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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의 함정]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했다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의 말이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결국 시진핑 주석은 '우리 모두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는 말자'는 제안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우리의 앎이 얼마나 어두운 지를 불교에서는 인간의 근원적 어리석음을 가리켜 무명(無明)이라 했으며, 아테네 델포이 신전에서 비롯하여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도 했습니다. 교만하지 말고 너 자신의 무지함(어리석음)을 깨달으라는 진언(참된 말)입니다.
투키디데스는 BC 5C경의 역사학자입니다. 그가 한 말 가운데,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 하나를 펌 합니다.
철학사는 작용과 반작용의 역사입니다. 즉, 어리석음과 지혜의 끝없는 싸움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실질적 전쟁의 역사가 있다면, 철학사는 말싸움(논리)의 역사가 됩니다.
1. 그리스 아테네
초기의 그리스 사람들은 운명이 인간의 삶을 좌우한다고 믿었을 뿐만아니라, 역사도 이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결과도 신들이 어떻게 개입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자들이 자연의 진행 과정에 대한 자연적 설명을 찾으려고 애쓰는 동안, 초기 역사가들은 역사의 진행 과정에 대해 자연적인 설명을 찾기 시작했다. 즉, 한 국가가 전쟁에서 패한 경우, 그 원인을 더 이상 신들의 복수욕으로 돌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헤로도토스(B.C. 484-424)와 투키디데스(B.C. 460-400)이 당시 대표적 역사가이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 (B.C. 423)에서
B.C. 5C에는 연극이 크게 발달하여, 비극으로는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등이, 희극으로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이름높다.
올페우스 종교가 영향을 준 곳에는 반드시 박카스적인 색채가 남아 있으며, 그 중의 하나가 여성주의(feminism)이다. p.36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현명한 영도 아래 부강하게 되어 번영을 누렸다. 그는 시민들의 자유로운 선거를 통하여 B.C. 429년에 실각할 때까지 약 30년 동안 아테네를 통치하였다. 페리클레스 시대는 아테네 역사상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시대였다. … 그러나 유리피데스는 페리클레스가 실각하여 죽은 후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어두운 시대까지 생존하였으며, 이 후기의 회의주의는 그의 작품 속에서도 나타나 있다. p.82
아테네는 B.C. 430년 경에 인구가 가장 많았으며, 약 23만(노예까지 포함하여)으로 추산되며 … p.83
소크라테스는 그의 청년 시대와 초기 장년시기를 페리클레스의 통치하에서 보냈다. p. 83
플라톤의 <대화>의 대부분이 페리클레스 시대에 주고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에는 부호들의 생활에 대하여 한결같은 묘사를 하고 있다. 플라톤은 아테네의 귀족 가문에 속하며, 전쟁과 민주주의가 상류 계급의 부와 안전을 깨뜨리기 이전의 전통 속에서 성장하였다. … 그러나 이와 같은 황금 시대를 이루게 된 힘의 균형은 안정된 것이 못되어, 안팎으로 위협을 당하였다. 즉, 안으로는 민주주의에 의해, 밖으로는 스파르타의 위협을 받았다. p. 84
우리가 알고 있는 희랍 문화는 주로 부유층이 대표한 문화였다. 그들은 교육을 받았으며, 또 여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여행으로 그들의 전통적인 편견을 억제할 수 있었으며, 토론에 열중하여, 지력이 예리하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이른바 노예 제도에 대해서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이 제도는 부자들이 자유민을 억압하지 않아도 그들의 부를 즐길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p. 101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노예와 부녀자들은 포함하고 있지 않은 중대한 한계점을 갖고 있지만, 어느 면에서는 현대의 어느 제도보다도 민주적이다. 재판관이나 대부분의 행정 관리들이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그들의 임기도 짧았다. 그들은 오늘의 배심원과 같은 일반 시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반 시민의 편견을 갖고 있었으며, 결코 직업적인 성격은 없었다.
