시 주님 계신 곳에 가져다 놓아도 금방 다른 곳에 눈을 돌리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는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데요. 이런 모습을 주님도 알고 계십니다. 이미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보물이 주님이 될 수 있도록, 그 보물에 우리 마음이 머무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회심’이라 합니다. 마음을 돌려 주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마음은 여러 곳으로 나뉘어 있을 것입니다. 저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당장은 어려울지 모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주님께만 마음을 두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
프리사이즈
다른 모든 사람처럼 저도 가끔 옷을 사러 갑니다.
저는 보기보다 옷을 크게 입습니다.
사실 크게 입는다기보다는 원래 큽니다.
옷을 사러 가면 여러 사이즈가 걸려있습니다.
95사이즈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건 내가 태어났을 때 입을 수 있는 옷이었어. 지금은 안돼.
100사이즈를 보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초딩때는 가능했는데…. 쩝.
105사이즈는..... 중학생때 졸업했지.
110사이즈는..... 크게나온 110은 가능하지. 그런데 요즘은 왜 이리 작게 입는지….^^
이렇게 모든 사이즈에 대한 저만의 주관이 있는데 가끔 그 주관을 뒤흔드는 사이즈가 있습니다. 이름하여…. 프리사이즈.
누구에게나 넉넉하게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그 프리사이즈.
프리사이즈는 제게 희망을 품게 합니다. 그러고는 입어 봅니다.
그런데 역시 프리사이즈는 안 맞습니다. 분명 프리라고 씌어있는데…. 누구에게나 맞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프리라고 말해도 내게는 프리가 아닌 것이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는 프리보다 더 자유로운 프프리사이즈니까요.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참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
이런저런 묵상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미친사회, 병든사회, 비정상사회 같습니다. 저절로 예나 이제나 묻게 되는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작년 모 정신과 의사의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라는 책을 접한 적이 있는데, 작금의 현실은 <대한민국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 또는 <세계는 거대한 정신병동이다>라 해도 될듯합니다.
삶의 비전을, 삶의 꿈을, 삶의 희망을 잃으면 그 어디나 머지 않아 정신병동이 됩니다. 정말 건강한 정신, 튼튼한 영혼이 절박한 시절입니다. 곳곳에 끊임없이 올라가는, 신축되는 고층 아파트 숲을 볼 때 마다 참으로 답답한 생각이듭니다. 마을에 이어 흙과 나무와 풀과 꽃과 다양한 생명체들과의 평화로운 조화와 공존이 정신 건강에 절대적인데... 자연과 흙에서 멀어질수록 심신의 병들은 늘어나고 깊어질텐데 참 걱정입니다.
어제 원장수사와의 면담차 수도원을 방문한 분에게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을 만나니 예수님 앞에 있다 생각하고 속 사정을 겸손히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또 엊그제 이 형제를 재무수사에게 안내하면서 드린 대동소이한 조언도 생각납니다.
“수도원에서 제일 좋은 분이니 용기를 내어 어려움을 다 털어 놓으시오.”
재무수사는 그 초라한 분의 행색에 상관없이 정중히 악수한 후 함께 자리에 앉은 다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순간 차별감없이 정중히 악수한후 경청하는 수사님 자세에 감동했습니다. 함께 살아도 우리 수도형제들이 얼마나 좋은 분들인지 늘 체험합니다. 평소 하는 본업(本業)이 하느님 찾는 일이고, 하느님께 삶의 비전을, 삶의 꿈을, 삶의 희망을 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며 살아가는 신분의 수도자들이기에 참 좋은 사람이 될 수 뿐이 없겠습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좋은 묵상감입니다.
“먼저 목표에 도달한 사람과 나란히 서라. 그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다산>
말을 바꾸어 감히 저는 말합니다.
“먼저 존경하는, 닮고 싶은 성인과 나란히 서라. 그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
나이에 관계 없이 삶의 목표에, 정상에 도달한 분이 성인입니다. 성인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충실했다는 것입니다.
“순임금이 모범에 비해, 나는 아직도 시골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근심이 깊으니 어찌해야 할까? 그저 순과 같이 되려고 노력할 뿐이다.”<소학>
소학小學은 중국 남송 시대에 주희의 감수하에 그의 제자인 유자징 등이 편찬한 책으로, 1187년 주희가 58세 완성했으며, 대학大學에 대응시킨 말입니다. 아동의 초보교육을 위해 일상적인 예의범절과 어른을 섬기고 벗과 사귀는 도리등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책입니다. 순임금 대신 성인을 넣어도 좋을 것입니다.
오늘 기념미사를 봉헌하는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예수회 수도자도 23년이란 짧은 생애로 선종했지만 삶의 햇수에 상관없이 삶의 목표에 도달한 성인입니다. 이탈리아 북부의 귀족가문에 태어난 그는 군인이 되기를 바라는 부친의 원의에 결연히 반대하여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신학생 시절 흑사병이 만연한 도시 로마에서 병자들을 돌보다 병에 전염되어 23세 꽃다운 나이에 선종한 성인입니다. 짧은 성인의 생애였지만 삶전체가 하늘에 보물을 쌓은 삶이었음을 깨닫습니다.