대체로 다수의 재판관이 소송과 해명을 듣고 나서 다수결로 審理해 나갔다. 원고와 해명자, 또는 고발자와 피고는 개인적으로 출두하고, 변호사의 힘을 빌지 않았다. 그러므로 재판에 이기고 지는 것은 편견에 호소하는 웅변술에 달려 있었다. 원고나 피고는 다 자기 해명을 하게 마련이지만, 그 원고는 전문가들에게 부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법정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대가를 지불하고 배우기도 하였다. …
B.C.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B.C. 404년에 아테네의 패배로 끝났다) 아테네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병마로 인하여 황폐해졌다. 그리하여 23만쯤 되던 인구는 크게 줄어 다시는 종전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페리클레스는 B.C. 430년에 관직에서 추방되고, 공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1501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법정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그의 두 아들은 전염병으로 죽고, 그도 다음 해(B.C. 429)에 (페스트로?) 죽었다. …
이러한 사회에서는 비극적인 정치가들의 적개심을 살만한 처지에 있던 자들이 변론술을 배우려고 한 것은 당연하다. … 이것은 소피스트들이 어느 계급(귀족 계급)에게는 인기가 있었지만 어느 계급(빈민층과 비민주주의자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pp. 102-103
B.C.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나고, B.C. 429년에 페리클레스가 죽자, 아테네는 암흑시대가 닥쳐왔다. 아테네인들은 해상에서 우위를 차지하였지만, 지상에서는 스파르타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여름 동안에 여러 차례 아티카(아테네를 제외하고)를 점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아테테는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졌을뿐더러 유행병이 크게 만연하였다. p. 108
* 크산티페에 대해선 유명한 악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이것은 동시대인인 크세노폰의 「饗宴」2장 10절이나, 「소크라테스의 회상」2장 2절의 증언도 있으므로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부정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대부분은 후대의 과장된 얘기일 것임. 「파이돈」에 보이는 크산티페는 남편의 불행에 대해서 눈물짓는 자못 평범한 여성이었음.
2.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비교
1) 손에서 입으로 가는 생활 → 농경 시대: 加工 → 손이 한가해짐 → 손의 발달(操作的), 민첩성, 두뇌 사용 → 삶의 여유
학문(知)은 삶의 여유에서 온다.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을 향유하는 것이다. 주관적 편협성은 잘못 본 데서 생긴다.
그리스 이전의 문명으로는, 미케네, 미노스, 페니키아, 애굽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문명을 철학이라고 안 한다. 철학 정신이란, 필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정신을 일컫는다. 철학의 탄생(=과학의 탄생)은 감성적 접근으로부터 logos的 사고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2) 지중해의 기후와 풍토을 보면, 그리스 본토는 본래 척박한 땅이다.(올리브와 포도넝쿨 등을 재배)
바다는 파랗다. 플랑크톤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중해는 생존의 터전이 아니라 교통 수단으로서의 기능밖에 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리스의 생활의 안정은 본토로부터가 아닌 식민지를 통해서이다.
하늘이 맑다. 1년이 건계(4월부터)와 우계(9월부터)로 나뉜다. 따라서 잡초가 없다. 풀은 인간에 대한 공격이며, 이 풀을 뽑는 것은 이에 대한 수동적 태도이다. 그러나 풀이 없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작용을 필요로 한다.
바람이 약하다. 따라서 나무는 좌우 대칭을 이룬다. 즉, 합리적(rational - 比로 나눌 수 있다)이다.
공기는 건조하고 바람이 없다. 시야가 뚜렷하게 보인다. 시각은 모양에 영향을 준다. 여기서 이데아 idea와 형상 eidos이 나온 것 같다. “히브리인은 귀로 듣고, 그리스인은 눈으로 본다”는 말이 나온 이유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 같다.
자연과 진리[truth = aleteia(lete: 레테강)]는, 숨기지 않는 것, 감추지 않는 것이다.
또한, 철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주체적 측면이 있어야 한다.
polis(도시국가)가 형성되면서 이주민이 생겼다. 그러나 모두 뜨내기다. 따라서 농토의 기반도 없고, 씨족이나 부족에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주로 청장년들은 바다로 나갔다. 여기서 democratia가 싹튼다.
점령 - 승리 - 원주민 반발 - 삭힘
결사대(개척대) - 행동 통일 - 공동 정신 - 새로운 종교 - 올림푸스신 - 원주민들 넋 달램
3) 富의 증가 - 전쟁 포로의 노예화
- 그 자체로서 보고 알려함(theoria) * praxis
3. sophist와 Socrates의 비교
그들 모두는 비현실적 自然보다는 폴리스적(현실적)인 人間 자신에 철학적 관심을 두었다는데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프로타고라스),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고, 설사 안다고 해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고르기아스)는 식의 태도로 일관했으며, 이러한 태도를 위험한 사상으로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감각보다는 이성의 우위를 주장하고 이성적 인간으로서의 존재 방식과 진리관, 윤리관, 진리관, 방법론을 대화의 형식을 통해 제자들과 아테네 시민들을 그들의 迷夢으로부터 일깨우려 했다.
4. sophist의 도덕관
그리이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뛰어나고 일반적으로 賞讚의 대상이 되는 것을 ‘arete’(아레테)라고 불렀다. ‘시민으로서의 덕’이 勇氣에 있었던 것은 polis가 戰士共同體였으므로 당연했으며 시민 간의 평등, 조화, 조정 등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植民運動과 상업의 발달에 따라 階級分化가 진전해 갔으며, polis는 奴隸所有者로서의 私的 土地所有者에 의해서 구성되는 支配階級의 組織이라는 양상을 띠게 된다. 따라서 상업, 노동의 천시에 따른 ethos(에토스)가 성숙해 갔다. 그리하여 각 계급이 자기 噴水를 지키고 그 度를 넘지 않는 調和와 秩序가 필요했다.
Delphoi의 아폴론 神殿의 壁에 있는 ‘gnoti seauton’라는 유명한 神託은 각 계급이 그 분수를 깨닫고 절도를 지키도록 호소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polis는 안정될 수 있었다. 지배 계급인 市民의 德은 피지배계급을 통제하는 데 있었고 自由民의 德은 적극적으로는 勇氣요 智慧이며, 소극적으로는 節制에 있었다. 페르시아 전쟁(500-479B.C.)의 승리로 아테네는 번영을 누리게 된 반면에 많은 시민들의 몰락, 빈부의 차 심화, 실업자의 출현 등으로 階級의 對立이 심해졌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나타난 polis의 危險思想이 있었으니, 하나는 당시 유행한 自然哲學이며, 다른 하나는 소피스트들의 思想이었다. 전자는 現實에서 벗어난 문제를 철학의 대상으로 삼아 polis 생활을 등한시 내지 忘却케 하였으며, 후자는 인간 자신의 문제를 대상으로 하였지만, 시민적 특권의 폐지, 고정적 절대적인 原理나 價値의 否定, 現存의 nomos와 ethos의 妥當性의 否認, 노예제의 否認, 극단적인 개인주의 등의 주장은 바로 polis的 原理, 즉 공동체적 원리를 뿌리로부터 뒤흔드는 둘도 없는 위험 사상이었다. 이때 허물어져 가는 polis 생활을 구하고 polis的 ethos와 nomos에 대한 도덕적 자각을 시민들에게 주려고 한 사상가의 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였다.