1591년 선종한 알로이시오는 1621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3년후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는 청소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에 대한 배려가 참 놀랍고 감사합니다. 창공의 빛나는 별들처럼 우리 삶의 비전이, 삶의 꿈이, 삶의 희망이, 삶의 길이, 삶의 빛이 되어주는, 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성인들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분이 바로 살아 있는 성인이라 일컫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어제도 다양한 분들과 만나 금과옥조의 가르침도 주셨습니다.
“진리 탐구중 믿음과 과학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라.”
과학자들과의 만남시 주신 말씀의 요지입니다.
“희망의 표징들(signs of hope)이 되십시오.”
루터교 신자들과의 만남시 강조한 대목입니다.
“너희의 확신과 믿음에 진실히 머물러라.”
신학생들과의 만남시 주신 말씀입니다. 참으로 부지런히 교회의 어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착한목자 성인교황이요 하시는 모든 일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십니다.
참 행복을 원하십니까? 참으로 자유롭고 부요한 내적 삶을 원하십니까? 답은 하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전념(專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땅에 보물을 쌓습니다. 그러니 두 부류의 삶으로 나뉘어 집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과 땅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늘 물어야 할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쪽에 속합니까?
이타적 사랑 실천의 삶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자선활동도, 봉사활동도,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 성무일도 시간이나 미사시간 또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간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어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참으로 안전한 하늘 보물 창고에 쌓이는 사랑의 선행들입니다. 땅에만 보물을 쌓다가 하늘 나라에 갔을 때 내 텅빈 하늘 창고라면 무슨 면목으로 주님을 뵈올수 있을런지요! 참 시급한 일이 수시로 내 하늘 창고를 점검해 보는 일이고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히 부여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기회들입니다. 돈이 없어도 사랑하는 열린 마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과연 내 마음은 하늘에 있습니까? 땅에 있습니까?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음으로 내 마음 하늘에 있을 때 그 사람은 그윽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할 것입니다. 한결같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충실할 때 주님의 빛이 그를 채워 마음도 눈도 몸도 환할 것이요 웬만한 심신의 병도 치유될 것입니다. 역시 단숨에 읽혀지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는 복음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내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하늘에 보물을 쌓는 무욕의 삶, 비움의 삶일 때, 순수로 빛나는 마음에, 눈이요, 몸입니다. 마음이 밝고 맑으면 눈도 몸도 밝고 맑으며 저절로 심신의 치유와 건강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항구할 때, 주님의 빛으로 빛나는 눈이요, 생명의 빛으로 충만한 마음이요 몸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여호야다 사제의 혁명이 성공함으로 폭력의 악순환은 종지부를 찍습니다. 그 땅의 모든 백성이 무지의 미몽에서 벗어나 바알 신전을 허물고 바알의 제단들과 상들을 산산조각 부숩니다. 온나라 백성이 기빠하고 이제벨에 버금가는 악녀 아탈야는 살해 됨으로 도성은 평온을 찾습니다. 바야흐로 하늘에 보물을 쌓을 기반을 마련한 여호야다 사제의 대활약이 눈부십니다.
참된 회개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삶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이렇게 살 때, 참된 자유, 참된 부요, 참된 행복의 삶이겠고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맑은 눈>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 몸도 환하다.”(마태 6,22)
내 곁에
늘 그렇게
벗이 있거늘
스스로
가리지 않은
맑은 눈으로만
벗을 볼 수 있으니
맑은 눈에
벗이 깃들어
품에 고이 스미고
벗을 품어
무거워진 듯한
몸과 마음은 오히려
밝고 환하고 아름답지요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6,20)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안경을 쓰기 전에는 가끔 길을 걷다가 동네 어르신들을 얼른 알아 뵙지 못하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지나칠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력이 약한 탓으로, 본의 아니게 예의가 없는 아이로 오해받았던 기억도 있을 만큼 어려서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눈에 관한 또 다른 기억은 늘 제 엄마는 제게 말했죠. ‘너는 눈이 예쁘다고!’ 저는 압니다. 제 얼굴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눈이라는 사실을. 그런 제 눈이 나이 들어오면서 사람-사물-사건을 뚜렷하게 보지 못한 채 살아오다가 백내장 시술 후에야 비로소 다시 세상을 밝게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때론 만나는 사람의 눈을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때론 정말이지 그 사람의 눈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저를 만나는 사람도 저의 눈을 보면 저의 눈을 통해서 제 마음 상태를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제 마음의 등불인 눈의 색깔도 다르게 비춰줄 것이며, 그 빛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잘 인도할 수도 있고,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여러분의 눈은 몸의 등불처럼 훤히 빛나고 있나요. 당신의 눈이 맑으면 하느님을 볼 것입니다. 세상 것이 아닌 우리 마음의 시선을 올곧고 순수하게 주님께만 고정한다면, 하느님을 우리는 일상에서 보게 될 것이고, 하느님을 보는 그 자체가 행복이며 보물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눈이 곧 몸의 등불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눈은 마음의 창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눈은 외부를 볼 수 있는 동시에 외부에서 눈을 통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눈이 맑으면 마음 역시 맑고 투명하리라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눈의 상태를 통해서 내적인 영적 눈이 맑고 투명한 시선을 가져라, 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5,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뜻은 곧 올바른 마음의 지향을 의미합니다. 죄의 유무에 연관 지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깨끗하지 않은 마음이란 곧 빗나간 마음, 비뚤어진 마음입니다. 세상의 사물, 사건이나 사람을 볼 때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올곧게 바라보는 것이 곧 깨끗한 마음입니다. 