5. sophist의 진리관
Protagoras의 ‘인간은 만물의 尺度’란 명제는, 만물을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준을 인간 자신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인간은 人間一般이 아니라 個別者로서의 인간을 가리킨 것으로, 그들의 진리관, 윤리관이 개인주의, 상대주의, 나아가서는 회의주의의 성격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플라톤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으로 아테네의 붕괴와 그의 스승의 사형은 민주제에 대한 절망감을 플라톤에게 안겨 주었고, 따라서 그는 권위와 지식이 적절히 배합된 정치 지도자의 像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 플라톤은 배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선원의 권위가 그의 항해에 대한 지식에 의존하는 것처럼 국가라는 배는 적합한 지식을 소유한 사람에 의해 운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제는 <국가론>에서 길게 설명되고 있다. 플라톤의 주요 관심사는 도덕 철학과 정치 철학이었다.
7.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처럼 이상국가를 꿈꾸지 않았다. 주목할 것은 중용(golden mean)을 강조한 점. 그리고 또 하나는 세계를 목적을 향해 있는 것으로 파악한 점.
8. 헬레니즘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B.C. 5세기 말의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아테네의 패배라기 보다는 그리이스의 모든 폴리스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반세기 동안은 여러 폴리스 간의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였으며, 케에로네아(Chaeronea) 전쟁(B.C.388경)은 폴리스의 멸망을 고하는 弔鐘이었다. 폴리스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전제군주국 마케도니아의 주도권 아래 세계 국가(cosmo-polites)의 시대가 전개된다. 폴리스에서 꽃핀 그리이스의 찬란한 문화는 알렉산더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전파되었고 동방의 여러 문화 또한 그리이스 본토로 흘러들어와 여기에 헬레니즘(hellenism)이라고 불리우는 혼합문화가 형성되었다. 알렉산더의 死後, 그리이스 제국은 세 왕국(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으로 분열되고 드디어 로마에 의해 정복된다(B.C. 30). 이 세 왕국이 때까지의 약 3세기 동안을 ‘헬레니즘 시대’라고 부른다.
더이상 폴리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고 이방인의 침입과 사회의 혼란은 세상의 무상함을 절실히 느끼게 했다. 사람들은 공동 생활에 대한 의욕을 잃고 저마다 安心立命을 누리는데만 마음을 기울였다. 따라서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은 개인으 安心立命을 위한 處世知이며, ‘폴리스의 철학’이 아니라 ‘코스모폴리테스(세계국가)’를 바탕으로 한 ‘世界市民의 철학’인 것이다. 이 시대를 대표한 것은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 그리고 회의주의 등의 철학이었다
알렉산더의 12년 통치 후 세 장군의 가문으로 분할된다. 그리고 마호멧교에서는 알렉산더가 전설적 영웅으로 남는다.
* 세 가문
1. 서유럽 - 안티고누스의 후손이 차지
2. 아프리카 - 프톨레미가 이집트 차지( 수도: 알렉산드리아)
3. 아시아 - 셀루카스(안티옥에 도읍) → 로마인에 정복당함
프톨레미와 셀루카스는, 희랍인과 야만인과의 융합을 포기하고, 희랍 용병으로 강화된 마케도니아 군대의 軍政 실시.
2세기 동안 페르시아는 팔티아인에게 정복됨.
- 박트리아 지방의 희랍인들은 점점 고립됨.
- B.C. 2세기경 메난더왕 - 인도제국(불교)
바빌론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훨씬 더 받음.
희랍어는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통하여, 더욱이 서쪽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문학과 문화의 통상어가 되고 이 상태는 마호멧의 정복 때까지 지속된다.
유태를 포함한 수리아의 여러 도시들은 언어와 문학에 대해서도 Hellenism化 되었음.
헬레니즘과 유태인 사이의 첫 충돌 - ‘매커비 제2서’
* 알렉산드리아
- B.C. 3세기경 상업도시로 발전.
- 수학 숭상
- 프톨레미 가문은 학문의 수호자 역할 담당
- 아르키메데스(시실리아인)
- 에라토스테네스(도서관 관장)
- 유클릿, 아리스탈코스,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뉴우스 등은 수학자로 만족
- 分化는 이 시대의 특징
* 古代, 희랍어 사용한 지역
1. 자유와 무질서 : 자유 도시 국가 시대
2. 굴종과 무질서 : 마케도니아 통치 시대 - 크레오파트라死後(B.C. 30), 로마의 이집트 합병
3. 굴종과 질서 : 로마 제국 시대
굴종과 무질서로 표현되는 헬레니즘 시대에, 스토아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기초 성립
B.C. 3세기 이후, 희랍 철학에서 새로운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A.D. 3세기에 新플라톤주의가 배출됐을 뿐이다.
이 기간에 로마 세계가 기독교에게 정복되도록 준비하는 중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짧은 생애는, 희랍 세계를 돌변시킴.
B.C. 334~324(10년간), 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바빌론, 페르시아, 사마르칸드, 박트리아, 판쟈보까지 정복.
바빌론의 고대 신화는 희랍인의 호기심을 만족시킴.
조로아스터교의 二元論, 인도의 불교에 익숙해짐.
알렉산더 정복지에 희랍 도시 세우고 자치 제도 실시.
알렉산더의 군대는 마케도니아인이었다. 여기에 희랍인들은 복종했다.
정복의 확대 → 희랍인과 야만인들 사이의 융화 도모 정책 씀.
희랍인들은 야만인들에 대한 강한 우월감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 우월감을 타파하려 했다. 그는 몸소 야만인의 두 공주와 결혼하였으며, 신하들도 그에 따랐다.
人類一般(세계주의적 견해 → 스토아 철학)이라는 개념 생겨나, 도시 국가나 희랍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소멸되었으며, 희랍 문명의 순수성을 잃게 되었다.
희랍인 -(과학)→ 야만인
희랍인 ←(미신)- 야만인
이 시대는 돈만 있고 권력을 탐내지 않으면 즐겁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군대의 약탈이 수시로 있었다.
이 시대(B.C. 3세기)는 어디서나 안정성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행운의 여신’이나 요행수를 존중하게 되었으며, 합리적 요소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마치 ‘밀톤의 사탄’처럼, “마음의 유일한 고향이다. 이곳에서는 지옥에서 천국을, 천국에서 지옥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알렉산더 정복 이후, 헬레니즘 세계는, 혼돈에 빠져든다.
로마인은 희랍인에 비하면 둔하고 야성적이었다.
자유 시대의 무질서는 그나마 견딜만 했다. 그러나 새로운 마케도니아인의 무질서는 무능한 통치자가 신하들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무질서이므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차라리 뒤에 오는 로마에게 굴종하는 편이 더 견디기 쉬운 편이었다.
이 시대는 대체로 사회적인 불만과 혁명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神殿이 은행일을 대신하였다. 금을 보유하고 신용 대부 했다.
B.C. 3세기 초, 델로스의 아폴로 신전에서는 10% 이자로 돈을 꾸어 주었다.
자유 노동자들은 노임이 줄자(생활 필수품 가격 폭등), 傭兵의 길을 선택한다.
지휘관의 군대 해산(이것이 전쟁의 지속 원인이 되었다)은 위태스러웠다.
유태인이나 페르시아인 불교도는 희랍의 대중적 多神敎보다 훨씬 훌륭한 종교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희랍인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은 바빌론이나 갈데아인들의 종교였다. 그들에게 받아들인 것은 주로 占星術, 魔術이었다. 이 신앙(점성술) 중에는 자연히(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필연성 혹은 숙명에 관한 신앙이 포함되게 마련. 행운에 관한 신앙과도 모순 없이 그리고 의심 없이 수용되었다.
이 혼란은 지적 능력의 약화와 도덕적 부패 초래하였으며, 대다수 시민들의 그날그날의 德과는 상치된 것이었다. 절약해 모아둔 것이 내일 흩어질지 모를 경우 검약은 무용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삶의 목적은 어떤 적극적인 善을 행하기 보다 불행을 피하는 것으로 되었다.
K / 2026.5.18