흔히 표현하는 것처럼 돼지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이지만 부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부처로 보인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의 위 말씀은 사실, 하늘과 땅에 상관없이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일뿐더러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일 것입니다.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되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삶을 살아오면서 자신을 위하여 그토록 재물을 땅에 쌓아 두었지만, 세상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게 인생임을 뒤늦게 깨닫잖아요. 사라지는 것, 없어지는 것에 목숨 걸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어라, 고 경고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보물을 지상적인 귀한 것, 좋은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보다, 당신이 보여 주신 참된 인간 삶의 태도인 진복을 의미한다고 보면 훨씬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됩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도 불행도 결정된다고 봅니다. 진복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 삶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보물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삶의 가치를 최우선인 나의 삶의 보물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그런 삶의 결실이야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하늘이란 우리 마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보물인 참된 행복은 땅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쌓아야 합니다. 보물을 마음에 쌓아 두는 그런 사람의 보물은 진정으로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6,20)
우리 삶의 참된 보물과 같은 진복의 가르침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릴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솟아나는 등불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자비롭고, 온유하고, 깨끗하고 평화롭고 의로운 빛을 비추지 않을까 싶네요. 과연 나는 내 마음속에 어떤 보물을 쌓아 두고 있는가? 내 눈에는 어떤 등불이 켜져 있는가, 라고 묻는 하루가 되고, 마음 살피기를 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사람-사물-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우리가 바라보는 사람-사물-사건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주님, 제 눈을 맑게 해주시고 제 온몸이 환히 빛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자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가기 마련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귀중하게 생각하는 곳에
자기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땅이 아닌 하늘로 향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있는 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시간이 지나면 없어집니다.
반면 하늘에 있는 것은 한계를 가지지 않기에
시간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늘로 눈을 돌리면서
영원한 것을 추구하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이
나쁘거나 미워해야 할 대상은 아닙니다.
이 세상도 하느님께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기에
좋은 세상이고
그 안에도 우리가 보물로 생각하는 것이 있고
우리 마음이 머무는 것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땅 위에 있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좋음을 누리지만
우리의 눈은 결국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늘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희망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정말 있을까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희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을 살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이것은 현실 도피와는 다릅니다.
현실 도피는 오늘을 살아가는 것보다
오늘을 견디어 내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희망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어려움에
머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땅 위에 있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비록 그것이 좋게 보일지라도
그 이면에 있는 어려움은
점점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벗어나고 싶어집니다.
우리는 감각을 가지고 있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2406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제1독서는 아탈야의 학살과 죽음을 전합니다. 아탈야는 엘리야 예언자의 오랜 원수인 아합과 이제벨의 딸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공주였던 그는 남 유다 임금과 혼인하여 남 유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아하즈야 임금이 죽자, 아탈야는 남 유다 다윗 가문의 왕족들을 모두 학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왕권을 장악하여 스스로 남 유다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다윗 왕가가 멸족될 위기에서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기지를 발휘하여 다윗 왕가의 마지막 핏줄인 요아스를 구출하였고, 6년 뒤에 여호세바의 남편인 여호야다는 아탈야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위에 앉힙니다.
이 사건은 야훼 신앙과 철저히 거리를 둔 오므리 왕조(아합, 이제벨, 아탈야)와 다윗 왕조의 대결이었고, 아탈야의 학살로 다윗 가문에게 주어진 왕권이 영원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이(2사무 7,11-16 참조) 물거품이 될 위기를 맞지만, 주님께서는 결국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통하여 당신 약속에 성실하신 하느님과, 그 약속을 위하여 협력하는 여러 의인들을 보게 됩니다.
코로나 시기 이후에 교회에 오는 신자들이 줄고, 교회 활동이 움츠러들었습니다.
미사 참례자의 수도 줄고, 성소자 수는 몹시 줄었습니다.
교회의 머지않은 미래가 마치 명맥이 끊길 위험에 놓인 다윗 왕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며, 하느님께서는 당신 약속에 성실하시다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고, 여호세바와 여호야다 같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들을 계속해서 보내 주실 것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의 삶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